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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소녀상이 뒤꿈치를 든 속 뜻은…

[인터뷰] 김부자 도쿄 외국어대학교 교수, 오카모토 유카 편집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왜 그렇게 일본군 '위안부' 평화비(소녀상)을 싫어할까? 위안부 소녀상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정말 위안부들은 모두 소녀였을까?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위안부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일까?
위 질문들에 대해 답해줄 한 권의 책이 출간됐다. <Q&A,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책임>(이타가키 류타·김부자 엮음, 삶창 펴냄)의 한국어판이다. 지난해 8월 일본에서 나온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들을 문답 형식으로 구성했다.
지난 8일 한국어판 발간차 한국을 찾은 김부자 도쿄 외국어대학교 교수와 편집자 오카모토 유카(岡本有佳) 씨를 만났다. 재일 교포 2세인 김부자 교수는 식민지 시기 젠더문제와 위안부에 관한 연구를 해왔다. 오카모토 씨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웹사이트인 'Fight for Justice'(☞바로 가기)를 운영하면서 일본 내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우선 이들에게 지난해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특히 아베 정부가 소녀상 철거를 줄기차게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일본 내에서는 소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김부자 교수는 "일본 남성들이 받아들이기 불편해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소녀상을 바라보는 일본 남성의 심리 저변에는 '죄책감'이라는 기제가 작동하고, 이 때문에 소녀상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오카모토 씨는 소녀상이 단순히 반일(反日)의 상징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소녀상의 뒤꿈치가 들려있다. 작가들은 위안부 피해자가 한국 사회에서도 편견과 차별을 견뎌야 했다는 점을 표현했다고 이야기했다"고 전했다.
그는 "소녀상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잘못된 점을 바꿔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라면서 소녀상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오카모토 씨는 "사실 성폭력은 전쟁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일례로 성노예라는 단어를 남성들이 싫어하는데, 이런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면서 "이를 위해 일본에서 필요한 것은 교육과 기억이다. 그래서 소녀상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지난 12.28 위안부 합의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의 지원을 위한 재단 설립에 일본이 10억 엔을 내겠다고 합의한 것을 두고 김부자 교수는 "이 합의에는 위안부 문제를 다시는 국제사회에서 이야기하지 말라는 조건이 있다. 앞으로도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성 노예가 아니다'라고 해도 한국은 대응할 수 없게 됐다. 소위 일본 정부가 10억 엔으로 '입막음'을 한 셈"이라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양국 정부가 이 정도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를 마무리하려는 배경에는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세계적으로도 전시 성폭력에 대해서는 인권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라며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이 한일 양국 정부에는 없었다"고 꼬집었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김부자(왼쪽) 도쿄외국어대학교 교수와 오카모토 유카 편집자 ⓒ프레시안(이재호)

프레시안 :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외교장관 기자회견을 통해 나왔던 위안부 합의에서 한국인들을 특히 자극했던 문제가 이른바 '위안부 평화비'(소녀상) 철거 문제였다. 일본 내에서 소녀상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나?

김부자 :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본 남성들이 받아들이기 불편해하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예전에 모 매체의 남성 기자와 소녀상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일본 남성으로서 소녀상을 보기가 힘들다고 이야기했다. 마치 자기가 잘못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런데 그 기자는 오히려 이런 부분이야말로 소녀상이 성공한 측면일 수도 있자 않겠냐고 이야기하더라.

프레시안 : 일본의 주류 남성들이 보기에 소녀상이 불편하기 때문에 눈 앞에서 치워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건가?

오카모토 유카 (이하 오카모토) : 그런 측면도 있고, 소녀상의 장소에 대해 불만을 갖는 사람도 많다. 왜 주한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했느냐는 문제다.

김부자 : 제가 아는 페미니스트 중에서는 소녀상이 위안부의 다양성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획일적인 이미지가 있다는 것이다. 저도 여기에는 동의한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위안부들은 대부분 소녀였다. 그래서 소녀상을 역사의 상징적인 측면으로 생각해야 할 측면도 있다.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를 통해 조선인 위안부는 소녀가 아니었고, 소녀라고 해도 소수이고 예외적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역사적 자료를 보면 그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1944년 미국 전시정보국 심리작전반에서 작성한 버마 미치나의 포로 기록을 보면, 포로가 된 조선인 위안부 20명의 평균나이는 23세였다. 이들이 연행되거나 징집된 것은 2년 전이므로 연행 및 징집 시 나이는 평균 21세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따지면 위안부 연행 및 모집 과정에서 미성년자는 거의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명 한 명의 나이를 따져보면 이 결과는 달라진다. 연행 혹은 징집 시 나이 기준으로 보면 미성년자는 20명 중 12명에 달한다. 과반수가 소녀였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정신대연구소가 편찬한 위안부 <증언집> 6권을 보면 증언한 피해자 78명 가운데 73명이 미성년자였다. 1993년 기준으로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를 신고한 175명 중 156명이 미성년자였다. 소녀가 '예외적'이었다고 보기 어려운 증거들이다.

중국에서 최대 규모의 위안소가 있었던 한구(漢口) 위안소에서 당시 병참 위안계장으로 일했던 야마다 세이키치(山田清吉)는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한반도에서 온 이는 '매춘' 전력도 없고 나이도 18, 19세인 젊은 여자가 많았다".

오카모토 : 일본 사람들이 소녀상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올해 3월 <평화의 소녀상은 왜 계속 앉아있는가>(오카모토 유카, 김부자 편집)라는 책을 통해 소녀상의 의미를 일본에 알리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 김부자(왼쪽) 교수가 <평화의 소녀상은 왜 계속 앉아있는가>라는 책을 들고 설명하고 있다. ⓒ프레시안(이재호)

소녀상은 위안부로 끌려갔던 조선의 여성들이 소녀라는 점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소녀상의 뒤쪽을 보면 할머니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이는 위안부 피해자 여성의 인생을 표현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소녀상을 자세히 보면 뒤꿈치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불안정한 느낌을 주는데, 소녀상을 제작했던 김운성, 김서경 작가에 따르면 위안부 피해자가 한국 사회에서도 편견과 차별을 견뎌야 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라고 한다. 즉 소녀상 안에는 한국 사회의 문제도 함께 들어있는 셈이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잘못된 점을 바꿔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이를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작가와 소녀상을 일본에 초청했다. 소녀상을 흔히 '반일'(反日)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작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일본에 책임과 사죄를 요구하고 있기도 하지만, 평화를 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점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성폭력은 전쟁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현재 일본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 이런 움직임이 같이 일어나지 않으면 일본 사회가 위안부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고 해결도 어려워진다. 일례로 성노예라는 단어를 남성들이 싫어하는데, 이런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필요한 것은 교육과 기억이다. 그래서 소녀상은 한국이 아니라 일본에 필요하다.

김부자 : 예전에 베를린에 가본 적이 있다. 베를린에 홀로코스트 기념비가 중앙역뿐만 아니라 정치적·문화적으로 중요한 장소 곳곳에 있더라. 이런 것처럼 도쿄에 소녀상이 있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끝났다"

프레시안 : 이번 위안부 합의를 두고 한국에서는 그래도 해결했으니 다행이라는 시각과 제대로 된 해결이 아니기 때문에 합의를 폐기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일본의 여론은 어땠나?

오카모토 : 일본 신문이 평가한 내용을 먼저 소개하자면, 일본 신문에는 5대 중앙지가 있다. 보수적인 신문으로 <요미우리>, <산케이>가 있고 진보적인 신문으로 <아사히>, <마이니치> 정도가 있다. 경제신문으로는 <니혼게이자이>가 있는데 이 중 <마이니치>가 이번 합의를 가장 환영했고 <아사히> 역시 환영의 입장을 밝혔다. <니혼게이자이>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요미우리>와 <산케이>는 한국에 대한 요구가 많았다.

<요미우리>는 한국에 소녀상 철거를 요구했고, 다시는 위안부 관련해 문제를 삼지 말라고 밝혔다. <산케이>는 '소녀상'이라는 말 대신 '위안부 동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으며, <요미우리>와 마찬가지로 이를 철거하고 다시는 문제 삼지 말라고 했다. <산케이>는 한발 더 나아가 위안부의 모집과 운영 과정에서 군의 관여는 없었으며, 따라서 고노담화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오카모토 유카 편집자 ⓒ프레시안(이재호)
한국의 언론은 위안부 합의 문제를 외교 또는 인권의 문제로 접근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일본 언론은 인권 문제로 접근하는 보도가 거의 없었다. 외교적인 시각으로만 접근했고 위안부 피해자와 관련한 보도도 거의 없었다. 합의에 찬성한 피해자를 중심으로 한 기사는 있었다.

일본 언론들이 이렇다 보니 제 주위에서는 합의가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주변사람들은 제가 위안부 문제 해결 활동을 하는 것을 알고 있는데, 지난해 합의가 나오니까 저한테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건넨 분들도 적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는 "드디어 끝났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본 사회에서 진보적이라고 하는 소위 '리버럴'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렸다. 가장 큰 부분은 아베 총리의 사죄에 대한 평가 부분이다. 와다 하루키 선생은 "아베 총리가 자신의 신념을 부분적으로 억제하고 새로운 사죄를 표명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요시미 요시아키 선생은 "백지화 하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평가했다.

프레시안 : 한일 양국은 지난해 합의 당시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일본 정부의 10억 엔이 투입되는데, 이 재단 설립이 지난 1995년 무라야마(村山) 총리 재임 당시 일본의 정부와 민간이 합동으로 마련했던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의 재탕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김부자 : 이번에 합의한 재단 설립은 기금보다 문제가 많다. 일본이 문제 자체를 한국 정부에 떠넘긴 것 아닌가? 일본 정부는 10억 엔만 주면 다 해결되지 않나? 저는 오히려 한국 정부가 왜 이 합의를 받아들였는지 되묻고 싶다.

이 합의에는 조건이 있다. 위안부 문제를 다시 문제 삼지 말라는 것, 즉 국제사회에서 이야기하지 말라는 조건이다. 실제 윤병세 한국 외교부 장관은 지난해 합의 이후 유엔에 가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일본 정부가 "위안부는 성 노예가 아니다"라고 해도 한국은 대응할 수 없게 됐다. 소위 일본 정부가 10억 엔으로 '입막음'을 한 셈이다.

한편으로는 양국 정부의 여성 인권에 대한 인식 문제도 있다. 위안부 문제는 외교 문제만이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도 전시 성폭력에 대해서는 인권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인 인식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인식이 한일 양국 정부에는 없었다.

프레시안 : 오카모토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Fight for Justice' 홈페이지를 보니 북한의 일본인 납치와 위안부에 대한 이야기도 있던데, 위안부도 일종의 납치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밝히셨다. 어떤 의미인가?

김부자 : 북한에서 납치 당하는 것에 대해 일본 정부는 문서가 없어도 인정하고 있다. 증언만을 가지고 납치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안부에는 이 기준을 적용하지 않는다. 위안부는 일본 정부가 모집했다는 문서가 없고 증언만 있다면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이든 위안부든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것 아닌가? 북한에 납치당한 일본인도 증언밖에 없지만 납치 사실을 인정하고 일본 정부가 조치를 취하고 있다면, 위안부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 이 부분을 지적하고 싶었다.

일본, "우린 할만큼 했다"

프레시안 : 지난 7일 <Q&A,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책임>의 한국어판이 발간됐고, 같은 날 책 발간 기념 행사로 한일 공동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부자 선생님은 '일본사회의 조선인 위안부 인식'을, 오카모토 선생님은 '한일 합의 이후 위안부 언론 상황을 생각하다'를 주제로 발표를 가졌다.

그런데 두 분 발표 내용 모두에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가 거론됐다. 이를 보면서 일본 사회 내에서 이 책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도쿄대학교 명예교수, 니시 마사히코(西成彦) 리쓰메이칸대 교수 등도 이 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일본 내에서 이러한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 김부자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김부자 :
그 전에 먼저 할 말이 있다. 우리는 <제국의 위안부> 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 수정주의와 싸우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제국의 위안부>라기 보다 일본의 언론과 지식인들이다. 이 책의 집필 목적 역시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것임을 밝혀둔다.

일본에서 <제국의 위안부>가 좋은 평가를 받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일단 일본 사람들은 가해자 입장에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예를 들면 한국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을 대놓고 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런 비판을 한국 학자가 대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지식인들이 지지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박유하 교수의 주장이 일본 병사와 위안부 모두가 피해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일본 내에 심어줬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내에서 일본 병사도 피해자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이걸 이 책이 채워준 셈이다.

그런데 식민지 상황에서 지배와 피지배 문제, 젠더 문제 등을 고려하면 일본 병사와 위안부는 대등한 관계가 될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일본 사회 전반에는 정치적인 성향과 관계없이 이런 욕망이 있다. 이는 곧 보수·진보(리버럴)와는 무관하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잘못된 역사 인식이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교육의 문제도 있다. 저는 재일 한국인 2세로 일본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 교육을 받았다. 학교에서 전쟁과 식민지 역사가 어떤 피해들을 주고 있는지에 대해 배우지 못했다. 접할 기회가 없으니 보수든, 진보든 이러한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오카모토 : 일본 사회에서는 세계 2차대전 이후 일본이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이 상당히 많다. 일본이 가해자로서 반성도 하고, 나름 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노력했다는 생각이 있는데, <제국의 위안부>가 이런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는 한국판과 일본판의 서술 내용이 살짝 다른 부분이 있다. 일본의 사죄와 관련한 내용인데, 박 교수는 일본어판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일본은 1945년 대일본제국 붕괴 후 식민지화에 대해 실제로는 한국에 공식적으로 사죄한 적이 없다.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고 이 사실은 한국에 보다 더 알려야 하겠지만, 그것은 실로 애매한 표현에 불과했다"

한국어판에는 "공식적으로 사죄·보상하지 않았다"라고만 쓰여 있는데 일본판에는 "양국의 정상이 만날 때마다 사죄를 해왔다"라는 문장이 추가됐다. 이는 곧 일본이 사죄를 한 적이 있고 여러번 했지만 "애매한 표현" 때문에 문제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박유하 교수의 표현은 일본 사회 내에서 "우리도 열심히 했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심리를 건드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박유하 교수가 아니라, 박 교수의 책을 받아들이는 일본의 정서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일본 사회의 이러한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위안부 문제 해결도 어렵다.

'전쟁 책임'이 아닌 '식민지 지배 책임'

프레시안 : 이번에 한국어판으로 출간한 <Q&A,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은 위안부의 정의, 역사적 배경, 1945년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 등의 내용을 담았고,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구성돼있다. 위안부와 관련한 활동을 하는 학자와 활동가 등이 각자가 맡은 영역을 나누어서 집필했는데, 책의 내용과 형식으로 봤을 때는 일종의 위안부 백서 또는 기본서, 입문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김부자 : 1990년대 후반부터 일본사회에서는 역사학자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를 비롯해 '역사 수정주의'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본 사회에서는 진보적인 지식인이나 언론들이 하타와 같은 역사 수정주의에 비판적인데, 그럼에도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서는 높은 평가를 줬다.

사실 <제국의 위안부>에는 인용을 비롯해 잘못된 부분이 적지 않다. 내용적으로 허술한 부분이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진보적인 언론이나 학자, 지식인들이 이 책에 대해 이렇게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에 대해 실증적이고 학술적인 연구를 진행해왔다.

(이타가키 류타·김부자 엮음, 삶창 펴냄)
한국에서 출간한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 지배 책임>은 이러한 연구 내용을 묶어낸 책이다. 이 책은 <제국의 위안부>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 수정주의에 대한 학술적이고 실증적인 비판을 위해 만들어졌다. 또 일반 사람이나 학생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했다. 책을 함께 만든 이타가키 류타(板垣龍太) 선생님은 식민지 조선과 관련해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연구자다.

1991년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됐는데, 20년이 훌쩍 지났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특히 이런 현상은 젊은세대들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래서 이들이 전문적인 내용이지만 쉽게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알 수 있도록 Q&A의 형식으로 책을 엮었고 지난해 8월 일본에서 출판됐다.

이 책에서는 처음으로 '식민지 지배 책임'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그간 일본에서는 '전쟁 책임'이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다. 이 부분이 다른 책들과 다른 차별점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어판을 만들게 된 것은, 류타 선생님과 친분이 있던 이화여대의 정지영 교수님과 대화에서 출발했다. 정 교수님은 한국의 젊은 세대가 위안부 문제를 오히려 잘 모르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사람이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자세한 것은 잘 모른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역사 수정주의의 영향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책이 오히려 한국 사회에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역사 수정주의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전면적으로 개조하려고 한다. 1990년대 위안부 문제가 나온 이후 위안부들이 성노예의 취급을 받았고 강제로 연행됐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데 이를 전면적으로 개조하려는 것이다. 위안부는 있었지만 성노예도 아니었고 강제로 연행하지도 않았다는 식이다. 이러한 흐름을 실증적으로 반박하기 위해 한국에서도 책을 출간하게 됐다.

"올해는 되겠지"…벌써 25년

프레시안 : 일본의 제도권 교육 내에서는 일본 전쟁 역사의 어두운 면, 특히 위안부에 대해서는 교육을 거의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김부자 : 저는 재일 교포 2세다. 동포들이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그 속에서도 우리나라의 여성사를 배우자는 동포 여성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 모임에서 1990년 12월 윤정옥 이화여대 교수님을 초청해서 강연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강연이 저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윤 선생님은 위안부 문제를 가부장제의 문제라고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도 중요하지만, 전후에 위안부 피해자가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것 또한 가부장제가 낳은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일본인 남성들이 한국에서 성매매를 하기도 했다. 이걸 '현대판 정신대'라고 부를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윤 선생님의 강의로 인해 위안부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윤정옥 선생님이 <한겨레신문>에 실었던 정신대 취재기를 번역해서 팸플릿을 만들어서 위안부 문제를 알렸고, 이후 동포 여성들과 함께 '종군위안부 문제 우리여성 네트워크' 등의 단체를 만들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 김부자 교수 ⓒ프레시안(이재호)

1991년 한국에서 위안부 피해를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에 오셨을 때 우리여성 네트워크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집회를 열었다. 그 이후 일본에서 피해자의 증언이 나왔는데, 1993년 송신도 할머니가 일본에서 유일하게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다. 이후 송 할머니의 재판을 지원하고 동포 여성들과 책을 만들고 증언을 번역하는 활동 등을 함께 해왔다.

이후 원래는 재일 한국인 여성 1세에 관한 연구들을 하려고 했는데 위안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재일 여성 1세와 위안부, 그리고 식민지 시기의 교육과 젠더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연구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제를 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주최 측의 한 명으로서 참여했다.

사실 1993년 고노(河野) 담화가 발표된 이후 문제가 빨리 해결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후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 생기면서 해결 양상이 복잡해졌다. 올해는 해결하겠지, 올해는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한 해 한 해 지내다 보니 벌써 25년이 지나갔다.

오카모토 : 고등학교 때까지는 한일 관계나 재일조선인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대학생 때 처음으로 이런 사실들을 알게 돼서 그때부터 한반도와 일본의 역사적·문화적인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러다가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나왔는데 이게 저에겐 큰 충격을 줬던 것 같다.

이후 1998년 나눔의 집 역사 박물관 기념식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 한국을 찾았다. 그때 3박 4일 정도 나눔의 집에서 머무르면서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났다. 당시 한국말을 전혀 몰랐지만 말로도 부족하지 않은 여러 느낌을 받았다.

김부자 선생님처럼 저도 위안부 문제에 뛰어드는 과정에서 송신도 할머니의 존재가 컸다. 한국과 일본에 있는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나 나눔의 집 등도 생겼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송신도 할머니가 유일한 분이었다. 그래서 더 이 문제가 중요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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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외교부·통일부를 출입하면서 주로 남북관계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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