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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천년의 농다리 건너 김유신 만나다

5월 고을학교는 진천고을

짙은 봄빛으로 찬란한 5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19강으로, 예부터 살기 좋은 고을이라 ‘생거진천(生居鎭川)’으로 불리는 진천고을을 찾아갑니다. 진천고을은 일찍이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하여 쌀 생산지로 유명합니다. 너른 들녘과 함께 초평저수지, 백곡저수지 등 농사에 필요한 물을 준비해 놓았던 저수지를 둘러보고 진천과 얽힌 김유신, 금성대군, 정철 등의 삶에 대하여 알아보는 시간도 갖도록 하겠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진천고을의 명소 초평저수지 Ⓒ고을학교

고을학교 제19강은 5월 24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진천농다리→팔각정(초평저수지 조망)→금성대군 사당→정송강사→보탑사→점심식사 겸 뒤풀이→김유신 탄생지와 태실→길상사→진천종박물관→진천향교→서울 순입니다.

▲진천고을 답사 안내도 Ⓒ고을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19강 답사지인 진천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

충청도의 고을에 대한 수사로 ‘생거진천(生居鎭川) 사거용인(死居龍仁)’이라는 말이 전해져 옵니다. 진천지역은 예로부터 평야가 넓고 토지가 비옥할 뿐만 아니라 저수지 또한 많아서 가뭄과 물난리가 별로 없어 농사짓기가 편안하여 예로부터 인심 좋아 살기 좋은 고장이라 하여 ‘생거진천’이라 하였고 용인지역은 산과 물의 경치가 좋으며 산세가 순후하여 가문과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산소가 많기에 ‘사거용인’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진천은 유명한 쌀 생산지로 꼽힐 만큼 논농사가 활발히 이루어졌기에 <모찌는 소리> <모심는 소리> <논매는 소리> <논뜯는 소리> 등, 논농사의 과정에 따른 다양한 소리가 세분되어 전해집니다. 사설과 가락이 다른 지역 민요에 비해 신세 한탄과 같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내용보다는 교훈적이고 긍정적 내용이 많이 나오는 게 특징으로, 이는 ‘생거진천’이란 말을 형성해 낼 수 있었던 진천이 지닌 넉넉한 생활환경과 무엇보다도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진천사람들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의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쌀 생산지로 유명하여 그에 따른 제언(堤堰, 둑)이 발달하여 진천에는 저수지가 여럿 남아 있습니다.

초평저수지(草坪貯水池)는 미호천(美湖川) 상류를 막은 영농 저수지로 충북에서 가장 큽니다. 처음에는 인근 곡창 지대에 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농공단지가 들어서면서 본래의 기능을 잃고 충주호와 함께 충북 낚시터의 양대 산맥으로 유명해졌습니다.

백곡저수지는 동양에서 유일한 사이펀식 저수지(1949)였으나 80년대 초 저수지제방확장축조사업으로 사이펀 시설은 수몰되었습니다. 저수지가 완성되어 농지 이용률이 증대하고 경지정리로 영농기계화도 기할 수 있었으며 향어 양식과 함께 관광명소로도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기지제(機池堤)는 조선시대의 관개시설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현의 북쪽 40리에 있다. 주위는 562척 2촌이고, 길이는 282척, 너비는 243척, 깊이는 4척 5촌이다”라고 적고 있으며 지금의 규모는 대략 7,357㎡입니다.

상고척제(上古尺堤)는 <여지도서>에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둘레는 663척이고, 길이는 280척, 너비는 180척, 깊이는 4척 2촌이다”라고 하였으며 조선 후기 지리지의 기록에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그보다 앞서 축조되어 사용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방은 주변이 밭과 공장 부지로 바뀌면서 관개 시설로서의 기능은 축소되었습니다.

하고척제(下古尺堤)은 <여지도서>에 “현의 북쪽 15리에 있다. 둘레는 467척이고, 길이는 250척, 너비는 108척, 깊이는 4척 5촌이다”라고 하였으며 현재 제방 부분은 도로로 편입되고 상류 쪽은 메워져 관개시설로서의 기능은 거의 상실되었습니다.

상몽미동 제언(上蒙未洞堤堰)과 하몽미동 제언(下蒙未洞堤堰)은 덕산면 용몽리 안구말 동, 서에 있으며 순채(蓴菜) 자생지로 유명하며, 몽촌지, 상몽촌지라고도 부릅니다.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상몽미동 제언은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둘레는 865척 5촌, 길이는 378척, 너비는 172척, 깊이는 5척 2촌이다”라고 적고 있으며 현재는 관개 시설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하몽미동 제언은 달리 아래몽촌못이라 부르기도 하며 이곳의 지명을 몽촌(夢村)이라고도 하는데,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선비가 꿈에 잘못을 저질러 용왕의 미움을 산 용왕의 아들을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는 전설에서 연유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하몽미동제는 현의 북쪽 20리에 있다. 둘레는 674척 6촌, 길이는 273척, 너비는 268척, 깊이는 5척 1촌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이 태어난 진천에는 그의 영정을 봉안한 길상사가 있다. Ⓒ진천군

진천의 산줄기는 한남정맥(漢南正脈)이 충북 진천과 경기 안성의 경계를 이루며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 있고 그 남단 일부가 진천고을에 해당되는데, 북서부는 덕성산(德城山 519m), 서운산(瑞雲山 547m), 무제봉(武帝峰 573m)이 둘러쳐져 있고, 무제봉 남쪽으로 옥녀봉(玉女峰 456m), 서쪽으로 백석봉(白石峰 467m), 서남쪽으로 장군산(將軍山 435m) 등이 솟아 있습니다.

또한 진천과 천안의 경계에는 만뢰산(萬賴山 611.7m), 만뢰산 동쪽으로 태령산(胎靈山 421m)과 문안산(文安山 415m), 문안산 동쪽으로 봉화산(烽火山 415m)이 솟아 있습니다. 덕성지맥인 서운산에서 엽둔재(葉屯峙 344m)를 넘어서 남쪽으로 뻗쳐 이루어진 만뢰산은 이웃한 동쪽의 충주, 음성에서 진천을 거쳐 서쪽의 천안으로 뻗은 한남정맥 능선을 이루고 있어 북쪽으로 한강 유역과 남쪽으로 금강 유역을 갈라놓은 분수령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

동남부는 천안과 이웃하여 환희산(歡喜山 402m), 환희산 서북쪽으로 덕유산(德裕山 412m), 환희산 남쪽으로 국사봉(國師峰 360m)이 솟아 있고 옥성저수지 북쪽으로 양천산(凉泉山 350m), 국사봉 동쪽으로 불당산(佛堂山 246m), 증평과 이웃하여 두타산(頭陀山 598m)이 솟아 있으며 이들 산지 이외의 지역은 대부분 해발 고도 400m 이하의 구릉성 지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만뢰산(萬賴山 611m)은 고구려 때 지명을 본 따서 그대로 붙인 이름으로 추측되며 옛 지명으로는 만노산 또는 이흘산이라 불렀으며 산 정상 일원에는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옛 성터의 흔적이 남아 있고 정상에는 지금은 메말라버린 우물터가 있어 신라의 옛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주능선은 충북과 충남을 가르는 경계선으로 정상에는 한자 뫼산[山]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장승이 세워져 있으며 이 장승은 진천에서 가장 높은 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남쪽 능선에 기대고 있는 보련마을에는 연곡사 터에 연곡리석비(보물 404)와 보탑사 3층목탑이 있으며 연곡지는 겨울철 얼음낚시로 유명합니다.

두타산(頭陀山)은 진천군 초평면, 괴산군 도안면과 증평읍의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산 이름이 생기게 된 유래는 단군이 팽우에게 산과 내 등, 산천을 다스리게 했는데 마침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려 온 산천이 모두 물에 잠기게 되어 높은 곳으로 피난을 가야 할 처지에 이르자 팽우는 이 산에 머물게 되었고 산꼭대기가 섬처럼 조금 남아 있었다고 하여 머리두(頭), 섬타(陀)를 써서 두타산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진천의 상산8경 중의 하나인 고찰 영수암을 산자락에 품고 있으며 정상엔 삼국시대의 석성인 두타산성의 옛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 규모는 둘레 1km, 높이1.2m로 성내에는 두 개의 우물터가 있으며, 가끔 통일신라시대의 토기 편과 기와 조각 등이 발견되고 고려 시대의 유물이 이따금 출토되기도 합니다.

▲진천 보탑사. 황룡사 9층목탑을 모델로 쌓았다는 3층목탑(높이 42.71m)이 유명하다. Ⓒ진천군

예부터 인심 좋아 살기 좋은 고장

진천의 물줄기는 남북 방향으로 긴 타원형 분지의 중심부에는 미호천(美湖川)이 남쪽으로 흐르고, 미호천을 중심으로 백곡천(栢谷川), 초평천(草坪川), 보완천, 부윤천 등 미호천 지류들이 흐르고 있습니다.

진천은 고대시대부터 전략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기에 토성과 석성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토성은 대모산성(大母山城), 걸미산성(榤尾山城), 환희산성(歡喜山城), 국사봉산성, 갈월산성(葛月山城)이, 석성은 도당산성(都堂山城), 이을산성, 태령산성, 문안산성(文案山城), 두타산성(頭陀山城)이 있으며 시대적으로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 가장 많고, 도당산성 등 일부는 고려시대에도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진천 지역에 읍성이나 산성이 축조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모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토성으로서 진천의 치소(治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안 경작지에서 여러 점의 숫돌이 채집되기도 하여 선사시대 이래 오랫동안 경작이 이루어졌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으며 축성 연대는 대략 5세기 말로 짐작됩니다. 6세기 이후에는 산성의 기능이 상실되어 문안산성(文案山城)과 도당산성(都堂山城)에게 중요한 역할을 넘겼을 것으로 보이며 기록으로 보아 대모산성은 조선시대까지 토성의 형태가 완전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본성의 남문 안, 서쪽의 평지에는 본래 큰 연못이 있어 항상 물이 고이고 밭으로 이용할 당시에도 계단을 만들어 경작하였는데, 남벽을 넘어오는 적에 대한 방어와 우마의 급수용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성안의 우물물과 흐르는 물을 일단 큰 못 안으로 흘러들게 한 다음 남문 밑으로 만든 수구를 통해 성 밖으로 빠지게 하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걸미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포곡식 토성으로 해발 약 80m의 낮은 구릉지 야산에 위치합니다. 동쪽에 ‘덕문이들’로 속칭되는 넓은 들판과, 북쪽으로 백곡천(栢谷川)을 사이에 두고 대모산성(大母山城)과 마주보고 있으며, 서남쪽으로는 도당산성(都堂山城), 문안산성(文案山城), 소을산 봉수대 등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습니다. 토축(土築)의 성지(城址)는 북쪽의 능선을 따라 약 100m 정도만 남아 있는데 그밖에 문지(門址)와 수구(水口) 등의 시설은 위치조차 찾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환희산성은 축조 경위 등의 연혁은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하며 환희산(402.3m) 정상부에 있는 테뫼식의 토축 산성입니다. 북쪽으로는 지장골 고개 건너 덕유산(德裕山)이 마주보이며, 진천에서 태랑역을 거쳐 병천과 목천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의 요충지입니다.

국사봉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인근 주민이 국사봉에 둥근 보루를 쌓고 난을 피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으며 정상부에서 내려다보면 사방이 조망되는데, 이러한 지형적 특성으로 진천의 남서쪽, 즉 천안 방면을 방어하기 위하여 신라시대에 축조한 산성으로 추정됩니다.

갈월산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안성인, 홍계남이 의병 수천 명을 모집하여 이 성을 중심으로 싸워 왜군을 대파하였던 곳입니다. 조정에서 이 소식을 듣고 홍계남을 수원부사로 임명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성은 신라시대에 변방을 지키기 위해 자리 잡은 성으로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을 막기 위해 진천의 서방을 수비했던 요새지로 보입니다.

도당산성은 축성 위치와 출토 유물로 보아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측되며 넓은 평야 지대를 이루는 진천의 외곽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만노군의 치소(治所)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둘레는 1,836척이며 성 안에 우물 2개소가 있었다고 하나 성은 이미 폐허가 되었습니다.

현재 길상사의 남쪽에 ‘약수’라는 이름으로 잘 정화된 우물이 있는데 이곳이 옛 우물터의 하나로 추정되며, 또 한 곳은 성내의 중앙인 길상사 뒤쪽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길상사의 신축으로 자취가 사라졌으며 일설에는 김유신(金庾信 595~673)의 출생지 또는 유소년 시절의 연무장(鍊武場)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만노산성은 문헌 기록에 만노성(萬弩城), 만뢰성(萬賴城), 이을성 등으로도 나타나는데, 현재는 만노산성 또는 만뢰산성으로 불리나 조선시대의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표기된 이을산성이라 칭하는 것이 정확할 것으로 보입니다.

축조에 대한 정사의 문헌 기록은 없으나 삼국시대의 토기편, 신라시대의 기와편, 고려시대의 그릇 조각과 기와편이 수습되고 있어서 삼국시대 말기부터 고려시대, 병자호란 때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의하면 김유신의 아버지인 김서현(金舒玄)이 태수(太守)가 되어 백제에 대항할 때 만뢰산에 만노산성을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석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1.2㎞이고 안에 우물이 1곳 또는 2곳이 있었는데 성은 이미 폐하였다고 합니다.

태령산성은 테뫼식의 석축 산성으로 <문화유적총람>에는 “태봉에 있는 석성지로 둘레 215m의 산성이다. 자연석으로 축성하였는데 지형의 고저에 따라 경사가 심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곳은 경사가 약한 곳으로, 신라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추측되며 태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성내에 태실지라는 유지가 있으며, 김유신 장군의 태를 묻은 태봉이라는 설이 전해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안산성은 삼국시대에 이미 축조되어 주로 진천의 남쪽 방면을 방어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문화유적총람>에는 “진천읍 서남쪽 4㎞에 위치한 문안산에 있는 석축으로 된 성지이며, 둘레가 약 1,200m에 달하였으나 대부분 붕괴되었다. 어느 시대에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타산성은 삼국시대의 ‘도서성’으로 비정하기도 하는데 도서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만노군(萬弩郡), 즉 지금의 진천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선 후기에 김정호(金正浩)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두타산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장군 실죽(實竹)이 도서성을 쌓고 백제군을 막았다고 하는데 실죽은 신라 21대 소지왕 때인 486년(소지왕 8)에 이찬으로 장군이 되어,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과 청산(지금의 옥천)의 굴산성(屈山城)을 고쳐 쌓았으며, 494년(소지왕 16)에는 청천전투에서 고구려 군과 맞서 싸운 인물로서 이 무렵에 두타산성을 축성하는 데에도 관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두타산성은 높이 약 1.2m, 남북 약 300m, 동서 약 200m, 둘레 약 1,200m의 규모로서, 우물터가 있으며, 천연의 암반 위에 축조된 석축이 일부 아직도 남아 있으며 서쪽 성벽은 이중으로 된 부분이 있어서 서쪽의 최고봉을 내성으로 한 이중 구조처럼 되어 있고, 가장 멀리까지 조망되는 요새지를 이루고 있습니다.

봉화산(烽火山) 봉수(烽燧)는 진천에 남아 있는 유일한 봉수로 본래는 소을산(所乙山) 봉수라 불렀습니다. 남쪽의 청주 거질대산(巨叱大山)에서 신호를 받아 북쪽의 음성 망이산(望夷山) 봉수로 연락을 취하던 간봉이엇습니다. 봉화산은 삼국시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시되어 온 곳으로 서쪽으로는 문안산성(文案山城), 북쪽으로는 도당산성(都堂山城)이 있는 요충지에 위치해 있으며 출토 유물의 시대 분포가 고려에서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인좌의 난 이후 왕의 특명으로 1731년(영조 7) 이곳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조선 초기 진천의 호구는 총 550호이며 인구는 1,923명이었고, 이 중 군정(軍丁)은 시위군 58명, 진군 10명, 선군 213명, 총 28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장양(長陽), 퇴량(堆糧) 등 2곳에 역(驛)이 설치되었으며, 봉수(烽燧)는 전국 5개 노선 가운데 제2거의 간봉(間烽)에 딸린 소을산(所乙山) 봉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읍치구역의 유적은 남아 있지 않고 향교만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진천향교(鎭川鄕校)는 조선 태조 때 창건하였다고 하나, <충북향유회집(忠北鄕儒會集)>에는 고려 충숙왕 때 창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고려시대에 설치되었던 지방 교육기관이 조선 초기에 재정비된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진천향교는 대성전과 동무·서무, 내삼문, 명륜당, 풍화루(風化樓), 교직사(校直舍), 내삼문, 홍살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대성전과 명륜당이 병렬적으로 배치된 좌학우묘(左學右廟)의 구조로 되어 있고 또한 외삼문에 해당하는 풍화루가 2층 누각 건물로 되어 있는데 향교 건축에서 외삼문을 누문으로 만든 것은 극히 드문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송강 정철의 위패를 봉안한 정송강사 Ⓒ진천군

금성대군과 정철의 사당

진천에는 금성대군과 정철의 사당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 사우(祠宇)는 초평면 용기리에 세거하던 금성대군의 후손들이 1740년(영조 16)에 창건하였고, 사우에 ‘청당사’라는 편액을 달았으며 내부 중앙에 감실을 설치하고 그 안에 위패를 봉안하였고 정면에 삼문을 세웠습니다.

금성대군은 세종의 여섯째 왕자로 이름은 이유(李瑜)이며 1456년(세조 2) 사육신에 의한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경북 순흥에 안치되었으며, 순흥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1457년(세조 3) 사사되었으나 1738년(영조 14)에 신원되었습니다.

정송강사(鄭松江祠)는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신원리에 있던 정철의 묘를 1665년 송시열(宋時烈)이 송강의 후손 정포(鄭浦)와 상의하여 지금의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어은골 환희산(歡喜山) 중턱으로 이장하고 지은 사당으로 홍살문, 외삼문인 문청문(文淸門),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과 '송강사(松江祠)'라는 편액을 단 사당과 신도비, ‘정송강사중건사적비’와 ‘송강기념관’이 있으며 기념관에는 정철의 유품인 은배(銀杯), 옥배(玉杯), 용연(龍硯), 친필 편지, <연행일기(燕行日記)> <송강집(松江集)> 1~7집, <송강가사(松江歌辭)>(성주본), <송강집(松江集)> 판목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은(漁隱)이란 지명의 유래도 묘소와 관련이 있는데, 송시열이 묏자리를 구하다 이곳의 지형을 보고 고기가 숨어 있는 모습과 흡사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며 정철의 사후 담양 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과 경남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습니다.

진천에 남아 있는 누정(樓亭)은 식파정(息波亭), 백원정(百源亭), 망북정(望北亭)이며 터만 남아 있는 곳은 절정(節亭) 터, 노은정(老隱亭) 터, 쌍오정(雙梧亭) 터, 소강정(小江亭) 터 등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식파정의 경우 시단적 성격이 강하고, 그 밖의 것은 특정 가문과 관련되어 건립되었는데 망북정과 절정은 경주김씨와 강릉김씨가 세거한 유허지적 성격이 강하고, 백원정과 노은정은 평산신씨와 연결되며, 쌍오정은 경주이씨와 관련이 있는 누정이었습니다.

식파정은 1616년(광해군 8) 이득곤(李得坤)이 두건리 앞 냇가에 세운 정자입니다. 1983년 백곡저수지를 확장하면서 두건리가 수몰되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으며 처음 정자를 세울 당시의 두건동은 시인 묵객들에게 무릉도원의 절경을 연상하게 하는 독서지소(讀書之所)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정자 이름은 “사람의 마음은 물결과 같아 바람이 일면 욕랑(慾浪)이 이는 것이니, 마음의 욕랑을 잠재우도록 양성한다”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득신의 호이기도 합니다.

김득신(金得臣)이 <식파정중건기(息波亭重建記)>를 썼고,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봉암(鳳岩) 채지홍(蔡之洪),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熱) 등 22명이 지은 식파정 제영(題詠)이 <식파정시문집(息波亭詩文集)>에 전합니다.

백원정은 백곡저수지 근처 낮은 언덕 위에 있으며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신잡(申磼)이 세종조의 문신이자 효자로 이름난 김덕숭(金德崇)을 추모하여 백원서원(百源書院)이라는 사당과 함께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 지었다고 합니다. 그 이름은 ‘효는 백행(百行)의 근원’이라는 데서 따온 것이며 소실되었던 것을 1958년 김덕숭의 21세손인 김동휘(金東輝)가 김덕숭이 잉어를 잡았다는 여계소(女溪沼)의 동쪽 절벽 위에 다시 건립하였습니다.

망북정은 조선 성종 때 숭의전참봉(崇義殿参奉)을 지낸 김자(金磁)가 사직한 뒤 낙향하여 처음 지었습니다. 정자 내부에 걸려 있는 안형렬(安亨烈)이 쓴 ‘망북정 중건기’에 의하면 본래의 정자가 멸실됨에 따라 인조 때 증손인 김내현(金鼐鉉)이 재건하였고 그 9세손인 김보제(金寶濟)가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정자의 이름은 인조 때 당파싸움이 치열해지자 벼슬길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내현이 언제나 임금의 은혜를 생각한다는 데서 붙인 것으로, 김내현은 망북정이라는 액자를 건 뒤 날마다 정자에 나와서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하면서 임금을 그리워하였고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노은정은 진천의 평산신씨 입향조(入鄕祖) 신잡(申磼)의 후손 정묵재(靜黙齋) 신협(申俠)이 건립한 정자로 신협은 노은정 앞에 조그마한 연못을 판 후 시냇물을 끌어들여 연꽃을 심었다고 하는데 이후 노은정은 신협의 후손인 신현복(申鉉福)의 아버지 대에 없어지고 현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노곡마을(논실마을)은 평산신씨의 입향조인 신잡이 서울에서 낙향하여 거주하던 곳입니다. 현재는 신잡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인 노은영당(老隱影堂)이 있고 마을 뒷산에는 신화국(申華國), 신잡, 신경희(申景禧) 등 평산신씨 문중의 묘소가 있으며, 그 주변에는 신헌 고택(申櫶古宅), 백원서원(百源書院) 터 등 평산신씨와 관련한 유적들이 집중 분포해 있습니다.

쌍오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 경주이씨 이시발(李時發) 후손인 강화유수를 지낸 이인엽(李寅燁)이 낙향하여 세거지인 초평 양촌리에 지은 정자입니다. 이후 이인엽은 천여 권의 서적을 비치하여 후진들을 많이 양성하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을 뿐이며, 서고에 있던 많은 책들은 망실되어 전하지 않고 있으며 쌍오정이란 이름은 이인엽의 할아버지인 이시발의 호, 벽오(碧梧)와 증조부 이대건(李大建)의 호, 오촌(梧村)에서 따온 것이라 합니다.

김유신의 생가와 태실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가락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후손으로, 그가 태어난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 계양마을에는 생가(生家)가, 그 뒤쪽 태령산(461.8m) 정상에는 태실이 있고 생가의 동북쪽 산비탈에는 태수 관저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연보정이라는 우물이 있으며, 김유신이 무술 연습과 말달리기를 했다고 전해오는 치마대도 있습니다.

길상사(吉祥祠)는 김유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신라 진평왕 때 만노군 태수 김서현(金舒玄)의 아내 만명(万明)이 아이를 밴 지 스무 달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을 유신이라 하였다. 태를 현의 남쪽 15리에 묻었는데, 화하여 신(神)이 되었으므로 태령산이라 하였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두고 나라에서 봄가을에 향(香)을 내리어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에서도 그대로 따라 행하였다. 본조 태조 무인(戊寅)에 이르러 비로소 국제(國祭)를 정지하고 소재관(所在官)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 속칭 태산(胎山)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사당이 불타 없어졌다가 1851년(철종 2) 정재경, 박명순(朴命淳) 등이 백곡면에 죽계사(竹溪祠)를 다시 세우고 조감(趙感)과 함께 김유신의 위패를 봉안하였으나 1864년(고종 1)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866년(고종 3) 벽암리 소흘산(所訖山) 아래 서발한사당(舒發翰祠堂)을 다시 세웠으나 1922년 대홍수로 무너진 것을 1926년 후손 김만희(金万熙)의 주선으로 지금의 자리인 벽암리 도당산성(都堂山城) 안에 길상사를 건립하였습니다.

홍살문과 본전인 흥무전(興武殿)을 비롯하여 관리사, 내삼문, 협문 등 모두 6동의 건물이 배치되어 있고 사당 안에는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영정이 있으며 뒤뜰에는 1957년 세운 흥무대왕신성비, 안뜰에는 1976년에 세운 김유신장군사적비, 입구에는 길상사중건사적비 등이 있습니다.

진천농교(鎭川 籠橋)는 진천읍을 관통하는 백사천과 이월면을 적시는 덕산 한천천이 합류해 흐르는 백곡천에 놓인 돌다리로 농다리, 수월교라고도 하며 지네를 닮았다고 지네다리라고도 불립니다. 조성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가 없으나 삼국시대 김유신 장군의 부친 김서현 장군이 군사적 목적으로 놓았다는 설과 구곡리 출신 임연 장군이 고려 후기에 고향인 세금천에 놓았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진천농교는 본래는 28수(宿)를 응용하여 28칸으로 만들어졌으나 일제강점기 때 3칸이 유실되어 25칸만 남아 있다가, 2008년 8월 15일에 28칸 전부를 복원하였으며 길이는 93.6m, 너비는 3.6m, 두께 1.2m, 교각 사이의 폭 80㎝ 정도의 규모입니다. 농교의 특징은 교각의 모양과 축조 방법에 있는데 돌의 뿌리가 서로 물려지도록 돌만으로 쌓았으며 교각은 대체로 일정한 모양을 갖추고 있고, 폭과 두께가 상단으로 갈수록 좁아지고 있어 물의 영향을 덜 받게 하기 위한 배려를 하였습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19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사전예약 관계상 5월 19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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