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을 전후한 세계정세 변화에 맞춰 한반도 냉전을 종식하려는 노력의 가장 큰 성과가 1991년 12월 13일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된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였다. 그 직전의 남북한 유엔 가입, 그 직후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과 어울려 당시의 남북관계는 화해와 평화의 길로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기본합의서의 내용은 지금까지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특별한 정치적 장애가 없을 때는 그 준수를 통해 남북관계 발전의 지표로 작동하는 그야말로 '기본' 합의서의 가치를 가진 것이라는 사실을 그동안의 경험이 보여준다.
1990년 9월 첫 고위급회담이 열릴 때부터 기본합의서 채택은 기정사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제1차 회담에서 남측은 8개항으로 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기본합의서(안)'을 제시했는데, 결국 채택된 합의서는 북측이 요구한 '불가침'을 강조한 정도로, 애초의 제안에서 크게 바뀌지 않은 내용이었다.
빤한 결론을 확인하는 데 1년 넘는 시간이 걸린 것은 앞 회에서 얘기한 '지연전술' 때문이었다. 북한에게는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 남북관계 개선이 극히 절실한 과제였다. 이 점을 이용해서 노태우 정권은 정상회담 추진을 고위급회담 진행에 연계했던 것이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제2차 고위급회담에서 남측은 최초의 제안을 '남북 불가침과 화해-협력에 관한 선언'으로 수정 제시했다. 북측의 '불가침' 주장을 받아들여 최종 합의서 내용에 도달한 셈이다. 그런데 그 후 회담 진행이 막힌 상황을 임동원은 이렇게 회고했다.
사실 우리측의 관계개선 기본합의서 내용과 북측의 수정안 내용은 많이 근접해 있었다. 명칭도 나중에 채택된 문서명칭인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와 근사한 것이었다. 북측은 분명히 합의를 원했고, 우리측에서 협상할 의사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타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상회담 개최를 원했던 우리는 '불가침'을 문제삼아 지연전술을 구사함으로써 협상 타결의 좋은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 큰 실책을 범한 것이다. 결국 정상회담도 성사시키지 못한 채 기본합의서의 채택이 1년이나 지연되는 파행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됐다.
그 후 기본합의서를 채택했을 때는 이미 노 대통령의 집권말기였고, 대통령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불붙기 시작하자 우리 정부가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일련의 의욕적인 사업을 펼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추진했던 노태우 정부는 남북합의사항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시간을 영영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피스메이커> 202-203쪽)
왜 북측은 이때 정상회담 제안에 응하지 않았을까? 고위급회담에서 일단 성과를 거둔 후 더 차원 높은 목적을 위해 정상회담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북측 입장이었다고 임동원은 설명했다(위 책 201쪽). 물론 타당한 이야기다. 그러나 남쪽 정권에서 고위급회담까지 지연시킬 정도로 애타게 바라는 일이라면 제공할 수 있는 온갖 인센티브를 제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한 번 만나고 그만두는 게 아니라 계속 만날 거라면 차원 높은 목적을 기다릴 것 없이 우선 만나고 보자는 것도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다.
남측에서 애타게 바라는 일이니 값을 최대한 올려야겠다는 속셈도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내부 체제문제에 대한 고려 때문에 신중한 태도를 취할 필요가 더 크게 생각된다.
권리가 크면 책임도 크기 마련이다. 권력을 독점하는 유일지도체제는 인민의 절대적 신뢰를 필요로 한다. 선거에 의지하는 남한 정권은 선거 때만 지나고 나면 상황을 빙자해서 공약을 뒤집는 일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지만, 유일지도체제 정권이 그런 짓을 한다면 상황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한 잘못이 신뢰를 갉아먹을 것이다. '정상'이라 해서 다 같은 정상이 아니다.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나서려면 인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확고한 전망이 필요하다. 절대적 지도자와 상대적 지도자의 차이다.
남북기본합의서 채택까지 겪은 우여곡절과 주한 미군 핵무기 문제
1991년 2월로 예정되었던 제4차 회담은 팀스피릿 군사훈련 등의 이유로 북한이 불발시켰고, 8개월이 지난 10월에야 열리게 된다. 고위급회담을 통한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북한의 필요는 갈수록 더 절박해졌다. 소련과 중국의 정책 변경에 따른 대내외적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미국의 북한 핵개발 의혹 제기도 대외관계의 어려움을 더했다. 오랫동안 반대해 온 유엔 동시 가입을 수용한 것이 이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1991년 10월 고위급회담 재개의 배경으로 임동원은 중국의 역할을 중시한다.
북한이 협상타결을 서둘게 된 데는 중국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해 11월 초 방한했던 중국의 한 탁월한 북한문제 전문가로부터 이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상부에 보고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그의 정보에 따르면, 김일성 주석은 이해 10월 초에 10일간(10.4~13) 중국을 방문, 경제특구를 시찰하며 덩샤오핑을 비롯한 중국 최고지도자들로부터 세 가지 권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즉, 북한도 중국처럼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하면서 개방과 경제개혁을 추진함이 바람직하며,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려면 한반도의 평화적 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니 조속히 남북협상을 타결짓고, 또한 미국 핵무기 철수의 호기를 활용하여 북한의 핵개발 의혹도 해소할 것을 권고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 주석은 중국에서 돌아오는 즉시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하여(10.16) 북남협상의 조속한 타결과 비핵화 합의, 그리고 경제특구 설치에 관한 모종의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피스메이커> 205쪽)
북한이 유엔에 가입한 상황에서 임기가 1년 남짓 남은 노태우 정권이 더 이상 정상회담을 위한 지연전술에 더 이상 매달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1년 전에도 빤했던 결론은 그 사이에 더 빤해졌고, 10월 하순의 제4차 평양회담에서 12월 중순의 제5차 서울회담에 이르기까지 이 결론을 확인하는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된 결과 '남북기본합의서'의 탄생에 이른다.
위 인용문에서 "미국 핵무기 철수"라 한 것은 당시 미국 부시 정부의 해외 핵무기 철수 정책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의 핵무기를 전량 철수하기로 한 결정을 말하는 것이다. 남한에는 1957년부터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1970년대 초에는 700여 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후반 카터 행정부 하에서 크게 감축되어 1989년 부시 행정부 출범 때는 약 100기가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 북한 핵개발 의혹이 떠오른 배경은 소련의 해체였다. 소련이 보유하던 핵무기와 핵기술이 통제를 벗어나 무책임한 세력의 손에 들어갈 위험은 스릴러의 인기 소재가 될 정도로 사람들 마음속에 심각하게 떠오른 문제였다. 그런 무책임한 세력의 한 예로 북한이 등장한 것이다. 1989년까지 북핵 문제가 제기되지 않고 있던 상황을 미국 언론인 돈 오버도퍼는 <두 개의 한국>(이종길 옮김, 길산 펴냄) 382쪽에 이렇게 설명했다.
89년 1월 부시 행정부 출범 당시, 북한의 핵개발 추진 가능성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위성 사진을 검토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한 소수 관리들뿐이었다. 심지어 에너지부 소속의 한 분석가는 영변에 세워지고 있는 건물들이 화학섬유 공장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할 정도였다. 북한 정부가 영변 시설을 너무 쉽게 노출시킨 것도 의문점이었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평양 공항에서 이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도 육안으로 영변 핵시설의 윤곽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미 정부 관계자들은 까다롭고 잘못 건드리면 오히려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는 북한 핵문제를 본격적으로 규명할 의사가 없었던 탓에 이와 같은 몇 가지 의문점을 구실 삼아 어떠한 조치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북한이 미국 핵무기가 남한에 배치되어 있는 상황을 이유로 IAEA(국제원자력기구)를 앞세운 미국의 핵사찰 압력을 거부한 것은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다. 미국은 핵무기의 남한 배치를 공식적으로 확인하지 않는 것이 기본방침이었지만, 그 사실을 과시할 때도 있었고, 실제 사용 가능성까지 공언하는 일도 있었다. (오버도퍼 위 책 385쪽)
월남 패망 후 미국은 안보에 대한 불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던 남한 정부를 달래준다는 명목 하에 경우에 따라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며 공공연하게 북한을 위협했다. 1975년 6월 제임스 슐레진저 국무장관은 남한에 미제 핵탄두가 배치돼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시인하면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가 전술 핵무기를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실제 그 사용 여부를 고려하게 될 것이다."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미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시험하는 것은 결코 현명치 못한 행동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76년 2월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미군 전폭기 부대가 잠시나마 남한에 배치됐고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게다가 그 해 6월 처음으로 실시된 팀스피리트 연례 합동 군사훈련의 일정도 대규모 병력 이동과 핵무기 사용 훈련으로 구성돼 있었다.
남한에 전술핵무기를 잔뜩 쌓아놓고 그것을 쓸 수도 있다고 이따금 위협까지 하는 터에 북한의 핵개발을 일방적으로 가로막을 수는 없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의 기본원리도 보유국의 기득권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으로 미보유국에 대해 핵무기 사용의 위협을 하지 않는 데 있다. 북핵문제 제기를 위해서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남북기본합의서 탄생에 도움이 된 소련 쿠데타
그런 참에 1991년 8월 소련에 쿠데타가 일어나고 소련 붕괴 조짐이 보이면서 소련 보유 핵무기의 관리 문제가 심각하게 되자 핵무기 감축과 통제 강화를 유도하기 위해 미국이 솔선해서 감축에 나서게 되었다. 이때 남한 배치 핵무기 철수 방침이 정해졌다.
미군 사령관들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해야 하는 현실적 이유가 전무하다는 데에 의견을 같이 했다. (…) 다음 해[1991] 봄 합참 의장을 역임한 아시아 전문가 윌리엄 크로 제독은 대 북한 협상 조건의 일환으로 남한 내 핵탄두 철수를 거론했다.
크로 제독은 다른 이들이 쉬쉬하면서 감추었던 이야기들을 다음과 같이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미군의 기동성을 감안해 볼 때 대한민국의 핵우산 보장을 위해 반드시 남한에 핵탄두를 배치할 필요는 없다."
주한 미국 대사와 군 지휘관들이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건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정부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육군 중장으로 퇴역한 후 부시 대통령의 안보 담당 보좌관으로 부임한 브렌트 스카우크로프트는 평양이 응분의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데 덥석 선물을 안겨줄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핵무기 철수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
[1991년 8월 소련 쿠데타사건 이후] 부시 대통령은 보좌관들과 협의한 후 남한에서 나머지 핵무기도 완전히 철수시키기로 비밀리에 결정했다.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한 측의 요구대로 핵탄두를 보관했던 군산의 미군 기지에 대한 북한의 사찰을 원칙적으로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남한에 배치된 핵무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수개월 간 지지부진한 협상을 이끌어야 했던 리처드 솔로몬 동아시아 및 태평양 담당 차관보는 "급변하는 소련의 국내 정세 덕분에 간신히 남한 내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은 공식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유엔총회에 참석차 미국을 방문했던 노 대통령을 만나 핵무기의 한반도 배치 여부를 떠나 남한에 핵우산을 제공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는 변함없다고 재차 다짐했다.
12월 핵무기 철수가 완료되자 노 대통령은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 그 어디에도 핵무기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공식 발표를 했다. 미국의 핵무기 철수는 이후 북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한반도에 타협과 화해의 시대를 앞당기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386-389쪽)
남한 배치 핵무기의 철수는 남북기본합의서가 나올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이었고, 철수가 실현된 결정적 계기는 소련 붕괴의 조짐이 드러난 1991년 8월의 쿠데타사건이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필요성을 남북이 함께 인정하고 그 내용에도 합의하고 있으면서도 사소한 이유로 늦어지고 있던 것이 소련 붕괴를 눈앞에 두고서야 매듭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91년 12월 10일 판문점에서 쉐라톤호텔로 향하는 차 안에서 북한 대표단의 최우진이 "도장을 갖고 왔다"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은(<피스메이커> 218쪽) 합의서 채택을 위한 모든 조건이 충족되어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서문과 4장 25조로 구성된 기본합의서의 요점을 임동원은 이렇게 정리했다.
* 남북화해를 위해 상대방 체제의 인정-존중, 내정 불간섭, 비방-중상 중지, 파괴-전복 행위 금지, 국제무대에서의 협력, 그리고 현 정전상태를 남북 사이의 평화상태로 전환 및 그때까지 정전협정을 준수한다.
* 남북 불가침을 위해서 무력 불사용 및 불침략, 분쟁문제의 협상을 통한 평화적 해결, 불가침의 경계선은 정전협정 규정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하고, 불가침의 보장을 위해 여러 가지 군사적 신뢰조성조치와 군비감축을 실현한다.
* 남북 교류-협력을 위해서 경제-과학-기술-문화-예술-보건-체육-보도 등 여러 분야의 교류협력 실현, 자유왕래와 접촉, 이산가족 상봉 및 재결합, 끊어진 철도-도로 연결 및 해로 항로 개설, 우편-전기통신 교류 등을 실현한다. (<피스메이커>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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