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폐허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폐허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국가 기본의 재구축을 위하여 <6>] 사회, 녹색 그리고 시민의 기치를


가장 자명한 진리를 향해 눈이 열릴 때

비극적인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벌써 한 달도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충격과 분노를 넘어 우리 모두를 침몰시키며 좌절시키는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나라는 깨어지고 희망도 사라지고 있습니다. 
 
1760년대에 이탈리아의 계몽사상가 베카리아는 사람들이 분석적 탐구보다는 진부한 인상에 좌우되기 때문에 "생명과 자유에 가장 필수적인 문제에서도 수많은 오판을 겪고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지쳐 인내의 한도에 이른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을 괴롭혀온 폐해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들의 눈은 가장 자명한 진리를 향해 열린다"고 설파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떠야 할 때라면 바로 오늘이 아닐까. 무너져 내린 이 폐허 속에서 우리는 과연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지금 여기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관료를 위시한 정치권과 이익집단의 3각 동맹은 이 나라를 철저하게 장악하고 자기들이 건설한 왕국에서 군림하고 있습니다. 시민들은 철저히 무대 밖으로 배제된 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도무지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시혜의 대상으로서의 백성이 있을 뿐 민주주의 주체로서의 시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제 식민지시대 작곡가 김순남은 극악한 일제 식민지 시절 유일하게 남은 자유라곤 손바닥에서 탱자를 굴릴 수 있는 자유밖에 없는 상황에서 '탱자'라는 곡을 작곡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손가락으로 SNS 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정치적 자유란 개인의 인권 보장을 넘어 시민들의 능력과 공공사회 의식, 평등을 선행조건으로 하는 정치적 참여를 통하여 달성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정치적 자유와 시민의 권리와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세월호 침몰은 가장 먼저 국정원에 보고되었습니다. KBS를 비롯한 언론 뉴스는 그 편집과 방향까지 철저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바로 문명을 자처했던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오늘의 일입니다. 일원적 지휘 체계와 자금 그리고 조직의 이러한 작동 체계는 지난 이명박 정부 때 복원되어 재구축되었습니다. 

여기에 야권의 무능하고 당파적인 그리고 탐욕적인 행태에 깊은 반감을 지니는 자생적인 보수지지층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지난 대선에서도 권력욕으로 충만된 야당을 조롱하면서 '골목 여론'을 장악하였습니다. 한때 온라인 전선은 진보 진영이 압도했지만 이제 역전된 상황입니다. 반면 야권은 권력욕과 무능으로 스스로 끝없이 자기 살을 깎고 영혼을 팔면서 기약 없는 쇠락의 과정을 겪어 왔습니다. 그리하여 시민민주 진영의 힘은 1980년대 이래 지금 가장 미약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기 1987년 우리는 겨우 직선제 하나를 얻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야당 정치권을 지배세력의 하위 파트너로 포섭하는 과정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야당 정치인의 권력욕에 부합하는 그것 외에 시민민주 진영이 쟁취한 것은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이후 정치권, 관료 그리고 각종 이익집단의 3각 동맹의 강고한 결탁으로 국민들은 국가권력 시스템 밖으로 철저히 배제되었습니다. 

지배세력은 마치 민주주의인양 국민들에게 총을 주었으나 그 총은 총알이 없는 장난감 총이었습니다. 내용 없는 빈껍데기의 민주주의에 불과한 것이었지요. 국민은 주인이면서도 정작 국가 권력 시스템에 대한 아무런 통제 장치도 갖지 못한 채 그것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로 이 허울뿐인 '민주주의' 시스템은 통제 및 견제 장치의 부재 속에서 공룡화한 탐욕과 무능의 결정체로서 스스로 파탄을 선고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민주주의는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기치; 사회, 녹색 그리고 시민

이제 시민민주 진영은 사회, 녹색 그리고 시민이라는 기치로 재구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복지 이슈는 시혜적인 차원을 넘어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서 주장되어야 합니다. 야권은 몇 년 전 무상복지 이슈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뒤 그 추억에 지나치게 취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아젠다를 개척하지 못하고 오히려 복지 아젠다를 보수에게 빼앗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현재 복지라는 이름으로 제기되는 최저임금제나 복지예산 등의 이슈는 대중들에게 차별화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재원 마련과 과세의 문제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이제 시혜적이며 피동적 범주의 복지 이슈는 적극적이고 당연한 권리로서의 '사회' 혹은 '사회권'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라는 영어 단어 'society'와 프랑스어 'socit' 모두 라틴어인 'socius'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의미는 '동료', '파트너'입니다. '사회권(droits sociaux)'이란 국가로부터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기본적 권리로서 시혜적 차원의 복지 개념과 달리 시민의 적극적 권리로서의 개념입니다. 
 
다음으로 '녹색'으로 표현되어왔던 환경 아젠다는 더욱 확대 심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사건에서 우리 모두 국민의 생명이 전혀 안전하지 못하고 사회적 제도적 보장 시스템이 전혀 구축되어 있지 않은 적나라한 우리의 비극적인 현실을 목도하였습니다. 이제 녹색의 이미지는 환경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생명의 영역으로 넓혀져 하며, 존엄한 삶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는 권리로서의 사회권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생명을 기본으로 하는 녹색과 사회권의 어젠다가 최우선의 핵심으로 제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민'의 이름으로

이제야말로 이 나라의 토대를 시민을 주인으로 하여 근본적으로 재구성해 나갈 때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민족 개조'의 '개조'가 아니라 사회의 '재구성' 혹은 '재구축'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제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저 세월에서 이 세월'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시민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시민운동이 존재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의 세월호에 내 아이를 태우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시민적 권리들 하나하나를 절대불가양의 권리로 확고하게 자기 손에 쥐고 챙기는 것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며, 내 아이들과 후손에게도 무엇보다 시민의식을 유산으로 남기고자 다짐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민의의 전당이 되어야 할 국회는 '시민의회'에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실 오늘의 그 실체는 오히려 '관료들의 하부조직'에 가깝습니다. 시민사회가 정치과정을 통해 의회와 소통하며 의회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시민사회와 시민의회의 꿈을 키우며, 함께 이를 실천에 옮겨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민을 주인으로 하는 새로운 건국을 위해서는 국민소환제, 검찰청장을 비롯한 감사원장과 경찰청장의 직접 선출, 국회 청원실 설치 등 광범위하고도 실질적인 직접민주의 실현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넘쳐나는 인재들의 넘쳐나는 지혜들이 온라인에서 허공에 산산이 흩어지는 이 현실을 통탄해야 합니다. 온라인과 SNS는 연대를 위한 훌륭한 수단일 수 있으나, 온라인이라는 허명에 영혼을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그간 우리는 일부 IT 산업과 한류의 특수한 성장으로 마치 우리가 선진국이 된 양 착시현상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에서 입증되었듯, 지금 우리의 수준은 터키 정도라고 보는 것이 냉정한 평가입니다. 
 
그간 우리는 미국 등 선진국을 엄청 좋아하면서 베껴왔지만, 베끼지 말아야 할 것은 베끼고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전혀 배우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감사원은 의회에 설치되어 행정부 예산 청구권을 획정 조정하고 지출을 거부하는 권한을 지님으로써 의회는 행정부에 대한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프랑스 감사원은 행정부 기관의 모든 지출계산서와 증빙서 원본을 제출받아 감사를 실시하며 모든 감사보고서는 대중에게 공개됩니다. 반면 지금 이 땅의 국회를 비롯하여 검찰제도, 감사원제도, 관료제, 정당 그리고 원전과 심지어 국회도서관에 이르기까지 국가권력 시스템 어느 한 곳도 제대로 국제적인 기준에 부합한 곳이 없습니다. 이제 침몰하고 있는 이 나라를 살리기 위하여 반드시 모든 제도와 시스템을 국제 기준에 부합시켜야 합니다.    
 
이른바 '국가안전처'는 우선 그 명칭부터 시민보호청, 혹은 주민보호청이 되어야 합니다. 국가가 국가도 아닌 현실은 이번 참사에서 모두가 두 눈으로 확인한 바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시민이 스스로에 대한 확고한 보호의 주체로 되어야 합니다. 시민이 우리 사회의 주인임을 선포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해나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시민단체를 비롯하여 시민 한 사람 한 사림이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그 자리에서, 때로는 연대하여 주인으로서 국가 권력에 대한 통제와 민주주의 주체로서의 권리 구현을 정부와 국회에게 선포하고 지속적으로 요구해 나가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끈기와 실천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