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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바람 따라 안산(鞍山)에서 용산(龍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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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초가을 바람 따라 안산(鞍山)에서 용산(龍山)으로

9월 서울학교

청명한 가을로 접어듭니다.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 인문역사지리 전문가)의 9월 답사(제42강)는 2015년 9월 13일(일) 열리며, 주제는 <안산(鞍山)에서 용산(龍山)으로>입니다. 걷기 좋은 초가을, 안산 자락에 깃들어 있는 연희궁터와 봉원사, 그리고 안산 봉수대를 둘러보고 도성밖 우백호에 해당하는 안산으로부터 용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그곳에 깃들어 있는 문화유적들을 찾아갑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안산에서 금화산을 거쳐 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서울학교

9월 13일 일요일 아침 9시, 서울 신촌 연세대 정문앞(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왼쪽에서 모여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연세대 정문앞-수경원터-광혜원-연세대 근대건축물-봉원사-안산-능안정-애오개-굴레방다리터-만리재-점심식사 겸 뒤풀이(서계마을)-효창공원-임정요원묘역-삼의사묘역-김구묘역

▲9월의 서울학교 제42강 답사로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의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안산(鞍山)은 한양도성(漢陽都城)을 이루는 내사산(內四山)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 산세와 위치적인 조건이 한양도성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내사산 중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하는 인왕산(仁王山)이 그 산줄기를 서쪽으로 뻗치면서 무악재(毋岳峴)에서 낮아졌다가 안산에서 솟구쳐 한줄기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화산을 일구고 아현(阿峴)으로 이어져 약현(藥峴)과 만리재(萬里峴)를 지나 용산(龍山)에서 한강에 숨어들고 있습니다. 또다른 한 줄기는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연세대학교 서쪽을 감싸안고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계당치(鷄堂峙)를 지나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臥牛山)을 일으키고 양화진(楊花津)의 잠두봉(蠶頭峰)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종조산(宗祖山)인 삼각산(三角山)의 인수봉[負兒岳]이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아이가 어미등을 뛰쳐나가면 위험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인수봉이 마주 바라보이는 안산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산줄기에 지명으로 비보책(裨補策)을 썼습니다. 즉 안산을 무악(毋岳)이라 하여 뛰쳐나가지 말라[毋] 하고, 안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개를 떡전고개[餠市峴]라 하여 떡으로 아이를 달래고, 목멱산 동쪽에 있는 고개를 벌아령(伐兒嶺)이라 하여 아이가 달아나면 혼내준다고 얼렀던 것입니다.

하지 말라 하고[毋岳], 떡으로 꾀이고[餠市峴], 혼내겠다고 얼러서[伐兒嶺] 어머니의 등에서 뛰쳐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비보책을 쓴 것입니다.

안산(鞍山)은 동, 서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를 예전에는 길마재 즉 안현(鞍峴)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공식적으로 무악재[毋岳峴]라고 부릅니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 있는 무악재는 황제의 나라 중국을 사대(事大)했던 제후의 나라 조선으로서는 황제의 사신이 드나들던 길목으로 매우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황제의 나라 사신들은 제후의 나라 관리들로부터 홍제원(弘濟院)에서부터 접대를 받고 무악재를 넘어 모화관(慕華館)에 이르러 조선의 국왕과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고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崇禮門)으로 도성에 들어와 궁궐 가까이에 있는 태평관(太平館)에서 유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산의 동쪽 자락에는 중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모화관과 그 입구에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에 딸린 연못인 서지(西池)가 있었습니다. 모화관은 원래 누각 형식으로 지어져 모화루(慕華樓)라 불렀으나 세종 때 모화관으로 바꿔 불렀고 입구의 문은 원래 홍살문이었으나 중종 때 김안로(金安老)의 건의에 따라 두 개의 기둥에 청기와를 덮어 격식 있는 문으로 거듭나서 영조문(迎詔門)이라 이름도 지었으나 3년 뒤 명나라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제안으로 영은문(迎恩門)이라 개칭하였고 서지에는 개성의 숭교사(崇敎寺)의 연못에서 가져온 연꽃이 가득하였습니다. 이 터는 지금의 영천시장과 금화초등학교 일대입니다.

▲수경원터에 남아있는 정자각 Ⓒ서울학교

안산의 두 봉우리는 각각 동봉수(東烽燧)와 서봉수(西烽燧)가 설치되어 있어 평안도와 황해도 길의 통신 임무를 맡았습니다.

동봉수는 평안도 강계(江界)에서 시작하여 육로를 따라 고양시 봉현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 셋째 봉수로 전해졌고, 서봉수는 평안도 의주(義州)에서 시작하여 해안을 따라 파주 교하를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의 넷째 봉수로 전달되었습니다. 지금은 동봉수대만 복원이 되어 있고 서봉수대는 통신회사의 철탑이 서 있으니 그것도 현대판 봉수임에는 틀림 없는 것 같습니다.

안산의 남쪽 자락은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천도(遷都)를 단행할 때 도읍지로 추천된 세 곳 중의 하나입니다. 고려 말 천도 예정지는 계룡산(鷄龍山), 한양(漢陽), 그리고 안산(鞍山)의 세 곳이었는데 경기도 관찰사 하륜(河崙)은 안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계룡산은 <정감록(鄭鑑錄)>에도 나와 있는 길지로서 제일 먼저 천도 후보지에 올라 도성 축성을 일정부분 진행하였습니다만 그 위치가 나라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도참사상(圖讖思想)에 의하면 계룡산 일대는 정씨(鄭氏)가 도읍을 세우는 곳이라는 주장 때문에 10개월 만에 공사가 중단되어 기단 일부의 석축물만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새로운 도읍지’라는 뜻으로 신도안(新都案)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지금은 계룡대라 고쳐 부르며 육, 해, 공군의 참모부가 들어섰습니다.

다음으로 하륜(河崙)이 주장한 안산 주산론(主山論)은 이곳의 지형이 앞이 확 트여 한강으로 접근하기가 쉽고 한강은 바로 서해와 맞닿아 있어 해양 진출이 용이함으로 도성으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풍수지리적으로 오히려 주산(主山) 앞에 안산(案山)이 있어 내룡(來龍)한 기운이 어느 정도 맺혀야 그 기운을 받을 수 있는데 이곳 지형이 막힘이 없기에 맺힘도 없어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성리학(性理學)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운 조선은 사농공상의 신분을 분명히 나누었는데 해상무역은 바로 가장 낮은 층인 상(商)에 해당함으로 그 직업을 천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역사적으로 백제, 신라, 고려는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서 백제는 중국의 동쪽 바닷가 도시에 백제원(百濟院)을 개척하였고 신라도 그 전통을 이어 신라원(新羅院)을 두었고 고려의 도읍 개성에서는 복식부기를 사용할 정도로 무역의 거래가 활발하였으나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을 치국이념(治國理念)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전통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안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터는 연희동 입체교차로 어름일 것이고 좌청룡(左靑龍)은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老姑山), 우백호(右白虎)는 서대문 구청 건너편 백련산(白蓮山)이 됩니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옹색하고 한강까지 훤히 트여 있어 산의 정기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하여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안산은 한양도성을 쌓을 때 논란이 많았던 곳입니다. 지금의 한양도성은 우백호인 인왕산에서 바로 안산(案山)인 목멱산(木覓山)으로 이어져 있지만,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인왕산에서 무악재를 가로질러 안산으로 와서 금화산 지나 약현(藥峴)에서 목멱산과 이어지는 도성을 쌓자고 제안했는데 인왕산 자락에 있는 장삼 입은 승려 형상의 선바위가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한 정도전(鄭道傳)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무학은 한양의 좌청룡 산줄기의 허약함을 비보하기 위해 궁궐을 동향(東向)으로 하는 인왕주산론(仁王主山論)을 주장하였으나 주례(周禮)에 따라 군왕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궁궐의 좌향(坐向)은 반드시 남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정도전의 주장에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太祖) 때 계획을 세워 세종(世宗) 때 준공을 본 이궁(離宮)이 세 곳에 있었습니다. 동쪽에는 진접면의 풍양궁(豊壤宮), 서쪽에는 연세대학교 부근의 연희궁(衍禧宮), 남쪽에는 한양대 앞 살곶이다리 근처의 대산이궁(臺山離宮)이라 하는 낙천정(樂天亭)입니다. 북쪽에 이궁이 없는 이유는 세 곳의 이궁이 설치되기 전부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潛邸)인 장의동본궁(壯義洞本宮)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 추측해 봅니다.

이렇듯 도성 주변에 이궁을 설치한 까닭은 건국 초기에는 왕가(王家)에 횡액(橫厄)이 생기든지 아니면 ‘왕자의 난’과 같은 변고가 생기면 왕이 이를 피하기 위함이었는데 후기로 가면서 왕이 쉬어가는 단순한 휴양지로 그 용도가 바뀌었습니다.

연희궁은 원래는 정종(定宗)이 태종(太宗)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거처하였던 곳이었으나 세종(世宗) 때 와서는 상왕인 태종을 위한 궁으로 서이궁(西離宮)이라 불렀으며 태종이 세상을 떠난 후 비로소 연희궁이는 이름을 얻었는데, 세종이 이곳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는 이어소(移御所)로 사용하였고 세조(世祖) 때는 연희궁을 서잠실(西蠶室)이라 하여 정5품의 관리를 배치한 양잠소(養蠶所)로 사용하였습니다.

성종(成宗) 때는 장녀 신숙공주(愼淑公主)의 묘를 이곳에 두었고 연산군(燕山君) 때에는 연희장(演戱場)으로 사용하다가 폐쇄되었으며 영조(英祖) 때에는 후궁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를 안장하였습니다. 영빈이씨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어머니로서 그의 묘를 수경원(綬慶園)이라 불렀으나 그 후 묘는 서오릉(西五陵)으로 이장되고 지금은 정자각(丁字閣)과 비각(碑閣)만이 남아 있습니다.

연세대학교에서 봉원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벌고개[罰峴]라 하는데, 그 유래는 이곳이 수경원의 주룡(主龍)이 되므로 사람이 다니면 등성이 낮아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고개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다니는 사람을 벌하였으므로 벌고개라 불리어졌습니다.

수경원터에는 갑신정변(甲申政變) 때 다쳤던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한 의사이며 선교사였던 알렌(1858~1932)이 고종에게 병원을 설립하자고 제안하여 만든, 세브란스병원의 전신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이었던 광혜원(廣惠院) 건물이 한옥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고종(高宗)의 윤허로 병원의 설립은 빠르게 진행되어 1885년 4월10일 재동에 있는 홍영식(洪英植)의 집(현재 헌법재판소 자리)에 광혜원이 설립되었고 2주 후에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뀌어서 결국 광혜원과 제중원은 한 몸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광혜원 또는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었습니다.

알렌의 제안으로 설립된 왕립병원이었던 제중원은 조선정부 외부(外部) 소속으로 조선정부는 건물과 경비를 지원하고 하급관리[主事]를 파견하여 일반재정을 관리하였고 선교부(미국 북장로회)에서는 의사들을 파견하여 의료 및 의학교육에 대한 경비를 관리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선정부에서 교사들이나 의사들을 직접 계약하고 고용해서 적절한 급여를 주었던 다른 기관들과는 달리, 의사들을 미국의 선교부에서 직접 파견했고 제중원의 의사들은 공식적인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1887년 제중원은 구리개(을지로에서 명동성당에 이르는 언덕)로 확장 이전했으며 1894년에는 제중원의 모든 운영권이 미국 선교부로 이관되어 사립병원이 되면서 기존의 설비와 기록들은 그대로 이어받았으나 1904년 재정난으로 제중원은 미국인 사업가 세브란스씨의 1만5천 달러 기부 등으로 남대문밖 복숭아골(현재 서울역 앞의 연세재단 세브란스빌딩 자리)로 새 병원을 지어서 이전하였고 이때 많은 돈을 기부한 세브란스를 기념하여 병원 이름을 세브란스기념병원으로 바꾸었습니다.

1905년 의사 숙소 등으로 사용되던 구리개의 옛 제중원 대지와 건물들은 조선정부로 반환되었으나 조선정부나 백성들은 그 이후 오랜 동안 문서와 말을 통해서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이라고 불렀습니다. 현재의 광혜원 건물은 1987년 연세대가 현대의학의 발상지로 복원한 것입니다.

▲봉원사는 매년 5월에 영산재(靈山齋)를 봉행한다. Ⓒ봉원사

봉원사(奉元寺)는 신라 진성여왕 때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하여 반야사(般若寺)라고 부른 데서 연유되었으며 고려 말 태고 보우(太古 普雨)스님이 반야사를 증축하여 금화사(金華寺)로 고쳐 불렀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리고 영조(英祖)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으면서 영조가 친필로 쓴 봉원사 현판을 하사하였는데 이런 사정들을 고려해 볼 때 아마도 가까이에 있는 영조의 후궁 영빈이씨의 묘인 수경원의 원찰(願刹)로 새 절이 지어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때 지어진 대웅전과 영조의 현판 글씨, 탱화, 목조삼존불 등은 모두 소실되었고 지금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이 쓴 명부전(冥府殿) 편액(偏額)과 대원군이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다시 쓰기 위해 불태운 충남 덕산 가야사(伽倻寺)에 있었던 범종(梵鐘)이 봉원사로 옮겨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봉원사는 한글학회가 창립된 곳이기도 합니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周時經)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하기국어강습소 졸업생과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우리말과 글의 연구와 교육을 목적으로 국어연구학회를 봉원사에서 창립하였습니다. 그 후 단체 이름이 여러 번 바뀌어 1911년 <배달말 몯음>으로, 1913년 <한글모>로, 1921년 <조선어연구회>로, 1931년 <조선어학회>로, 1949년에 드디어 지금의 <한글학회>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제26대 고종 21년(1884년) 발생한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었던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등 개화파 인사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동인(李東仁) 스님이 5년간 주석(住錫)하였던 갑신정변의 요람지이기도 합니다.

봉원사에는 매년 봄에 영산재(靈山齋)가 거행됩니다. 영산재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취산(靈鷲山)에서 설법하시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상징화한 의식으로, 영산회상을 열어 영혼을 발심(發心)시키고, 귀의(歸依)하게 함으로써 극락왕생(極樂往生)하게 한다는 의미를 갖는데 국가의 안녕과 군인들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국가적 불교의식으로 치러졌습니다.

영산재가 진행되는 절차는 매우 복잡합니다만 간단히 요약하면 우선 괘불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를 내어 거는 괘불이운(掛佛移運)으로 시작하여 괘불 앞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찬불의식(讚佛儀式)을 갖고 영혼을 모셔오는 시련(侍輦), 영가(靈駕)를 대접하는 대령(待靈), 영가가 생전에 지은 욕심내고[貪], 성질부리고[嗔], 어리석었던[痴] 삼독(三毒)을 씻어내는 의식인 관욕(灌浴)의 차례로 행해집니다.

이어서 공양(供養) 드리기 전에 의식장소를 정화하는 신중작법(神衆作法)을 한 다음 불보살에게 공양을 드리고 죽은 영혼이 극락왕생하기를 바라는 찬불의례가 뒤를 잇습니다. 이렇게 권공의식(勸供儀式)을 마치면 보다 구체적인 소원을 아뢰게 되는 축원문이 낭독되고 다음으로 영산재에 참여한 모든 대중들이 다 함께 하는 회향의식(回向儀式)과 봉송의례(奉送儀禮)로 끝나게 됩니다.

영산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고 209년에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지금도 매년 5월이 되면 봉원사에서는 그 의식을 봉행하고 있습니다.

안산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 상에 작게 솟아오른 봉우리가 금화산(金華山)입니다. 그 이름은 봉원사의 고려시대의 이름인 금화사(金華寺)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안산에서 금화산을 지나 동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달리 떡전고개[餠市峴]라고도 불리는 애오개[阿峴]를 지나 만리재를 넘어 효창공원으로 이어져 용산(龍山)에 닿습니다.

이 능선을 따라 걷다보면 금화산 조금 지난 곳에서 능안정(陵安亭)이라는 정자를 만나게 되는데 금화산 남서쪽 산록인 북아현동을 능안리라 부른데서 말미암은 것으로 능안리라는 지명은 금화산 자락에 의령원(懿寧園)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의령원은 사도세자와 흔히 ‘혜경궁 홍씨’라 칭하는 혜빈 홍씨(惠嬪洪氏) 사이에 태어난 장자로서,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3세에 죽은 의소(懿昭)의 묘원(墓園)을 말하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북아현동 중앙여자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며 의소묘(懿昭墓)로 불리다가 고종 때 의령원으로 승격되었고 1949년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되었습니다.


금화산 산줄기의 끝자락에는 서대문에서 마포 쪽으로 넘나들던 떡전고개[餠市峴]로도 불렸던 애오개[阿峴]가 있으며 애오개를 넘어 신촌 쪽으로 가자면 굴레방다리를 건너 ‘큰고개[大峴]’를 넘어야 하는데 지금의 아현동에서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하며 고개의 이름을 따서 이화여대 앞이 대현동(大峴洞)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넓게 차도를 내서 시원스럽게 뚫려 있지만 이것은 신작로(新作路)를 내면서 직선으로 새롭게 뚫은 길이고 옛길은 구부러진 골목길이었으며 옛길에는 지금 재래시장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애오개길’이라 불리는 옛 고갯길을 남아있는 흔적을 따라가 보면, 종근당 앞의 애오개를 넘어서 가구점 골목을 지나 지금은 복개되어 자취를 찾아볼 수 없지만 굴레방다리를 건너서 아현시장을 지나 이화여대 입구에 이르는 길로서 조선 초기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고갯길입니다.

굴레방다리는 큰 고개에서 흘러온 물줄기와 금화산에서 능안리를 따라 흘러온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일 뿐만 아니라 큰 고개를 넘어 신촌 쪽으로 가는 길과 마포 쪽으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으로, 이곳의 지세는 풍수지리적으로 큰 소가 길마는 안산(鞍山)에 벗어놓고 굴레는 이곳에 벗어 놓은 뒤 서강(西江)을 향해 내려가다가 홍이대 뒷산인 와우산(臥牛山)에 가서 누운 형국이라고 합니다.

아현시장 뒤편, 즉 서강 쪽으로 뻗어 있는 산줄기에 기대어 골목길을 맞대고 마을을 이루었던 전통부락은 지금은 뉴타운 개발로 모두 철거되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애오개는 조선시대 도성의 서남쪽 강화 방면으로 가는 노선의 경유지로서 숭례문을 나와 칠패시장을 지나 만리재 옆에 붙어 있는 약현과 애오개를 넘고 굴레방다리를 건너서 큰고개를 넘고 노고산 북쪽을 돌아 나와 와우산 북쪽을 지나 양화진에 이르고 이곳에서 배로 한강을 건너 양천에 닿고 김포, 통진, 갑곶진을 거쳐 강화에 이르게 됩니다. 이 길이 강화로이며 조선의 제6로입니다.

애오개를 지나 숭례문 쪽을 향해 있는 약현을 비껴 지나면 만리현(萬里峴)에 이릅니다. 이곳은 세종 때 집현전 박사였던 최만리(崔萬理)가 살았다고 하여 그리 불렀다고 합니다.

만리현에는 한양도읍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새 도읍지를 물색하던 중 한양의 지세를 보니 우백호의 끝자락인 만리현이 백호(白虎)의 형상으로 그 세력이 급하고 움직이는 기운이 넘쳐나 이를 눌러 앉히기 위해서 만리현이 바라다 보이는 관악산(冠岳山)에 호압사(虎壓寺)를 짓고 상도동 남쪽에 솟아있는 국사봉에 사자암(獅子庵)을 지었다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관악산 옆에 붙어있는 호암산(虎岩山)의 전설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리현을 지나 용산 쪽으로 내려서면 청파동 뒷자락에 효창공원이 있습니다. 효창공원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 바친 애국지사들의 유해를 모신 묘역으로 백범(白凡) 김구(金九)묘역, 삼의사(三義士)묘역, 임정요인(臨政要人)묘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효창원터에 안장된 백범 김구 묘 Ⓒ서울학교

원래 이곳은 정조(正祖)의 큰아들로 다섯 살에 죽은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무덤인 효창원(孝昌園)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이곳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宜嬪) 성씨, 순조(純祖)의 후궁인 숙의(淑儀) 박씨, 숙의 박씨 소생인 영온옹주(永溫翁主)가 안장되어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효창원의 모든 무덤은 서삼릉(西三陵)으로 옮겨졌으며 이곳은 소나무만 우거진 인적이 드문 곳으로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때 일본군의 주둔지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광복 후에는 애국열사들의 묘역이 되었는데 효창공원 중앙 위쪽에 위치한 김구묘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主席)인 백범 김구 선생이 모셔져 있고 효창공원 위쪽의 동편에 위치한 삼의사묘역에는 백범이 귀국 후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백정기(白貞基) 의사의 유해지로 이곳을 미리 정해 놓고 일본으로부터 유해를 봉안하여 안장하였고 유해를 찾지 못한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가묘(假墓)를 마련하였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삼의사 묘가 아니라 사의사(四義士) 묘인 셈인데 묘의 석축에는 “의사들이 남긴 향기가 백세토록 영원하라”라는 뜻으로 백범이 쓴 ‘유방백세(遺芳百世)’의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임정요인 묘역에는 임정 요인으로 중국에서 순국한 이동녕(李東寧), 차이석(車利錫), 조성환(曺成煥)의 유해를 모신 곳으로 효창공원 입구 바로 오른쪽에 있습니다.

점심식사 겸 뒤풀이는 재래시장인 만리시장 안에 있는, 고향의 정취와 신선한 자연을 맛볼 수 있는 <서계마을>에서 맛있는 쌈밥과 파전에 막걸리도 한 사발 내놓을 예정입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 모자, 선글라스, 식수, 스틱,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참가비는 5만5천원입니다(강의비, 점심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현장에서는 참가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서울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seoulschool2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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