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살 길은 ‘싸가지의 유무’에 있지 않다
진보 진영이 유례없는 침체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싸가지가 없다거나 잘난 척만 해서 진보가 쇠락했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진보진영의 쇠퇴 요인으로는 상황 대처 능력의 부재와 리더십의 위기를 비롯하여 정확한 평가와 진단의 부족 그리고 정책의제 개발 노력의 결여 등 다양할 것입니다. 하지만 늘 보수를 경멸만 하거나 SNS에서 ‘비꼼의 잔치’를 벌인다고 이 상황이 극복될 리 없습니다. 그러한 행태는 오히려 냉소주의의 만연과 함께 더욱 큰 패배를 초래할 뿐입니다.
진보란 대중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
“정치가는 다음 시대를 생각하고, 정상배는 다음 선거를 생각한다.”
선거전술이나 정치공학에만 매몰되는 것은 정상배나 할 일이지 결코 정치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사실 정치란 그리고 진보란 무슨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 그리고 진보의 핵심은 한 마디로 대중의 이익에 봉사하는 관점을 견지하는 데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하여 억압 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 바로 정치 그리고 진보의 요체입니다. 이 원칙을 저버린 그 어떠한 방향도 결코 진보가 될 수 없습니다(여기에서 진보와 민주는 구분 없이 사용합니다). 일희일비, 일시적인 현상에 사로잡히고 찰나적인 인기에 영합하여 부화뇌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동시에 고식에 머물러서도 안 되며, 현실에 유연하게 적응해 나가야 합니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이른바 국가혁신의 과제로 부각된 여러 이슈 중 이를테면 ‘5급 고시’ 폐지에 대하여 사회 일각에서 반대하고 특히 많은 진보 진영의 논객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외교부 유명환 전 장관 아들 특채 사건 등이 떠오르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세상사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일이든 부분적인 부작용은 불가피합니다. 역지사지로 입장을 바꾸어, 만약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경우라면 과연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핵심 고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고, 일의 선후와 경중을 잘 가려내야 하며 근본과 부차(副次)를 정확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나무에 가려 숲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특채 문제는 매우 우려스러운 난제에 속합니다. 그러나 실제 ‘고시 기수’에 의하여 구조화된 현 관료집단의 지배구조는 고시 기수라는 문제의 핵심 고리를 해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며, 이를 반대하는 것은 결국 현재의 관료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해나가자는 기득권 혹은 보수파의 논리로 귀결됩니다.
‘5급 고시’ 폐지에 대한 반대는 정부가 이를 추진하는 데 대한 반발로부터 비롯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이라고 하여 무조건 반대하는 자세는 올바른 태도가 아닐 뿐 아니라, 오늘날 국민들이 대단히 혐오하고 있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당파적 경향성일 것입니다.
한편 일부 진보진영에서는 관료집단을 우호세력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일종의 ‘존경심’까지 보이기도 합니다. 자타공인 진보진영 인사이자 상당 기간 고위직으로 일했던 어떤 후배는 필자에게 “4급 이상 공무원들은 모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라며 고위직 공무원을 높이 평가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필자는 그 ‘대단하다’라는 용어가 아부나 처세 또는 승진 분야에서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필자의 눈이 밝지 않은 탓인지 모르지만, 이제까지 자기 직무와 국리민복의 측면에서 ‘대단한’ 공무원은 유감스럽게도 거의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 ‘대단한’ 고위 공무원들로 인하여 이 나라가 무능한 관료공화국으로 전락하였고, 세월호 참사 역시 이들 무능 무책임한 집단이 장본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합니다.
고시라는 관문을 통하여 똑똑한 젊은이들이 공무원사회에 진입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입한 지 3, 4년이 채 못 되어 그들은 이미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 초록동색으로 완벽하게 다른 공무원과 동일한 모습을 보여줄 뿐입니다.
실사구시의 관점 견지해야
공공기관의 기관장 임기 문제에 대해서도 진보 진영은 반대 견해가 다수를 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독재가 연상되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현재와 같이 2~3년에 그치는 기관장 임기야말로 관료집단의 전횡과 무능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마치 삼국지에 나오는 ‘십상시(十常侍)의 난’처럼 모든 공공기관에서 관료집단이 그저 단기간 부나방처럼 ‘왔다 가는’ 기관장을 허수아비로 만든 채 모든 것을 농단하는 관료공화국이 초래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구체적인 방안 제시를 항상 작은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을 극복해야 합니다. 작은 문제의 총화(總和)가 바로 큰 문제입니다. 문제의 해결은 추상(抽象)에 있지 않고 언제나 구체(具體)에 있습니다. 작은 문제를 해결 하지 않고서 큰 문제 해결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큰 문제를 해결한다고 목소리 높이는 사람치고 생각이 그 만큼 큰 사람을 보기 어렵고 또 문제를 잘 해결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우리 사회의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정작 야당을 찍지 않는 것일까요? 한마디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국민들은 실제(實際)에는 관심도 없고 오로지 목소리만 높이고 허장성세, 결국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동시에 못하는 무능한 사람을 혐오합니다.
시민의 권리 실현을 위한 장기전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이 땅에서는 대통령 5년 단임제를 비롯하여 ‘5급 고시’, 검사의 기소권 독점주의, 대통령 직속의 감사원, 국회 상임위 입법절차 그리고 전작권의 양도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제도가 국제 표준의 궤도에서 이탈한 그리고 미달하는 세계 유일의 ‘한국적’ 시스템으로 충만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근대성과 비민주성을 넘어 참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공무원 선발 및 승진제도 개혁을 비롯하여 선거제도 개혁을 통한 ‘독점적’ 양당 제도의 보완, 정책정당의 구체적인 방안 및 제도적 뒷받침, 감사원과 검사 위상의 제자리 찾기, 국회의장과 장관을 위시한 모든 공공기관장 임기의 정상화 연장 등의 국가 기본의 재구축을 차근차근 이뤄나가야 합니다.
진보진영은 무엇보다도 시민 권리 실현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갖추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정당에게 강제해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단기간이 아니라 끈질긴 행동으로 실천해나감으로써 하나하나 쟁취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묵묵히 주어진 길을 걷다
이들 과제들은 하루아침에 모두 이뤄낼 수 없는 장기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욕속부달, 욕심이 지나치면 성취할 수 없고,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입니다. 기본이 완벽히 부재한 이 나라에서 모름지기 먼저 나 자신부터 기본을 갖출 일입니다.
무실역행(務實力行), 원칙을 견지하고 작은 문제부터 그 해결 방안을 힘써 찾고 실행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묵묵히 그리고 태연하게 주어진 길을 걸어 나갑니다. 때로는 우회하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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