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죽은 이유를 설명해달라는 게 죄가 될 수 있을까.
미신고 집회 개최,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상, 대통령 명예훼손 등 온갖 죄목이 주렁주렁 달렸지만 그가 한 일은 단지 그뿐이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해달라고, 그리고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고 소리친 일. 그러나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은 결국 5.04제곱미터 구치소 독방 안에 갇혔다.
그러기를 100일 하고도 열흘. 지난 2일 박 위원은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재판부는 박 위원에게 증거 인멸 우려가 없고, 남은 재판을 성실히 받겠다고 거듭 밝힌 점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세월호 참사가 이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라면, 박 위원의 구속은 정부와 공권력이 얼마나 잔악한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박 위원은 지난 4.16 참사 이후 정부가 유가족과 시민사회를 떼어놓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지켜봤다. 용산 참사 때보다도 공작의 규모가 크고 또 집요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4.16 운동은 '진실을 덮으려고 하는 세력과의 싸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박 위원이 출소한 지 사흘 만인 지난 5일 서울 중구 4.16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프레시안 : 출소한 지 사흘 됐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박래군 : 계속 쉬고 있다. 공백이 길었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듣는 중이다. 4.16 연대 상황 듣고, 또 인권중심 사람 재단 가서 사무처 사람들 만난다. 물론 감옥 안에서도 바깥소식을 듣긴 했지만, 10분 간의 면회, 검열되는 편지만으로는 다 알기 어려운 상황들을 차차 파악하는 중이다. 110일 만에 나왔더니 이슈가 많이 바뀌었더라.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노동 개악' 문제가 뜨겁더라. 그런 이슈들도 이제 따라가야 한다.
프레시안 : 구속기소된 배경을 설명해달라.
박래군 : 세월호 1주기였던 지난 4월, 원래는 시민과 조용히 추모하는 작업을 하려 했다. 그런데 계획이 급격하게 바뀌었다.
3월 27일, 해수부가 특조위 시행령안과 전혀 다른 시행령안을 입법 예고했다. 특조위가 아예 작동도 못 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당시 유가족과 시민들은 진상규명과 더불어 세월호 선체 인양을 요구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정부는 희생자 가족들한테 돈을 얼마 주겠다는 등 그런 얘기를 했다. 그래서 유가족들도 삭발하고 아이들 영정 들고 안산에서 서울까지 걸어왔다. 가만히 있어도 아파 죽겠는데 정부는 희생자 가족들에게 온갖 모욕을 하고 생채기를 내서 덧나게 한 것이다.
그런 정부 행태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분노가 넘치다 보니 일부에선 폭력적인 행동도 했지만, 그런 시위를 하게 한 배경과 원인을 제공한 것은 정부다. 그것도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차원이 아니라 위헌적인 차벽 등으로 원천봉쇄하는 식이었다. 정부가 자기 책임을 느끼지 않고 도리어 4.16 연대와 시민들을 탄압하면서 그 목소리 자체를 억눌렀다고 본다.
저도 그때 화가 무척 났다. 세월호 참사에선 단 한 명도 국민을 구조하지 못한 정부가 진상 규명해달라는 목소리는 철저하게 묵살한 것 아닌가. 당시만 해도 정부가 세월호 인양을 놓고 정치적으로 저울질하던 때다. 그때 유가족과 시민이 그렇게 안 싸웠으면 지금까지도 정부는 인양을 저울질하고 갖고 놀았을 거다.
프레시안 : 경찰 조사 당시, 정부가 세월호 관련자들을 탄압하는 의도에 대해 <프레시안> 인터뷰에서 "시민사회단체를 위축시켜 유가족과 분리한 뒤 유가족들을 고립시키려는 것"이라고 했다. (☞관련기사 : 박래군 "세월호 관련자 처벌? 유가족 고립 의도")
박래군 : 그렇다. 세월호 피해자 가운데에는 유가족뿐 아니라, 화물기사, 생존자도 있고, 또 같은 희생자 가족 가운데서도 일반인 희생자 가족, 단원고 학생 가족이 있는데, 정부는 각 피해자 집단끼리 분열시키고 회유해왔다. 그러면서 '일베'나 극우 인사들의 혐오 발언 등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오히려 조장하는 행태를 보였다. 정부 여당 인사들이 나서서 조류독감(AI), 교통사고에 비유하는 등 자극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유가족을 매도해서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특히 돈 문제를 걸고넘어지며 유가족이 '시체 장사꾼'이라는 얘기를 듣게 했다.
프레시안 : 세월호 참사뿐 아니라 그간 많은 인권 현장에서 '유가족'의 곁에 서 있었다. 다른 사건, 특히 용산 참사에 비해 세월호 정국에서 정부의 탄압 정도는 어땠나.
박래군 : 결국 나타나는 양상들은 비슷하다. 물론 용산 참사 때는 '일베'가 없었다. 그래도 일베와 비슷한 반응들은 있었다. 당시는 '전철연(전국철거민연합)'이 대중적으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 그런 걸 악용하곤 했다. 그때 여당 쪽 한 명이 용산 참사를 '도심 테러'라고 규정하자 여기저기서 그 한 마디를 가지고 변용해서 아픈 말들을 만들어냈다. 정부는 그런 분위기에 편승했다. 겉으로는 애도하는 것처럼 했지만, 결국 추모대회조차도 못하게 막았다. 그때도 제가 (감옥에) 갔다 왔는데, 그 이유가 정부가 허락하지 않는 추모대회를 했다는 이유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용산 참사 때에 비해 세월호 사건은 공감하던 사람들의 수가 굉장히 많았다. 사고 초반에는 거의 전 국민이 공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가족에 대한 온갖 마타도어가 돌면서 결국 관심이 흩어졌다. 그때보다 지금 사는 게 더 힘들다 보니, 왜곡된 선전이 잘 먹히는 것 같다. 특히 청년 세대에 있어 대학 특례 입학이 얼마나 예민한가. 사실 특례 입학은 유가족이 요구한 것도 아니고 여야 국회의원들이 멋대로 끼워 넣은 것인데, 유가족들이 과한 요구를 한 것처럼 여론을 호도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는 피해자 가족들의 입장은 어떻겠나. 길바닥에서 먹고 자는 유가족들은 피눈물이 난다. 피해자들의 억울한 얘기를 들어줘야 하는데, 그런 분위기가 아니라는 게 참 안타까웠다.
프레시안 : 세월호 투쟁이 시작된 지 1년 반이 지났다. 유가족뿐 아니라 세월호 관련 활동가들도 많이 지쳐있을 텐데, 어떤가.
박래군 :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전국에서 편지가 왔다. 저를 만난 사람도 아닌데, 그런데도 여기저기서 편지를 많이 보내주셨다. 개인적으로 보내기도 하고, 지역 단체 단위로 보내기도 하고 너무 많아 셀 수 없을 정도였다(웃음).
편지 내용을 보면, 석방이 빨리 되었으면 한다는 내용과 더불어 본인들이 각자 지역에서 어떤 활동을 하는지를 얘기하더라. 서울 광화문이나 진도 팽목항 같이 눈에 잘 보이는 곳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사라졌다고 세월호에 대한 관심이 잊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민들은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4.16 연대 자체도 그렇다. 기존 조직처럼 중앙이 있고 하부가 있고 그런 수직적인 구조가 아니다. 말 그대로 네트워크 조직이다. 각 참가 주체의 자발성이 최우선이고, 사무실에서는 그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더 잘하도록 격려해준다.
프레시안 : 정부는 박래군을 세월호 관련자, 세월호 폭력 시위의 '주동자'라고 했다. 그렇다면 세월호 투쟁에서 본인이 생각하는 역할이 무엇인가.
박래군 : 나의 역할은 바로 '연결자'다. 인권 운동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통합력이라는 게 있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힘을 모아가는 역할을 인권 운동 영역에서 맡아야 한다. 용산 참사 때도 그렇고 세월호 참사도 그렇고, 나는 각기 다른 입장을 가진 시민 사회들을 하나로 묶는 연결자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부는 마치 내가 전체 조직을 다스리고 책임지는 일종의 '보스'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시하면 일사천리로 조직이 돌아가고 그런 줄로 생각하는데, 그건 옛날 운동 조직 방식이다. 시민사회 쪽에서는 이미 조직 형태가 많이 수평적으로 바뀌었다. 내가 일방적으로 지시할 수도 없고, 먹히지도 않는다.
프레시안 : 건강은 어떤가.
박래군 : 처음 종로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갈 때부터 잠만 쏟아졌다. 몸이 푹 꺼졌달까. 계속 몸이 안 좋았었는데, 활동을 하는 게 아니니까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확 풀어져 버렸다. 원래 체력이 괜찮은 편인데도 거의 한 달간 그랬다. 그래서 나중엔 운동도 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안에 있으면 어차피 술, 담배도 못하니 몸이 좀 괜찮아졌다.
걱정이 되는 게, 이런 상태가 나만 그런 게 아닐 거란 거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이나 활동가나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노상에서 생활했다. 다들 몸들이 안 좋을 텐데, 그리고 앞으로 더 안 좋아질 텐데…. 건강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박래군 : 출소 이튿날까지 전화가 빗발쳤다. '겨울 되기 전에 나와서 다행이다', '면회 가려고 했는데 왜 벌써 나왔느냐'(웃음), 이런 반응이 대부분이다.
프레시안 : 감옥 생활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인가.
박래군 : 추석날 아침에 식사로 나온 밥, 그리고 구치소에서 파는 것 중에 내가 미리 사놓은 음식들을 대충 모아서 독방 안에 제사상을 마련했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 몇 년 전 돌아가신 장모님 지방을 쓰고, 희생자들과 미수습자 분들도 쓰고 나 혼자 쓸쓸히 차례를 지냈다. 절을 하고 혼자 눈 감고 있으니, 세월호 때 돌아가신 분들이 다 나한테 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는구나'. '위로받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편지나 면회도 기억난다. 유가족분들도 힘내라고 편지를 보내주셨고, 그리고 마지막에 답장을 보냈는데, 단원고 희생자 학생들의 형제자매들이 써준 편지가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경희대학교에서 내 인권 수업을 듣던 아이들 몇 명이 면회에 온 적이 있다. 자기들이 쓸 수 있는 돈이 딱 만 원 있다며, 과일 사고 남은 4000원을 영치금으로 넣어주더라. 참 먹먹하고 감동적이었다.
프레시안 : 보석으로 풀려 나오리라고 예상했나.
박래군 : 들어갈 때, 언제 나올지 몰랐다. 변호사들이 보석 신청을 하긴 했는데,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었다. 1주기 집회 현장에서 연행된 사람들도 다 보석이 기각됐다. 정부 입장에선 그분들이 종범이고 내가 주범일 텐데 그렇다면 나는 더더욱 보석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10월 28일 두 번째 재판 하고 나서 12월 중순까지 50여 일의 계획을 새로 짰다. 책 내기로 한 게 있어서 원고를 일주일에 한 꼭지씩 쓰는 게 목표 중 하나였다.
석방 당일 오후 3시만 해도 후배 한 녀석이 면회 와서, 그 친구한테도 제가 실형도 나올 수 있으니 석방은 기대 말라고 했다. 이후 면회가 끝나고 독방에 들어왔는데 아내로부터 전자 서신이 와 있어서 읽었다. 제가 수면무호흡증이 있어서 기계를 쓰는데 그게 망가져서 어떻게 할지 의논하자는 내용이었다. 그러고 나서 저녁을 먹고 숟가락을 놓으며 설거지나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못 보던 교도관이 날 찾았다. '좋은 일로 왔다'고 했다.
지난번 용산 참사 때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나올 때 굉장히 얼떨떨했다. 긴가민가했다. 감옥에서 나올 때 육중한 철문 몇 개를 거치고 나와야 하는데 그걸 그냥 나가는 건가 싶었다. 내 발로 걸어나가면서도 바깥에 나오는 순간까지도 믿기지 않았다. 지금도 사실 좀 얼떨떨하다.
프레시안 : 재판 준비는 어떻게 하고 있나.
박래군 : 앞으로 심리가 세 번 정도 남았다. 제대로 나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검찰의 기소가 부당하다는 걸 밝히기 위해 피고인 신문을 잘 준비해야 하고, 최후진술도 준비해야 한다. 아마 12월 중순 정도 1심 선고가 될 것이다. 보석으로 나오긴 했지만, 보석은 언제든지 취소가 가능하다. 그래서 몸을 사려야 해서 좀 답답하다.
프레시안 : 앞으로 활동 계획에 대해 알려달라.
박래군 : 벌여놓은 일들을 책임지고 마무리해야 한다. 우선 4.16연대와 인권재단 사람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구치소에 있는 동안 12월 개최 예정인 인권 콘서트의 준비위원장이 저로 정해져서 이것도 해야 한다. 내년 1월에는 또 용산 참사 7주기라서 이와 관련한 작업도 해야 하고, 책도 써야 하고, 할 일이 무척 많다.
프레시안 : 구치소에 있는 사이 국정화 이슈, 노동 개혁 이슈 등이 대두되면서 상대적으로 세월호 이슈가 뒤로 밀려났다. 아쉽진 않나.
박래군 : 세월호 투쟁은 이제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잊혀가는 게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게다가 워낙 한국 사회가 좋게 말해 역동적이라 할 정도로 이슈가 터지니…. 그럼에도 세월호는 놓치지 말아야 할 이슈다.
프레시안 : 향후 세월호 투쟁의 과제가 무엇인가.
박래군 : 작년에도 사실 그랬다. 작년 하반기 추석 즈음해서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김유민 학생의 아버지 김영오 씨가 단식하면서 인신공격에 가까운 반응이 굉장히 많았다. 이런 혐오 분위기가 조성될 때 유가족이 먼저 움직였다. 여기저기 찾아가 간담회를 하며 오해를 풀고, 진실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우리 사회는 분명히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하는 세력이 있지만, 또 진실을 덮으려고 하는 세력은 훨씬 더 강고하다. 그런 사람들과 싸울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프레시안 : 시간이 지날수록 세월호 투쟁의 동력을 찾기 쉽지 않을 것 같다.
박래군 : 그래서 저는 유가족들한테 말씀드렸다. 앞으로도 비슷한 일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사람들은 잊을 것이고, 함께하는 사람도 줄어들 것이라고. 그러나 적어도 힘들을 모아 나아가자고.
올해 하반기부터 내년 2주기까지가 고비랄까. 세월호 싸움의 중요 전환점이라고 본다. 현안을 뛰어넘어 세월호만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힘을 놓지 말고 가져가야 한다.
프레시안 : 세월호 투쟁의 의미는 무엇인가.
박래군 :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이면 세월호 유가족들한테 고맙다고 해야 한다. 만약 피해자들이 정말 정부 뜻대로 돈 받고 진상 규명 없이 물러났으면 투쟁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누가 지시하고 가르친 것도 아닌데 유가족들이 스스로 격론을 벌인 끝에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미 그들의 가족들은 죽었지만,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극복하고 비극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도록 대승적으로 싸워나가겠다는 게 얼마나 고맙나. 우리는 이렇게 유가족들이 주축이 되는 세월호 투쟁 속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확인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월호 참사 이후 지금 우리 사회는 안전 사회로 갈 수 있는 일들을 제대로 준비하고 있나. 그렇지 않다. 변하지 않고 묻어두려고만 한다. 어디서 또 세월호보다 더 심한 일이 터질지 모른다. 핵발전소, 화학공단과 같은 시한폭탄을 우리 사회는 안고 살고 있다.
세월호는 모든 사안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노동 개혁 이슈가 그렇다. 세월호 선원 대부분이 비정규직이었다. 다른 생명을 책임질 수 없는 노동 조건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선원들 욕만 할 게 아니라 그런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도록 해야 하는 거다.
4.16 운동은 곧 이 세상을 바꿔가는 것이다. 아래로부터, 근본부터. 거꾸로 뒤집힌 가치관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돈이 우선인 세상에서 인권이 존중되고 생명이 우선되는 사회로.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국가에 대한 박 위원의 생각을 알려달라.
박래군 : 이제는 국가가 뭔지 잘 모르겠다. 현대 정치학에서 공부하는 국가론에서 국가를 바라본다면 그건 순진한 생각이다. 본질을 봐야 한다. 국가라는 것을 소수의 기득권 세력이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데 큰 문제가 있다.
사실 저는 '우리 모두의 책임'이란 말을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일부 소수가 전횡을 일삼게 된 데에는 우리 시민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 자기 권리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기에 심부름꾼이 상전 노릇을 하며 우리 목숨을 하찮게 보는 것이다.
바꿔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시민 되기 운동이 필요하다. 언제까지 욕만 하고 말 건가. 저들이 바꾸지 못한다면, 우리가 힘을 모아 바꾸도록 해야 한다. 시민 사회 활동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4.16 연대든 다른 곳이든 시민사회 단체 회원이 되거나 후원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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