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의 뜨거운 관심은 단연 개헌론이다. 국정감사 후 봇물 터질 ‘개헌 논의’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더라도, 단순 말실수라고 보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게 사실이다. 결코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청와대의 대응은 개헌론을 봉쇄하기 보다는 불을 지핀 상황이 되고 말았다. 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직 사퇴 소동은 그 서막을 예고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다 이재오를 위시한 친이계 의원들, 개헌론에 쌍수를 들고 반길 새정치민주연합, 대통령의 ‘개헌 논의 금지령’을 비판한 문재인 의원의 말까지 더하면 개헌론은 탄력을 얻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헌론을 향한 경고는 이미 엎어진 그릇을 두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때로 격투기 선수는 공격이 방어가 된다. 수세에 몰릴수록 공격을 해야 수세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법이다. 구경꾼은 수세와 공격이 격렬해질수록 흥분한다. 상대방이 수세에 몰리면 금방 끝낼 수 있다고 더 몰아치라고 한다. 개헌론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입장은 어쩌면 구경꾼의 처지인지 모른다. 구경꾼의 관점에서 누가 치고 누가 맞든 별반 차이가 없다. 어차피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질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 남는 이 찝찝함은 무엇일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은.
개헌론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대통령 취임 중반이 되면 어김없이 나오던 단골 메뉴이다. 대권을 노리는 입장에서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픈 심정이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단임 대통령제의 한계가 노출되는 시점에 마땅히 제기되어야 할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비슷한 레퍼토리다. 하나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이구동성으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의 모습이 어떠한지 더 이상 부가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말로 전해 듣는 것과 몸으로 느끼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하긴 지금의 심정을 비싼 돈 주고 치른 홍역이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안이 될지 모르겠다.
모든 말에는 드러나지 않는 의미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개헌론도 그렇다. 요란한 수사 뒤에는 불편한 셈법이 숨어있다. 지금의 개헌 논의는 정치 논리로 포장되어 있다. 이 같은 프레임은 정치인과 언론의 합작 작품이다. 개헌의 정치 논리는 권력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개헌을 바라본다. 시민의 시선은 늘 방관자로 머문다. 개헌은 조선왕조의 파워 게임처럼 대권을 쟁취하기 위한 명분 쌓기 정도로 이해된다. 당당하게 논의하지 못하고, 슬쩍 말하고 빠지는 태도나 말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엄포는 유치하지만 권력의 모습이고, 일상의 시각에서는 대하드라마에서 볼 법한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임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분명 정치인과 시민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다. 정치인은 보통 사람의 이런 공감대에 기대어 정치적 결단을 내리곤 한다. 보통 사람이 정치인에 거는 기대도 이런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개헌은 권력 게임에서 끝나지 않는다. 개헌은 권력 게임을 넘어 시민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개헌의 방향은 우리 시민의 삶을 바꾼다. 개헌이란 우리 삶을 떠받들고 있는 삶의 관계,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는 제도적 문제이다. 제도의 설정과 방향은 시민의 삶과 가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사실 개헌의 기회를 갖는 세대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역사적 사건을 주도한 세대의 전유물처럼 간주되는 것도 개헌은 정치적 격동기에 빈번하게 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개헌 논의가 심심치 않게 제기된다는 것은 우리 시대가 그 정체성 차원에서 아직 확고하게 정립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더더욱 개헌 논의는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틀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숙제이기도 하다.
우리 현대사는 개헌의 의미를 반증한다. 우리 경험에서 가장 가까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생각해보자.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가 없었다면 직선제 개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직선제 개헌이 거리에서 주권을 외쳤던 시민들의 힘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의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가. 이 모든 것을 권력 게임으로 볼 수 없다. 권세 이전에 새로운 권위에 대한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민주공화국의 힘이 아닌가.
개헌은 그 시대의 경험과 무관할 수 없다. 개헌의 진정한 의미는 사회를 떠받들고 있는 규칙의 문제점에서 나온다. 개헌의 의미는 더불어 살고자 하는 시민의 삶과 무관할 수 없다. 주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개헌의 발의자는 정치인들이지만 개헌은 명목상으로 주권자인 시민 누구나 제안할 수 있는 것이다. 절차상으로 개헌을 발의할 수 없다고 해서 개헌에 대한 제안과 토의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비록 초기 단계지만, 지금 개헌 논의에서 빠진 것은 시민의 관점이다. 시민의 경험과 요구를 충족시킬 절차를 통해 개헌의 당위성이 현실화되어야 한다.
시민의 삶을 구성할 제도적 관심에서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시민의 관점에서 개헌의 방향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 방향은? 무엇보다 권력을 분산하는 방식을 고안해야 한다. 제왕적 대통령이 단지 한 사람의 변덕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도상 결함인지 따져 물어봐야 한다. 대통령의 막강한 힘을 분산시키되, 민주주의 방식으로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국회에서의 이원집정제나 의원내각제 논의는 제도의 형식 논리를 반복하는 것뿐이다(국회의장 직속의 헌법개정자문위원회의 개헌안도 비슷하다). 다시 말하지만, 무릇 모든 논의는 시대의 아픔을 담아내야 하는 법이다. 미래의 세대를 위해 이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도록 경계를 넘어 제도적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권력의 전횡이 두렵다면, 우리 시민들이 나설 차례이다.
그러나 정치인과 보통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정치인의 관심은 미래의 권력이지만, 보통 사람은 권력과 거리가 멀다. 이런 간극 때문에 시민은 정치인에게 강한 책임감을 요구한다. 책임을 저버린 정치인을 배제하는 제도를 바라는 것은 바로 시민의 요구인 것이다. 통치자의 정치 행위가 백지수표로 전락하는 걸 막아야 한다. 일단 되고 보자 식의 선심성 공약 남발을 막으려면 강한 형태의 정치적 책임을 지워야한다. 공약을 아무렇지 않게 파기하거나, 공무는 무조건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관행을 철폐할 제도 마련이 급선무이다. 권세에는 그에 합당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 체제가 갖추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정치 고유의 현명한 판단을 막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가능성을 확인할 정치력이 절실하다. 책임이 사라진 정치에는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과거의 가능성이 현재에 실현될 때 현재와 다른 미래가 전개된다. 따라서 정치적 책임의 문제는 정치력의 독특한 주도권을 인정하되, 권력의 오남용을 막는 문제와 직결된다.
개헌은 법치의 성숙성을 전제한다. 성숙함은 현명함과 용기를 요구한다. 마치 새집으로 이사할 때처럼 애착이 가는 물건은 두지만, 더 이상 필요 없다면 과감하게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내친 김에 개헌논의에 한마디해보자. 그저 권력만을 부릴 생각이라면 개헌에 왈가불가하지 마시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민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개헌이다. 진정한 시민의 말할 용기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실수를 반복하기 싫다면, 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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