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시원함, 7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4(토)∼5(일)일 제40강으로, 통영의 섬이지만 삼천포에서 가까운 수우도와 삼천포어시장과 노산공원의 박재삼문학관과 고성의 상족암 해변길을 걸으러 갑니다.
서양뿐만 아니라 한국의 바다에도 인어의 전설이 내려옵니다. 거문도 백도의 ‘신지끼’라는 인어는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인어처럼 긴 생머리의 미녀인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통영과 삼천포 사이의 섬 수우도에는 남자인어의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인어장군이라고도 불렸던 설운장군이 바로 그 남자인어입니다.
관군이 막아주지 못하는 왜구들로부터 섬 주민들을 지켜준 이가 바로 설운장군입니다. 수우도에는 장군의 사당도 있습니다. 수우도 해변의 숲을 따라 난 둘레길은 남해바다의 숨겨진 비경 중 하나입니다. 또 고성의 상족암은 선녀의 전설이 깃들어 있을 정도로 절경이고 2,000여 개의 공룡 발자국이 남아 있는 세계3대 공룡화석지 중 하나입니다. 7월 남해바다의 전설과 수억 년 전 공룡의 시대로 여행을 떠나지 않으시렵니까. ▶참가신청 바로가기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의 섬 수우도와 삼천포·상족암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한국 바다의 인어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의 영향 때문인지 사람들은 인어라고 하면 대체로 긴 생머리의 서양 인어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동양에서도 인어의 전설은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었다. <산해경>에는 용어, 능어, 제어 등 수많은 인어들이 등장한다. 한국 바다 곳곳에도 인어의 전설이 서려있다. 인천의 장봉도에는 그물에 걸려든 인어가 애처로워 놓아주었다는 어부의 목격담이 전해지고,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옥붕어란 인어 이야기가 나온다. 심지어 여수 거문도의 전설에는 인어공주를 닮은 긴 생머리의 여자 인어 ‘신지끼’까지 등장한다. 중국의 기서 <태평광기>에 등장하는 인어도 미녀다.
“바다의 인어는 사람같이 생겼는데 눈썹, 눈, 코, 입, 손톱이 모두 아름다운 여인이다. 살결은 옥같이 희고 머리털은 말꼬리처럼 치렁치렁하며 길이가 5~6척이다.”<태평광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자들의 미녀에 대한 판타지는 동일했던 모양이다. 과학적으로는 허황된 이야기일 뿐이지만 신화나 전설의 소재로 인어는 더없이 매혹적인 대상이다. 인어는 대체로 여성성을 갖는다. 인어의 목격자가 대부분 오랜 항해로 성에 굶주렸던 남자 선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새끼를 끌어안고 젓을 먹이는 듀공(dugon) 같은 바다 포유류를 인어로 착각했고 거기에 과장이 보태져 인어의 전설이 완성됐다.
그런데 드물게 남자인어에 대한 전설도 있다. 바빌로니아의 수신 ‘에어’는 남자인어였다. 한국바다에도 남자인어의 전설이 깃든 섬이 있다. 통영의 수우도가 그곳이다. 섬 지역 주민들을 살육하고 약탈하던 왜구들을 격퇴시켰다는 남해바다의 전설적인 영웅 설운장군. 수우도의 당집에는 설운장군이 수호신으로 모셔져 있다. 겨드랑이에 아가미가 달려 육지는 물론 바다 속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던 장군을 섬사람들은 인어장군이라 불렀고 하늘이 내린 영웅으로 숭배했다. 서해바다에서 임경업장군신이 그랬듯이 남해바다에서는 설운장군신이 절대적이었다.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았던 수많은 애기장수들은 자라기도 전에 무참히 죽임을 당했지만 설운장군만은 예외였다. 인어장군 이야기는 한국 바다의 <오디세이>였다.
수우도는 통영의 섬이지만 통영에서 직항하는 여객선은 없다. 삼천포항 수협선착장에서 하루 두 차례 정기여객선이 있다. 이 배는 통영의 사량도가 종점임으로 사량도에서 가는 방법도 있다. 오늘 수우도 바다는 더없이 고요하다. 늙어가는 섬. 섬의 주민은 대부분 노인들이다. 마을은 가파른 산비탈 아래 들어섰고 집들은 서로 어깨를 기대고 살아간다.
왜구를 물리친 설운장군, 역적의 누명을 쓰다
옛날 수우도에 늦도록 자식이 없는 부부가 살았다. 아내는 뒤늦게 아이를 가졌는데 열두 달 만에야 태어났다. 아이는 비범했다. 첫돌이 지나고부터 바다에서 헤엄을 치고 놀기 시작했다. 자라면서 아이의 온 몸에 비늘이 돋기 시작했다. 일곱 살이 되자 늑골에 물고기 아가미 같은 구멍이 생겼다. 그래서 아이는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바다 속을 헤엄쳐 다닐 수 있었다. 당시 남해안 일대 주민들은 왜구의 노략질에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었다. 관군은 왜구로부터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
아이는 훌쩍 자라 청년이 되었다. 어느 날 사량도 앞바다에 또 왜구들이 나타났다. 바다 속을 헤엄치던 청년은 수우도 은박산 꼭대기로 솟아올라 거대한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왜구들을 내쫓았다. 왜구들이 욕지도 쪽으로 빠져 나가자 청년은 또 욕지도 천왕봉으로 건너 뛰어가 내쫓았다. 왜구들이 국도 쪽으로 도망치자 국도 산꼭대기로 건너 뛰어 왜구들을 아주 몰아냈다. 그때부터 남해안 섬사람들은 청년을 설운장군 혹은 인어장군이라 부르며 우러렀다. 장군 덕에 섬사람들은 왜구의 침략을 받지 않고 편안히 살게 됐다. 차츰 설운장군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갔다. 풍문들 중에는 설운장군을 음해하는 이야기들도 있었다. 반인반어인 괴물이 남해바다를 휩쓸고 다니며 어선들을 괴롭혀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할 수 없다는 헛소문이 사실처럼 퍼졌다.
소문은 궁궐 담까지 넘어갔다. 왕은 수우도를 관할하는 호주판관(湖州判官)에게 그 괴물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호주는 지금의 욕지로 추정된다. 호주판관은 관군을 이끌고 설운장군을 잡으려 했지만 잡을 수가 없었다. 설운장군은 물속에서 보름씩 꼼짝 않고 숨어 있기도 하고, 수우도나 욕지도, 국도 같은 섬으로 번개같이 사라져버리니 어찌 잡을 수가 있겠는가. 조정에서는 지원군까지 보냈지만 도리가 없었다. 설운장군은 오히려 관아로 쳐들어가 호주판관의 부인을 납치해 국도에 숨겨두고 아내로 삼아버렸다. 부인은 임신을 하고 아이까지 출산했다.
아이가 생겼어도 부인은 틈만 나면 탈출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던 어느 날 장군이 잠든 틈을 타 아이를 통나무 속에 띄워 보내며 관군에게 연락을 했다. 관군이 들이닥쳐 장군을 생포했다. 설운장군은 한번 잠이 들면 며칠씩 계속 자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부인은 그 기회를 노렸던 것이다. 장군은 잠든 채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압송 도중 장군은 잠에서 깼다. 당황한 관군이 장군의 목을 잘라 죽이려 했으나 목이 떨어지면 다시 붙고 목이 떨어지면 다시 붙어서 죽일 수가 없었다. 그때 판관 부인이 잘린 목에다 메밀가루를 뿌리니 더 이상 목이 붙지 않았다. 설운장군은 마침내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다. 특별한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은 살려두지 않던 사회. 어쩌면 설운장군이 호주판관의 부인을 납치해서 제 부인으로 삼았다는 이야기는 모함일지도 모르겠다. 섬 주민들을 위해서 살았던 민중의 영웅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를 부도덕한 인물로 매도해야만 하지 않았겠는가.
정결해야만 출입 가능한 사당
설운장군이 숨을 거두자 다시 왜구들의 노략질이 시작됐다. 장군을 죽인 관군들은 왜구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수우도에 제각을 짓고 장군의 위패를 모셨다. 장군의 영혼이 왜구를 물리쳐주기를 바라며 정성껏 제를 올렸다. 보통 다른 섬들이 정월에 당제를 지내는 것과 달리 수우도에서는 시월 보름에 당제를 모신다. 장군이 죽임을 당한 날이 음력 시월 보름날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수우도 사람들은 장군의 제사를 잘 모시면 마을이 태평하고 풍어가 든다고 믿는다. 장군을 모신 사당은 지령사다. 지령사 사당 안에는 설운장군과 부인, 두 아이의 초상이 있고 그 좌우로 하인 2명의 초상이 걸려 있다.
“할바시를 엄청스레 크게 모싰어요. 할바시가 부락을 잘 되기로 해준께.”
수우도 경로당 앞 평상에 앉아 놀고 있던 할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할바시’ 설운장군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섬 지방에서는 여신을 할망 혹은 당산할매라 부르듯 남신은 할바시(할아버지)라 부른다. 지금은 삼년에 한 번씩 제를 모신다. 예전에는 해마다 제를 올렸지만 더 이상 해마다 제를 모실만한 여건이 못 되기 때문이다. 신앙심 깊은 노인들은 너무 늙었고 젊은 사람들의 신심은 예전 같지 못하다. 할머니들은 그 이유를 너무도 간명하게 정리 하신다.
“지 아비 제사도 잘 안 모실라고 하는 세상 아니요.”
그래도 벌써 몇 백 년을 이어온 당제다. 예전에는 당제를 보름 앞둔 시월 초하루부터는 외지 사람들이 섬에 들어올 수조차 없었다. 외지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었다. 임산부들도 섬 밖으로 내보냈다. 많은 섬들이 섬 안에 피막이란 장소를 두어 당제 기간 피신해 있게 했지만 수우도에서는 아애 섬 밖으로 내보냈으니 신을 모시는 일이 그만큼 더 엄격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임산부를 부정하다는 생각 자체가 여성 차별적이지만 당시는 그랬다. 임산부들은 당제가 끝난 뒤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설운장군을 모신 당집은 신성한 구역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무서워서 함부로 들어가지 못했다. 한 해 동안 집안에 상이 나거나 부정한 행실을 하지 않은 정결한 남자가 제주를 맡아서 제를 주관했다. 제주로 선택된 사람은 10월 초 하루부터는 최대한 깨끗이 해야 했다. 집에는 금줄을 처 놓고 외지인의 출입을 막았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목욕을 하고 되도록 말도 하지 않았다. 소변 한번 보고 와도 목욕을 해야 했으니 변소에 가지 않기 위해 먹는 것도 삼갔을 정도였다.
제물은 육고기는 일체 쓰지 않았고 바다고기만 썼다. 인어장군이 바다에 살았던 때문일까. 당제가 가까워오면 주민들은 삼천포시장에서 명태를 몇 상자씩 사왔다. 떡도 하고 갖은 나물도 해 올렸다. 명태를 사온 것은 제를 올리고 동네사람들이 다 함께 나눠 먹기에 명태가 최고였기 때문이다. 생명태에 무를 썰어 넣고 큰 솥에 끓이면 그렇게 맛날 수가 없었다. 당제 모시는 날은 동네잔치였다. 괭가리 뚜드리면서 밤새 놀았다.
수우도 노인들은 여전히 장군신이 두렵다
하지만 섬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늘 장군신을 두려워했다. 당에 모셔진 설운장군의 초상도 얼마나 무섭게 그려졌던지 한번 보기만 해도 기겁을 했다. 그런데 그 초상은 문화재 도둑이 훔쳐가 버렸다. 마을에서는 비가 새던 낡은 사당을 헐고 집도 새로 짓고 장군의 초상도 다시 그려 봉안했다. 장군의 얼굴도 예전보다 덜 무섭게 그려졌다. 이제 당제도 사당도 옛날만큼 신성하지 않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사당을 드나든다. 하지만 수우도 노인들은 여전히 장군신이 두렵다.
그래서 섬에 살면서 평생 동안 신당에 발 한 번 들여놓지 못한 분도 있다. 상을 당한 상주가 멋모르고 신당에 발을 들여놨다가는 무조건 벌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만큼 신성한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수우도 노인들은 사당에 가는 것을 꺼려한다.
“사당, 저는 아무나 못가요. 이 동네 사람들은 데나 개나 안 들어갑니다.”
나그네가 가보겠다고 하니 만류하신다.
“깨끗하면 들어가소. 아니면 가지 말고.”
부정한 데가 있으면 벌을 받을 수 있으니 들어가지 말란 말씀이다.
한때는 50가구 300여 명이 살던 수우도에 이제는 25가구 30여 명의 주민들이 산다. 대부분이 노인 독거가구이고 젊은 사람 8가구는 모두 배를 가지고 물고기도 잡고 양식도 한다. 다들 홍합양식을 하는데 소득이 크다. 많은 소득을 올리니 밖에는 수우도가 부자섬이라 소문이 났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그것이 잘못된 소문이라고 항변하신다.
“수우도에 부자만 산다고 헛소문이 났어요.”
젊은 사람들은 잘 살아도 노인들은 아무런 벌이가 없어 힘들게 살고 있다는 말씀이다. 더구나 요새는 멧돼지 때문에 ‘고메(고구마)’ 하나 심어먹기 힘들다고 하소연이다. 많은 섬들이 그렇듯이 이 섬도 노인들은 가난하고 노동력 있고 자본력 있는 젊은 사람들은 부유하다. 양극화는 섬이나 육지나 다를 바 없다. 비교 대상이 없으면 가난하더라도 행복할 텐데 비교 대상이 있으니 상대적 박탈감도 크다.
수우도의 산이 좋다고 이름이 나면서 주말이면 등산객들이 제법 많이들 찾는다. 그들은 대부분 삼천포에서 유람선을 타고 들어와 섬의 산을 한 바퀴 걷고는 바로 빠져 나간다.
“관광객 와도 아무 수입도 없어요. 즈그 묵을 거 다 해갖고 와서 유람선이 섬에 풀어놓으면 한 바퀴 쌩 돌고 금방 가버려요.”
배낭 가득 먹을 것을 짊어지고 오니 섬에서는 물 한 병, 소주 한 병 안 사먹는 사람이 태반이다. 관광객이 늘어도 섬에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오로지 이익은 유람선 선사에게 돌아갈 뿐. 무언가 대책이 있어야지 싶다.
수우도의 유일한 해녀
“고생 참 오지게 했습니다. 물 밑을 깃습니다.”
일흔 아홉 주상이 할머니. 은퇴한 노해녀는 51살 때 남편을 잃고 7남매를 혼자 먹이고 입히고 키워서 뭍으로 내보내 공부를 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다.
“돈은 10원도 없고 남은 건 골병뿐입니다. 그래도 자식들이 도와줍니다.”
여수가 고향인 남편은 한국전쟁 중에 사량도로 배를 타러 왔었다. 중매로 결혼을 하고 사량도에서 조금 살다가 수우도로 들어와 내내 살았다. 남편은 통영의 ‘오가다리’(멸치배)를 탔다. ‘이리야’(선두)였다. 선두란 멸치잡이 배에서 멸치를 삶는 직책이다. 그물을 올리는 선원들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았다. 살림을 책임지던 남편이 병석에 눕던 마흔여덟 살부터 아내는 늦깎이 해녀의 길로 접어들었다. 수우도의 유일한 해녀였다. 그녀 나이 51세 때 남편은 이승을 떴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7남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 뼈가 빠지도록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늦깎이 해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난히도 수영을 잘 했기 때문이다. 설운장군의 후손이라도 됐던 것일까. 어릴 적부터 물개처럼 바다 속을 누비며 자랐다. 수영만은 수우도 최고였다. 53살부터는 5년간 삼천포 해녀 배를 타고 다니며 돈을 벌었다. 그 후로는 쭉 수우도에서만 물질을 했다. 해삼, 전복도 따고 청각, 우무도 뜯고 문어랑 고동도 잡아다 팔았다. 그중 청각이 가장 큰 돈이 됐다. 청각 값이 워낙 좋아 한 사나흘 뜯으면 백만 원씩 벌기도 했다. 남자들이 덴마(전마선)로 며칠씩 고기잡이해서 팔아봐야 기껏 7만∼8만원 벌던 시절이었으니 큰 돈을 번 것이다. 그 덕에 7남매를 키웠다. 막내는 대학까지 보냈다. 수우도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벅수처럼 살았지. 눈물 꼴꼴나게 살았지.”
돌장승인 벅수가 통영지방에서 바보란 뜻으로도 쓰인다. 그렇게 고생해가며 자식들을 키웠으면서도 노해녀는 그저 “밥만 먹이고 옷만 입혔을 뿐 자식들한테 해준 게 없어”라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요새로 말하면 부잣집 개보다 못 먹여 키웠지.”
물질을 하지 않는 날엔 도둑놈꼴창, 해골바위 그 비렁(비탈)을 오르내리며 나물을 캐다 삼천포장에 팔았다. 방풍이나 기새(원추리)가 그렇게 많았다. 바다와 산을 오가고 밭에는 또 보리랑 고메(고구마)를 심어서 식구들 먹여 살렸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겨우내 쓸 땔감을 하러 산을 누볐다. 워낙 산을 잘 타서 염소란 별명도 얻었다. 그렇게 세월 보내다 보니 어느새 팔십이 눈앞이다. 무릎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더 이상 물질을 할 수 없게 됐지만 노 해녀는 그래도 칠남매가 다들 무사하게 살아줘서 고맙다. 자식 앞세우는 “험한 꼴 안보고 먼저 눈 감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다. 뭍이나 섬이나 어머니들은 평생을 자식 걱정뿐이다.
수우도에도 섬을 일주하는 둘레길이 있다. 길은 방파제 부근인 신애끝에서부터 시작된다. 인위적으로 만든 길이 아니고 섬사람들이 옛날부터 다니던 길 그대로라 자연스럽다. 그런데 지도에 그려진 몇몇 섬의 지명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백두봉이니 고래바위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그래서 수우도 안태봉(태를 묻은 고향에서 평생 산 사람)인 주상이 할머니들에게 옛 지명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런 지명들은 대부분 유람선 선장들이 붙인 것이란다. 고래바위는 정말 고래처럼 생겼다. 하지만 섬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은 도둑놈꼴창이다. 과거 해적들이 배를 숨기던 곳이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은 아닐까. 더 적당한 이름이 있다면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섬사람들이 부르던 옛 이름을 묻어버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지명이란 섬살이의 내력을 알려주는 살아있는 역사책이 아닌가.
세계3대 공룡유적지 고성 상족암
경남 고성군 하이면에 있는 상족암은 해식애의 암벽이 겹겹이 층을 이룬 해안절벽이다. 그 옛날 선녀들이 내려와 돌베틀로 옥황상제에게 바칠 금옷[錦衣]을 짰고 동굴 안에는 선녀들이 목욕했다는 웅덩이가 있다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로 천하의 비경이다.
상족암이 유명세를 탄 것은 상족암 주변에서 발견된 수백 개의 공룡 발자국 때문이다. 상족암은 미국 콜로라도주, 아르헨티나 서부해안과 함께 세계3대 공룡유적지로 인정받고 있다. 1982년의 학술조사로 무려 2,000여 개가 넘는 세계 최대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새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11호)도 있다. 상족암(床足岩)이란 지명은 절벽 아래에 해식동굴들이 숭숭 뚫려 있어 바다에서 보면 거대한 밥상다리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근 주민들은 발자국이 많다 해서 ‘쌍족암(雙足岩)’ 혹은 ‘쌍발이’라고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상족암(床足巖)은 소을비포(所乙非浦) 서쪽 15리 지점에 있다. 돌기둥 네 개가 있으며 바위가 평상 같다. 파도가 밀려오면 물이 그 밑을 지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근처에는 공룡박물관이 있는데 공룡 전신 골격 진품과 복제품, 익룡 전신 골격, 부조 화석, 일반 화석 등 수백 점이 전시돼 있다.
박재삼문학관을 찾아서
도쿄에서 출생해 삼천포에서 성장한 박재삼(1933∼1997) 시인은 한국 전통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 음색을 재현하면서 소박한 일상생활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애련하고 섬세한 가락을 노래했다. 그의 시는 슬픔이라는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실어, 그 속에서 삶의 예지와 감동을 전해준다. 삼천포어시장 부근 노산공원에 그를 기리는 문학관이 들어서 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 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을 보겄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가는,
소리죽은 가을강을 처음 보겄네.
(박재삼 시인의 <울음이 타는 가을강>)
섬학교 제40강, 7월 4(토)∼5(일)일, 수우도와 삼천포·상족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7월 4일(토)>
07: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0강 여는 모임
-삼천포 도착
-점심식사(삼천포 해물한정식)
-삼천포 출항, 수우도 도착
-수우도 걷기(약 4km)
선착장-신애끝-염습개-도둑놈꼴창(고래바위)-신선대-금강봉-은박산-동백군락지-서몰-큰골(몽돌해수욕장)-샘골-수우도마을-설운장군사당-선착장
-수우도 출항
-삼천포 도착
-숙소 도착, 방 배정((노블레스모텔, 다인실)
-저녁식사 겸 뒤풀이(다찌식 실비집에서 다양한 해물요리)
-자유시간 및 취침
<7월 5일(일)>
07:00 기상, 아침 산책
-아침식사(삼천포식 해물탕)
-버스 이동
-상족암 해안길 걷기(약 3km)
상족암 유람선주차장-박물관제2매표소-상족암-공룡테마파크앞-병풍바위(전망대)-맥전포항
-삼천포 박재삼문학관 방문
-점심식사(해물한정식)
-삼천포어시장에서 장보기
14:30 서울 향발. 제40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소지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제40강 답사 참가비는 25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사전예약 관계로 6월 29일까지 참가신청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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