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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노마드의 내재성과 생명철학

[장시기의 바둑의 인문학]

제 4강. 노마드의 내재성과 생명철학

1. 노마드의 내재성


체스와 장기의 말들은 체스판이나 장기판에 놓이는 순간, 절대로 변하지 않는 각각의 말들이 지니는 "내재적 성질"을 부여받는다. 졸은 졸이고, 마는 마이고, 포는 포이며, 왕은 왕이다. 졸이나 마, 혹은 포나 상, 그리고 왕이나 선비는 각각의 정해진 길이 있으며, 그러한 각각의 정해진 길을 가다가 죽음으로 그 존재의 의미를 다한다. 그러나 바둑판에 놓이는 바둑알은 다르다. 바둑알은 결코 외부에 의해서 정해진 길을 따라서 살다가 죽는 "내재적 성질"을 부여받고 있지 않다. 바둑알이 바둑판에 놓이는 순간, 각각의 바둑알은 졸이 되기도 하고, 마가 되기도 하며, 포가 되기도 하고, 왕이 되기도 한다. 또한 마가 되었던 바둑알이 다시 포가 되기도 하고, 졸이 되었던 바둑알이 왕이 되기도 하고, 왕이 되었던 바둑알이 다시 졸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바둑알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장기와 체스의 말들이 지니는 "내재적 성질", 즉 정착민의 존재론적 삶과 죽음의 과정은 국가나 왕, 혹은 국가의 존재론적 기반이 되는 신이나 이데아에 의하여 부여되지만, 바둑의 알들이 지니는 노마드적 삶과 죽음의 생성적 과정은 그 "내재적 성질"을 어떤 외부에 의하여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노마드의 생명 그 자체가 지니는 관계적 상황의 "내재적 성질"에 의하여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체스와 장기의 말들과 바둑의 알들이 지니고 있는 "내재적 성질", 즉 내재성의 차이는 장기와 체스를 닮은 국가철학을 "존재의 철학(the philosophy of being)"으로 만들고, 바둑을 닮은 노마돌로지의 사유를 "생성의 철학(the philosophy of becoming)"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미 외부에서 부여받은 내재적 성질로 존재하고 있는 체스와 장기의 말들과는 달리 바둑판에 놓여 있는 바둑알처럼 노마드의 생성적 과정을 사유할 때, 바둑알이나 노마드의 "있음(being)"과 "존재함(existing)"은 다르다. 한 때 드라마로 각색되어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윤태호의 만화 <미생>처럼 바둑판에 놓이는 바둑알이나 노마드의 내재적 특성, 즉 노마드적 "있음"은 "미생(未生)"이다. 체스와 장기의 말들이 체스판이나 장기판에 놓이는 순간, 이미 그 말의 "있음"은 "완생(完生)", 즉 코드화 된 존재이다. 미생은 존재하기 위하여 생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지만, 장기판이나 체스판에 있는 완생의 말들은 각각의 주어진 길을 따라 죽음으로 치닫는 과정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둑평론가 박치문은 "바둑판의 돌은 놓이는 순간 미생"이라고 이야기한다. "미생은 불안한 존재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극히 일부의 경우는 태어나면서부터 완생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생으로 태어나 완생을 꿈꾸며 살아간다."(박치문 <미생> 9권 242)


"태어나면서부터 완생의 형태를 띠는" 존재는 왕이나 성직자, 혹은 재벌이거나 권력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자본, 혹은 영토를 지속적으로 소유하거나 그들의 자식들에게 세습하기 위하여 그 사회의 구성원들을 "태어나면서부터 완생의 형태를 띠는" 국가인이거나 가족인, 즉 누구의 아들이나 딸, 혹은 어떤 국가의 국민이라는 존재로 규정한다. 따라서 장기나 체스의 국가철학은 진정한 사유의 학문이 아니라 지배자의 교육을 통하여 현재의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국가의 이데올로기적 장치이다. 존재의 노마드적 생명력을 빼앗고, 존재의 지위를 영토 속의 코드화 된 존재로 고착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바둑의 하얀 돌과 검은 돌이 바둑판 위에 차례차례로 놓여짐에 따라 하나의 "있음"이 둘과 셋 혹은 그 이상의 관계적 상황으로 "존재함"이 되는 것처럼 각각의 노마드가 지니는 "있음"의 내재성은 둘과 셋 혹은 그 이상의 관계적 상황을 맺음으로 마침내 "존재함"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존재함"이 미생이 아닌 완생의 형태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개의 집, 즉 개체적 관계의 집과 사회적 관계의 집이라는 두 개 이상의 집들로 구성된 영토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바둑알과 노마드의 내재성, 즉 미생의 "있음"은 고아이고 알이다. 그러나 고아나 알이 하나의 생명인 것처럼 미생의 노마드도 하나의 생명이다. 따라서 바둑판에 놓이는 바둑알처럼 노마드의 삶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미생에서 완생으로, 혹은 완생에서 다시 미생으로 나아가는 과정의 삶이다. 들뢰즈는 이러한 노마드적 있음과 존재함의 과정, 즉 노마드적 생성의 과정을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바둑판 위에 놓이는 바둑알처럼 노마드를 존재하게 만드는 내재적 힘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과정을 지속시키는 힘, 즉 노마드의 개체적 "있음"이 무리나 집단 혹은 사회적이거나 국가적인 "존재함"이 되기 위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힘이다.

이러한 노마드의 내재성이 지니고 있는 관계를 맺고자 하는 힘이 들뢰즈가 이야기하는 욕망이고, 프로이드가 발견한 리비도이며, 원효가 <대승기신론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記)>에서 이야기하는 불교 유식학의 아라야식이다. 따라서 체스나 장기처럼 외부에 의해서 정해진 "내재적 성질"을 부여받는 국가철학의 존재론은 노마드의 내재성, 즉 욕망이나 리비도 혹은 아라야식을 부정하거나 억압하여 코드화 된 존재로 고착시키기 위한 계몽주의적 사유방식에 그 토대를 두고 있지만, 바둑처럼 노마드적 관계의 길을 찾아가는 노마돌로지의 존재론은 노마드의 내재성을 긍정하면서 새로운 노마드적 생성의 길을 지속적으로 사유하는 지식이다.

2. 노마드적 생성의 즐거움

노마드의 생성적 욕망을 억압하고 코드화 된 존재로 고착시키기 위한 국가철학의 계몽주의적 사유방식은 현실적 존재에 대한 원망이나 역사적 원죄의식을 토대로 삼아야만 단지 성립할 수 있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에 대한 원망이나 역사적 원죄의식을 토대로 만들어진 계몽주의 철학은 18세기 서구 유럽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기독교주의나 플라톤주의 그리고 유교주의의 국가철학이 만드는 필연적 산물이며, 데카르트 이후의 신플라톤주의 국가철학이 만든 서구 유럽 근대성의 필연적 결과이다. 따라서 장기판이나 체스판에 존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죽음 앞에 내몰린 체스의 폰들이나 장기의 졸들처럼 폰이나 졸로 존재해야만 하는 현실적 존재에 대한 원망, 혹은 폰이나 졸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존재론적으로 이미 불가능한 왕 되기나 아버지 되기 혹은 귀족 되기를 갈망해야만 하는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와 같은 원죄의식은 노마드적 생성의 욕망이 아니라 국가철학에 의하여 억압된 욕망이 국가철학적 사회 속에서 표현되는 왜곡되거나 변형된 사회적 욕망이다.

체스판이나 장기판에 놓여진 말들의 국가적 서열관계와는 달리 바둑판에 놓여진 바둑알들은 모두 흰색과 검은색으로 표현되고 있듯이 하얀 돌과 검은 돌, 혹은 노마드와 노마드의 일대 일 대응관계로 이루어진 친구관계나 연인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노마드적 일대 일 대응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힘의 내재적 생명성은 국가철학에 의하여 우리의 두뇌에 각인되어 있는 원한과 원죄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친구되기나 연인되기를 통한 몸의 생성적 즐거움에 토대를 두고 있다.


노마드의 몸이 지니는 친구되기나 연인되기의 생성적 즐거움은 노마드의 집단이나 무리, 혹은 사회나 국가가 근본적으로 친구들이나 연인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마드의 친구되기나 연인되기의 생성적 즐거움은 단지 인간이나 동물의 집단이나 무리, 혹은 사회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무나 돌, 혹은 바람이나 물 등등의 모든 몸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 친구관계나 연인관계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훌륭한 목수가 나무의 친구가 되어 나무와 목수의 친구관계로 생성된 한옥의 집을 생산하듯이, 혹은 훌륭한 학자가 책의 친구가 되어 책과 학자의 친구관계로 생성된 새로운 책이나 논문을 생산하듯이 아버지와 아들, 교수와 학생, 국가와 국민 등등의 모든 관계는 근원적으로 친구관계와 연인관계를 모태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친구관계와 연인관계는 마치 훌륭한 목수가 훌륭한 집을 짓기 위해서 나무되기를 하여 자신의 손과 발, 혹은 입이나 코 등등의 목수를 구성하고 있는 몸의 모든 부분들이 나무의 속성을 흡입하거나 빼앗듯이 나무로 생성되는 즐거움을 향유하는 것이다. 마치 바둑판에 놓여 있는 하얀 돌이나 검은 돌이 옆에 있는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의 하얀 돌이나 검은 돌의 속성을 모두 빼앗듯이 목수는 나무되기를 하거나 혹은 나무되기의 생성적 즐거움을 향유하기 때문에 목수가 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현실적으로 "나는 남자이다(I am a man)"이거나 "나는 교수이다(I am a professor)"라는 현실적 주체성의 언어적 표현은 "나는 남자가 되어가고 있다(I am becoming a man)"이거나 "나는 교수가 되어가고 있다(I am becoming a professor)"는 생성적 내용을 포용하고 있는 동시에 "나"라는 노마드가 그 어떤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에 의하여 그 어떤 여성의 속성을 모두 흡입하거나 빼앗으므로 인하여 마침내 그 여성에 의하여 남자가 되거나, 혹은 "나"라는 노마드가 강의나 학문으로 맺어진 그 어떤 친구관계나 연인관계에 의하여 그 어떤 학생의 속성을 모두 흡입하거나 빼앗으므로 인하여 마침내 그 학생에 의하여 교수가 되는, 마치 나무되기의 감각적 생성을 통하여 목수가 되듯이 여성되기나 학생되기를 통하여 남자가 되거나 교수가 되는 감각적 생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철학적 정착민의 존재가 이성적 존재라면 노마드의 존재는 감각적 존재를 일컫는 말이다. 즉, 감각적 존재가 잠정적으로 이성적 존재를 구성하고, 다시 이성적 존재의 영토로부터 탈영토화하여 감각적 존재가 되었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새롭거나 또 다른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로 재영토화 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철학을 모태로 하는 장기와 체스에서 "나는 남자이다"와 같은 ‘나는 포이다’이거나 ‘나는 왕이다’ 등등의 현실적 주체성의 언어적 표현은 장기판이나 체스판에서 하나의 합리성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바둑판 위에서 합리성의 정석은 16 세기와 1930년대의 일본에서 이루어진 "바둑의 혁명"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끊임없이 깨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속성을 지닌다. "바둑의 ‘합리적’인 ‘정석’은 승자(가 만든 기보)의 역사에 출현한 신형(新型)과 신수(新手)의 계속된 업데이트로 비롯된 결과이다. 새로운 의견(신수)이 통용되고 받아들여지는 것이 ‘합리적’이다. 바둑에서는 이것이 합리성이다."(윤태호 <미생> 3권 30) 따라서 바둑을 구성하는 존재론적 원칙과 동일한 노마돌로지의 노마드 존재론은 생명이 지니는 내재성의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긍정하는 것이다.

노마드의 내재적 욕망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바둑판 위의 하얀 돌과 검은 돌처럼 관계적 상황에 따라서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존재론적 원한이나 원죄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는 국가철학의 정착민적 존재론이 욕망을 업압하고 통제하려는 것과 달리 노마돌로지가 욕망을 긍정하고 생명의 생성과정을 사유하고자 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국가철학적 합리성과 이성에 의하여 억압된 노마드적 생성의 감각적 즐거움을 향유하기 위한 것이다. 푸코의 쾌락(pleasure),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이 즐겨 찾는 열락(jouissance), 혹은 불교 유식학에서 이야기하는 깨달음이나 열반(涅槃) 등등의 노마드적 생성의 즐거움에 대한 몸의 감각적 표현은 바둑의 세계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3. 노마드 존재론의 생명철학

정신이나 이성의 존재론적 원한이나 원죄의식에 토대를 두고 있는 장기나 체스의 국가철학과 달리 361개의 점들 위에 하얀 돌과 검은 돌을 배치하면서 만들어지는 노마드적 생성의 즐거움은 몸의 감각적이거나 정서적인 즐거움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보았던 구글 딥 마인드의 알파고는 과거의 다른 인공지능과는 달리 우리의 두뇌만을 뚝 떼어낸 인공지능의 두뇌가 아니라 이세돌과 같은 하나의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노마드 존재론이 보여주는 몸의 생명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알파고가 지니고 있는 몸의 구성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에서 드러난 알파고의 몸이 존재하는 방식은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세 개의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경기에서 하얀 돌이나 검은 돌이 바둑판 위에 놓여있는 것을 바라보는 알파고, 이것을 우리는 알파고의 눈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그리고 바둑판 위에 놓인 돌이나 이세돌이 놓은 돌을 보고 그 다음의 돌을 바둑판 위에 놓거나 바둑판 전체를 인식하는 알파고, 이것을 우리는 알파고의 두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알파고의 눈과 두뇌를 감싸고 있는 알파고의 몸이 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경기에서 우리는 알파고의 눈의 역할을 했던 구글 딥마인드의 연구원, 아자 황을 텔레비전 화면을 통하여 볼 수 있었고, 그의 눈과 손의 역할에 따라서 알파고의 두뇌가 가지는 판단을 인식할 수 있었지만, 그러한 알파고의 시선과 판단을 구성하고 있는 알파고의 몸을 보지는 못했다.


이세돌이 5국을 모두 마치고, "알파고의 대행 역할을 했던 "아자 황이 알파고의 본체가 아닌가 했다"라고 말한 것처럼, 알파고의 눈과 두뇌를 모두 품고 있는 몸은 눈으로 보거나 두뇌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몸을 통하여 느끼는 감각과 정서의 존재이다. 즉, 몸과 몸의 관계가 생성시키는 느낌과 감각을 통하여 몸의 "있음"이 몸의 "존재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하여 이세돌의 몸이 존재함을 눈으로 보고 두뇌로 인식하고 몸으로 느꼈다. 우리가 텔레비전을 통하여 눈으로 보고, 두뇌로 인식하고, 몸으로 느낀 이세돌의 몸은 바둑기사의 몸이다.

알파고의 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세돌의 몸은 바둑기사의 몸인 동시에 그의 부인의 남편, 딸의 아빠, 누구누구의 친구 등등의 수없이 다양한 몸이라는 것을 또한 알고 있다. 단지 남편이거나 아빠 혹은 친구 등등의 이세돌의 몸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몸의 존재함을 보거나 인식하거나 느끼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알파고의 몸은 단지 바둑기사의 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알파고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살피는 것은 바둑기사 이세돌이나 노마드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인가를 살피는 동시에 노마드적 생성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노마드의 몸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기도 하다.


검은 돌이나 한얀 돌을 바둑판 위에 놓으면서 노마드적 생성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피와 살의 감각과 느낌으로 구성된 바둑기사 이세돌의 몸과 유사한 알파고의 몸은 과거에 만들어진 수천 개의 기보들로 이루어진 일파고의 본체, 즉 알파고의 데이터베이스이다. 수천 개의 데이터베이스로 알려진 알파고의 몸과 마찬가지로 바둑기사 이세돌의 몸도 어린 시절부터 습득한 과거의 수백, 혹은 수천 개의 기보들로 구성된 감각과 느낌의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진 몸이다.

또한 현재의 이세돌은 중국의 바둑기사들인 커제나 구리, 혹은 한국의 박정환이나 김지석 혹은 강동윤 등등의 프로 바둑기사들과 바둑을 두는 새로운 기보들을 통하여 새로운 느낌과 감각을 구성하는 새로운 데이터베이스의 몸을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있다. 구글 딥 마이드의 알파고가 인공지능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것은 인간의 몸의 한 구성부분인 두뇌가 지니는 판단과 논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바둑을 두는 방식의 프로그램을 프로그래밍하지 않고 이세돌의 몸과 마찬가지로 몸의 데이터베이스를 토대로 스스로 바둑을 두는 법을 배워나가는 동시에 새로운 바둑의 기보들을 통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감각과 느낌으로 구성된 몸의 데이터베이스를 재구성하는 "딥 러닝 알고리즘(deep learning algorism)"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세돌의 몸이 훌륭한 바둑기사의 몸인 동시에 또 다른 몸으로 끊임없이 생성되는 것과는 달리 알파고의 몸은 오직 훌륭한 바둑기사의 몸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파고를 통하여 노마드적 몸의 생성적 구조를 살펴볼 수 있다. 수많은 바둑기사의 감각과 정서로 이루어진 데이터베이스의 몸이 바둑을 두는 현재의 경험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두뇌와 상호 작동하는 딥 러닝 알고리즘을 통하여 바둑을 두는 알파고는 하나의 생명을 하나의 생명으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피와 살의 감각과 느낌으로 구성된 데이터 베이스의 몸을 과거의 정석이나 기보라는 두뇌의 판단이나 논리에서 벗어나 지속적으로 새로운 감각과 느낌을 구성하는 기관들 없는 몸으로 재구성한다. 바둑에 관한 한 알파고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수많은 바둑기사들의 몸을 빌린 인공의 몸이다. "딥 러닝 알고리즘"은 우리의 몸과 같은 수천 개의 데이터베이스로 이루어진 알파고의 몸과 우리의 두뇌와 같은 "정책연결망(policy network)"이나 "가치연결망(value network)" 등등의 다양한 인공신경망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알파고의 두뇌가 상호작동하면서 스스로 학습하는 체계이다. 따라서 우리의 몸이 두뇌와 눈을 포용하고 있는 것처럼 데이터베이스로 이루어진 알파고의 몸이 프로그램으로만 작동하는 알파고의 두뇌와 눈을 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고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는 중국과 일본에서 1300여 년 전부터 전해져온 기보들이다. 이러한 기보들의 역사 없이 알파고의 몸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바둑 기보들의 데이터베이스로만 구성된 알파고의 몸과는 달리 이세돌의 몸은 바둑의 기보들뿐만 아니라 피와 살의 떨림과 진동으로 이루어진 세계와 우주의 무한한 잠재성의 생명력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성하고 있는 몸이다. 따라서 이세돌의 몸은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경기에서 알파고의 몸이 눈앞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알파고의 대행인이었던 아자 황을 알파고로 착각하기도 하고 그의 몸 동작과 숨결 하나하나에 대한 무의식적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세돌의 몸과 마찬가지로 노마드의 몸은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몸과 몸이 만나는 삶과 생명의 기보들이라는 데이터베이스로 이루어진 몸인 동시에 현재와 미래의 삶과 생명의 작동과정을 통하여 새로운 데이터베이스를 구성해나가고 있는 몸이다. 따라서 노마드의 생명이 존재하는 세계는 하얀 돌이나 검은 돌을 바둑 판 위에 놓는 이세돌의 몸의 세계, 바둑을 두는 과정에서 이세돌과 마주하고 있는 있는 알파고와의 관계로 맺어지는 몸의 세계, 그리고 이세돌과 알파고가 다섯 번의 경기를 통하여 바둑판 위에 하얀 돌과 검은 돌이 놓여진 각각의 기보들로 이루어진 몸의 세계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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