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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향우 일본, 미국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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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우향우 일본, 미국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김기협의 냉전 이후] <18> 냉전 후유증에 시달리는 일본

1990년 10월에서 1992년 10월까지 8차에 걸친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는 동안 북한은 또 하나 일련의 중요한 회담에 임하고 있었다. 1991년 1월에서 1992년 11월 사이에 열린 일본과의 수교회담이었다.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에 해방 후 가장 가까이 간 접촉이다.

건국과정에서 북한은 남한과 달리 친일파 처단을 철저히 했기 때문에 일본에 적대적 태도를 취한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보는 통념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일본에 접근할 일이 있을 때 북한의 '국민감정'이 결정적 장애가 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일본 쪽의 국민감정이 문제가 되곤 했다. 1991-1992년의 수교회담 파탄에도 '이인혜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놓고 남북을 비교해 본다면, 남한의 국민감정이 훨씬 더 두드러진다. 이것은 남한의 친일파 처단이 미흡한 데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남한에서 부와 권세를 누려온 데 대한 일반인의 불만감이 일본과의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그 위에 겹쳐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일본 측의 망언에 대해 대통령이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대통령이 친일파거나 친일파 후예이기 때문이라는 의심이 바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에 비해 북한은 실용적 기준으로 일본을 대해 온 셈이다. 그 차이가 가장 두드러졌던 것은 친일파를 정권의 축으로 삼으면서 정략적 '반일'을 내세운 이승만 시절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한다는 핑계로 재일동포를 내팽개쳤다. 반면 북한은 재일동포 지원 사업을 꾸준히 펼쳤기 때문에 1955년 5월 결성된 친북한 성향의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에 재일동포의 80%가 가입하기에 이른다.

일본 대하는 자세에도 영향 준 남북한의 친일 청산 차이

1959년 12월 시작된 재일동포 '귀환'사업을 통해 약 8만8000명의 재일동포가 북한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귀환'에 따옴표를 친 것은 그 의미가 엄밀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대다수는 남한 지역에 고향을 둔 사람들이었다. 이 북송사업을 다룬 책 <북한행 엑서더스>(한철호 옮김, 서해문집 펴냄) 머리말에 테사 모리스-스즈키는 이렇게 적었다.

<북한행 엑서더스>를 집필하면서, 나는 '귀국(repatriation)'이라는 어휘에 대해 심사숙고했다. '귀국'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재일조선인들에게 북한은 물론 '조국(fatherland)' 한국의 일부분이었지만, 그들 대다수가 태어난 땅은 아니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이게 친숙한 조상의 도시와 마을로 '돌아가는 것(returning)'이 아니라 매우 낯선 사회를 향해 떠나는 것이었다.

북송 재일동포 중 90% 이상이 남한지역 출신으로 추정된다. 재일동포 중에 남한지역 출신이 원래 압도적으로 많다. 식민지시대에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북한지역에서는 만주 방면으로, 그리고 남한지역에서는 일본으로 대부분 향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한지역으로 돌아온 재일동포 중에는 일본으로 도로 밀항해 간 사람들이 많았다. 전쟁 후의 일본도 살기 힘든 곳이었지만 남한지역은 그보다도 더 힘들고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4.3항쟁기의 제주도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돌아간 사람들 중에 많은 수가 10년 후 북송선에 올랐다.

김일성이 1957년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일본과의 수교가 양국 간 호혜와 아시아의 평화에 이바지할 것임을 역설했다고 한다(김계동 <북한의 외교정책과 대외관계> 346쪽). 당시의 이승만 정권보다 전향적인 태도였는데, 역시 '친일파 콤플렉스'의 유무에 따른 차이일 것이다. 물론 일본은 미국의 허락 없이 '침략자' 북한과 수교할 수 없는 입장이었지만 정경분리의 원칙을 내세워 북한과의 교역을 늘려나갔다. 그래서 냉전기 동안 자유진영 국가 중 북한의 가장 큰 교역상대국이 되었다. 특히 1971년 1월 '일-조 무역촉진에 관한 합의서' 채택 후로는 미수교 상태라도 상당히 안정된 관계가 대체로 유지되었다.

북-일 관계는 남한이 1980년대 중반까지 소련 및 중국과 거의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고 지낸 것과 다른 양상이었다. 기본적인 이유는 북한이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필요로 하는 데 있었다. 미국과 일본에 부속된 남한 경제와 달리 북한 경제는 소련과 중국의 지원만으로 지탱하기 힘들었다. 특히 1950년대에는 식민지시대에 일본이 건설한 중공업시설 운영을 위해 기술과 부품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한편 일본은 정치-군사적으로는 미국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경제면에서는 자신의 헤게모니를 추구하면서 정경분리 원칙을 내세웠다.

1990년을 전후한 냉전 종식 단계에서 남한이 '전 방위 외교'에 나설 때 공산국가의 남한 수교를 더 이상 가로막을 길이 없는 북한으로서는 스스로 전 방위 외교에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남한이 수교하고자 하는 공산국가들(특히 중국)은 종래의 동맹국 북한에 대한 체면 때문에라도 남북 화해 노력을 조건으로 내거는 일이 많았다. 서울올림픽 직전의 7.7선언에는 공산국들의 남한 접근에 걸림돌을 제거하는 의미가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7.7선언에서 남북 간의 교류 증진과 함께 북한이 미국, 일본 등 남한의 우방과 관계 개선을 원할 경우 적극 협력하겠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7.7선언에 대해 '두 개의 한국' 획책이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직후에 헝가리가 남한과의 수교 방침을 발표하자 격렬한 항의와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히 1990년 한-소 수교에 임해서는 남한의 북방정책 성공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고, 새로운 대응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과의 대화를 시도하면서 일본과의 수교를 추진하게 된 것이다.

북-일 수교 회담이 좌초한 이유

북-일 수교 추진의 출발점이 된 것은 1990년 9월 하순 일본 자민당과 사회당 의원단의 평양 방문 때 조선로동당과 함께 발표한 3당 공동선언이었다. 주요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1. 식민지 지배 35년 및 전후 45년에 대한 보상
2.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국교관계 수립
3. 교류협력 발전과 위성통신 이용, 직항로 개설
4. 재일 조선인의 법적 지위 존중
5. 조선은 하나, 남북대화에 의한 평화통일 인정
6. 핵 위협 제거
7. 국교수립 실현을 위한 정부간 교섭 권고
8. 상호 당적 관계 강화 및 협조 발전(김계동 위 책 349쪽)

그 후 연말까지 베이징에서의 예비회담을 거쳐 1991년 1월 30일 평양에서 개막된 수교회담의 의제도 대략 이 범위의 것이었다. 3월에는 도쿄에서 제2차 회담이 열렸고, 제3차에서 제8차까지의 회담은 1992년 11월 초순까지 베이징에서 열렸다.

1991년 8월의 제4차 회담에서 11월의 제5차 회담까지는 회담의 성공 전망이 밝았다. 북한이 유엔 가입과 핵안전협정 서명 방침을 밝힌 시점이었다. 북한이 배상 대상에서 전후 45년을 제외하고 식민지배 36년으로 한정하는 데 동의한 것도 성공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진행이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북핵문제 앞에서 좌초하고 말았다. 수교회담은 2000년 4월에 재개될 때까지 7년 반 동안 중단되었다. 1991-1992년 수교회담에서 북-일 간 입장 차이를 김계동은 이렇게 정리했다. (위 책 351쪽, 해설 12-2)

8차례의 수교회담을 통해 북한과 일본은 주요 현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 차이를 노정하였다.

첫째, 기본문제인 구한말 조약(을사보호조약 등)과 합병조약의 유-무효 문제에 대하여 북한은 한반도에서의 정통성 확보 및 보상범위의 확대를 위하여 구 조약의 무효를 주장했으나 일본은 한-일 기본조약의 해석 틀 내에서 보상방식을 찾았다.

둘째, 보상원칙 및 범위와 관련하여 북한은 교전국으로서의 보상,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 전후 45년의 피해와 손실에 대한 보상을 주장한 반면, 일본은 교전국으로서의 보상과 전후 보상에 대해 거부하는 한편 식민지 지배 보상도 재산청구권 문제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셋째, 기타 문제로서 북한이 제기한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문제와 일본이 제기한 일본인 처의 본국 왕래문제 및 이은혜 문제가 있었으나, 수교회담의 본질적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글에서는 '일본인 처 본국 왕래 문제'와 '이인혜 문제'를 크게 중요하지 않은 주변적 문제로 보았지만,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크게 부각된 문제였다. 일본 정계에는 북한과의 관계정상화를 서두르자는 협상파와 이에 반대하는 강경파가 갈라져 있었는데, 강경파가 선정적인 방식으로 언론에 문제를 터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일본인 처란 1960년을 전후해 북송선에 탄 재일동포를 따라간 일본인 부인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일본경제도 아직 어려울 때여서 경제 사정이 괜찮고 귀환 동포를 우대해 준다는 북한으로 따라간 일본인 부인이 많았다. 모국은 그 후의 경제발전으로 풍요로운 사회가 되었는데 남편을 따라간 새 조국에서 빈곤과 억압에 시달리게 된 이 여인들의 운명은 매우 특이한 것이다. 그리고 이은혜란 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납치된 일본 여성에게 일본어를 배웠다고 폭로한 인물로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 2013년 4월 28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기념 행사 축사에 앞서 일왕 내외에게 예의를 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평화헌법은 절대선인가

근년 일본의 우경화라 하여 내외의 걱정을 모으는 현상의 초점이 헌법 개정운동에 있다. 패전 후 미국의 강압 아래 제정된 '평화헌법'을 바꿔 군사적 주권을 가진 '보통국가'가 되자는 움직임이다.

평화헌법을 폐지하자는 이 운동에 군국화 반복의 위험이 있고,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국 입장에서는 전쟁범죄에 대한 반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걱정을 넘어 분노까지 일으킬 일이다. 그런데 가만 생각하면 저지른 지 70년이나 되는 전쟁범죄에 지금까지 매달려 있다는 것도 뭔가 잘못된 일이다. 그리고 평화헌법이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가로막는 가면이나 방패 역할을 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평화헌법은 좋은 것이고 그것을 폐지하자는 것은 나쁜 짓이라는 흑백론을 넘어, 일본 전후체제의 구조적 문제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일본현대사 연구자 존 다우어는 "샌프란시스코 체제 : 미-일-중 관계의 과거, 현재, 미래"(바로 가기)에서 전후 일본의 미국에 대한 예속성을 지적했다. 평화헌법이 표방하는 '평화국가'가 사실은 미국에 대한 군사적 예속을 전제로 한 '예속적 독립'을 뜻한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국이 일본 처리를 주도해서 '샌프란시스코 체제'를 만들었다. 일본과의 강화회담에 일본 군국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인 한국과 중국이(남한과 국민당정부까지도) 배제된 것을 다우어는 이 체제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한다. 일본의 비무장은 평화국가의 보장에 앞서 미국의 통제력 확보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의 새로운 상황 앞에서도 일본이 군사적 측면에 집착하는 것은 군사적 주권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주변 4대국 중 일본이 앞으로의 변화에 대해 가장 대결적 태도를 보일 것이 걱정스럽다. 냉전체제 구축에 맞춰 만들어진 샌프란시스코 체제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냉전의 후유증에 가장 깊이 시달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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