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잠자리를 잡고 있었다. 웬일인지 그날따라 잘 잡히지 않았다. 아홉 살 소년은 옷깃에 눈물을 찍어내던 어머니 곁으로 가 칭얼댔다.
'어린 게 뭘 알겠어요. 쯧쯧.'
어머니 옆에 선 손님이 소년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낯선 손님이 엄마에게 말을 할수록 어머니의 훌쩍임은 더 커졌다. 고개를 갸우뚱한 소년은 어머니 품을 떠나 다시 고추잠자리를 잡으러 갔다.
소년은 어느덧 노인이 되었다.
최홍이(74) 씨는 65년 전 그날을 이따금씩 떠올린다. 어머니를 울리던 낯선 손님은 아버지의 비보를 전해준 전령사(傳令使)이자, 학살의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관련 기사 : "아버지 뼛조각 하나라도 찾을 수 있다면…")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여름, 이승만 정부는 후퇴를 명령했다. 후퇴 도중 또 하나의 명령을 내렸다. '좌익 세력과 보도연맹원들을 처단하라'. 보도연맹에 가입한 전향자들이 조선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협조할 것이라고 의심한 것이었다. 전쟁이 이어지는 와중에,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검속이 시작됐다.
최 씨네 가족이 살던 홍성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전선이 홍성까지 밀려왔을 때 경찰은 좌익이나 보도연맹원들을 마구잡이로 검속했다. 결국 후퇴가 급박해지자 학살극을 벌였다. 경찰은 일부는 용봉산 골 부근에 끌고 갔고, 일부는 경찰서 앞마당에서 처분하고, 일부는 시간차에 태워 광천, 청양으로 데려가 총질했다.
최 씨의 아버지 최원복 씨는 이 미친 학살극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좌익도 아니었고, 좌익 전향자도 아니었다. '제2의 3.1운동'이라 불리는 1932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였다. 나중에 안 사실은, 아버지의 막냇동생 즉 최 씨의 삼촌이 좌익 운동을 했었고, 그 탓에 아버지도 희생된 것이었다. 좌익도, 좌익 전향자도 아님에도, 정부의 강제 할당 명령을 받은 경찰은 무고한 최 씨 아버지를 검속 대상에 넣어버렸다.
어렸을 적 집에 찾아와 어머니를 울린 그 '손님'은, 아버지의 마지막을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죽어 구름 속에서라도 어린 칠 남매를 지켜주겠다"는 말을 끝으로, 총에 맞아 구덩이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손님'은 옆 사람과 함께 총에 맞은 척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묻힌 장소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모부가 학살 현장들로 지목된 곳을 찾아가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50여 년간 최 씨는 아버지 제사를 위패장으로 모셔야 했다.
뜻밖에도, 아버지가 계신 곳에 대한 단서는 아버지의 동생, 그러니까 최 씨의 고모 입에서 나왔다. 2000년 1월, 집안 경사가 있어 다 모인 어느 날이었다. 오서산 자락에 위치한 광천읍 담산리로 시집 가 살던 고모가 뜬금없이 던진 말이었다.
'네 아버지가 우리 동네 앞에서 묶여 줄지어 지나갔단다.'
이 한마디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온 가족이 소리를 지르며 따져 들었다. "그때 얘기했으면, 시신이라도 찾을 것 아니냐고, 아니면 끝까지 입을 열지 말지 그랬냐"는 것이었다.
"보도연맹원이랑 엮이면 바로 죽임 당하던 시절 아닙니까. 본인이나 다른 가족들도 끌려갈까 봐, 집 앞에서 친오빠가 죽으러 가는 걸 보고도 모른 체 해왔던 겁니다."
'좌익분자 가족' 오명에 '수난 3대'
"연좌제가 뭔지 아세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를…. 오죽하면 친오빠가 죽었는데도 죽었단 소리도 못 하고 곡소리도 못 냈겠어요."
고모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다. '좌익분자의 아들'이란 낙인은 평생을 갔다. 최 씨의 동생들이 취업 이민을 하기로 했지만,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반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아는 공무원 보증을 세우고서야 겨우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최 씨 또한 앞길이 막혔다. 당시 어느 취업 자리든 전제조건이 '해외여행에 결격 사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동네 은사님이 "너는 신원조회 때문에 일반 직장은 고사하고 공무원도 못 한다. 그나마 나은 곳이 학교니 교사를 하라"고 조언해주셨다. 뜻에 따라 교대에 들어가 교사가 되었다.
노태우 정권 때였다. 교사 생활을 열심히 해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전임 전두환 대통령이 "연좌제를 없애겠다" 해서 좋은 시절이 온 줄로 알았다. 그런데 초청이 번복됐다. 신원조회에서 불가 판정이 나온 것이었다.
연좌제의 그늘은 최 씨 자녀에게까지도 이어졌다. 행정고시 시험을 본 딸은 필기 시험을 붙고도 면접에만 올라가면 번번이 떨어졌다. 아는 사람을 통해 이유를 캐물었다. "통일될 때까진 안 된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아버지' 소리 한 번만 하면 원이 없겠는데, 시원하게 통곡이라도 했으면 좋겠는데, 저는 일생토록 한 번도 마음 편히 아버지를 추모한 적이 없습니다."
"여기 묻힌 분들 모두 제 아버님입니다"
지난달 25일. 광천읍 담산리 아버지가 끌려온 자리 앞에 제사상을 차렸다. 그날부터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 조사단'의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첫날부터 유해가 하나 둘 나왔다. 뼈인지 나무껍질인지 구분조차 안 되는 것들이 우르르 쏟아졌지만, 하나라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이 아버지 유해일까 봐.
지난 6일까지 이곳에선 최소 21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당시 아버지뻘 나이대보다, 20~30대의 젊은 남성으로 추정되는 유해들이 많았다.
"제가 첫날 개토제 할 때 추모사를 낭독했습니다. '전국의 아버님께 올립니다'라고요. 저에겐 여기 묻혀 있는 분들이 다 아버지고, 조상님입니다."
최 씨는 안다. 유실된 시신이 많아 아버지의 유해를 여기서 찾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것을. 마음을 비우고, 큰 바위 하나를 주워들어 차 안에 옮겼다. 반짝반짝 빛나는 석영이었다.
"만약 아버지를 찾지 못하면, 이 굴에서 나온 돌을 가져가서 아버지 모시듯 간직하려고요."
최 씨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조사단원들의 손을 잡으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명박 정부 이후로 정부가 미루고 있는, 어쩌면 거부하는 일을 개인이 대신하는 데 대한 고마움이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 아닙니까. 무슨 일을 해도 돌아가신 분들을 살아 돌아오게 할 순 없으니, 유해 발굴 작업에 국가가 나서서 유족들의 한을 풀어줘야 합니다. 그래야 후손들도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어깨 펴고 살아갈 것 아닙니까. 억울한 사람 없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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