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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손잡고 결혼식 입장, 꿈 이룬 나나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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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손잡고 결혼식 입장, 꿈 이룬 나나이들

[나나이(Nanay), 슬럼을 떠나다 ③] 타워빌 첫 합동 결혼식

"몰라보겠어. 정말 예쁘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수한 차림으로 재봉틀을 돌리던 '나나이'(어머니라는 뜻의 필리핀 타갈로그어)들이 깜짝 변신했습니다. 베이지색, 금색 드레스를 빼입고 곱게 화장을 한 채로 나타났습니다.

"오늘만 기다렸어요."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 타워빌 합동 결혼식에 참석한 타워빌 주민들. ⓒ프레시안(손문상)

오늘은 타워빌 주민 모두가 기다리던 결혼식 날입니다. 필리핀에서 결혼식은 아주 중요한 예식입니다. 그래서 식을 아주 성대하게 치룹니다. 동네 주민들도 신랑 신부 못지않게 갖춰 입고 와 식을 즐깁니다. 드레스 코드를 맞추는 건 필리핀 결혼식 관례입니다. 나나이들의 드레스 색상인 베이지색과 금색이 바로 오늘의 드레스 코드입니다.

결혼식이 열릴 교회 안으로 드디어 신랑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신랑 신부가 한 쌍이 아니었습니다. 무려 다섯 쌍이었습니다. 게다가 모두 중년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눈치채셨나요. 오늘 합동 결혼식의 주인공들은 바로, 봉제 센터에 다니는 나나이들입니다.

▲결혼식 준비를 마치고 식장으로 향하는 나나이들. ⓒ프레시안(손문상)

이혼 금지 국가 필리핀 여성들의 꿈

결혼은 타워빌에 사는 여성 모두의 꿈입니다.

가톨릭이 국교인 필리핀은 국가 차원에서 이혼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부부가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사실혼 관계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법으로 묶여 있지 않은 탓에, 어느 한 쪽이 상대방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타워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 사는 부부 중 상당수가 정식으로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은 남편에게서 버림받았습니다.

집 주변에 변변한 일자리가 없다 보니, 남편들은 일을 찾아 마닐라로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평일에만 마닐라에 나가 있던 남편들은 점차 주말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아내는 홀로 아이들을 돌봅니다. 필리핀에서는 피임도 법으로 금지돼있어 출산율이 무척 높습니다. 여성 혼자 아이 셋, 넷, 많으면 대여섯 명을 돌봐야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여성들은 결혼식을 통해 법적으로 부부임을 인정 받기를 바랍니다.

ⓒ프레시안(손문상)

그러나 결혼식을 치르기에는 금전적 부담이 큽니다. 나나이들에게 결혼식이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지요. 다행히 타워빌에서 지역사회 개발 지원을 하는 NGO 단체 '캠프'의 도움으로 합동 결혼식을 열 수 있었습니다.

다섯 명의 나나이가 오늘, 어렵사리 평생의 소원 하나를 이룬 셈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네 아이의 엄마, 아들 팔짱 끼고 결혼식 입장

다른 나나이들의 따뜻한 환호 속에 다섯 커플이 차례로 행진했습니다. 남편이 먼저 씩씩하게 앞서나간 뒤, 아내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나나이 중 한 명인 '로이어'가 행진할 시간이었습니다. 남편을 먼저 앞서 보낸 로이어가 젊은 남자의 팔짱을 꼈습니다. 로이어와 함께 팔짱 낀 남자는 바로 로이어의 스무 살 먹은 첫째 아들입니다. 로이어뿐 아니라 다른 나나이들도 아들의 손을 잡고 행진했습니다. 주례석 앞으로 다섯 쌍의 커플이 나란히 섰습니다.

"신랑 신부는 서로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합니까?"
"네. 영원히 함께하겠습니다."

나나이들은 차례로 수줍게 대답했습니다.

▲주례사를 듣는 다섯 쌍의 타워빌 부부. ⓒ프레시안(손문상)

▲로이어 부부. ⓒ프레시안(손문상)


주례사와 예물 교환식이 끝나고, 오늘이 하이라이트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바로 나나이들이 그토록 원하던 혼인 신고서 작성 시간입니다. 신랑 신부들은 서류에 각자의 이름을 쓰고, 사인했습니다. 오늘 결혼식을 주관한 '캠프'의 이철용 대표 내외도 이들 다섯 부부의 보증인으로 나서 혼인 신고서에 사인했습니다.

로이어는 가슴 벅찬 듯 눈물을 보였습니다. 남편이 다정한 손길로 로이어의 눈물을 닦아주더니 귀엣말을 했습니다. 서로 속닥이는 모습이 신혼부부 못지않아 보였습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사진 촬영을 위해 가족이 모였습니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자태에 그리고 수줍은 모습에 잠시 깜빡했는데, 로이어는 사 남매의 엄마였습니다. 다 큰 아이들을 옆에 세운 로이어는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어 보였습니다.

▲결혼식 후 가족 사진을 찍는 나나이. ⓒ프레시안(손문상)

"제 결혼이 '모두의 축복'이라고 해준 나나이들, 고마워요"


"너무 행복했어요. 꿈을 이뤘어요. 제 평생 이런 큰 선물은 다신 없을 거예요."

▲눈물을 글썽이는 로이어. ⓒ프레시안(손문상)
결혼식 후 며칠 뒤 다시 만난 로이어는 예전과 똑같은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무척 행복해 보였습니다.

"남편과 제게 했던 맹세를 잊을 수 없을 거예요. 남편은 저에게 '평생토록 같이 살자. 하나님이 항상 우리 가족 곁에 있으니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자'고 했어요. 꿈 같은 순간이었어요."

로이어는 그간의 고생이 다 사라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로이어 역시 강제 이민자였습니다. 정부 철도 사업 때문에 마닐라에서 살던 집이 철거돼 타워빌까지 떠밀려왔습니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고 일자리를 잃은 로이어네 식구는 고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남편은 오래도록 일을 구하지 못했고, 결국 첫째 아들은 대학 생활 1년을 끝으로 학업을 접어야 했습니다.

로이어는 그때를 생각하며 울먹였습니다. 남편은 아직도 직장을 찾지 못한 상태입니다. 로이어는 그러나 희망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결혼 준비를 하면서, 가족이 하나가 된 느낌을 받았어요. 모든 것에 감사하고, 서로 더 사랑하자고 다짐했어요. 저희 가족에게 이 결혼식은 축복이었어요. 캠프와 봉제 센터를 만난 것도요. 제가 봉제 센터에 다니지 않았다면, 우리 가족은 아직도 절망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을 거예요."

로이어는 일을 하며,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 자신감을 키웠다고 했습니다. 캠프의 역량 강화(empowerment) 프로그램이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다른 나나이들에게 무척 고마워요. 저의 결혼이 '모두의 축복'이라고 했어요. 봉제 센터에 다니면서 이렇게 진심으로 저를 아껴주는 친구들을 만난 건 행운이에요. 이번에 못 한 다른 나나이들도 어서 결혼식을 올렸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프레시안(손문상)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바로 가기 : "나나이(Nanay), 슬럼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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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어리

매일 어리버리, 좌충우돌 성장기를 쓰는 씩씩한 기자입니다. 간첩 조작 사건의 유우성, 일본군 ‘위안부’ 여성, 외주 업체 PD, 소방 공무원, 세월호 유가족 등 다양한 취재원들과의 만남 속에서 저는 오늘도 좋은 기자, 좋은 어른이 되는 법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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