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부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는 내용이 포함된 2015 개정 역사과 교육 과정을 지난달 23일 발표했다. 언론을 중심으로 '뉴라이트 사관이 반영됐다'는 비판이 일자, 교육부는 이례적으로 '설명 자료'를 따로 만들어 배포했다. (☞관련기사 : "중고등 역사 교과, 친일 관련 내용 대거 빠져")
"'대한민국 수립'은 공청회, 행정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수정 요구 의견, 역사 전문 연구기관의 검토, 역사과 교육 과정 개발 연구진의 의견을 반영해, 역사과 교육 과정 심의회의 최종 심의를 걸쳐 결정된 것으로 특정 단체의 요구를 수용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님."
정부가 나서서 뉴라이트와 유착 의혹을 적극 부인한 셈이다. 그러나 역사 및 역사 교육 전문가들은 이같은 해명은 거짓이라고 지적한다. 새정치민주연합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특별위원회,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저지 네트워크가 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주최한 '2015 개정 역사과 교육 과정과 국정교과서 논란' 토론회에서, 역사 전문가들은 "이명박 정부로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뉴라이트와의 자발적, 적극적, 반복적 유착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들은 정부의 국정화 시도가 뉴라이트식 교과서를 만들기 위한 기도임을 부인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4년 전부터 이미 뉴라이트와 자발적이고 반복적인 유착"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뒤집기 첫 시도는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역사 교과서 속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자유민주주의'로 수정하도록 해 큰 파장을 낳았다.
한상권 역사정의실천연대 상임대표는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달라는 건의서를 넣은 단체가 '한국현대사학회'"라고 했다. 한국현대사학회는 <대안 교과서>를 만든 '교과서 포럼'의 핵심 인사들이 중심이 된 학회다. 당시 사회과교육과정심의회는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를 반영하지 않은 채로 교육 과정을 최종 확정했다. 그러나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 통일교육원 등에서 같은 건의가 따르자 이주호 당시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직권으로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도록 했다.
한 대표는 "지금까지 사용해온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는 이유가 제대로 제시되지 않았다"며 "독재 정치로 민주주의를 유린한 이승만과 박정희를 '자유민주주의' 수호자로 복권시키려는 사전 포석"이라고 밝혔다.
당시 교과부는 고등학교 집필 기준에서 "유엔으로부터 합법정부로 승인"이라는 문구를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으로 바꿨다.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강조했는데, 이 또한 한국현대사학회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현대사학회 건의서를 통해 "대한민국이 유엔의 지원과 국제적 승인 하에 성립, 출범했음을 분명하게 강조해달라"고 했다.
한 대표는 정작 유엔총회 결의안 원문에는 '유일한'이라는 표현이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유엔의 권위를 빌어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을 역사적 정통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1945년 해방의 역사적 의미를 상쇄시키려는 것"이라며, "해방 공간에서 소외된 친일파를 건국세력으로 부활시키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뉴라이트를 지탱하는 논리구조 가운데 핵심이 '건국절'"이라며, "이명박 정부 때부터 강조해왔던 건국절 관련 내용이 이번 교육 과정에 들어갔으므로, 국정화 이전에 목적은 다 달성한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미 뉴라이트와 자발적이고 반복적인 유착이 있었는데 국민들이 과거 일을 까먹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만일 국정화를 강행한다면, 단순한 찻잔 속 태풍이 아닌 총선으로 연결되도록 공론을 마련할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수립' 표현, 누구 의견을 듣고 갑자기 수정했나"
김육훈 역사교육연구소장은 이번 2015 교육 과정이 확정되기까지 교육부와 시안 개발진이 보여준 '불통'을 지적했다. "무엇을 하겠다는 것 말고, '왜' 바꾸는지에 대해 설득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외부의 의견 개진을 묵살했음을 감안하면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표현이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뀐 경우다.
김 소장은 세 차례 열린 공개 토론회나 공청회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바꾸자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없었다고 했다. 불과 고시 열흘 전쯤 열린 집필 기준안 공청회에서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라는 표현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했다. 김 소장은 "그렇다면, 시안 개발진이나 집필기준안 연구진도 아니며 교육 과정심의회도 아닌 다른 단위에서 어느 누군가가 의견을 개진했고 이를 교육부가 받아들였다는 추측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는 "역사 학계 전체가 좌편향이란 식으로 반지성적 태도를 견지하는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공식적, 비공식적 과정을 통해 교육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한 데 반해, 한국의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를 대표할만한 단체들은 요청받은 바 없으며 심지어 공식적인 대화 제의조차 거절당했다"고 비판했다.
"국정화 안 돼도 국정 같은 검정 교과서 나올 것"
이외에도 이번 교육 과정에 대한 다양한 우려가 쏟아져 나왔다. 조왕호 대일고 교사는 이번 교육 과정에 이전과 달리 '교수 학습 방법 및 유의 사항', '평가 방법 및 유의 사항' 등 '유의 사항'이 들어간 데 대해 우려를 표했다.
조 교사는 "검정이 되더라도 집필자나 편집자들의 사고의 폭을 상당히 제한할 것임에 틀림없다"며 "국정화가 아닌 검정으로 결정된다 하더라도 사실상 국정이나 진배없는 검정 교과서들만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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