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이들은 입을 모아 말합니다. 타워빌은 이제 더 이상 절망의 동네가 아니라고. 작지만 큰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입니다.
타워빌의 기적은 우연이 아닙니다. 지역 개발에 대한 무수한 고민과 노력 끝에 일군 성과입니다. 물론 그 주체는 필리핀 정부가 아닙니다.
'our friend', 'good guy'
나나이들은 그를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타워빌 봉제 협동센터를 설립한 한국 NGO 단체 '캠프'의 이철용 대표, 그에게서 타워빌과 필리핀, 해외 원조와 지역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가난했던 유년의 기억, 필리핀으로 이끌다
이 대표를 필리핀으로 이끈 것은 가난했던 유년 시절의 기억이었습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란 이 대표는 미국 대학생의 도움으로 공부해 목사가 되었습니다. '받은 만큼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나 머릿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한 현장은 필리핀 빈곤 지역이었습니다. 한국 생활을 접고 필리핀에 정착했습니다.
처음 간 곳은 마닐라 대표 빈민 지역 스모키 마운틴 '사와타'였습니다. 쓰레기 냄새와 매캐한 연기 냄새가 진동하는 사와타에서, 이 대표는 빈민들의 구직 활동을 돕기 위한 컴퓨터 강좌를 열었습니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였습니다. 관심 갖는 주민들은 없었습니다.
정부는 이곳 주민들을 마닐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강제 이주를 한 사람들은 그러나 어느새 또 쓰레기뿐인 이곳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습니다. 구걸을 하며 노숙을 하다가 막노동으로 연명했습니다. 고민했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도시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닐라에 올 필요가 없다면, 사와타에 와서 쓰레기를 뒤지는 사람들도 없겠죠."
곧바로 짐을 싸서, 마닐라에서 40km 떨어진 강제 이주 지역 '타워빌'로 갔습니다. 이곳은 겉보기엔 사와타보단 깨끗해 보였습니다. 주택이 있고 길이 닦여 있어, 적어도 '절대 빈곤'의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 온 NGO 단체들은 잠깐 기웃거리다가 금방 떠나갔습니다.
속살을 잘 들여다보면 문제투성이였습니다. 남편들이 일자리를 찾아 집을 버리고 마닐라로 떠난 탓에, 여성 혼자 집을 지키는 가구 비율이 70% 수준에 달했습니다. 마닐라로 출퇴근하는 주민들은 밤이 되면 파김치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계란을 파는 어떤 어머니는 뼈밖에 안 남았어요. 시장이 마닐라에 있다 보니 새벽 3시에 집에 나와서 마닐라에 가서 돌아오고…. 원래 남편이랑 같이 장사했는데, 남편이 집에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혼자 벌어야 하는 상황이 온 거죠."
"빈민들에게 돈 주는 건 쉽다"
타워빌 주민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컴퓨터 강좌 실패를 교훈 삼아, 주민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직접 물어보았습니다. 주민 600여 명을 대상으로 1년에 걸쳐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타워빌 주민들에게 당장 급한 것은 역시 '일자리'였습니다. 설문 조사 결과, 여성 주민이 많다는 점 등을 고려해 봉제 센터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등의 지원을 받아 2011년 봉제 센터 문을 열었습니다.
40여 명의 여성들이 지원했습니다. 이들에게 봉제 기술을 알려주고, 쌀과 분유 등 식료품을 제공했습니다. 돈은 쥐여주지 않았습니다. 여성들에게 급료를 주면, 남편들이 그 돈을 술 마시는 데 모조리 써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NGO 단체가 오면, 사람들은 '돈을 달라'고 합니다. 단체 입장에서도 돈 주는 게 제일 쉬워요. 어렵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하지만 그게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대책은 아닙니다. 건강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해요."
주민들의 건강을 생각하면 일자리는 더욱 절실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필리핀 사람들이 몸에 안 좋은 튀긴 음식을 많이 먹습니다. 좋아해서가 아니라, 먹을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죠. 에블린 집에서도 보듯, 대부분 집에 냉장고가 없어요. 있어도 팔게 되죠. 소득이 없으니까요. 필리핀처럼 더운 나라에서 냉장고가 없이 집에서 오래 보관할만한 게 튀긴 음식이에요. 건강을 논할 여지가 없는 셈이죠. 생존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수입원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캠프는 현재 봉제 협동조합 말고도 베이커리 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지원합니다. 양계장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3화의 주인공 '로이어'의 남편도 양계장 운영 준비에 한몫 거들고 있습니다.
"왜 문어발식으로 운영하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살아가는 데 뭐든 필요하잖아요. 지역에서 필요한 게 있다면 그에 응답하는 게 저희의 역할이겠죠."
매 맞던 여성들, 우르르 몰려가 남편 '혼쭐'
캠프가 타워빌 지역 주민에게 전한 것은 단순한 기술만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 또한 불어넣었습니다.
지금 봉제 공장은 조직, 생산, 마케팅까지 모두 나나이들이 직접 관리하는 방식으로 운영됩니다. 나나이들은 제 손으로 대표를 뽑고, 월례 회의 등을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직접 해결합니다. 자발적으로 나서서 일감을 가져오며 납품 활로를 뚫기도 합니다.
또, 각종 역량 강화(empowerment) 프로그램 등을 통해 협동과 같은 사회적 가치를 배워나갑니다. 나나이들은 이제 스스로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고, 자신뿐 아니라 타워빌 주민 모두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방안을 고민합니다.
나나이들은 캠프를 통해 단순 노동을 넘어 의식 향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여기 여성들은 예전엔 남편이 때릴 때 그저 맞고만 있었대요. 그게 왜 문제인지를 알지 못했던 거죠. 그런데 얼마 전엔 누가 매 맞는다는 얘기를 듣고, 나나이들이 그 집에 우르르 몰려가서 남편을 호되게 혼냈다고 하더라고요."
이 대표는 이같은 나나이들의 성장 과정을 보며 큰 감동을 받습니다.
"한국에 있었을 땐 큰 교회에서 수천 명 신도들을 데리고 일했는데, 그렇게 큰 감동 있는 삶을 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필리핀에서는 매일이 감동이에요. 마을 주민들이 변해가는 이런 기적 같은 현장에 제가 있다는 게 오히려 감사할 따름입니다."
"깃발 꽂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얼마 전 캠프는 코이카 지원 사업 평가에서 1등을 차지했습니다. 어깨에 힘 좀 들어갈 법 하련만, 이 대표는 되물었습니다.
"깃발 꽂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는 '책임'을 강조했습니다.
"해외 NGO 단체에는 양적 성장에 대한 유혹들이 많아요. 특히 필리핀의 경우 빈민가가 많아서 'NGO 천국'이라고 불리죠. 조금 된다 싶으면 여기저기 사업 벌이고, 그러다가 '아니면 말고'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일은 삶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 대상으로 하는 일이잖아요. 사업 하나를 하더라도 신중하게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 대표가 처음부터 목표로 삼았고 지금도 바라는 것은 '지속 가능한 지역 개발' 모델입니다.
지속 가능한 지역 개발을 위해, 이 대표와 나나이들이 풀어가야 할 과제는 '자립'입니다. 평생 캠프가 지원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지원을 하루아침에 갑자기 뚝 끊을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여러 역량 강화 활동을 하다 보면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기 마련입니다. 나나이들은 '아직은 기다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 대표는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그것 또한 나나이들의 결정이라면, 받아들여야겠죠."
타워빌 봉제 공장의 재봉틀은 오늘도 돌아갑니다. 타워빌 주민들이 비참한 삶을 살지 않도록, 오늘은 어제보다 더 건강해질 수 있도록, 이 대표와 캠프의 '착한' 지역 개발 실험도 계속됩니다.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바로 가기 : "나나이(Nanay), 슬럼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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