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4석이 걸린 재·보선 결과를 놓고, 현재 야권 대선 후보 선호도 1위를 달리고 있는 130석 야당 대표에게 무례하고 지나친 요구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충분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치가 처해 있는 절박한 상황을 보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재·보궐 선거 참패는 야권 분열과 관계없어
불과 두 달 전에 바로 직전의 대선 후보(문재인 대표)가 직접 당권을 잡은 새 지도부가 출범했고, 세월호 참사 1주기와 성완종의 비자금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서 치러진, 흔히 여당의 무덤이라고 하는 재·보궐 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한 석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미 여러 분석이 잘 나와 있듯이, 이번 재·보선은 야당의 분열로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야당의 분열은 강화도 선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여당의 불법 대선 자금 의혹이 터져 나온 시점에, 인천을 재정 파탄으로 몰고 간 지역 연고도 없는 안상수 후보조차 이길 수 없었습니다. 야권 분열은 성남 선거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신상진 후보는 과반이 넘는 55%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습니다. 야권 연대가 아니라 단일 야당이 나와도 이길 수 없는 결과였습니다.
광주에서 천정배 후보는 조영택 후보를 20% 넘는 격차로 이겼습니다. 탈당과 야권 분열을 광주 선거 운동의 기조로 삼았다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조영택 후보 본인이 탈당의 장본인인데 말입니다. 조영택 후보는 바로 지난 총선에서 공천 과정에 불복해 무소속 출마하면서 "민주당은 유권자의 선택권을 무시한 꼼수를 부리고 광주를 마치 지도부의 '호주머니 속 노리개' 정도로 인식했다. 광주 시민을 얕잡아본 행태"라고 비난했습니다. 이러고도 이기기를 바랐단 말입니까?
이제 관악(을) 한 곳이 남았습니다. 여기를 보기 전에 먼저 묻고 싶습니다. 이미 세 곳에서 진 선거에서 관악 한 곳을 건졌다면 어땠을까요? 새정치민주연합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국민들은 야권의 분열을 바라지 않았다"고 의미를 부여했을 것입니다.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관악에서 야당 지지자들은 정동영이 좋아서 20%의 지지를 보내주었을까요? 오신환 후보가 1위를 달리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아닙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바로 저 선거 해석이 몸서리치게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에도 수없이 제1야당의 저런 아전인수 태도에 환멸을 느꼈고, 그 꼴을 또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도 관악(을)은 3파전이었습니다.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는 33.3%, 통합진보당 이상규 후보가 38.2%, 통합민주당이었다가 탈당한 무소속 김희철 전 의원이 28.5%를 얻었습니다. 두 야당 후보의 득표를 더하면 66.7%에 이릅니다.
이번에는 어땠습니까? 오신환 후보는 지난 선거보다 10%를 더 얻어서 43.8%로 승리했습니다. 정태호, 정동영 후보의 득표를 모두 합쳐도 54.3%에 불과합니다. 오신환 후보의 득표 자체가 관악(을)에서 보수 후보의 역대 최다 득표입니다. 이래도 분열이 패배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선거만 생각하는 의원들, 통제력 없는 당대표
국민들은 생각할지 모릅니다. 재·보궐 선거에서 4:0으로 졌으니 이제 야당이 깊은 반성을 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환골탈태하기 위해 뭔가 큰 변화를 시도하겠구나. 총선이 불과 1년 남았으니, 근본적인 개혁을 하겠구나 하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장담컨대,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의 국회의원들과 당 지도부는 이번 재·보선 결과를 놓고서 근심하기보다는, 일주일 뒤에 치러질 원내대표 경선에서 누구를 뽑을 것인가에 온갖 정신을 쏟고 있을 것입니다.
재·보궐 선거는 '남의 선거'고, 원내대표 선거는 '내 선거'이기 때문입니다. 원내대표가 '내 선거'인 이유는, 재·보선 참패 뒤 치러지는 원내대표 선거의 결과가 내년 총선에서 '내 공천'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보궐 선거가 끝났습니다. 새정치민주연합에서는 또 다시 진흙탕 계파 싸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앞으로 1년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공천 싸움의 시간입니다. 내 지역구, 내 사람을 챙기기 위한 이 싸움에서는 아군도 친구도 없습니다. 총선 공천을 앞두고 당권파인 친노를 견제하려는 다른 계파들과, 문재인 대선 후보를 비판하는 다른 대선 주자들이 당을 뒤 흔들 것입니다.
대선에는 관심이 없고 총선에만 목을 매는, 시쳇말로 '의원 놀이'에만 관심이 있는 이 현상은 이제 제1야당의 전통이 된 지 오랩니다. 문제는 문재인 대표가 이 난국을 잘 헤치면서 당을 총선 승리로 이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의 근거는 문재인 대표가 지난 10여 년간 해온 정치적 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재인 대표는 참 좋은 사람이고 좋은 시민이며 리더의 좋은 친구지만, 리더로서의 자질은 갖고 있지 않아 보입니다. 문재인 대표에게는 화합과 소통 또 비전이라는, 정치인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여러 장점들이 있습니다. 국정 경험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자질과 경험이 정치적 리더십으로는 연결되지 못했습니다. 본인의 정치력 부재가 가장 큰 원인입니다.
정치는 진심과 운명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김대중·노무현과 문재인의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배구보다 못한 정치
한국에서 남자 배구란 여러 팀이 경쟁하다가 마지막에 삼성화재가 우승하는 게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삼성화재는 무려 지난 7년 동안 우승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아니었습니다. 2년차 신생팀 OK저축은행이 삼성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OK저축은행은 안산을 연고지로 정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세월호 참사를 맞았고, 위안('We An'san)이라는 슬로건을 단 유니폼에서 광고를 없앴습니다. 김세진 감독은 공식적으로 분향소를 참배하고, 선수들에게는 안산 시민을 위해서 우리가 힘을 내자면서 팀을 이끌었습니다.
김세진 감독이 선임될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습니다. 선수 시절 스승들이 여전히 감독으로 있는 배구판에서 경험 부족이 드러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는 달랐습니다. 스승인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을 상대로 김세진 감독은 챔피언 전에서 3:0 완승을 거두었습니다.
물론 OK저축은행에는 '시몬'이라는 걸출한 용병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삼성화재에도 '레오'라는 선수가 있습니다. 차이가 있었던 것은 삼성화재가 시즌 내내 레오 중심의 경기를 한 반면, OK저축은행은 결정적인 순간에 시몬을 쓸 수 있게 아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OK저축은행이 창단 첫해 과감하게 송명근, 이민규, 송희채 같은 젊은 선수를 영입해서 잘 키워낸 데 있습니다.
세월호의 눈물을 닦아 주겠다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오해 받기 싫다면서 뒤로 물러선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OK저축은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김세진 감독이 젊은 선수들과 함께 안산의 슬픔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철옹성 같았던 삼성화재의 벽을 깨부수자, 배구판이 달라졌습니다. 강만수, 김호철, 문용관 감독이 물러나고, 강성형, 최태웅 같은 한 세대 이상의 젊은 감독이 선임되었습니다. 내년 배구판이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우리 정치는 어떻습니까? 선거란 여러 정당이 경쟁하다가 마지막에 새누리당이 이기는 게임이 아닙니까?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스스로 변화와 개혁을 포기하고, 준우승에 만족한 팀은 어디입니까? 준우승한 팀이 "3위 팀이 우리를 집중 견제해서 우승을 하지 못했다"고 하면 팬들이 맞장구를 쳐줄까요? 배구보다 못한 정치가 아닙니까?
계파의 수장은 모두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십시오!
정치는 실력의 장이기도 하지만, 시간과 운이 중요한 변수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마키아벨리조차 그런 변수들을 '포르투나'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을까요. 잔혹한 여신 포르투나의 변덕에 맞서려면, 그와 싸워 이길 수 있는 강한 '비르투'를 갖추어야 합니다.
2002년 노무현의 친구였던 문재인이, 15년 뒤인 2017년의 대선 후보가 되려면 15년간 축적된 정치력을 보여주었어야 합니다. 실패한 대선 후보에서 성공한 대표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내년 총선에서 문재인 대표의 지도력으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어야 합니다.
아쉽게도 이제 그 시기와 운이 지난 듯 보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문재인 대표는 더할 나위 없는 절호의 기회에서도 전패했습니다. 정치는 신뢰의 게임입니다. 리더십은 성공의 전례에서 나옵니다. 문재인 대표가 정치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뒤 새누리당과 싸워서 이긴 적이 있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문 대표가 앞으로 갑자기 탁월한 정치력을 발휘해서 내년 총선을 잘 이끌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기를 바란다면, 그것만한 난센스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문재인 대표가 지금 사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 야당의 비상대책위원회 체제가 어떤 돌려막기를 하면서 변화와 개혁의 걸림돌이 되어 왔는지는 두 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지금 거론되는 임기 1년의 원내대표 중에서 당대표를 겸직할 수 있을만한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결국 내년 총선은 문재인 대표가 치러야 합니다. 다만, 그 총선까지 당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은 스스로 무엇인가 내려놓을 때 생길 것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당 대표가 내 정치에서 마지막 직함이라는 선언이 그것을 가능케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노무현과 친노가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비단 문재인 대표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문재인 대표가 먼저 내려놓으면, 다른 계파의 수장들도 마땅히 욕심을 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계파의 수장들이 먼저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이 당의 체질을 개선하고 외연을 넓힐 수 있도록, 말 그대로 백의종군의 길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OK저축은행이 그랬듯이, 젊은 리더십을 앞세우고 젊은 인재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웃의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는 공감의 능력, 그 슬픔을 딛고 서서 무엇인가 이루어 낼 수 있는 책임감, 근본적인 수준의 변화. 이것 없이 야당은 총선도 대선도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뻔한 게임의 가장 큰 피해자는 바로 국민입니다.
문재인 대표님,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십시오. 그것이 야당도, 국민도, 그리고 노무현도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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