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새해군요^^ 1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34강은 <새해특집>으로 2(금)〜4(일)일, 2박3일로 통영 앞바다의 따뜻한 섬 장사도와 추도로 향합니다. 아울러 통영의 깊은 겨울맛과 멋을 함께 즐깁니다.
섬학교 제34강 <새해특집>은 1월 2(금)〜4(일)일, 2박3일로 진행됩니다. 첫째 날 서울을 출발, 통영에서 점심식사 후 거제도 가배항에서 아름다운 해상공원 장사도로 향합니다. 장사도 탐방 후 통영으로 돌아와 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제철 해산물 요리의 향연으로 첫날을 장식합니다.
둘째 날은 물메기덕장으로 유명하며 비경으로 꼽히는 추도로 향합니다. 추도 일주 탐방을 마치고 미륵도의 이름난 달아전망대에서 한려수도의 풍광을 감상한 후, 감동적인 바다 풍경과 만날 수 있는 삼칭이해안길을 걷습니다. 셋째 날은 미륵도입니다. 마치 선계를 방불케 하는 미륵산과 법정스님이 출가했던 미래사, 치유의 숲 편백숲을 걸으며 새해 아침 따뜻한 남도의 감동을 마음속에 새깁니다.
섬학교 제34강 답사 참가비는 35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배운임, 2일 숙박비, 7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장사도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사전예약 관계상 12월 29일까지 참가신청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장사도는 신드롬을 일으켰던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던 통영의 섬입니다. 외계인 도민준(김수현 분)이 지구 여자 천송이(전지현 분)에게 프로포즈를 했던 해상공원 장사도는 10만 그루의 동백나무와 1,000종의 식물, 천연기념물 팔색조가 사는 그야말로 해상낙원입니다. 또한 통영 최고의 겨울 별미는 물메기국이라 하는데, 추도는 그 물메기의 본고장입니다. 강원도 황태덕장처럼 추도의 물메기덕장은 겨울에만 볼 수 있는 통영 섬의 진풍경입니다.
아울러 통영의 깊은 멋과 맛이 배어 있는 미륵산과 편백숲, 삼칭이해안길을 걷습니다. 법정스님이 출가했던 절이 있는 미륵산과 1만여 평의 편백숲과 4킬로미터를 내내 푸른 바다를 보면 걸을 수 있는 삼칭이해안길까지, 새해 아침 섬학교는 내내 감동적인 풍경과 만날 수 있습니다. 한겨울에도 중부지방보다 10도 이상 따뜻한 남국의 섬들과 통영에서의 2박3일.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새로운 한해를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지요.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신년특집> 장사도·추도, 그리고 통영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장사도]
<별에서 온 그대>도 반한 섬
장사도(長蛇島)는 본래 13가구 83명의 주민들이 살던 낙도였다. 진배미 혹은 장배미라고도 했다. 당시 섬에는 학생 23명의 작은 분교와 교회당도 있었다. 1970년대 장사도 분교의 염소선생 이야기는 <낙도의 메아리>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72년 3월, 31세의 옥미조 선생이 분교에 부임했을 때 주민들은 미역 같은 해초나 말려서 팔 뿐 가축을 기르거나 농토를 거의 일구지 않았다 한다. 가축을 기르지 않았던 것은 장사도란 이름이 뱀을 뜻하고 ‘기(氣)가 센 섬'이라 가축을 기르면 안 된다는 유감 주술이 유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옥선생은 스스로 흑돼지를 사다가 잘 키워서 주민들에게 보여주었고 덴마크의 ‘달가스운동’을 본떠 섬의 야산을 개간해 밭을 만들자고 호소했다.
결국 젊은 선생의 열의에 감동받은 주민들이 밤낮으로 야산을 개간해 1년 만에 4h의 옥토를 일구었다. 옥선생은 개간한 밭에 감자와 고구마, 보리 등 식량뿐만 아니라 수익성이 있는 양파도 심게 했다. 집집마다 돼지를 기르게 했고 갯벌에 조개 양식장을 만들어 많은 소득을 올리게 했다. 주민들의 소득이 높아지자 장사도분교의 저축이 목표액의 6,000%를 넘겼다고 한다. 부임 2년째인 73년 2월 초순에는 옥선생과 마을주민들의 손으로 배를 접안 할 수 있는 선착장까지 만들었다. 결국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유현목 감독에 의해 <낙도의 메아리>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됐다.
원주민들이 떠난 섬에 해상공원이 들어선 것은 2011년 12월이다. 섬에는 10만 그루의 동백나무와, 후박나무·구실잣밤나무·참식나무·까마귀쪽나무 등의 상록수림이 울창해 원시림을 방불케 한다. 또 섬은 천연기념물 팔색조와 풍란, 석란 등 1,00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하는 식물원이기도 하다. 폐교와 섬집이 복원되어 있고 20개 코스의 정원이 있다. 장사도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 바다와 섬들의 풍경은 숨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추도]
이름난 물메기 섬
겨울 추도는 온통 물메기 세상이다.
"어찌 추도 왔으꼬?"
"물메기가 많이 난다해서 구경 왔습니다."
"아, 그래 왔습니까."
통영시 추도(楸島) 미조마을 부둣가, 노인 한 분이 통발 그물을 손질하고 계신다. 노인은 물메기 잡는 통발 그물이 찢어진 것을 이어붙이는 중이다. 추도는 통영에서도 이름난 물메기의 고장이다. 통영 지방에서는 물메기국을 겨울 해장국의 으뜸으로 친다. 마른 메기는 잔치음식의 대표다. 전라도 잔칫상에 홍어가 빠지면 차린 것 없단 소리를 듣듯이 통영의 잔짓집에서는 마른 메기찜이 빠지면 '안꼬 없는 찐빵'이다. 그 통영에서도 추도는 대표적인 물메기 섬이다.
추도 어선들은 모두가 통발로 물메기를 잡는다. 다른 지역의 어선들은 대부분 플라스틱 통발을 쓰지만 추도만은 여전히 전통적인 대나무 통발 어법을 고수하고 있다. 물메기를 잡는데 썼던 대나무 통발을 손질하는 노인. 노인은 오랜 세월 물메기 잡는 어부로 살았다.
물메기의 표준어는 꼼치다. 꼼치는 동서남해 모든 바다에서 난다.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이다. 동해에서는 곰치·물곰, 남해에서는 미거지·물미거지, 서해에서는 잠뱅이·물잠뱅이 등으로 칭한다. 통영에서는 흔히 '미기' 혹은 ‘메기’ ‘물메기’라 부른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온다. 12월에서 3월까지의 물메기가 맛있는 것은 산란을 위해 살을 찌우기 때문이다. 보통 수명은 1년 남짓이다. 대부분 산란 후 죽는다.
늘그막에 어부생활을 은퇴한 노인은 이제 통발 그물 손질하는 일이 소일거리다. 강만식(80세) 할아버지. 장갑을 끼어도 손이 시린 12월 중순. 엄동의 한복판에 찬 바닷바람 맞으며 노인은 맨손으로 그물을 깁는다. 장갑을 끼고는 바느질을 할 수 없는 까닭이다. 노인의 손은 마른 가죽처럼 질기고 두텁지만 사람의 손인데 어찌 시리지 않겠는가.
"내가 본토배긴데 할아버지 대부터 배운 기술이 그만 메기잡이 기술이요. 문어잡이 기술이요."
노인의 할아버지가 추도에서 물메기와 문어를 잡았고, 노인의 아버지도 물메기와 문어를 잡았고, 노인도 물메기와 문어를 잡았다.
"추도는 그때도 멘 메기였소."
살이 타락죽처럼 살살 녹는 최고의 술국
통영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옛날에는 물메기를 생선 취급도 않고 버렸다는 소리들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노인의 증언처럼 물메기잡이는 옛날부터 이어져온 통영 지방의 전통어업이다.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물메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잡히면 버리는 하찮은 물고기가 아니라 술병까지 고치는 명약으로 대접받았다.
"고기 살은 매우 연하다. 뼈도 무르다. 맛은 싱겁고 곧잘 술병을 고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우리나라 호남 부안현(扶安縣) 해중에 수점(水鮎, 물메기)이 있는데, 살이 타락죽(찹쌀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했다. 옛 기록들이 아니더라도 물메기국은 그야말로 해장에 최고다. 물고기들이 흔하던 시절에는 지금처럼 귀한 대우를 받지는 못했겠지만 물메기 또한 어류의 가계에서 제법 족보 있는 물고기였던 셈이다.
추도에서 태어난 노인은 어린 시절부터 뱃일을 하며 자랐다.
"쪼맨할 때부터 뱃일했어요. 학교도 못 댕기고. 살기가 딱해서."
노인이 어릴 때도 추도에서는 물메기가 많이 잡혔다. 문어단지로 문어도 잡았다. 노인은 소년시절 배에서 밥을 짓는 화부로 어부생활을 시작했다. 오랜 세월 남의 배만 탔다.
"넘의 집살이만, 순 넘의 집살이만..,"
그러다 나중에는 돈을 모아 동네 사람 한 명과 동업으로 물메기잡이 배를 운영했다."그때는 메기 잡아봐야 돈도 안됐어요. 이때까지 살아나는 역사가 이래요. 요샌 세상이 좋아져서 경매도 하고 메기를 잡아도 돈이 되는 기라."
노인은 남들보다 조금 이른 칠십 살 때 뱃일을 은퇴했다. 고된 뱃일로 얻은 허리 병 때문이었다.
"일을 너무 많이 해갖고. 척추뼈가 닳아 없어져 버렸어. 수월케 살아온 사람들은 팔십 되도 멀쩡한데."
이제는 더 이상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지 않지만 노인은 여전히 손에서 어구를 놓지 못한다. 조업에서 돌아온 어선들의 대나무 통발을 손질해 주는 것이 일과다.
“내야 뭐 손운동 한다고 꼼지락꼼지락 하지. 내가 하고 재면 와서 쪼깬식 거들어 주지. 가만히 있으면 지겨버서. 점심 때 되면 집에 가서 요기도 좀 하고. 춥고 손 시리면 집에도 있다오고."
노인은 운동 삼아 쉬엄쉬엄 통발 손질을 하신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겨울 추위 속에서 맨손으로 하는 작업이 어찌 고생스럽지 않겠는가.
빨래보다 물메기를 더 많이 말리는 겨울 추도
새벽에 조업을 나갔던 어선들이 점심 무렵이면 통발을 걷어서 귀항한다. 오늘 추도의 물메기잡이 배들은 모처럼 만선이다. 어선에서 물메기를 내리면 동네 여인네들은 물메기를 손질한다. 물메기의 등을 따서 내장과 알, 아가미 등을 꺼낸다. 아가미와 알은 젓갈을 담고 몸체는 몇 번이고 민물에 깨끗이 씻어낸 뒤 건조장으로 보낸다. 조기나 민어 같은 생선들은 손질한 뒤 소금 간을 해서 말리지만 물메기는 북어나 황태처럼 소금을 뿌리지 않고 민물에 씻어서 바로 말린다.
"메기는 바닷물에 씻으면 맛이 없어요. 짭아서 간을 하면 못 먹어요."
동네 사람들은 물메기를 손질해 준 뒤 품삯을 돈이 아니라 물메기로 받는다.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전통이다. 아마도 물메기가 현금으로 바로 통용될 수 있기 때문에 이어져온 풍습이지 싶다.
추도는 물이 좋기로 유명한 섬이다. 산에 나무도 울창하다. 가래나무가 많았다 해서 가래 추(楸)자를 써 추도다. 추도 희망봉 꼭대기에는 드넓은 고원이 있다. 옛날에는 고구마밭이나 보리밭으로 활용했었지만 지금은 묵정밭이 되었다. 희망봉 고원으로 빗물이 스며들어 9부 능선에서 물이 솟구친다. 용천수다. 산에서 솟아나 흐르는 염기가 전혀 없는 추도의 물은 달디달다. 그래서 추도 물로 위장병을 고쳤다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윗새미, 동서 아래새미 3곳의 우물에서 물이 펑펑 솟아났다. 가뭄이 아무리 심해도 급수선이 들어온 적이 없다. 물 하나만은 최고의 부자섬이었다. 섬에 물이 풍족한 것은 축복이다. 물이 많으니 ‘논농사'도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추도 사람들은 "보릿고개 시절 쌀밥 먹은 섬사람 추도밖에 없다"고 한다.
추도 사람들은 그 좋은 물로 씻어 말리니 추도 메기가 다른 지역 메기보다 더 맛있다고 믿는다. 맛있으니 추도 메기는 다른 지역 메기보다 한 축(10마리)에 2〜3만원을 더 받는다. 생물은 주로 국거리로 사용되고 마른 메기는 찜이나 조림용으로 쓰인다. 세척하느라 쌓아둔 물메기더미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물메기 한 마리를 잽싸게 낚아채 간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저건 고양이가 아니라 쥐다. 훔쳐 먹은 물메기 덕에 어찌나 살이 쪘는지 쥐가 고양이만큼이나 크다. 덩치 작은 고양이는 감히 덤비지도 못하겠다.
통영에서도 추도 물메기는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겨울 추도는 물메기 섬이다. 겨울 추도에서는 비탈진 언덕만이 아니라, 길가와 담벼락, 텃밭, 빈집 마당까지도 어디나 물메기 건조장이 된다. 겨울이면 추도 사람들은 빨래보다 물메기를 더 많이 널어 말린다. 어떤 집에는 빨랫줄에도 물메기 몇 마리가 걸려 있다. 빨랫줄에서 옷과 물메기, 문어가 같이 말라간다. 물메기를 말리는 건조대를 덕장이라 한다. 덕장은 물메기를 걸기 좋게 소나무로 짜서 세운 건조대다. 덕장 다리에는 소나무 가지가 거꾸로 매달려 있다. 뾰족한 소나무 잎으로 고양이나 쥐가 타고 오르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물메기는 생물로도 출하하지만 설날 전까지는 대부분 말려서 내보낸다. 품은 많이 들어도 마른 메기가 값이 월등하기 때문이다. 생물이 한 마리 7천 원 정도면 마른 메기는 2만원을 호가한다.
햇빛과 해풍을 맞으며 말라가는 물메기는 5〜7일 정도면 바짝 마른다. 바람이 불면 5일만에도 마르지만 바람이 없으면 일주일은 말려야 제대로 바짝 마른다. 마른 메기는 크기별로 분류해서 한 축, 10개씩 묶은 뒤 ‘추도 물메기’란 상표를 붙여 통영 위판장으로 출하된다. 추도의 물메기잡이는 보통 동지 무렵부터 3개월 정도 이어진다. 설날 전까지는 마른 메기가 많이 팔리지만 설 이후에는 마른 메기 수요가 떨어진다. 설날 전까지 마른 메기가 잘 팔리는 것은 차례상에 마른 메기를 올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날 이후에는 대부분 생물로 내보낸다.
추도에는 미조와 대항(한목), 샛개, 어둥구리 등 네 개의 마을이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미조, 대항, 두 마을에 모여 산다. 통영에서 온 여객선은 대항마을을 들렀다 미조마을을 종점으로 다시 회항한다. 나그네의 추도 걷기는 미조마을에서 시작된다. 먼저 섬의 미조마을 초입 500살 자신 후박나무 어르신과 신목인 400살 자신 잣밤나무 어르신께 인사를 올린다. 나무 어르신들은 추도의 우주목이다. 추도의 온갖 풍상과 사람살이의 역사를 생생히 기억하고 계실 터다. 미조 마을 안길을 가로질러 대항마을까지 가는 길은 포장도로이지만 해안 지형을 싹둑 잘라서 만든 해안 일주로가 아니다. 예부터 이어진 산 고갯길을 그대로 살려 포장만 했으니 그래도 자연에 가까운 길이다. 대항까지 3킬로 남짓의 해변길은 그래서 정겹고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으니 고즈넉한 길의 주인은 여전히 사람이다.
대항마을도 온통 말라가는 물메기 천지다. 당산나무 옆집 담벼락 아래 양지녘, 할머니 한분이 마른 메기를 분류해서 한 축씩 묶고 있다.
"남해 사람이 와서 그래요. 이상하게 추도 기가 맛있다고."
할머니도 추도 물메기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메기 말고 딴 거는 아무 것도 없어요. 해 먹을 게 없어요."
추도 사람들은 오로지 물메기에 의지해 산다. 난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섬이다보니 양식을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겨울 한철 물메기잡이가 추도의 일년 살림살이를 좌우한다. 그러니 추도 사람들이 추도 물메기에 대한 자부심이 큰 것은 당연하다.
"묵어본 사람은 서울이고 인천이고 주문 들어옵니다."
할머니는 마른 메기 꼬리에 쇠꼬챙이로 구멍을 뚫은 뒤 줄에 꿰어서 꾸러미를 만든다. 대항마을에서도 조업 나갔던 물메기잡이 어선들이 들어올 시간이다.
나그네는 대항마을의 폐교 운동장을 어슬렁거리다 마을을 가로질러 다시 해변길을 걷는다. 미조에서 시작된 해변길은 대항을 지나 다시 미조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으니 그대로 둘레길이다. 개발이란 명목으로 더 확장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아름다운 해변의 길이야말로 추도의 진짜 보물이다. 요즘 추도 또한 다른 섬들처럼 관광객 유치를 위한 개발 사업이 진행 중이다. 산에 오르는 탐방로로 만들 계획이다. 섬을 찾는 뭍사람들은 대체로 걷기에 목말라 있다. 그러니 섬에는 아무리 많은 걷기 길이 생겨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니 제발 더 이상의 자동차도로 확장은 없으면 좋겠다. 또 관광객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면 싶다. 도로가 확장되고 자동차들이 들어오는 순간 추도는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다. 성수기의 도로는 상습적으로 주차장이 될 것이고 비수기에는 일이십분만에 섬을 한 바퀴 휙 돌아본 뒤 떠나버릴 것이다. 그런 섬개발은 주민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한다. 추도는 자동차 없는 섬이 되는 것이 어떨까.
[통영 달아전망대]
통영바다 섬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미륵도의 달아전망대다. 달아전망대 왼쪽은 한산대첩의 현장인 한산도 바다, 오른쪽은 당포해전의 전승지 당포바다다. 이 전망대에서는 멀리 욕지도와 두미도까지도 한눈에 조망된다. 맑은 날이면 삼천포와 남해까지도 보이니 미륵산 정상 못지않은 전망이다. 이곳이 ‘통영8경’의 하나로 꼽히는 것은 그런 탁 트인 전망과 아름다운 일몰 때문일 것이다. 달아전망대에 있는 구조물은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작은 정자 하나와 나무데크가 전부지만 이 전망대는 어느 이름난 전망대보다 많은 것을 보여준다. 인공 구조물을 적게 만들수록 사람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과 혜택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달아전망대는 몸으로 체험하게 해준다.
어떤 지역에 가면 그 자체로도 전망이 아름다운데 굳이 전망대라는 이름의 거대한 타워나 건물을 세워 풍광을 해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구조물들은 전망대가 아니라 전망방해대다! 땅에서 몇 미터 더 올라간다고 전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더 많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인공의 구조물을 세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공의 전망대는 애써 자연을 찾아온 사람들을 자연과 격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망대 건물 안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들은 불어오는 바람을 느낄 수도 없고 바다 내음과 풀과 나무의 향을 맡을 수도 없다. 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도 들을 수 없다.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풍경을 시각으로만 제한시킨다. 그것들은 인간의 우둔함을 보여주는 어리석음의 전망대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인공을 최소화한 달아전망대는 풍경과 자연을 한껏 끌어안을 수 있는 진정으로 아름다운 전망대다.
[통영 삼칭이해안길]
내내 청보석의 바다를 보며 걷는 해안길
평지가 드문 통영에서 삼칭이해안길은 더없이 걷기 좋은 평탄한 길이다. 해안 침식을 막기 위해 쌓은 제방에 길을 낸 것이 통영 최고의 해변길이 됐다. 마리나리조트에서 영운리까지 4km를 내내 바다만 보며 편안히 걸을 수 있다. 이 길은 자전거도로로 만들어진 까닭에 시멘트 포장을 했다. 흙길이 아니라 조금 아쉽지만 시리도록 푸른 청보석의 바다는 그런 아쉬움쯤 잊게 해주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으니 안전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다. 모처럼 삼칭이길을 걷는다. 오늘은 이 길에 자전거보다 걷는 사람이 더 많다.
삼칭이란 이름은 삼천진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이 길의 끝자락 마을인 영운리에 삼도수군통제영 수군의 주둔지인 삼천진이 있었다. 진장은 종9품의 권관(權管)이었다. 권관이란 조선시대 변경지방 진관(鎭管)의 최하단위인 진보(鎭堡)에 두었던 종9품의 수장(守將)이다. 삼천진은 본래 삼천포에 있었으나 1619년 (광해군 11년) 영운리로 옮겨오며 삼천진이란 이름도 함께 가져왔다. 과거에는 진이 옮겨가면 이름도 옮겨갔다. 선유도에 있던 군산진이 옮겨가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따라갔고 경기도 남양에 있던 영종진이 지금의 영종도로 옮겨가면서 이름도 따라갔다. 삼천포란 이름은 고려시대 개경에서 뱃길로 삼천리 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긴 생머리의 소녀 셋이 마리나리조트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되돌아온다. 아마 자전거를 빌려 시간이 다할 때까지 길을 오가며 노는 듯하다. 육상에서 싱그러운 소녀들이 바람을 가르는 동안 바다에서는 흰 돛을 올린 요트들이 바람에 밀려간다. 여객선은 먼 바다 섬으로 떠나고 조업 나갔던 어선들은 서둘러 포구로 돌아온다. 통영 공설해수욕장 부근 벤치에서는 청년 둘, 기타를 퉁기며 노래 연습이 한창이다. 사내들 몇은 낚싯대를 던지고 물고기를 잡아 올린다. 바닷물은 맑고 푸르고 투명하다. 파래와 돌김, 잘피들까지 해변의 물속에는 무성한 초원이 다 드러난다. 초원에 풀을 뜯으러 나온 물고기들 머리 위로 소방헬기 한 대가 굉음을 내며 한산도 방향으로 쏜살같이 날아가고 놀란 물고기들은 물풀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긴다.
병사들의 영혼을 천도하던 마을 수륙리
주인과 함께 산책을 나온 복슬 강아지 한 마리는 길을 가다 말고 딴전을 피운다. 태어난 지 45일밖에 안된 신생의 강아지. 어린 생명의 기운으로 이 길도 더욱 생명력 넘친다. 공설해수욕장 부근 길가와 모래밭에서는 부모 손을 잡고 나온 아이들이 연을 날린다. 연을 처음 날려보는지 아이들은 자꾸 연을 떨어뜨린다. 아이들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높이 날아오르다 추락하고 다시 날아오르고 다시 추락하길 반복하며 점점 더 멀리 날아오르게 될 것이다.
길가에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통영시 명예시민이자 홍보대사인 영화배우 성룡이 쓰레기 봉지를 들고 웃으며 당부한다.
“쓰레기를 효과적으로 줍는 방법은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사진을 찍은 성룡은 자신이 통영시 홍보대사라는 사실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그렇거나 말거나, 어떻든 성룡의 당부는 잘 지켜지지 않는 듯싶다. 해안가로 밀려온 부표며 페트병 같은 바다 쓰레기들이 자주 눈에 띈다. 통영 공설해수욕장은 해수욕장이라 이름 하기에 초라할 정도로 작은 해변이다. 그래도 이 마을에는 펜션들이 많다. 여름철에 제법 떠들썩할 것이다.
충북 번호판을 단 대형버스 옆에서는 술판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동창생들은 낮술에 거나하게 취해 구호를 외치다, 노래를 부르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가뭇없는 한 시절을 흘려보낸다. 술판 옆에는 멍게 작업용 바지선이 떠 있다. 양식장에서 수확해온 멍게를 모아놓고 선별하는 일손이 바쁘다. 어선 한 척은 일꾼들을 싣고 멍게를 수확하기 위해 양식장으로 떠난다. 이주노동자 일꾼들이 난간도 없는 바지선에 위태롭게 서 있다. 통영은 봄부터 여름까지 내내 멍게 세상이다. 산 밑 주차장 옆에는 산으로 간 배 한 척이 자동차들과 나란히 정박해 있다. 자전거 도로답게 자전거 대여점도 몇 곳 눈에 띈다. 1인용, 2인용, 자전거 마차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걷기도 좋고 자전거 타기도 좋고 무엇이든 다 좋은 날이다.
공설해수욕장이 있는 이 마을은 수륙리다. 삼도수군통제영 시대 죽은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는 수륙제를 행하던 장소라 해서 수륙리란 이름을 얻었다. 이 바다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의 거처인가. 임진왜란으로 죽은 수천, 수만, 적과 아의 영혼들, 무고한 백성들의 영혼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훈련 중 많은 수군이 목숨을 잃었으리라. 전복 따위 해산물 공납을 관청에 바치기 위해 물질하다 숨을 거둔 원혼 또한 부지기수이리라. 억울하거나 죽어 마땅하거나 무관하게 아무튼 원귀가 된 영혼들을 위로하고 천도하던 곳, 수륙리. 그 원혼들의 바다가 오늘은 더없이 평화롭고 무심하고 푸르기만 하다.
본래 수륙재란 수륙(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고 위로하기 위해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공양(供養)하는 불교의식이다. 수륙도량(水陸道場) 혹은 수륙법회라고도 한다. 수륙재를 지내면 떠돌던 넋들이 불보살의 가피를 받아 극락으로 천도된다고 믿어진다. 수륙재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 464〜549년), 달마대사에게 불법을 묻던 그 양나라 황제인 무제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무제는 떠도는 넋들을 구제함이 제일가는 공덕이라 생각하고 수륙재를 지냈다.
이 땅에서 처음 수륙재가 거행된 것은 고려 광종 2년(970년), 갈양사(葛陽寺)에 개설된 수륙도량에서다. 억불숭유 정책을 취했던 조선시대에도 초기에는 국가행사로 수륙재를 거행했다. 하지만 중종 때에 유생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국가행사로 거행되는 것이 금지됐다. 이후 민간에서만 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통영 미륵산과 편백숲]
수도승과 처녀와 호랑이와 도솔암
미륵산에 오른다. 용화사 건너 도솔암 코스를 택했다. 도솔암은 고려 태조 20년(943년)에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천년 고찰이다. 17세에 지리산 칠불암으로 출가해 수도하던 도솔은 25세 때 이곳 미륵산으로 옮겨와서 바위굴 속에서 수도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괴로워하며 입을 벌리고 도와달라고 애원한다. 도솔은 호랑이의 입에 걸린 비녀를 뽑아내 준다.
그 후로 호랑이는 늘 도솔 곁에 머물렀다. 어느 날 호랑이는 아름다운 처녀 하나를 물어다 놓고 떠나버린다. 저를 살려준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제가 잡은 먹잇감을 먹지 않고 도솔에게 양보한 것이었을 터다. 하지만 도솔은 승려가 아닌가! 도솔이 ‘육식’을 끊었다는 것을 호랑이는 몰랐던 거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호랑이 녀석!
도솔은 처녀를 간호해서 소생시킨다. 처녀는 전라도 보성 관아의 아전인 배 이방 딸인데 혼인날을 받아놓고 목욕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왔다고 했다. 도솔은 끝내 파계하지 않았다. 도솔이 딸을 데려다주자 배 이방은 감격에 겨워하며 거금 300냥을 시주했다. 도솔이 그 돈으로 도솔암을 지었다는 것이 창건 설화의 결론이다.
오래된 산속 암자의 경우 도솔암과 엇비슷한 창건 설화들이 적지 않다. 설화의 의미를 풀어 해석할 생각이 없으나 굳이 추측하자면 호랑이란 도솔선사 자기 안의 야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지금도 도솔암 위쪽에는 도솔이 수도하였던 천연암굴이 있다 하는데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도솔암은 한때 남방제일선원(南方第一禪院)으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한다. 또 한국전쟁 직후에는 법정스님의 스승이고 조계종 종정을 지낸 효봉(曉峰)선사가 제자인 구산(九山)스님과 함께 이곳으로 와 기거하기도 했었다.
미륵산은 통영의 대표적인 산이다. 한국의 100대 명산에 뽑힌 바 있다. 명산에 뽑힌 것은 산 자체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기보다는 미륵산이 선사하는 풍경에 대한 보답이리라. 산세는 험하지 않아 쉬엄쉬엄 걸어도 정상까지 1시간이면 충분하다. 미륵산에 오르는 길은 미래사와 야소골 코스 등 여러 곳이다. 나는 그 중 도솔암 코스를 선호한다.
신라 선덕여왕 때 은점(恩霑)이 정수사(淨水寺)로 창건했다는 용화사를 들러 띠밭등 방향으로 가는 코스는 초입은 평탄하고 좋지만 중간쯤부터는 너무 가팔라서 여간 힘들지 않다. 야소골 코스도 흙길이라 발목이 편하지만 그 길은 야소골의 논들이 ㅤㅎㅘㅁ금빛으로 물드는 가을이 제격이다. 봉수골에서 도솔암까지는 시멘트 길인 것이 좀 불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도적의 산채처럼 산비탈에 들어앉은 도솔암의 비경에 이끌리는 마음을 뿌리칠 수가 없다.
미륵부처님을 기다리는 산, 미륵산
도솔암에서 30여 분을 오르면 미륵산 정상이다. 약간 가파른 구간이 한 두 곳 있긴 하지만 쉬엄쉬엄 최대한 보폭을 작게 해서 걸으면 별로 어려운 길이 아니다. 지금은 미륵산에도 쉽게 오를 수 있는 케이블카가 생겼으나 땀 흘리며 산길을 걸어 오르면 미륵산은 케이블카를 타고 쉽게 오른 사람들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동과 희열을 안겨준다.
통영 시내와 통영 앞바다의 섬들, 멀리 삼천포와 남해, 고성, 사천, 거제의 섬들이 선경을 방불케 한다. 정지용 시인이 어째서 미륵산 정상에 올라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고 고백했는지 절로 이해가 간다. 풍경은 언어도단의 경계에 있으니 어찌 필설로 다 할 수 있으랴. 그저 외마디 탄성이나 지르며 망연히 바라볼 뿐이다.
미륵산 정상 바로 아래 신선대에는 정지용 시인이 미륵산에서 느낀 소회를 기록한 문장비가 서 있다. 정상에는 과거 삼도수군통제영에서 관장하던 봉수대도 있었다. 그래서 산 아래 마을 이름이 봉수골이다.
법정스님과 미래사
미륵산 정상에서의 하산 길도 여러 갈래다. 나는 늘 미래사 방향으로 하산한다. 이 방향의 길에는 어떤 마력 같은 힘이 있는데 그 마력의 원천은 미래사 주변의 편백나무 숲이다. 미래사는 미륵을 기다리는 절이다. 법정스님이 출가하여 행자생활을 한 절집이기도 하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자란 박재철은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 때인 1954년 미래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법정스님이 됐다.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고뇌하던 박재철은 1954년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고승 효봉스님을 만난 날 즉석에서 머리를 깎아버렸다. 박재철은 삭발한 뒤 먹물 옷을 입고 환희심에 종로거리를 한 바퀴 돌았으며 다음날 바로 미래사로 내려와 부목(땔깜 담당 나무꾼)이 되어 행자생활을 시작했다고 전한다.
법정스님의 스승인 효봉스님(1888~1966)은 판사 출신인데 통합종단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고승이다. 평양 지주의 아들이었던 이찬형은 일본 와세다대 법정학부를 졸업한 뒤 1914년부터 10여 년간 판사 생활을 한 조선인 최초의 판사였다. 식민지의 백성이었지만 지주의 아들이었던 이찬형은 조국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지주 양반들처럼 자연스럽게 친일과 출세의 길을 걸었다. 그는 법정에서 수많은 식민지 민중은 물론 독립운동가들을 감옥으로 보냈다.
그러던 이찬형 판사가 법복을 벗게 된 것은 독립운동가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뒤였다. 평양복심법원 판사였던 그는 독립운동가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뒤 집으로 돌아와 고뇌했다. 법조문 몇 줄로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 있다는 사실에 몇 날 며칠을 회의하다 어느 날 부인과 자식이 잠든 사이 담을 넘어 세상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후 지게에 엿목판을 지고 엿장수를 하며 3년여 세월 세상을 떠돌다 금강산 신계사로 출가했다. 그리고 효봉이란 새 이름을 얻었다.
한국전쟁 중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으로 주석하던 효봉스님은 부산에서 여수행 여객선을 타고가다 배 멀리 때문에 통영에 내려 용화사 도솔암에 잠시 의탁했다. 용화사는 당시 대처승이 주지였다. 주지는 효봉스님을 극진히 대접했지만 다른 승려들은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 상좌 구산스님이 효봉스님을 모시기 위해 따로 세운 절이 미래사다. 절집 건물은 1954년 고성의 어떤 부잣집 행랑채를 사서 뜯어다 다시 조립했다. 지금의 건물들은 1983년 당시 주지이던 종욱스님이 대웅전 불사를 시작해 10년 만에 완성한 것이다. 종욱스님은 1996년 입적했다. 절 주변에는 효봉암과 구산대 등이 있다.
편백, 그 치유의 숲
산 속 풍경을 거스르지 않고 풍경 속에 푹 안긴 미래사 건물들도 아름답고 귀중하지만 내가 보기에 미래사의 가장 큰 보물은 편백나무 숲이다. 편백숲은 본래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심었던 것인데 후일 미래사에서 매입해 관리해 왔다. 일본에서는 편백이 가장 귀중한 목재로 쓰인다. 궁궐을 비롯한 신사 등 전통 건축물이 편백으로 지어진다. 불상도 대부분 편백으로 만들어진다. 편백이 암을 비롯한 난치병 환자들에게 좋다는 소문이 나 많은 환자들이 찾아와 숲의 신령한 기운을 받고 기력을 얻어 간다. 그런데 더러 몸은 건강하지만 욕심이 사나운 이들이 몰래 편백나무 묘목을 뽑아가고 흙도 파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이기적인 욕심이 과연 건강을 더 좋게 하는 약이 될까!
나무들은 상처를 입을 경우 병균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톤치드라는 물질을 뿜어낸다. 피톤치드란 1937년 구소련 레닌그라드 대학의 생화학자 토킨(Boris P. Tokin)박사가 그리스어의 ‘식물(phyton)’과 ‘죽인다(cide)’는 단어를 합성해서 만든 용어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테르펜 등의 방어물질들을 통칭해서 피톤치드(phytoncide)라 한다. 그것들은 인간에게도 이롭다. 인체에 기생하는 나쁜 병원균과 해충, 곰팡이들을 퇴치시켜준다. 피톤치드를 인체가 받아들이면 스트레스가 해소되고 장과 심폐기능이 강화되고 기억력과 집중력도 향상된다고 한다.
측백나무과인 편백의 경우 소나무 등 다른 침엽수보다 세 배 이상의 피톤치드를 뿜어낸다. 그래서 편백숲의 치유효과가 더욱 뛰어나다고 한다.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수령 60〜100년 사이가 가장 많다고 한다. 일제 때 조성한 미래사 편백숲의 수령이 그 정도다. 편백은 일본이 원산지지만 이 땅에 뿌리내려 백 년을 살았으니 이미 토속의 나무가 되었다. 나는 자주 편백숲을 걷는다. 오늘도 곧게 뻗은 편백숲을 걸으니 움츠러들었던 정신의 갈기가 곳추 서고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5만여 평, 미래사 편백숲은 그야말로 통영의 보물이다.
섬학교 제34강, 1월 2(금)〜4(일)일, 장사도·추도·통영 <새해특집>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월 2일(금)>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 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34강 여는 모임→통영 도착→점심식사(통영식 해물탕)→거제도 가배항 출항→장사도 탐방(입구선착장-장사도분교-승리전망대-온실-섬아기집-야외공연장-미인도전망대-야외갤러리-출구선착장)→장사도 출항→가배항 도착→숙소 도착(캘리포니아호텔, 다인실)→저녁식사 겸 뒤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제철 해산물 요리의 향연)→휴식 및 취침
<1월 3일(토)>
07:00 기상→아침식사(복국 또는 아구탕)→중화항 출발→추도 대항마을 도착→추도 일주 탐방(대항마을-보건진료소-발전소-용두섬-미조마을-대항마을, 약 6km)→점심식사(추도 물메기탕)→추도 출발→통영 도착→달아전망대 탐방→삼칭이해안길 걷기(4km)→저녁식사(자유식) 및 자유시간→취침(캘리포니아호텔, 다인실)
<1월 4일(일)>
07:00 기상→아침식사(생선구이백반)→통영 걷기(용화사주차장-도솔암-미륵산-미래사-편백숲-둘레길-띠밭등약수터-용화사, 약4km)→점심식사(통영 한정식)→중앙시장에서 장보기→ 제34강 마무리모임, 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볍고 따뜻한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장갑, 얼굴가리개(버프), 스틱, 물통, 윈드자켓, 우비(+접이식 우산),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 거부당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제34강 답사 참가비는 35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배운임, 2일 숙박비, 8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장사도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사전예약 관계상 12월 29일까지 참가신청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회원이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 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e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 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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