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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의 창덕궁, 창경궁, 종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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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늦가을의 창덕궁, 창경궁, 종묘

11월 서울학교

늦가을, 서울학교(교장 최연. 인문지리기행학자, 서울해설가)의 11월, 제32강은 한양도성의 좌청룡 산줄기에 솟아있는 응봉(鷹峰)이 부려놓은 동궐(東闕)인 창덕궁, 후원, 창경궁, 함춘원 터와 더불어 종묘를 돌아봅니다. 또 한옥의 형태가 변형은 되었지만 그나마 잘 남아있는 익선동 한옥골목을 둘러본 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와신상담하며 왕권의 회복을 꿈꾸었던 운현궁(雲峴宮)까지 찾아갑니다. 11월의 서울학교는 전 일정이 모두 평지 걷기로, 얘깃거리는 풍성하지만 걷기에는 별로 힘들지 않는 편안한 코스입니다.

서울학교 제32강은 2014년 11월 9일(일) 열립니다. 이날 오전 9시 서울 창덕궁 정문 돈화문 앞에 모입니다(지하철은 3호선 안국역 3번출구에서 도보 5분, 1,3,5호선 종로3가역 6번출구에서 도보 10분. 시내버스는 간선 109, 151, 162, 171, 172, 272번, 지선 7025번 이용하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창덕궁(돈화문-금천교-궐내각사-인정전-희정당-대조전-낙선재)→후원(부용지-불로문-의두합-애련지-존덕정-관람지-옥류천-연경당)→창경궁(통명전-양화당-영춘헌/집복헌-환경전-경춘전-함인정-숭문당-문정전-명정전-성종태실-춘단지-홍화문-월근문)→함춘원터→경모궁→종묘→점심식사 겸 뒤풀이→익선동 한옥마을→운현궁(양관-수직사-노안당-노락당-이로당-박물관)

▲창덕궁과 창경궁을 조감도 형식으로 그린 동궐도(東闕圖). 조선 후기 대표적인 궁궐 그림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 가로 576cm, 세로 273cm. 국보 제249호. Ⓒ문화재청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응봉(鷹峯)이 부려놓은 동궐과 종묘

삼각산의 세 봉우리인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에서 시단봉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석가봉, 용암봉, 시단봉을 지나면 한 줄기는 문수봉에서 서쪽으로 의상능선(義湘稜線)을 따라 나한봉, 나월봉,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을 지나 의상봉까지 북한산성의 남쪽 부분을 이룹니다.

다른 한 줄기는 보현봉(普賢峰)에서 남쪽으로 도성(都城)을 향하여 그 지맥을 뻗었는데 형제봉(兄弟峰)을 지나 보토현(補土峴)에서 급격히 낮아졌다가 구준봉(狗蹲峰)을 건너 백악(白岳)에 이르러 다시 본줄기는 남쪽으로 경복궁(景福宮)을 향하여 그 정기를 한껏 부려놓는 한편, 서쪽으로는 인왕산(仁王山)으로 이어지면서 한양도성의 우백호(右白虎)를 이루고 동쪽으로는 낙산(駱山)으로 이어지면서 좌청룡(左靑龍)을 이루었으나 좌청룡의 산세가 우백호에 비하여 급격히 낮아져 여러 가지 비보책(裨補策)이 마련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산세가 허약한 좌청룡 산줄기에 북쪽 대문인 숙정문(肅靖門)을 지나 말바위 아래에 예사롭지 않은 봉우리가 하나 솟아있으니 이를 매봉우리, 즉 응봉(鷹峯)이라고 합니다. 응봉은 한양도성의 좌청룡 산줄기에 있는 봉우리지만 그 산세는 도성 안쪽인 남쪽으로 힘차게 뻗음을 이어가면서 동궐(東闕)인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리고 국립대학인 성균관과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宗廟)를 품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응봉의 정상에 군부대가 들어서 있습니다.
궁궐은 그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는데, 임금이 상주하면서 통치행위를 하는 곳을 정궁(正宮)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양궐(兩闕)체제로서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북궐(北闕)인 경복궁(景福宮)이, 그 이후에는 동궐(東闕)인 창덕궁(昌德宮)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창덕궁은 임진왜란 이후에 세워진 것이 아니고 조선 초기에 태종 이방원에 의해 건립된 궁궐입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는 한양에 경복궁을 세우고 고려의 모든 기득권이 응집되어 있는 개경(開京)을 버리고 마침내 한양으로 천도(遷都)하여 힘찬 첫 걸음을 내딛었습니다만 이방원에 의해 자행된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두 아들인 방번(芳蕃)과 방석(芳碩)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고 있는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 등을 참살하는 비극이 벌어지자 태조는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으로 물러납니다.

그런데 왕위에 오른 정종은 피비린내 나는 경복궁이 싫어서 개경 근처에 있는 생모인 신의왕후(神義王后)의 묘를 참배하고는 그대로 개경에 눌러 앉았습니다. 결국은 개경환도(開京還都)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원은 경쟁관계에 있던 형 방간을 제거하는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스스로 세자가 되어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는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받습니다.

▲창덕궁의 늦가을 Ⓒ창덕궁

태종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면서 바로 한양천도(漢陽遷都)를 결심하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상왕(太上王)인 태조 이성계의 뜻을 받들어 한양천도를 단행합니다. 그런데 원래 있던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새롭게 이궁(離宮)을 하나 더 지어 창덕궁이라 명명하고 그곳으로 이어(移御)하였습니다. 아마도 1차 왕자의 난 때 많은 사람을 참살한 현장인 경복궁이 꺼림직했을 것입니다. 태종의 뒤를 이어 등극한 세종 때 경복궁으로 다시 이어하여 마침내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까지 경복궁이 정궁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의 3대 궁궐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따라서 몽진(蒙塵)에서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宣祖)는 거처할 곳이 마땅치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시방편으로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私邸)였던 정릉동 행궁(行宮)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궁궐 중건사업에 착수하였습니다.

당연히 그 복원 대상은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되어야 했으나 풍수가들이 경복궁은 불길하니 창덕궁을 중건하여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창덕궁의 복구사업을 시작하였으며 선조는 창덕궁의 복원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이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구를 완료하고 선조가 머물던 정릉동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짓고는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창덕궁은 고종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될 때까지 조선의 또 하나의 정궁으로서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복원해 놓고도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경운궁과 창덕궁 사이를 수시로 오갔으며 더 나아가서 재정상태가 어려운데도 왕기가 서려 있다는 인왕산 아래에 경덕궁(慶德宮, 지금의 경희궁)과 인경궁(仁慶宮)을 새로 짓는 등 궁궐 짓기에 몰두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궁궐을 무리하게 많이 지은 이유는 정비(正妃) 소생이 아닌 첩빈(妾嬪) 소생이라는 출생의 약점과, 장자(長子)가 아닌 차자(次子)로서 왕위를 계승하는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서 임금의 역할을 나누어 맡는 분조(分朝)의 책임을 다하면서 겪었던 많은 어려움들로 인해 성격이 예민해지고 소심해져서 이것을 조금이라도 극복해 보고자 군왕의 권위를 세우려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출생의 약점으로 말미암은 안정되지 않은 정신상태는 급기야 정비 소생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강화도로 안치시켰다가 죽음으로 몰았고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시켰으며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을 사사(賜死)하였을 뿐만 아니라 궁궐을 새로 짓고자 무리하게 재정을 조달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이유가 빌미가 되어 서인(西人)들이 일으킨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은 결국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새로 지은 궁궐의 첫 주인은 참혹하게 그 권좌를 찬탈당하고 말았습니다.

▲창경궁의 가을빛 Ⓒ창경궁


창덕궁, 임진왜란 후 격변의 현장

세월은 흘러, 일본은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황세자인 순종으로 그 황위를 잇게 하고 을사늑약(1905년)과 한일합병(1910년)에 이르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강제침탈을 완성하게 됩니다.

조선의 모든 주권을 침탈한 일본은 명목상의 황제인 순종을 창덕궁에 꼭두각시로 앉혀놓고 모든 권력을 농단하였습니다. 이때 창덕궁의 전각들은 태반이 훼멸되었고 남은 전각들도 일본 관리들의 향응을 위한 장소로 탈바꿈하였으며 차량통행을 위해 대부분의 계단을 흙으로 메웠고 자동차가 정차할 수 있도록 전각의 출입문 앞에 지붕이 달린 현관을 달아내는 등 궁궐의 구조와 형태를 철저하게 훼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금만이 노닐 수 있었던 후원(後苑)을 일반인에게 공개 관람시킴으로써 조선왕실의 위엄을 실추시켰는데 그나마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창덕궁은 주인 잃은 궁궐로 쓸쓸하게 남게 되었습니다. 창덕궁은 이궁(離宮)으로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정궁(正宮)의 역할을 하며 격변하는 역사의 중심에 서서 사육신의 참변, 연산군과 광해군의 패륜, 인조반정(仁祖反正),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신정변(甲申政變), 그리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를 묵묵히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같은 정궁이지만 경복궁과 창덕궁은 그 전각의 배치가 확연히 다릅니다. 경복궁이 중국의 법식에 맞게 정문, 중문 정전, 편전, 침전이 남북 직선축 상에 대칭으로 자리잡은 인위적인 공간배치인 반면에 창덕궁은 모든 전각들이 지형조건에 맞게 비대칭으로 자리잡은 자연스러운 공간배치입니다.

창경궁(昌慶宮)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지금의 창경궁 자리에 수강궁(壽康宮)을 짓고 그곳에 살았던 것이 그 연원입니다. 그후 성종에게는 할머니 세조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어머니 소혜왕후(昭惠王后), 작은어머니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安順王后) 등 세 분의 대비가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위한 처소가 따로 필요해서 창덕궁에 붙어있는 수강궁 터에 새롭게 지은 것이 별궁(別宮)으로서의 창경궁입니다. 별궁으로 창건되어 정궁으로서의 역할은 못했으나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이 중건되지 않은 상태에서 창덕궁이 정궁의 역할을 할 때 바로 옆에 붙어있는 창경궁도 정궁의 보조역할을 담당하며 당당히 정궁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탔으나 광해군 때 중건하였고 다시 인조 때 이괄의 난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불탔으나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 지어놓고 사용하지 않은 인경궁 전각들의 목재를 활용하여 다시 지었습니다.

창경궁에서도 여러 사건이 일어났는데, 숙종 대의 인현왕후(仁顯王后)와 장희빈(張禧嬪)의 갈등과 반목의 현장이었고 영조 대에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정치적 희생양으로 뒤주에 갇혀 죽은 비극의 현장도 바로 창경궁입니다. 낙선재(樂善齋) 부근에 있었던 취선당(就善堂)은 장희빈이 왕비인 인현왕후를 저주하던 곳이었고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8일간의 지옥 같은 고통을 겪었던 곳은 문정전(文政殿) 앞뜰입니다.

창경궁은 고종 대까지는 본래의 모습을 유지해 왔으나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궁궐 전체를 공원화시키고 조선을 강제병합한 이후에는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고 일본의 국화인 사꾸라를 심고 심지어는 동물원까지 조성하여 그야말로 유원지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 시기에는 낙선재(樂善齋)가 창경궁의 일부였습니다만 새로이 담장을 쌓아 창덕궁의 일부로 만들었고 창덕궁 후원의 일부였던 춘당지 또한 담장을 둘러 창경궁에 속하게 하고 그곳에서 뱃놀이를 하였으며 함께 어울려 있던 종묘와 동궐 사이를 가로 질러 신작로를 내서 그 둘을 갈라놓기도 했습니다.

▲종묘의 만추 Ⓒ종묘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弘化門)을 마주보고 있는 서울대학교병원 언덕배기가 함춘원이 있었던 곳입니다. 함춘원(含春苑)이란 궁궐에 인접해 있는 작은 언덕으로, 이곳에 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 민가를 짓지 못하게 하고 백성들의 출입을 금하였으며 나무를 심고 가꾸어 보호하는 궁궐에 딸린 동산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궁궐 가까이에 있는 동산에 오르면 궁궐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므로 이를 막기 위해 취해진 조치입니다.

이러한 함춘원은 창경궁의 동쪽인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 자리, 창덕궁 서쪽이면서 경복궁 동쪽인 지금의 북촌 일대의 언덕배기, 경희궁 남쪽이면서 경운궁 서쪽인 러시아공사관 자리의 세 곳에 있었습니다. 북촌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조그마한 한옥을 다닥다닥 지어서 그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고 러시아공사관 자리는 상림원(上林園)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있으며 서울대학교병원 자리는 함춘회관(含春會館)이라는 건물 이름으로 그 내력이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곳 함춘원에는 경모궁(景慕宮)이라는 또다른 사적이 하나 남아있는데, 정조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은 사당(祠堂)입니다. 정조는 창덕궁과 창경궁에 머물면서 경모궁에 지름길로 가기 위해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모궁과 가장 가까운 곳에 문을 내고 매달 삼가 찾아뵙는다는 마음을 담아 문 이름을 월근문(月覲門)이라 지었습니다.

35위 왕과 48위 왕후 모신 종묘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 담장 너머로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왕(追尊王)과 추존왕비의 신주(神主)를 봉안한 사당인 종묘(宗廟)가 있습니다. 조선 초에는 창덕궁과 창경궁 그리고 종묘가 한 울타리 안에서 문을 통하여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만 일제강점기 때 궁궐을 훼손하기 위해 종묘와 동궐(창덕궁, 창경궁) 사이에 신작로를 내며 단절시키고 도로 위로 일본식 구름다리를 놓고 그곳으로 통행하게 하였습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차가 다니는 도로를 터널로 덮고 그 위로 나무를 심어 동궐과 종묘를 잇는 복원사업이 한창 진행 중입니다.

종묘에는 신주를 모시는 곳이 두 곳인데 정전(正殿)과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입니다.
정전에는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 등 49위를, 영녕전에는 16위의 왕과 18위의 왕후 등 34위의 신주를 모시고 있는데,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주는 영녕전에 모셨으나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주는 종묘에 봉안되지 않았습니다.

종묘의 정문은 외대문(外大門)으로 창엽문(蒼葉門)으로도 불리고 북문도 만들어 창덕궁의 동남 협문과 통하도록 하였으며 종묘 안에는 신주를 모신 정전과 영녕전 외에 제사를 준비하는 많은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제례(祭禮) 때 임금이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는 망묘루(望廟樓), 향축(香祝)과 폐(幣)와 제물을 보관하고 제관(祭官)들이 대기하던 향대청(香大廳), 제례를 올리기 전에 임금이 목욕재계하는 어숙실(御肅室), 제례 때 사용하는 제물(祭物)과 제기(祭器) 그리고 운반기구 등을 보관하고 음식을 장만하던 전사청(典祀廳), 제사를 담당하던 관원과 노비들이 거처하던 수복방(守僕房), 제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이 악기를 준비하고 대기하던 악공청(樂工廳), 음식을 차리기 전에 제물을 심사하던 찬막단(饌幕壇), 제례 때 사용할 물을 긷던 제정(祭井), 제례가 끝나고 사용한 축(祝)과 폐(幣)를 불사르는 망료위(望燎位)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묘 안에는 조선의 임금과 왕비가 아닌 다른 대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 있는데 역대 왕들의 배향공신(配享功臣) 83위를 모신 공신당(功臣堂)과 춘하추동 네 계절을 주관하는 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칠사당(七祀堂)과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민왕을 제사 지내는 공민왕신당(恭愍王神堂)의 세 곳이 그곳입니다.

종묘 바로 옆에 붙어있는 익선동은 1930년대 주택경영회사를 운영하던 정세권이 북촌에 이어 두번째로 도시형 한옥마을로 개발한 곳으로, 대지가 넓은 북촌에는 영호남의 지주들이 정착하여 부촌이 형성된 반면에 익선동은 15평 안팎의 작은 한옥들로 주로 서민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한옥의 형태는 서민들의 삶에 맞게 변형된 퓨전 형식으로 ㄱ자형, ㄷ자형, ㅁ자형 외에 지금의 아파트 평면처럼 네모난 모양도 있어 일제강점기 시대의 변형된 다양한 한옥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사저(私邸)인 운현궁(雲峴宮)은 그의 아들 고종이 출생하여 12세까지 성장한 곳으로, 고종이 즉위하면서 임금의 잠저(潛邸)라는 이유로 ‘궁’의 명칭을 받게 되어 운현궁이라 불렸습니다. 운현(雲峴)은 ‘구름재’라는 뜻으로, 조선시대 서운관(瑞雲觀, 뒤에 관상감으로 개칭됨) 앞의 고개를 가리키는데, 지금의 계동 현대사옥에 서운관이 있었으며 그 앞 언덕배기가 구름재[雲峴]였습니다.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我在堂), 대원군의 할아버지 은신군(恩信君)과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사당, 고종이 창덕궁에서 운현궁을 드나들 수 있는 경근문(敬覲門)과 대원군 전용의 공근문(恭覲門)이 있었으나 모두 헐려 없어지고,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노락당(老樂堂), 별당채인 이로당(二老堂)만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운현궁 동쪽에는 양관(洋館)도 있는데 본래 대원군의 손자인 이준(李埈)의 저택으로 1912년 무렵에 건립되었으나 1917년 이준이 죽은 뒤 순종의 아우인 의친왕(義親王)의 둘째아들 이우가 이어받았으나 지금은 덕성여자대학교의 건물 일부로 쓰이고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식수, 따뜻한 여벌옷, 우의, 장갑, 간식, 자외선 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32강 참가비는 6만원입니다.(강의비, 창덕궁·후원·창경궁·종묘 관람료, 점심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65세 이상분/24세 이하분/장애인(1∼3급)과 보호자 등은 관람료 차이로 참가비가 다르니 연락바랍니다. 해당자는 당일 신분증 또는 증빙서 지참바랍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서울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seoulschool2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서울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서울학교는 매달 한번씩, 둘째주 일요일 기행하려 합니다. 각각의 코스는 각 점들의 '특별한 서울 이야기'를 이어주는 선입니다. 선들을 둘러보는 기행이 모두 진행되면 '대강의 서울의 밑그림'인 면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기행을 통해 터득한 여러분들의 상상력이 더해질 때 입체적인 '서울 이야기'는 완성되고 비로소 여러분의 것이 될 것입니다.

기행의 원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대략 오전 9시에 모여 3시간 정도 걷기 답사를 하고, 가까운 곳에 있는 맛집에서 점심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에 1시간 30분가량 가까이에 있는 골목길과 재래시장을 둘러본 후 오후 3∼4시쯤 마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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