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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의 진실, 그 때 미군 폭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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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의 진실, 그 때 미군 폭격이 있었다

[유라시아 견문] 캄보디아 : 속국의 민주화

킬링필드 산업

캄보디아는 근 10년 만이었다.

2004년 초, 배낭여행으로 갔었다. 단편적 기억만 있다. 아침으로 바게트 빵을 먹는 캄보디아 사람들이 신기했고, 시엠립에 있는 <평양식당>에서 처음으로 북조선 사람들을 접했다. 앙코르와트에서는 <화양연화>를 흉내 내며 첫사랑을 마감하는 허세를 부렸고, 프놈펜에서는 킬링필드의 비극을 애감해하는 상투적인 포즈를 취했다. 한참 빠져있던 미니홈피에는 당시의 풋내 나는 기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렸고, 어설펐다.

그 사이 나는 사회학도에서 역사학자가 되었고, 서방의 이론(theory)을 섬기기보다는 동방의 사론(史論)을 세우는 일을 중시하게 되었다. 여행 또한 자의식이 분출하는 감상에 젖기보다는 시무(時務)책을 건의했던 연행록에서 영감을 얻는 편이다. 관광보다는 견문의 태도를 견지하려고 노력한다.

하기에 두 번째 캄보디아 행에서는 유적지에 통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관광객이나 여행 산업 자체가 더 흥미로웠다. 프놈펜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도 단연 여행객들이 많았다. 여전히 아세안의 일원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의 일국이라고 해야 어울릴법한 가난한 나라이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비즈니스맨들은 드물었다.

10년 사이 메콩강변에 자리한 카페와 레스토랑의 직원들이 '고니찌와' 대신에 '니하오'로 인사한다. 실제로 프놈펜 시내는 '일국삼어(一國三語)'라도 되는 냥, 영어만큼이나 한자 간판이 많았다. 특히 금은방과 노래방, 쇼핑몰과 레스토랑에는 어김없이 한자가 병기되어 있었다. 이곳도 화교가 바닥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10년 전에도 그러했는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한자에는 도무지 까막눈이었던 시절이다. 아침 식사를 하며 영자 신문과 화교 신문을 번갈아 읽을 수 있게 것도 지난 10년의 변화이다. <프놈펜 포스트> 1면에서는 베트남과의 국경 분쟁을 확인하고, <남화(南華)일보> 경제면에서는 방콕-프놈펜 간 고속도로 건설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비단 개인적 변화라고만 여기지 않는다. 시대적 흐름의 소산일 것이다. 1990년대 이래 세계화가 '단기적 미국화'를 지나 '장기적 중국화'에 들어섰다.

캄보디아 여행은 크게 둘로 나뉜다. 시엠립에서는 앙코르 제국의 위대함에 감탄한다. 프놈펜에서는 킬링필드의 비극에 전율한다. 대부분의 관광 상품이 그렇게 짜여 있다. 10년 전 나도 그러했다. 소수의 배낭족만이 시하눅빌의 해변까지 즐기다 돌아간다.

캄보디아에 대한 서적도 비슷하다. 프놈펜 시내에도 'Monument Books'가 있었다. 동남아 곳곳에 자리한 영어(및 프랑스어) 전문 서점이다. 이제는 나에게도 친숙한 곳이 되었다. 가는 도시마다 이 서점을 찾곤 한다. 프놈펜에는 미국 대사관에서 멀지 않고, 세계은행 사무실과 지척인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에 진열되어 있는 도서들도 앙코르와트와 크메르루주로 대별할 수 있었다.

마침 올해는 크메르 루주 정권이 들어선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1975년 4월 17일이었다. 올해는 또 베트남 통일 40주년이도 했다. 4월 30일이었다. 4월 17일에 프놈펜이 점령되었고, 4월 30일에 사이공이 함락되었다. 남베트남에 앞서 캄보디아부터 적화된 것이다.

두 사건은 결코 무관하지 않았다. 아니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폴 포트는 사력을 다해 프놈펜으로 진격했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을 함락시키기 전에 프놈펜을 접수해야 한다는 조바심으로 초조했다.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통일한 이후에는 캄보디아까지 침공할 것을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킬링필드의 전조였다.

1970년대 전체를 아울러 조망할 필요도 있다. 1975년 킬링필드의 비극은 1970년과 1979년 사이에 일어났다. 1970년 10월 9일에는 론 놀의 쿠데타가 있었다. 미국의 지원에 힘입은 군사 정변이었다. 베트남 전쟁에 휘말리기를 거부하며 중립 노선을 고수했던 시하누크 국왕은 축출되었다. 베이징과 평양을 오가는 망명객 신세가 되었다.

미국은 론놀을 내세워 베트남 전쟁을 대리 수행했다. 남베트남에 진주하고 있던 미군들도 캄보디아로 진격했다. 국경 지대의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타도한다는 명분이었다. 악명 높은 폭격도 시작되었다. 1975년까지 약 270만 톤의 폭탄이 캄보디아에 투하되었다. 물론 적들만 골라 정밀 타격할 수는 없었다. 민간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 폭격이었다.

론 놀의 본심은 달리 있었다. 그는 반공주의자보다는 반베트남주의자였다. 미국의 지원 아래 (북)베트남에 대한 성전을 벌인다고 자위했다. 당시 선전 포스터에도 붉은 별의 모자를 쓴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캄보디아의 승려들을 살해하는 장면이 그려졌다.

즉, 론 놀과 폴 포트는 좌/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을 캄보디아의 '주적'으로 상정했다는 점에서는 일치했다. 프랑스는 100년 손님이고, 미국은 5년 손님이었지만, 베트남은 '1000년의 외세'였기 때문이다.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의 거개가 한때는 캄보디아의 영토였다.

킬링필드가 대학살이고 대참사였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곳만큼은 두 번째 방문에서도 숙연하고 처연했다. 도시는 소각되었고, 화폐는 폐지되었으며, 지식인에 대한 탄압은 극에 달했다. 교사의 80%, 의사의 95%가 죽음을 면치 못했다. 다만 이 극단적 히스테리에는 하노이에서 외국물을 먹고 온 '친베트남파'에 대한 강박적 두려움이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의 남진(南進)을 거드는 내부의 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게다가 킬링필드의 피해 또한 과장이 심하다. 불과 3년 남짓에 인구의 4분의 1이 학살되었다는 억측이 만연하다. 인구의 4분의 1이 준 것은 사실이다. 다만 1970년대 전체에 걸쳐 일어난 일이다. 미국의 폭격으로 사망한 인원부터, 베트남이나 태국으로 피난 간 사람들까지 도합한 숫자이다. 과연 5년의 무차별 폭격과 3년의 집단 학살 가운데, 어느 쪽의 인적 피해가 더 컸는지 단언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기록의 편중과 기억의 편향이 막심하다. 폴 포트의 '적색 킬링필드'만이 일방적으로 부각되었다. 미국의 전쟁 범죄, '백색 킬링필드'는 철저하게 가려졌다. 1970년대의 인도차이나라는 시공간적 맥락은 생략된 채, 아시아 공산주의 정권의 잔혹함과 야만성만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꼴이다.

그럼으로써 탈냉전기 세련된 형태의 반공주의에 복무했다. 1994년 클린턴 행정부는 '인권 외교'의 일환으로 캄보디아 집단학살심판법안(The Cambodia genocide justice act)을 입안했다, 국무부 산하에 전담 기구를 두고 80만 달러의 예산도 투입했다. 특히 예일대학교의 제노사이드 연구소에 용역이 집중되었다. 크메르루주에 관한 가장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킬링필드 연구'의 본산이 되었다.

20년이 흐른 지금, 이 예일산 연구 성과들이 킬링필드에 대한 기록과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온 여행객들이 페이스북와 트위터 등을 통하여 킬링필드에 대한 고정관념을 재확인하고 재확산시킨다. 어느새 킬링필드 또한 홀로코스트처럼 일종의 '기억 산업'이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정작 1979년 이후의 사태에 대해서는 감감하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전복된 것은 1979년 1월이었다. 폴 포트의 불길한 예감은 예지로써 적중했다. 끝내 베트남군이 캄보디아를 점령하여 10년이 넘도록 지배했다. 폴 포트는 1980년대 내내 태국(타이) 국경에 근거지를 두고 '천년 외세'에 맞선 항전을 지속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밀림 속의 폴 포트를 기억하지는 않는다. 오로지 킬링필드 3년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역시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 폴 포트를 밀어내고 캄보디아의 지배자로 등극한 이가 30년 독재자 훈센이다.

ⓒ이병한

ⓒ이병한

훈센 : 속국의 독재자

베트남의 캄보디아 공격은 1978년 12월 25일 시작되었다. 10만 명의 최정예 베트남군이 성탄절에 맞추어 출격했다. 캄보디아를 접수하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수십 년간 실전으로 단련된 막강한 부대였다. 프랑스와 미국을 연이어 물리친 세계 유일의 군대였다. 베트남은 1979년 1월 7일 프놈펜 '해방'을 선언했다. 크메르 루주의 악몽이 끝났다고 선포했다. 민주 캄푸치아는 전복되었고,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즉각 베트남을 모델로 삼은 국가 개조가 단행되었다. 10만 명의 베트남군이 상시 주둔했다. 총책임자는 베트남의 혁명 원로 레득토(Le Duc Tho)였다. 학교야말로 새 나라의 초석이었다. 교실마다 스탈린과 호치민의 사진이 걸렸다.

사회주의 학습도 교정되었다. 폴 포토의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를 대신하여 소련과 베트남의 정통 사회주의를 가르쳤다. 인구의 9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음에도 '노동자 의식'이 주입되었다. 당장 떠오르는 것은 소련의 속국, (외)몽골이다. 유목민을 노동자로 개조시켰다. 아니나 다를까, 신생 캄보디아 인민공화국을 가장 먼저 방문한 해외 사절단이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몽골 대표단이었다.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을 영접한 캄보디아의 외교부 장관이다. 당시 불과 27세, 새파랗게 어린 세계 최연소 장관이었다. 훈센이다.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29세에 부총리가 된다. 그리고 1985년 1월 14일, 33세의 나이로 총리 자리에 오른다. 세계에서 가장 젊은 총리였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오랜 집권자 중의 하나가 된다. 2015년 올해까지 장장 30년, 인생의 절반을 국가수반으로 살았다.

그가 크메르 루주의 탄압을 피해 베트남으로 피신한 것은 1977년이었다. 베트남에 충성 서약을 하며 하이푹(Hai Phuc)이라는 베트남식 이름도 얻었다. 이듬해에는 캄푸치아 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본뜬 캄보디아 판 혁명 조직이었다. 그리고 1979년 베트남군의 프놈펜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베트남의 비호 아래 1981년 캄푸치아 인민혁명당을 발족시켰고, 1985년 캄보디아 인민당으로 개명했다. 30년 통치를 함께한 영구 집권당이었다.

훈센이 총리로 등극한 1985년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등장한 해였다. 베트남에 대한 원조가 중단되자, 베트남은 1986년 도이모이를 선언하며 시장 경제를 도입했다. 시장의 합리성이 정책에 반영되면서 캄보디아 점령에도 영향을 미쳤다. 소련의 원조에 기생하던 점령 정책을 지속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결국 소련군이 동유럽에서 철군하던 1989년, 베트남군도 캄보디아에서 철수했다. 동유럽과 동남아의 탈냉전이 동시적으로 진행된 것이다. 10년의 점령 비용은 값비싼 것이었다. 2만3000명의 베트남군이 목숨을 잃었다. 저강도의 킬링필드였다.

그럼에도 베트남이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었다. 점령 기간 광범위하고도 정교한 지배망을 구축했다. 지금도 수백 명의 베트남 전문가들이 국제협력단의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나아가 크메르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국적을 세탁하여 캄보디아의 고위 관료로 남아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는 소문이다.

무엇보다 베트남의 복심, 훈센이 건재하다. 애초 훈센을 총리로 발탁한 이도 레득토였다. 훈센에게 세계 정세를 가르친 것은 캄보디아 대사 응오디엔(Ngo Dien)이었다. 레득토의 총애와 응오디엔의 지도 아래서 훈센의 정치적 성장이 거듭되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보은으로 훈센은 1985년 국경 협상에서 베트남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체결해주었다. 현재 베트남의 최남단 영토인 푸꾸억(Phu Cuoc)을 넘겨준 것이다.

2015년 7월 15일자 <프놈펜 포스트>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던 바로 그 베트남-캄보디아 국경 분쟁의 기원이다. 30년 묵은 적폐이다.

1989년 베트남이 떠나면서 캄보디아의 국명은 다시 변경되었다. 인민공화국을 지우고 캄보디아국이라 했다. 입헌군주제로 돌아갔다. 시하누크도 김일성 주석이 선물한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프놈펜으로 복귀했다. 실권은 없을망정 '상징 국왕'의 허울은 되찾은 것이다. 국기와 국가도 새로 정했다. 소승 불교도 재차 국교로 지정되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의 점령 유산은 여전했다. 당장 1월 7일부터 크게 기린다. 올해는 40주년을 맞이하여 양국 공동으로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였다. 때문에 크메르 양식의 독립기념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베트남풍의 캄보디아-베트남 우호탑을 바라보는 심정은 복잡한 것이었다. 몇몇 캄보디아 지식인을 만나 속내를 물어봤지만, 속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킬링필드의 산업화를 통해 이득을 얻는 쪽은 크게 셋이다. 우선은 베트남이다. 캄보디아 점령을 합리화할 수 있다. 둘째는 훈센이다. 캄보디아를 학살과 폭정에서 구해내었다는 것이 30년 집권의 명분이다. 끝으로는 미국이다. 크메르 루주의 비극을 널리 선전함으로써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최종적 승리를 거듭 추인할 수 있었다. 베트남과 미국의 기묘한 공모 속에 훈센의 장기 독재가 터하고 있는 것이다.

▲ 캄보디아-베트남 우호탑. ⓒ이병한

속국의 민주화

베트남군이 철수하고 캄보디아를 접수한 것은 유엔(UN)이었다. 1991년부터 1만6000명의 평화유지군과 5000명의 민간고문단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사회주의를 대신하여 민주주의가 이식되었다. 캄보디아 재건을 위하여 2년간 유엔이 쏟아 부은 돈은 30억 달러였다. 유엔인권헌장에 바탕 한 모범적 헌법을 만들어 주었고, 선거와 다당제 등 민주주의의 제도적 기반도 닦아주었다. 사실상 유엔의 보호국이었던 것이다.

성과는 대단한 듯 보였다. 첫 선거의 투표율이 90%에 육박했다. 유엔은 환호했다. 동남아의 가난한 소국마저 민주주의를 오래 갈망해 왔다며 제 논에 물을 댔다. 한창 도취되어 있던 무렵이기는 했다. 소련이 제풀에 무너졌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신세계 질서'를 제창하고, 민간의 어용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하던 무렵이다. '프라하의 봄'에 빗대어 '프놈펜의 봄'을 운운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동남아는 동유럽이 아니었다. 캄보디아는 폴란드도 남아공도 아니었다. 하벨이나 바웬사, 만델라가 없었다. 김대중도 없었고, 아웅산 수치도 없었다. 헌법은 허공을 맴돌았다. 신정부 수립 이후 썰물처럼 빠져나간 유엔을 대신하여 지상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훈센과 캄보디아 인민당이었다.

베트남이 이식한 일당 국가 체제 아래서 국가 권력은 마을 구석구석까지 침투했다. 그 조직 사업을 담당하던 이가 훈센이었다. 그래서 유엔이 하사한 민주주의 아래서도 능란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교육 수준이 낮은 민중들을 대상으로 때로는 뇌물로 때로는 협박으로 표를 긁어모았다.

캄보디아에서 선거란 훈센의 권력을 거듭 확인하는 '정치 극장'에 불과했다. 물론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과 사법 기관 등 국가기구를 총동원한 편법이 판을 쳤고, 야당에 대한 탄압도 무지막지했다. 일부 서방 언론에서 '사담 훈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캄보디아에는 이라크처럼 석유가 나지 않기에 자신의 운명은 후세인과는 다를 것이라며 미국의 위선을 조롱했다. 서구의 '민주주의 교조주의'를 마음껏 비웃으며 세계 최장수 총리의 기록을 거푸 갱신하고 있는 것이다.

훈센이 야당을 향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무기가 킬링필드에 대한 악몽이다. 인민당이 선거에서 패배하게 되면 재차 내전이 일어날 것이라며 공포심을 조장한다. 또 외국 자본이 일시에 빠져나가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며 겁박한다.

기실 프놈펜 시민들도 유엔의 진주를 환영했었다. 허나 인권이니 민주주의 때문은 아니었다. 달러에 환장했다. 2년간 캄보디아에 풀린 30억 달러는, 유엔 관련 인원들이 하루에 145달러씩 썼다는 말이 된다. 이는 당시 캄보디아인들의 1년 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달러 경제로 흥청망청하면서, 사회주의 시절과는 화끈하게 안녕을 고했던 것이다.

지금도 프놈펜에서는 자국 화폐인 리엘 대신에 달러가 더 널리 통용된다. 레닌대로 옆 러시안 마켓에서도 달러를 선호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ATM에서도 달러가 인출되어 당혹스러웠다. 화폐 주권일랑 좀체 괘념치 않는 모양이다. 즉, 훈센 통치 30년간 캄보디아는 이중적 속국이 되었다. 정치 군사적으로는 베트남에, 경제적으로는 해외 원조에 종속되어 있다.

하여 야당의 구호 또한 '독재 타도'나 '민주 수호'가 아니다. 반훈센은 곧 반베트남으로 이어진다. 2013년 대선이 상징적이다. 야당이 반베트남으로 대동단결하여 단일대오를 형성함으로써 훈센과 박빙의 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선거에서는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풍문도 들린다.

돌아보면 독립 이후 줄곧 그러했다. 캄보디아의 정치적 균열의 핵심에는 늘 베트남이 자리하고 있었다. 크메르 루주는 반베트남 좌파였으며, 론 놀은 반베트남 우파였다. 시하누크 국왕은 반베트남 중립파였다. 그럼에도 결국 친베트남 좌파였던 훈센이 권력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만큼 베트남의 영향력이 드셌다.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아울러 20세기 베트남은 대약진했다.

2013년 선거에서 반베트남 단일 전선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세대 변수가 결정적이었다. 역대 가장 젊은 선거였다. 유권자 950만 가운데 30대 이하가 350만이었다. 처음으로 투표하는 이도 150만을 헤아렸다. 1979년 이후 태어난 이들이 인구의 다수를 점해가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해 '크메르 루주'의 직접적 기억이 없는 세대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킬링필드의 학살과 폭정에서 캄보디아를 구해냈다는 훈센의 해방서사가 먹혀들지 않는다. 오히려 캄보디아 신세대들이 경험한 베트남은 자국의 독재자를 막후에서 지원하는 후견국이자 패권국이다.

그래서 제1야당의 이름 또한 '구국당'이다. '속국의 민주화'에서 '독립국의 민주화'로의 이행이 캄보디아의 시대정신이 된 것이다. 다음 대선은 2018년이다. 2013년보다 더 젊은 선거가 될 것이다. 못다 이룬 '2013년 체제'의 가능성이 한층 높다. '2018년 체제'의 도래를 기원하며, 캄보디아의 또래들을 응원한다.

그럼에도 캄보디아의 제2차 민주화가 크메르 루주의 실패를 답습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베트남과 담을 쌓고 벽을 치는 '주체 노선'만으로는 나라의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 오히려 동남아의 동서남북을 잇고 엮었던 앙코르제국의 유산을 생산적으로 복기할 필요가 있다. 마침 앙코르 제국의 연결망을 복원해내는 '앙코르 로드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남화일보>에서 읽었던 프놈펜-방콕 고속도로와도 연동되는 흥미로운 고고학 복원 사업이다. 다음 글에서 살피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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