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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가고 싶은 섬,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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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국인이 가고 싶은 섬, 1위

11월 섬학교 <소매물도·대매물도>

11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44강으로 한려수도의 비경, 통영의 소매물도와 대매물도입니다.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이 가고 싶은 섬 1위로 뽑힌 소매물도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환상이라 이를 만합니다. 특히 썰물 때면 바닷길이 열려 소매물도와 하나가 되는 등대섬의 모습은 가히 선경을 방불케 합니다.

▲환상처럼 펼쳐지는 대매물도 풍경 Ⓒ이상희

대매물도는 소매물도와 형제섬입니다. 소매물도의 명성에 가려 덜 알려졌지만 그 풍경은 소매물도보다 더 빼어난 데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국립공원에서 <해품길>이라는 걷기 길을 만들어 해안절경을 감상하며 한가로이 걸을 수 있습니다. 소매물도의 풍경을 오롯이 조망하기에 대매물도 장군봉보다 더 좋은 곳은 없습니다. 가을 기운이 가득한 11월 7(토)∼8(일)일 대·소매물도의 해안절경을 걸으며 더없는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대매물도에서 바라본 바다와 섬들의 풍경은 하롱베이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의 섬 <대·소매물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소매물도, 자기 땅에 세들어 사는 섬

한국의 섬들 중 소매물도의 명성은 가히 독보적이다. 한국인들이 꼭 가보고 싶은 섬 1위로 꼽힌 것도 그 명성 때문일 것이다. 한국의 관광형태는 유명하면 “일단 가고 보자”니까. 한국의 섬들 중 풍광이 1등이라고는 장담할 수 없지만 빼어난 섬임에는 틀림없다. 소매물도의 명성은 등대섬의 풍경에서 비롯되었다. 섬의 주봉인 망태봉 정상에서 보는 등대섬의 풍광은 가히 비경이라 이를 만큼 아름답다. 물길에 막혀 등대섬에 가지 못하더라도 망태봉에서 등대섬을 보는 것만으로도 먼 섬까지 온 보람이 충분하다. 그만큼 등대섬의 풍광은 절경이다.

소매물도와 등대섬은 가는 목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그 목을 ‘열목’이라 한다. 두 섬의 길은 썰물이면 하나로 연결되고 들물이면 끊어진다. 열목이란 두 섬 사이의 길이 열린다 해서 얻어진 이름이 아니다. 들물이면 끊어졌던 동서 두 바다 사이에 뱃길이 열린다 해서 열목이다. 소매물도 앞의 바위섬 오륙도는 들물이면 다섯 개가 됐다가 썰물이면 여섯 개가 된다 해서 오륙도다. 오륙도가 다섯 개면 열목의 뱃길이 열린 것을 알고 어선들이 그 길로 방향을 잡는다.

등대섬의 등대는 등대원들이 상주하는 유인 등대다. 등대에 이르는 길은 나무 데크가 깔려 있어 안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등대섬은 일명 ‘쿠크다스섬’이라고도 부른다. 쿠크다스란 과자 광고에 등대섬이 등장하면서 소매물도가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때문이다. 과거 소매물도 탐사 코스는 마을에서 섬의 정상 망태봉을 넘어 등대섬까지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들물 때는 물길에 가로막혀 등대섬을 건너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섬에서의 동선은 매우 제한적이고 탐방로 또한 극히 짧았다.

그러다 최근 둘레길이 생겼다.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 만든 <등대길>이다. 걷기 열풍 덕이다. 섬이 워낙 작다보니 둘레길을 걷는데도 한 시간이 채 안 걸리지만 섬을 더 깊이 체험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운 길이다. 등대길 코스는 마을에서 우측 해안길을 따라 나 있다. 하지만 그 길은 제법 가파른 편이다. 등대섬과 망태봉을 다녀오면서 폐교 옆으로 돌아내려오는 길이 쉽다.

마을을 가로질러 가면 부두에서 망태봉 정상까지는 20분이 채 안 걸린다. 망태봉 정상에는 과거 장승포세관 소매물도 감시서가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던 세관건물이 근래에는 매물도 관세역사관으로 재단장을 해서 문을 열었다. 감시초소는 1970년대 야간에 화물선 등을 이용해 일본에서 들여온 밀수품을 남해안의 섬이나 해안으로 옮기던 속칭 ‘특공대 밀수’를 단속하기 위해 설치됐었다. ‘이즈하라특공대’라 불리던 밀수단은 고속 밀수선으로 저녁에 일본에 갔다가 새벽에 밀수품을 들여왔다. 초소는 87건의 밀수선을 적발하는 실적을 냈지만 밀수 감시선이 투입되면서 폐쇄됐다. 그 자리는 더 오랜 옛날에는 해적을 감시하던 망대가 있던 자리이기도 하다.

또 고향을 떠나 섬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고향의 부모를 그리며 절을 하던 망배단이기도 하다. 섬의 애환이 깃든 장소인 것이다. 소매물도는 면적 0.51㎢, 해안선 길이 3.8km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걸어서 돌아도 1시간이면 족하다. 지금은 폐교된 소매물도 분교 운동장, 거기서 공을 차면 바다로 풍덩 떨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더 이상 낙도가 아닌 유명 관광지다. 하지만 소매물도의 주인은 섬 주민들이 아니다. 자신의 땅을 소유하고 있는 주민은 몇 명 되지 않는다. 다들 남의 땅에 세 들어 산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1989년 소매물도의 36가구 원주민들은 서울의 개발업체인 ㈜남해레데코에 모든 땅을 팔아버렸다. 개발업체는 온갖 감언이설로 주민들의 땅을 헐값에 사들였다. 이후 단 한 집만 계약금의 두 배를 위약금으로 물어주고 땅을 되찾았을 뿐 나머지는 모두 개발업체의 손으로 넘어갔다. 개발업체는 소매물도를 대규모 자연관광 단지로 개발하겠다는 명목으로 투자금을 모으려 했다. 당시 개발업체는 신문에 광고까지 내며 투자자를 모았다.
“비경 매물도가 태고의 잠에서 깨어나 한려수도의 꽃으로 환상의 섬으로 새롭게 성장할 것입니다.”(<한산면지>에서 재인용)

개발업체에서는 심지어 계약당사자인 섬 주민들이 죽을 때까지 살도록 해주겠다고 속여서 땅을 매입했었다. 하지만 투자금 모집광고에서 보듯 투자자만 모이면 주민들은 곧바로 쫓겨날 상황이었다. 그러나 개발업체는 부실경영으로 채권자인 다른 업자의 손에 넘어갔다. 결국 대부분의 주민들은 서둘러 섬을 떠나야 했다. 겨우 쫓겨나지 않고 섬에 남은 몇몇 주민들은 자기 땅을 팔고 그 땅에 '세 들어' 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갑자기 유명 관광지가 된 탓에 관광 수입이 커지자 주민들은 땅을 판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남의 손에 든 떡. 근래에 경매를 통해 섬 주민 한 사람이 많은 땅을 되찾았고 한동안 내던 집세도 더 이상 내지 않지만 대다수 주민들은 여전히 자기 땅이 없다. 소매물도는 그래서 섬개발의 나쁜 선례로 남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섬 주민들이 쫓겨나는 섬 개발은 이루어지지 말아야 마땅하다.

금지된 사랑, 남매 바위

저녁이 오려는가. 하늘 한쪽이 흐리다. 신화가 되기에는 너무 좁은 땅, 작은 섬일수록 끔찍한 전설들이 떠다닌다. 나그네는 둘레길을 걸으며 해안가 남매 바위 앞에서 길을 멈춘다. 옛날 어미섬 대매물도에 자식 없이 살아가는 부부가 있었다. 권씨라고도 하고 허씨라고도 한다. 부부는 뒤늦게 아이를 얻었다. 남매 쌍둥이였다. 남매 쌍둥이는 명이 짧아 일찍 죽게 된다는 말들이 있었다. 부부는 딸을 소매물도에 버렸다. 남아선호가 낳은 비극이었다. 세월 따라 아들은 불쑥 자랐다. 어느 날 아들은 나무 하러 산에 갔다가 소매물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부모는 아들에게 “소매물도는 무서운 용이 사는 곳이니 절대 가서는 안 된다”고 신신 당부했었다. 여느 아들들처럼 아들은 부모 말을 가볍게 여겼다.

금단의 과실일수록 유혹은 달콤하다. 열아홉의 봄날, 마침내 아들은 금기를 어기고 노를 저어 소매물도로 건너갔다. 거기서 뜻밖에도 물비린내 달큰한 처녀를 만났다. 첫눈에 반한 두 남녀는 정념을 못 이겨 서로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었다. 그때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들고 비바람 천둥번개가 치면서 두 남녀는 바위로 변해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그것이 저 전설 속의 남매바위다.

전설이란 그저 전설일 리가 없다. 어떠한 전설도 현실의 반영이다. 남매의 이야기도 괜히 지어낸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뭍에서 흔한 달래고개 전설 같은 일이 섬에서는 더 자주 일어났을 것이다. 덕적도의 선단여 전설도 남매간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다. 섬이란 공간은 지금도 폐쇄적이다. 그러니 옛날에는 어떠했겠는가. 평생 섬을 떠나 보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 좁은 땅, 몇 안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보라 쳤다. 봄이 오고 가을이 갔다. 연분도 늘 맞대면 하는 사이에서 난다. 근친간의 사랑이 어디 한두 번이었을까.

옛날의 섬에서는 남매로 나서 부부로 연을 맺고 살다간 이들에 대한 풍문도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근자에 와서도 섬에서는 형수와 시동생이 눈 맞아 야반도주했다느니 하는 따위 풍문이 드물지 않았다. 남매바위에 대한 전설은 그에 대한 경책으로 생겨난 것일 터다. 하지만 어이하랴. 남녀 간의 일이란 인간의 일이지만 또한 인간의 일이 아니기도 한 것을!

▲소매물도의 명성은 기암괴석의 등대섬 풍경에서 비롯된 바 크다. Ⓒ이상희


수족관 안의 생

섬에서도 어김없이 세월이 간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시간은 흐르고 밤은 온다. 바람이 아주 자는 걸까. 수면은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다. 그러나 저 평화로운 바다 속은 여지없이 피비린내 진동하는 생존의 바다다. 큰 물고기와 작은 물고기들이 서로 먹고 먹히는 생사의 바다. 사람이 던지는 가짜 미끼에도 물고기들은 줄줄이 걸려들고, 평화로운 수면 아래 놓인 덫들, 그물들. 물속은 온통 지뢰밭이다.

어느 횟집 앞. 나그네는 내내 수족관 속 물고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어부에게 잡혀온 물고기들을 기다려 주는 것은 죽음뿐이다. 죽음이 코앞에 있어도 물고기들은 눈치도 못 챈다. 수족관 안의 시간이 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리다툼하고, 쫓고 쫓긴다. 때때로 횟집 주인의 뜰채가 다가오면 서둘러 달아나지만 그래 봐야 수족관을 벗어날 수 없다. 발버둥 친다 해서 죽음을 피할 길은 없다.

횟집 주인은 부지런히 수족관 안의 물고기를 건져 낸다. 불과 두어 시간 사이 수족관은 텅 빈다. 이제 주인은 바다로 가 다시 물고기들을 잡아 올리고 수족관은 가득 채워질 것이다.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 죽음을 피할 길 없으니 삶 또한 피할 길이 없다. 수족관 안의 생. 건너 섬 욕지도와 연화도 사이로 해가 진다. 삶 밖에 다른 무엇이 있을까. 도달할 수 없다면 있어도 있는 것은 아닌 것. 하늘은 잠시 수족관 너머로 노을빛 연화세계를 보여주지만 건널 수 없는 자들은 그저 애달픔에 유리벽만 치다 돌아간다.

섬의 수호신, 인어와 도깨비

한국 바다에도 인어가 살았다! 인어의 전설은 서양의 신화나 동화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수의 거문도에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 속에 나오는 인어처럼 하얀 살결에 긴 생머리를 한 아름다운 인어가 살았다. 거문도 사람들은 그 인어를 ‘신지끼’라 불렀다. 신지끼는 주로 달 밝은 밤이나 새벽에 나타났다. 신지끼는 백도 앞 밤바다에서 조업을 하는 어선 근처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그때마다 신지끼는 절벽에 돌을 던졌다.

처음 신지끼를 목격한 어부들은 두려워서 배를 타고 거문도로 귀항했다. 어선이 거문도에 들어오니 큰 풍랑이 몰려왔다.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됐다. 사람들은 신지끼의 저주로 풍랑이 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신지끼를 기피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던 와중에 거문도 섬사람 중 하나가 신지끼의 신호를 달리 해석했다. 신지끼가 나타나 백도의 바위에 돌을 던지는 것은 위협이나 저주가 아니다. 풍랑이 오는 것을 미리 알려주는 신호다. 그 이후 인어 신지끼는 거문도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 섬사람들의 지혜다.

대매물도에도 거문도의 인어 신지끼 이야기와 거의 흡사한 전설이 전해온다. 대매물도 당금마을 바로 건너편에는 어유도란 섬이 있다. 대매물도 사람들은 어리섬이라 한다. 사람이 살았었지만 지금은 무인도다. 대매물도 당금마을과 어유도 사이에는 매섬이라는 작은 바위섬이 있다. 어유도 바다에는 유난히도 물고기떼가 많이 물려들었다. 그래서 이름도 물고기가 노는 섬이다. 매섬은 물고기를 노리는 매를 닮았다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 흑비둘기와 황조롱이가 서식하고, 희귀식물들과 상록활엽수림이 무성한 어유도는 지난 2000년부터 통영시가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그 어유도에는 ‘허칭이 강정’이란 곳이 있다. 허칭이는 허깨비, 강정은 파도의 침식으로 암벽의 연약한 부분이 뚫리거나 무너져 내려 우묵하게 패인 곳을 일컫는 통영 말이다. 옛날 대매물도 어부 한 사람이 어유도 허칭이 강정 아래 바다로 낚시를 갔다. 물고기가 너무도 잘 물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신없이 잡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허칭이 강정에서 돌멩이들이 날아와 풍덩풍덩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어부는 기겁을 하고 배를 몰아 대매물도로 돌아왔다. 어부가 배에서 내리고 얼마 후 샛바람이 불고 큰 풍랑이 몰려왔다.

그 후로도 어부들이 허칭이 강정 부근에서 낚시를 하는데 돌멩이가 날아오면 서둘러 대매물도로 돌아왔고 얼마 후면 꼭 풍랑이 몰아쳤다. 섬사람들은 도깨비가 풍랑이 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돌을 던진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강정의 이름이 허칭이 강정이 됐다. 거문도 어부들을 풍랑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것이 신지끼라면 대매물도 사람들을 구해준 것은 허칭이, 허깨비처럼 실상을 알 수 없는 도깨비다.

섬사람들을 보호해준 그 초자연적인 존재가 인어든 도깨비든 섬사람들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생명의 은인들이다. 옛날 섬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자연의 소리는 물론 초자연의 소리에까지 귀 기울일 줄 알았다. 험난한 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지혜였다. 우리의 귀는 초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자연의 소리도 들을 수 없게 퇴화해버리지는 않았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섬으로 가는 것은 잃어버린 원시의 청력을 회복하러 가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또 이 섬과 바다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듣고 올 수 있을까.

▲대·소매물도 두 섬은 처처가 절경이다. 사진은 대매물도 꼬돌개 해변. Ⓒ섬학교

영혼이 떠나간 육체여!

대매물도라 하지만 소매물도에 비해 크다는 것일 뿐 면적 1.8㎢, 해안선 길이 5.5㎞의 아담한 섬이다. 대매물도는 소매물도와 함께 한려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최근 대매물도에는 한려해상국립공원에서 만든 <해품길>이라는 5.2km 거리의 트레일이 생겼다. 아직 섬에 오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머지않아 이 섬에도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으로 예감된다. 대매물도만큼 풍광 좋은 트레일은 다른 섬들에서는 좀 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거리는 짧지만 풍광은 청산도나 금오도 트레일보다 빼어난 면이 있다.

그래서 나그네는 이 섬이 걱정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하루 탐방객 수를 적정한 인원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만들어야 옳지 싶다. 그렇지 않으면 소매물도나 홍도처럼 서울역 대합실인지 섬인지 분간이 안갈 정도로 포화 상태가 될 것이 자명하다. 한 번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것은 섬의 생태계나 주민들에게도 득이 아니다. 문제는 지속가능성이다.

당금마을 분교 뒤 안 해변을 따라 이어진 해품길을 걷는다. 이 길에서는 한없이 푸른 남태평양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해안 절벽을 따라 이어지는 오솔길은 더없이 편안하고 한가롭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까닭에 길은 온전히 나그네의 길이 된다. 숲길을 지나면 거기 환상처럼 초지가 나타난다. 섬에 넓은 초지가 있는 것은 과거 인구가 많을 때 화목으로 베어낸 때문이다. 게다가 산비탈까지 개간에서 일구던 밭을 묵혀두니 그 또한 초지가 되었다. 근래에는 소나무 재선충에 걸려 베어진 소나무들이 많아 초지는 더 넓어졌다. 그로 인해 시야도 확 트였다.

섬에서 만나는 녹색의 드넓은 초지는 이방의 감성을 자극한다. 섬은 그래서 여권 없는 해외여행이 된다. 길은 약간의 경사가 있지만 대체로 평탄하다. 섬의 뒤 안은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가파른 산비탈 바위틈을 비집고 자라난 잣밤나무나 동백나무 같은 상록수들은 몽실몽실 피어난 초록의 꽃 같다. 그 위로 쏟아지는 남국의 태양빛이 눈부시다. 길을 걷다보니 산의 고개 마루까지도 전에는 온통 밭이었다. 간간히 보이는 산정의 돌담들은 밭의 흔적이다. 바람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하기 위해 섬에서는 밭에도 돌담을 쌓았었다.

장군봉에서 아래 대항마을 마을 뒷길에는 제법 규모가 큰 2층 건물이 홀로 서 있다. 붉은 벽돌 건물은 공동주택이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빈 집이 된 지 오래다. 내가 빈 집이라 했던가? 아니다. 저 집은 더 이상 빈 집이 아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이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은 틀린 말이다. 빈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아니다. 사람이 살지만 어떤 이유로 일정기간 비워 둔 집이 빈 집이다. 사람의 집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사는 건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주 떠나가 버려 더 이상 살지 않는 집은 집이 아니다. 사람은 집의 영혼. 영혼이 떠나간 저 건물은 더 이상 집도, 빈 집도 아닌 것이다. 사람도 그렇지 않은가. '죽은 사람'이란 없다. 영혼이 떠난 몸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물질일 뿐. 슬픔도 더 이상 너의 것은 아니구나. 영혼이 떠나간 '육체'여! 사람이 떠나간 '집'이여!

장군봉 전망대에 서니 소매물도와 등대섬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소매물도가 아름다운 섬인 것을 비로소 알겠다. 소매물도 산정에서는 등대섬만 보이지만 여기서는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함께 볼 수 있다. 숲에서 나와야 숲이 보이는 법. 소매물도와 등대섬을 조망하기에 여기보다 더 좋은 곳은 더 없다. 소매물도에 온 사람들도 이곳 장군봉에 오면 단박에 반하고 말 것이다. 장군봉 전망대 옆에는 바위굴이 있다. 이 굴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포진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저와 비슷한 인공동굴을 제주도 송악산과 우도에서도 본 적이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말기 제주도 곳곳에 ‘바다의 가미가제’인 가이텐 자살특공대(인간 어뢰)를 숨겨놓기 위해 바위굴을 팠다. 또 대매물도나 거제 지심도처럼 포진지를 파기도 했다. 산하에는 수만 년이 지나도 치유되지 않을 깊은 상처가 남았다.

1945년 3월, 진해 일본군 통제부에서 대한해협 방어를 위해 대매물도에 포진지를 구축했다. 포진지 공사에는 충청도에서 끌려온 광부들과 매물도의 당금, 대항, 소매물도 주민들이 강제동원 됐다. 끌려온 사람들은 스스로 식량을 마련해와 바위굴을 뚫고 방카(대피소)를 만들었고 포진지를 구축하느라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으로 포진지는 무용하게 됐고 후일 한국 해군이 잠시 진지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지금 장군봉에는 해군도 떠나고 통신회사 기지국이 들어서 있다. 그런데 포진지 동굴 앞에는 아무런 안내판이 없다. 처음 온 사람은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다. 장군봉 둘레를 따라 해품길을 새로 내면서 옛 길목에 세워져 있던 안내판을 옮겨오지 않은 때문이다.

▲이국적인 풍광의 대매물도 초지는 나그네의 여수를 자극한다. Ⓒ섬학교

다 꼬돌아진 꼬돌개!

장군봉에서 섬 뒷길을 따라 꼬돌개로 넘어간다. 소매물와 머리를 맞대고 있는 꼬돌개는 대매물도에서 일몰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꼽히지만 섬사람들의 슬픈 역사가 깃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10년경 비어있던 대매물도에 첫 이주민이 들어왔다. 고성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꼬돌개에 집을 짓고 정착했다. 산비탈에 논밭을 일구고 해초를 뜯고 물고기를 잡아 삶을 이어갔다. 뭍에서는 도저히 먹고 살 길이 없어서 망망대해의 낙도까지 흘러들어온 유민들이었다. 유민들이 정착민이 되어 살 만하겠다 싶을 무렵 괴질(콜레라)이 돌았다. 결국 첫 이주민들은 전원이 몰살당했다. 괴질로 한 사람의 생존자도 없이 다 꼬돌아졌다(쓰러졌다) 해서 생긴 지명이 꼬돌개다. 1869년 고성, 사천 등지에서 들어온 2차 정착민이 지금 주민들의 조상이다. 이들은 꼬돌개에서 일차 정착민이 살던 집터와, 구들장, 밥그릇, 숟가락 등을 발견했다고 전한다.

폐촌이 된 꼬돌개마을에서 대항마을로 이어진 길은 그야말로 옛 오솔길이다. 겨우 한두 뼘이나 될까 말까 한 좁고 구불구불한 흙길은 발로 밟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손대지 않은 진짜 옛길, 이 길이야말로 문화재다. 더 이상 확장하거나 손대지 않는다면 이 섬의 진짜 보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오솔길을 걸어 나온 나그네는 대항마을 해변길을 따라 당금마을로 넘어간다. 당금마을은 대부분 민박을 친다. 여름에는 제법 많은 피서객들이 들어오지만 다른 때는 낚시꾼들이 주된 손님이다. 선착장 입구에는 스킨스쿠버 장비대여점도 있다.

작은 섬들은 물이 가장 큰 걱정거리다. 그래도 대매물도는 소매물도보다 물 사정이 좋은 편이다. 구판장 주인 할머니는 "큰 바위 밑 땅에서 물이 폭폭폭 솟아나더라"고 물줄기를 찾던 시절의 소식을 전해준다. 그 물을 탱크에 모아서 각 가정으로 분배한다. 대매물도는 내연발전소가 있어 전기가 공급된다. 몇몇 집은 고기잡이배를 부리고 또 몇 집은 소를 키운다. 그러나 매물도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무엇보다 해초다. 마을어촌계가 공동관리하는 어장에서 미역을 채취하는 것이 생계에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여름 미역 철이면 섬은 해녀들이 채취해온 돌미역을 말리느라 분주하다.

대매물도 해녀들도 전복, 소라, 성게, 석화 등 해산물을 채취한다. 대매물도에는 1925년경부터 제주 해녀들이 물질을 오기 시작했다. 1930년부터는 제주의 고운식, 오백룡 등이 해녀들을 싣고 와 본격적으로 해녀선을 운영하며 해산물을 채취했다. 이 나라 바다 구석구석 제주 해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당시에는 해산물을 채취하면 마을과 해녀가 반분했다. 지금 남은 해녀들은 그때 그 제주 해녀의 후예들이다. 오늘 나그네는 선창가에 앉아 노 해녀가 막 잡아온 손바닥만 한 석화에 술잔을 기울인다. 한 개가 한 접시나 되는 석화의 맛은 마치 진짜 진한 우유를 마시는 것처럼 고소하다. 괜히 굴을 ‘바다의 우유’라 한 것이 아니구나! 이 또한 섬과 바다가 주는 여행의 큰 즐거움이다.

▲소매물도 풍경, 꽃양귀비가 활짝 핀 섬은 그 자체로 꽃섬이다. Ⓒ섬학교

섬학교 2015년 11월, 제44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배시간의 변경으로 일부 조절될 수 있습니다).

<11월 7일(토)>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 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4강 여는 모임
-통영 도착
-점심식사(해물탕)
-거제 저구항(버스 이동)
-저구항 출항
-소매물도 도착
-소매물도 산책하기(3km)
선착장→폐교→매물도관세역사관→등대섬→선착장
-소매물도 출항
-대매물도 당금항 도착
-숙소 배정(대매물도 <노을민박>, 다인실)
-대매물도 마을 산책
-저녁식사 겸 뒤풀이(자연산생선회/해산물모듬/매운탕)
-자유시간 및 취침

<11월 8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
-대매물도 <해품길> 걷기 (5.2km)
당금마을선착장→마을골목길→폐교→정자→장군봉전망대/포진지→대항마을 섬뒷길→꼬돌개
→대항마을
-대매물도 출항
-거제 저구항 도착
-점심식사(통영 <풍년식당> 한정식), 제44강 마무리모임
-서울 향발

▲섬학교 11월 제44강 <소매물도·대매물도> 답사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 제44강 <통영 소매물도·대매물도> 참가비는 27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등하교시 고속도로변의 죽전정류소, 신갈정류소를 이용하실 분은 참가신청시 꼭 알려주세요.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대매물도에서 마주한 무인도 오륙도의 황홀한 일몰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 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 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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