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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도 安도 영·정조 시대처럼 성공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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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도 安도 영·정조 시대처럼 성공할 수 없는 이유

[강응천의 역사 오디세이]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분노하는 국민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이합집산이 분주하다. 그런데 이러한 이합집산은 뚜렷한 방향성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으로, 또 오른쪽으로!

2015년 12월 13일 안철수의 탈당으로 시작된 정치 쇼는 기존 정치권으로부터 멀어져 가던 국민의 관심을 붙잡아 두는 데 성공했다. 안철수는 확 달라진 정치 감각을 선보이며 날고 기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정치 무대의 중심에 섰다. 안철수는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언론이 온통 이 문제로 북새통을 떠는 사이 국민의 질타 속에 사경을 헤매던 정치권은 아연 원기를 회복한 모양새다.

연일 정치인의 합류가 이어지며 승승장구하던 안철수 신당의 캐치프레이즈는 '중도'였다. 그것의 본색이 '이승만 국부론' 같은 '보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자 반격에 나선 더불어민주당 역시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참가 전력의 김종인을 영입하며 '중도' 경쟁에 시동을 걸더니 정부 여당의 소위 '노동 개혁'에 타협의 손길을 내밀었다. 마치 우경화만이 살 길이라는 듯.

이 일련의 과정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다가오는 미증유의 경제 위기 앞에서 기득권층만이라도 살아남기 위한 보수 정치 세력의 대동단결! 대다수 정치 세력은 그러한 '보수 대연합'으로 가는 정치판에서 지분을 챙기기 위한 합종연횡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조선 시대에도 이처럼 위기 앞에서 기득권층이 대연합을 시도한 사례가 있었다. 17, 18세기는 동서양에 요즘과 비슷한 위기의 바람이 몰아닥친 시기였다. 당시 나름대로 힘을 합친 조선의 기득권 세력은 개혁을 추진해 위기를 넘긴 반면, 서유럽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기득권층이 대거 몰락했다는 진단도 있다.

17세기 조선은 왜란과 호란의 양란이 가져다준 위기 앞에서 100년 논쟁 끝에 대동법이라는 획기적 개혁안을 관철시켰다. 대동법은 그동안 가구별로 할당하던 현물세를 소유 토지에 비례한 쌀로 일원화해 걷도록 한 세법이다. 그렇게 하면 땅이 많은 부자일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고, 땅 없는 서민은 아예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체제가 흔들리는 위기 앞에서 기득권층이 스스로 제 살을 깎아내는 부담을 각오하고 만든 개혁안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개혁이 18세기 영·정조 대의 부흥을 가져온 원인 중 하나라는 게 일반적 평가이다. 그러나 영·정조 역시 개혁을 지속시키기 위해 정치권의 분열을 해소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들이 이에 대한 해법으로 시도한 것이 바로 '탕평'이었다. 유교 전통에서 탕평은 왕 중심의 정치를 말하는 것으로 신하 중심의 정치인 붕당과 대비되는 것이다. 붕당 간의 지독한 당쟁을 겪고 왕이 된 영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탕평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숙종 말년에 희빈 장 씨의 아들인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고, 숙빈 최 씨의 아들인 영조는 노론의 지지를 받았다. 세자였던 경종이 즉위하자 격렬한 당쟁이 벌어져 노론이 경종에 대한 불충과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쓰고 대거 숙청당했다. 영조도 배다른 형인 경종을 해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위기에 몰린 순간, 경종이 죽는 바람에 극적으로 위기를 탈출해 왕위에 올랐다. 소론 쪽에서 영조가 경종을 독살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할 만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누구나 영조의 다음 선택은 노론과 혈맹을 맺고 소론을 철저히 숙청하는 것이라 짐작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을 해치려 했던 과격파를 제외한 소론의 정권을 유지시키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노론도 끌어들이는 탕평 노선을 취했다. 노론이든 소론이든 자신에 동조하는 자들을 선별적으로 헤쳐 모이게 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소론과 노론의 강경파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특히 영조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지방의 소론 강경파와 남인 세력은 1728년 무신란, 1755년 나주 괘서 사건 등 일련의 '혁명'을 시도하며 30년 넘게 저항했다. 그러자 소론을 일망타진하자는 노론 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영조는 소론 탕평파를 끝까지 놓지 않고 그들과 함께 탕평 정치를 관철시켰다. 대동법 이후 최대의 개혁인 균역법 실시를 통해 백성의 군역 부담을 줄이고, 청계천 바닥을 긁어내고 물길을 바로잡아 천변 빈민의 삶을 개선한 것은 이 같은 탕평정국이 안정되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쟁의 불씨는 사도세자를 고리로 내연하고 있었다. 세자는 소론 강경파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는데, 나주 괘서 사건으로 소론 강경파가 궁지에 몰리자 세자의 처지도 곤란해졌다. 노론 강경파가 세자를 압박하면서 각 정파의 이합집산이 일어나자 그 상황을 이기지 못한 세자는 정신 질환에 걸려 기행을 일삼은 끝에 영조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그 귀결은 세자의 참혹한 죽음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그 자신이 아버지를 둘러싼 분열의 피해자였다. 천신만고 끝에 왕위에 오른 정조에게는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빚어진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다시 탕평을 이루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복권시키는 정면 돌파를 통해 이러한 과제를 달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사도세자의 복권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영조는 자신의 탕평을 좌절시킨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도세자 문제가 재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왕위 계보에서 빼고, 정조로 하여금 어려서 일찍 죽은 큰아버지(사도세자의 형) 효장세자를 계승하게 했다. 즉 영조-효장세자(진종)-정조의 승계 구도를 확정한 것이다. 정조도 영조의 뜻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초기에는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장하는 소론 강경파와 남인을 처벌하고, 사도세자에 비판적이었던 노론 강경파를 국정 파트너로 삼기도 했다.

정조가 회심의 사도세자 복권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즉위한 지 10여 년이 지나 국정을 어느 정도 장악한 1780년대 말이었다. 그는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고,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썼다는 금등 문서를 공개했다.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영남 유림 1만여 명이 연명으로 사도세자 복권을 주장하는 만인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 무렵 '벽파'라 불리게 된 노론 강경파를 제외한 노론 '시파', 소론, 남인은 연대해 이 과정을 지원했다.

물론 정조의 목표는 가능한 모든 정치 세력을 탕평의 기치 아래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론 벽파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끈질긴 논쟁과 타협을 통해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의 동의를 얻어 사도세자와 혜경궁을 왕과 왕비에 버금가는 예에 따라 추숭할 수 있었다. 1795년 화성에서 거행된 혜경궁의 회갑연은 이처럼 정치권의 통합을 전제로 한 화합의 축제로 거행될 수 있었다.

정조의 마지막 목표는 사도세자를 왕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이는 영조와 한 약속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정조 자신의 대에는 할 수 없지만, 다음 왕은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정조는 갑자년인 1804년을 맞아 세자에게 양위하고 자신은 상왕으로 화성에 거둥해 개혁을 추진한다는 구상을 세웠다고 한다. 그 정지 작업으로 영조 때 확립된 정치 의리를 변경하는 문제에 관한 정치권, 특히 노론 벽파의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진력하던 중 갑자년을 4년 앞둔 1800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탕평도, 개혁도 거기서 멈추고 말았다.

간략하게 살펴보려 했던 것이 길어지고 말았지만, 영조와 정조가 탕평을 통해 지배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얼마나 끈질긴 노력을 했는지는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개혁의 동력을 마련하지 않으면 이반된 민심을 다독일 길이 없어 왕권은커녕 국가의 유지도 어려워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17세기의 위기는 그러한 탕평을 바탕으로 한 일련의 개혁을 통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조선 왕조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국민을 조선 시대 왕만큼도 못 섬기는 한심한 정치권

지금 이합집산하고 있는 정치권이 영·정조 대처럼 통합과 개혁을 이뤄낼 수 있을까? 그러려면 당시의 사대부들처럼 뼈를 깎는 자기희생을 감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영·정조와 같은 강력한 권력자의 존재도 필요하다.

지금의 정치권은 그 두 가지가 다 없는 것처럼 보인다. 선거구 협상이나 소위 '노동 개혁' 논란을 보면 기득권 수호에 경도된 철저한 조직 이기주의만 드러냈을 뿐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그들에게는 영·정조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국왕은 유일한 주권자이자 사실상 사대부 계층의 대표자였다. 오늘날 주권자는 헌법에 명시된 것처럼 국민이다. 국왕이던 영·정조는 눈앞에 있는 인격체로서 그가 강력한 의지를 보이면 사대부들이 두려워하며 따랐다. 그런데 오늘날의 정치권은 눈앞의 인격체가 아닌 국민을 추상적인 '대중'으로 여겨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다.

주권자 대다수의 이익과 배치되는 우향우를 거듭하는 그들의 행보가 이를 말해 준다. 그러나 국민이란 주권자는 의사 표현이 신중하고 더딜 뿐 한번 분노하면 영·정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무섭다는 것은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정치권이 실기(失機)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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