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북한 응원단의 아시안게임 참가 문제와 관련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미‧북간에 뭔가 새로운 움직임이 시작된 것 같다. 5월에 물꼬가 트인 일‧북간에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방북 얘기까지 나온다. 가까운 시간 내에 통미봉남(通美封南), 통일봉남(通日封南) 상황이 재연되는 건 아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미국 정부 당국자들이 군용기를 타고 지난 8월 16일 1박 2일 일정으로 북한을 비공개 방북하고 돌아왔다.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기자 질문에 미 국무부 대변인은 8월 20일 "아는 바 없다"며 말을 아꼈다. 그런 상황에서 8월 말에는 북한 당국이 리수용 외상의 유엔총회 참석 계획을 발표했다. 북한 외교 책임자가 유엔총회에 직접 참가하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15년 만의 일이기에 리수용 외상의 방미시 미‧북 접촉 계획이 있느냐는 기자 질문에 유엔주재 북한 외교관은 "두고 보자"고 역시 아리송한 답변을 했다. 리수용 외상의 방미가 그 동안의 미‧북 간 물밑접촉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지난 5월부터 납북 일본인 귀환 문제로 북‧일 대화가 이어지더니 최근에는 아베 일본 총리의 방북 얘기까지 나온다.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은 아베 총리의 방북을 반대하고 나섰지만, 아베 총리는 납북자 송환 문제 협상이 한고비를 넘으면 그 매듭을 짓기 위해서라도 방북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과거 미‧북 관계 선례를 볼 때, 이번 미국의 대북접근은 시기적으로 볼 때 국내정치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11월 초에 미국에서는 중간 선거가 있다. 그동안 케네스 배 등 3명의 북한 억류 미국인의 석방문제를 놓고 미‧북 간에 줄다리기를 해왔으나 성과가 없었다. 그러자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북한이 드디어 미국에 벼랑끝 전술을 펼치는 것 같다. 오바마 정부가 선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북한 리스크'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북한과의 접촉과 대화에 응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미국이 대북적대시 정책을 수정하지 않으면 자위력 강화 차원에서 4차 핵실험을 하겠다고 예고해 왔다. 그러나 만약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미국이 계속 북한의 요구를 무시하고 강경일변도로 나가다, 혹시라도 북한이 11월 중간선거 임박해서 4차 핵실험을 한다면 민주당은 선거에서 참패하고 오바마는 조기 레임덕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북한은 바로 이점을 노리고 미국과 딜(deal)을 시작한 것 같다.
북한은 미국에 관계개선을 요구하는 사인을 계속 보내왔었다. 지난 8월 말 북한 당국이 CNN으로 하여금 케네스 배 등 북한 억류 미국인 3명을 인터뷰 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CNN은 다른 일로 취재차 평양에 들어갔기 때문에 억류 미국인 인터뷰는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북한당국의 난데없는 배려로 대어를 낚은 셈이다. 그런데 억류 미국인들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하나같이 억류 기간중에 "인도적 대접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미국 정부가 움직여 달라고 주문했다. 북한이 미국 정부의 대북접근을 정당화하는 명분을 주면서 미‧북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트고자 하는 포석으로 보인다.
오바마로서는 부시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을 것이다. 부시는 북한의 위조달러 문제를 이유로 2005년 가을부터 대북 경제제재를 추진하다 2006년 11월 중간 선거를 눈앞에 둔 시점인 2006년 10월 9일, 1차 북핵실험 성공이라는 뒤통수를 맞았다. '북한 리스크'를 잘 관리하지 못한 탓에 부시와 공화당은 선거에서 큰 손해를 보고 나서야 북한과의 양자협상을 시작했다. 더 이상의 북핵상황 악화를 막기 위한 합의서(소위 2.13합의)도 그때 만들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부시는 북핵문제를 악화시킨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같은 과거 부시의 학습효과 때문에 이번 미‧북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면 양국 간 관계개선까지는 아닐지라도, 미국 국내정치 때문에 당분간 훈풍이 불 수도 있다. 이렇게 돼서 통미봉남 상황이 재연될 때 우리 국민들은 그래도 박근혜 정부가 '원칙있는 남북관계'를 잘 정립해 나가고 있다고 칭송할 수 있을까?
최근 일‧북관계 변화도 일본의 국내 정치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아베 총리와 자민당은 납북 일본인의 송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국내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굳히려 하고 있다. 납북 일본인 송환 문제가 일본이 만족할 만큼 진전을 보이고 아베 총리의 방북이 이뤄지면 우리 국내에서는 통미봉남에 이어 통일봉남까지 자초한 정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을 것이다.
대북정책을 국내정치에 이용할망정 유연하게 북한을 다루는 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박근혜 정부는 연초부터 계속 이어진 북한의 남북대화 요구나 기대를 일부러 외면해 왔다. 자기 방식대로 따라오라는 식의 '북한 길들이기'를 계속해 왔다. 대북강경 자세를 '원칙있는 남북관계'라면서 지지하는 여론이 높아지는 걸 즐겼다. 그러다 보니 동북아의 새로운 외교 흐름을 감지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는 자기가 놓치는 줄도 모른 채 남북관계 개선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변정세가 빠르게 바뀌고 있는데도 박근혜 정부의 대처는 너무도 안이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7월 7일 북한은 '공화국 정부 성명'을 통해 올해 9월 19일 개막되는 인천 아시안게임에 북한 선수단과 함께 응원단도 파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관련하여 7월 17일 판문점에서 체육 실무회담이 열렸는데, 회담 도중 북측 대표단이 남측의 무례한 태도를 이유로 회담장을 박차고 나간 적이 있다. 이후 체육계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로는 우리 측 대표 중 한명이 국제관례 운운하면서 응원단의 입장료 문제를 꺼내는 바람에 북한 측이 회담장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이쯤 되면 우리 정부가 북한 응원단의 아시안 게임 참가를 달가워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못 오게 하려고 했던 것밖에 안 된다.
8월 20일 아시안게임 준비 관련 남북 체육인들끼리 접촉에서 응원단 불참을 공식통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그걸 국민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이후 8월 28일 북한이 조선중앙TV를 통해서 관련 사실을 폭로하자 그때서야 "그건 공식통보가 아니었다"느니 "당국간 확인이 필요했다"느니 하는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8월말 아시안 게임 응원단 문제로 남북이 책임공방을 벌이더니 9월 1일, 통일부는 "북 태도 변화 없이 5·24해제 조치는 없고, 아시안게임 북측 응원단 참가를 추가 제의할 계획도 없다. 다만 여건이 좋아질 때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이뤄지길 희망한다"고 했다. 드레스덴 선언 이행의 첫 사업이 될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의 실마리를 풀어 나갈 수 있는 응원단 문제 하나 해결하지 못하면서 "여건이 좋아질 때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이루어지기를 희망한다?" 우리 속담에 "가는 정이 있어야 오는 정이 있다"는 말이 있다.
북한에서는 응원단을 보내기 위해서 선발에서 훈련까지 준비를 많이 했다. 따라서 응원단으로 선발된 어린 여학생들은 물론이고 북한 주민 전체가 김정은 제1위원장의 지시로 시작된 사업인 만큼 성공하리라 기대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참히 내팽개쳐졌으니 그 후유증은 오래갈 것이다. 실제로 응원단 파견 취소를 공식 발표한 이후 북한에서는 공개적으로 남북관계 개선은 기대 말라는 투의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만약 박근혜 정부가 응원단 문제를 좀 넉넉하게 처리함으로써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남북왕래와 교류의 물꼬가 트였더라면 그것이 이산가족 상봉과 정례화로도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응원단의 아시안게임 참가가 물 건너갔으니 올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은 어렵게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후 설 계기 이산가족 상봉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산가족 상봉은 기본적으로 인도적 문제이면서 동시에 민족 동질성 회복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드레스덴 선언의 대북 3대 제안, 즉 인도적 문제 해결, 북한 민생인프라 구축, 민족 동질성 회복 중 2개 제안(인도적 문제 해결, 민족 동질성 회복)에 걸쳐있는 사업이 이산가족 상봉이다. 그런 점에서 이산가족 상봉은 그 어떤 사업보다도 최우선적으로 추진되고 성과를 내야 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마침 시기적으로 이 문제를 응원단 문제와 연계해서 좋게 풀어 나갈 수도 있었다. 박근혜 정부가 향후 남북관계를 주도해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는 말이다. 정부가 이번 북한 응원단 문제를 잘못 다룸으로써, 이산가족 상봉과 이후 남북관계 개선 가능성을 상당 기간 스스로 닫아버린 셈이 되었다.
박 대통령은 지난 8월 17일 통일준비위원회 제1차 회의를 주재하면서 드레스덴 선언 이행계획을 만들어 달라고 지시했다. 통일준비위원회에는 정부 측 위원도 20명이나 들어가 있고, 정부 측 부위원장은 통일부 장관이다. 민간위원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통일부 장관을 비롯한 정부 측 통일준비위원들은 이산가족 상봉이나 응원단 참가 문제가 대통령의 지시사항인 드레스덴 선언 이행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대통령 지시가 이렇게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고, 대통령 따로 통일준비위원회 따로 움직여도 되는지 답답하고 막막하다. 통미봉남, 통일봉남 상황이 도래했을 때 정부가 국민들에게 어떤 논리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지, 어떤 수사(修辭)를 동원할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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