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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도읍지‥고령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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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대가야 도읍지‥고령고을

3월의 고을학교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파릇파릇 3월 유람(제6강)으로, 철(鐵)과 도기(陶器)의 왕국이며 대가야 도읍지였던 경북 <고령(高霊)고을>로 떠납니다. 2014년 3월 23일(일요일) 당일로 진행합니다. 고령은 동쪽으로 대구광역시·경남 창녕군, 남쪽으로 경남 합천군, 서쪽으로 경북 김천시, 북쪽으로 경북 성주군과 각각 접하고 있습니다.

▲대가야 왕릉군 Ⓒ고령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지난해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6강 답사지인 고령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백두대간이 덕유산(德裕山)에서 주봉인 향적봉을 향해 북쪽을 향하지 않고 백암봉에서 동쪽을 향하여 산줄기를 이어오다가 대덕산(大德山)에서 다시 작은 산줄기로 갈라져 나와 수도산(修道山)을 일구고 가야산(伽倻山)에서 크게 솟구쳤다가 낙동강 중류의 물속으로 숨어드는데, 가야산이 그 산록에 합천, 성주, 고령고을을 부려 놓았으니 이 일대가 대가야(大伽倻)의 땅이었습니다.
고령은 한반도 남부 내륙지방의 경상분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낙동강과 접하고 있어 범람원이 넓게 발달해 있고, 서쪽으로는 가야산을 정점으로 산지들이 높게 솟아 있는데, 전반적인 지형은 상대적으로 해발고도가 높은 서쪽의 산지와, 회천 소가천 안림천 등 낙동강의 지류 하천들이 만든 중앙의 저지, 그리고 동쪽의 해발고도 300m 내외의 구릉과 크게 휘어져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범람원으로 구분됩니다.

고령의 역사는 가야시대부터 시작되는데 서기42년에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개국하여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에 이르기까지 520년간 지속된 대가야국(大伽倻國)의 도읍이었다가, 562년에 신라에 병합된 후 대가야군(大伽倻郡)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는 경산부(현 성주)에 속했고, 명종(明宗) 때인 1175년에는 감무(監務)를 두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인 1413년(태종 13)에는 고령현(高霊縣)이 되었다가 1895년 지방관제 개정 때 현(縣)을 군(郡)으로 개칭하면서 고령군(高霊郡)이 되어 14개 방(坊)을 관할하였으며,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부, 군, 면의 통폐합에 따라 9면 97개 동으로 개편되었으나 1930년 쌍동면과 임천면이 통합되어 8면이 되었고, 1979년 고령면이 고령읍으로 승격되어 1읍 7면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의 이운 교통로였던 개포나루 Ⓒ고령군


두 가지 건국신화

가야의 건국신화는 두 곳의 기록에 전해 오는데 그 하나는 신라 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석이정전(釋利貞傳)>에 나오는 이야기를 조선시대에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면서 인용한 것으로 “가야산 신과 하늘 신 사이에 태어난 두 형제 가운데 형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고, 동생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이 되었다” 는 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려 중기에 김해의 지방관으로 파견된 어떤 문인이 지은 <가락국기(駕洛國記)>를 고려 후기(1281) 일연(一然)이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쓰면서 인용한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 알이 깨어져 6명의 동자가 되었는데, 가장 먼저 깨어 나온 동자가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고 나머지 다섯 동자가 다섯 가야의 왕이 되었다”는 금관가야 중심의 건국신화입니다.

신석기시대에 등장한 취락(마을)은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농업의 발달, 특히 쌀농사의 시작과 잉여생산물의 발생, 인구의 증가 등 여러 요인에 의해 다수의 취락이 결집되거나 혹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단위를 이루는 읍락으로 바뀌고 다시 철기 문화의 발달과 함께 여러 읍락이 결합되면서 고대국가가 형성되기 전의 형태인 부족동맹체의 성격을 띠게 되는데, 가야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대가야도 그중의 하나였습니다.
고구려의 낙동강 유역 진출 이후 가야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에서 대가야가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5세기 후반 경에는 가장 두드러진 세력으로서의 모습을 보입니다. 고구려군의 침공을 받은 김해세력(금관가야)은 그 후 쇠퇴하게 되었고,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은 고령을 중심으로 하는 내륙의 가야세력이 후기 가야를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외부적인 요인과 더불어 대가야가 국력을 키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발달된 철기(鐵器)문화였는데 대가야의 주요 철산지는 합천의 야로면과 고령의 쌍림면 용리 등 미숭산(734m) 기슭으로 추정되며 특히 야로(冶爐)의 철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세금으로 바쳤을 만큼 품질이 좋았다고 합니다.

제철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원료와 연료이기 때문에 이 두 가지 요건을 기본적으로 충족하는 입지에 더하여 생산된 철의 운송에 가장 적당한 곳에 제철소가 들어선다고 보면 가야산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발달한 산지와 계곡에서 철광석이나 사철의 채광과 제련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은 가야산에서 시작하여 우두산, 비계산, 오도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가야산에서 가산, 미숭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사이에 생긴 물줄기인 대가천과 회천이 고령을 거쳐 낙동강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곧 철의 원료인 철광석, 연료인 땔감, 운송수단인 물길이 두루 갖추어져 있어 대가야의 철 생산지로서 합당한 곳입니다.

그래서 야로와 쌍림의 제철유적지에서는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제철로(製鐵爐)의 파편과 쇠똥[鐵滓]이 많이 흩어져 있고, 철의 원료가 되었던 철광석과 사철 등이 채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령의 대가야 고분에서는 고리칼, 쇠창, 쇠도끼, 화살촉 등 많은 무기들이 발굴되었습니다.

▲주산 6부 능선에 있는 주산성 Ⓒ고령군


대가야가 번성한 요인

다음으로 대가야가 발전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도읍지인 고령이 사통팔달의 교통의 요지로서 지리적 입지조건이 유리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고령은 남해안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고 거창, 함양 등의 내륙지역과 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백두대간을 넘어 무주, 장수, 임실, 남원으로, 북으로는 성주, 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황간, 영동으로, 동으로는 낙동강을 건너 곧바로 대구로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고령지역의 이러한 지리적 이점이 곧 5세기 이후 가야에서 가장 강력한 지역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고 이로 인해 교역을 원활하게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백제 등으로부터 선진 문물의 흡수도 다른 가야국들에 비해 빨랐을 것입니다.

대가야는 자체 발전을 바탕으로 주변 가야지역으로도 진출하여 5세기 중엽에는 황강 유역과 남강 상류지역을 포괄하는 연맹체의 맹주국이 되었으며, 5세기말에는 그 대부분 지역을 간접 지배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했다는 사실을, 발굴되고 있는 토기와 여러 가지 유물들이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대가야에서는 서기300년대 이후부터 차츰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모양의 토기를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비스듬한 지형을 이용한 굴가마를 사용했으며 대체로 서기400년대부터 대가야가 멸망한 후인 600년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만들어져서 점점 대가야의 세력이 미치는 곳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토기의 생산을 위해서는 제철과 마찬가지로 원료와 연료의 공급이 충분해야 하는데 원료는 ‘고령토(高靈土)’라고 불리는 고운 흙이 고령 부근의 여러 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고 연료인 땔감은 제철과 마찬가지로 고령의 서북쪽에 위치한 가야산군의 숲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토기문화가 발달된 것으로 보입니다.

토기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양으로 나타나고 변천하는데 고령을 비롯하여 대가야가 차지했던 영토에서는 신라나 백제와 구별되는 토기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굽다리접시, 긴목항아리, 그릇받침 등으로 대표되는 ‘대가야 양식 토기’는 부드러운 곡선미와 풍만한 안정감이 특징입니다.

굽다리접시는 접시가 납작하고 팔(八)자 모양으로 벌어지는 굽다리에는 좁고 긴 사각형 구멍이 일렬로 뚫려있고, 긴목항아리는 긴 목이 부드럽게 좁아들어 몸체 부분과 S자형 곡선을 이루며 여러 겹의 정밀한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으며,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대야 같이 넓고 깊은 몸체에 여러 겹의 물결무늬와 솔잎모양의 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대가야 양식 토기는 서기300년대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서기400년대 초에 완성되어 합천, 남원 등 다른 지역으로 퍼져나가 4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합천의 황강 상류로 진출하고, 400년대 말에는 거창, 함양에까지 전해지고, 500년대에 들어서면 진주를 거쳐 고성지역까지 확대되고, 500년대 중반 경에는 남해안은 물론 마산, 창원에까지 퍼져 거의 가야지역 전체에 미치게 됩니다.

대가야 멸망 그 후

이렇듯 번성했던 대가야는 562년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리고 멸망한 대가야의 많은 인재들은 신라의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가야금을 만든 우륵은 신라의 중원경(中原京, 청주)으로 보내졌고 신라의 대문장가인 강수(强首)와 명필 김생(金生)도 대가야의 후손들이지만 고령이 아닌 다른 곳에서 활동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가야 멸망 후 김유신(金庾信) 등 금관가야 출신들은 무(武)로써 신라의 통일에 도움을 주었다면, 대가야 출신의 인물들은 문(文)으로써 신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 대가야의 후예들은 해인사 창건에 크게 이바지한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처럼 불교에 귀의하여 조용히 망국의 한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답게 많은 왕릉이 있습니다. 고령읍을 병풍처럼 감싸는 주산성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 위에는 대가야가 성장하기 시작한 서기400년 경부터 멸망한 562년 사이에 만들어진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줄지어 늘어섰는데 우리나라 최초로 발굴된 순장(殉葬)묘 왕릉인 지산리44호와 45호 무덤을 비롯하여, 주변에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되는 크고 작은 200여 기의 무덤이 있습니다.
순장이란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위해 살아있는 사람이나 동물을 죽여서 함께 매장하는 장례행위로서, 산 사람을 다른 사람의 장례에 사용한다는 것은 강력한 권력을 소유한 통치자 집단의 지배력을 반영하는 것으로 특히 고대사회에서 널리 성행한 풍습입니다. 이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계세(繼世)사상에 따라 이승에서의 생활을 저승에서도 그대로 누리라는 의미에서 행한 것입니다.

고령의 읍치(邑治)구역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형세로 내룡(來龍), 장풍(藏風), 득수(得水)의 조건을 모두 구비한 명당이지만, 읍치의 동쪽이 지대가 낮고 하천과 접해 있어 지기(地氣)가 그리로 빠져나갈 우려가 있어 이에 대한 비보책(裨補策)으로 하천변에 ‘적림(赤林)’을 조성하였습니다.

하천을 따라 형성된 적림은 좌청룡(左靑龍)의 산줄기가 짧은 것을 보완해 주고, 읍치의 안산이 되는 명당수 너머의 망산이 너무 떨어져 있는 것을 보완해 주는 역할도 하며 나아가서는 대가천의 물 흐름이 고령읍 쪽으로 침범하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내곡천에서 흘러내린 토사가 동쪽으로 퇴적되도록 유도하여, 홍수를 방지해 주고 고령읍 주변에 보다 넓은 충적지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 Ⓒ고령군


망산(望山)과 이산(耳山)

이산(耳山)은 고령 읍치의 주산(主山)이고 망산(望山)은 안산(案山)으로 특히 가야산에서 미숭산을 지나 이산까지 이어지는 매우 빼어난 지세는 이산에서 멈추어 명당인 읍치를 잘 감싸안고 있는 형세이며, 특히 고령향교까지 이어지는 지맥은 선명하고 강하게 뻗어 있습니다.

고령 읍치의 수세(水勢)는 주산 북쪽에서 소가천과 내곡천 물이 성주 쪽에서 내려오는 대가천과 합류하여 읍치 앞에서 금천을 이루고, 안림천과 읍치 동남쪽에서 하나로 합쳐져 회천으로 흘러 이곳에서 수구(水口)를 형성하며, 안림천과 대가천이 만나 회천으로 빠져나가는 수구 방향이 다소 허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지만 읍치의 주산이 되는 이산이 동쪽으로 터를 열어놓았고 청룡과 백호의 용맥(龍脈)이 짧아 명당 판국을 에워싸 안음[環抱]이 부족하기는 하나 내맥(來脈)이 훌륭하고, 산이 그치고 물이 모이는 곳[山盡水會處]이라 명당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합니다.

대가야의 도읍 고령은 낙동강 건너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금산(錦山)에서 망을 보고 주산(主山)에 외적이 침입하였던 것을 알렸다고 하는데 그래서 적을 살펴보는 금산은 망산(望山)이라고도 하고 망산에서 적의 내습을 외치는 소리를 들은 주산은 이산(耳山)이라고 달리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주산의 서쪽 능선은 미숭산(美崇山), 문수봉(文壽峰), 사월봉(四月峰)으로 이어져 있고 이들 산지는 내곡천의 분수계를 이루며, 내곡천은 동류하여 고령읍을 관통하는 회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서북쪽으로는 멀리 가야산이 바라다 보입니다.

주산에는 대가야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 발견된 지산동고분군이 남동쪽 능선을 따라 무리지어 축조되어 있고 산 정산 6부 능선에는 주산성이 남아있으며 남쪽 능선 아래는 대가야박물관과 대가야왕릉전시관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미숭산은 고려의 장군이었던 이미숭(李美崇)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항해 군사를 모으고 미숭산에 성을 쌓아 고려를 되찾고자 싸움을 벌였던 곳입니다. 당시 대세는 이성계에게 이미 기운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숭은 결국 고려 회복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절했다고 전해지며 본래 상원산이었던 산 이름을 뒤에 이미숭 장군의 이름을 따서 미숭산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미숭산과 문수봉 사이에는 나상치 혹은 나상현이라 불리는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는 고령과 합천을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정상 주변에는 미숭산성(美崇山城)의 성터와 성문의 잔해와 샘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금산(錦山)은 고령읍 동쪽에 위치한 산으로 서쪽에 있는 주산과 미숭산을 마주 보고 있으며 비단같이 아름다운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대가야시대에 수비병들이 망을 보던 곳이라 하여 망산(望山)이라고도 불렀다는데 조선시대부터 봉수대가 운영되면서 망산이라 하였다고도 합니다.
정상에 있는 망산성은 금산의 다른 이름인 망산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며 망산성은 대가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대가야시대에는 전초(煎哨) 방위성으로 신라군을 맞아 격전을 치른 곳이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방어기지로 이용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고령지역의 성곽들

고령지역에 성곽이 축조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삼한시대에 변한에 속한 반로국(半路國)이 고령지역에 존재했고, <삼국지(三國志)>에 삼한시대부터 성곽이 수축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빠르면 삼한시대부터 성곽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현재까지 고령지역에서 확인된 성곽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월성리토성으로 해발 44m 정도 되는 낙동강 변의 야산인 발산의 정상부를 감싸면서 쌓은 산성으로 4세기 대의 승석 타날문 토기편이 출토되고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령지역에서 현재까지 지표조사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성곽은 모두 18개소로서 이들 성곽들은 대부분 대가야시대부터 테뫼식 토석(土石) 혼축(混築)으로 축성된 것으로 보이며 그 중 대가야의 궁성이었던 평지성인 대가야 궁성지와 월성리토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산성입니다.

대가야시대 이후 고령지역의 산성은 신라에 의해 재사용되었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에는 지역의 의병들에 의해 수축된 경우도 많았고 망산성, 의봉산성, 미숭산성, 봉화산 등에는 조선시대의 봉수가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산성의 규모는 정확하지 않으나 둘레가 500~2,000m 정도로 중소형의 것이 대부분이며 다만 봉화산성, 월성리 토성, 본관리 옥산성은 둘레가 300m 미만의 소규모의 보루성(堡壘城)이나 관망대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가야시대의 궁성지로 전해오는 곳은 현재 고령향교가 위치한 연조리 일대로서 지난 2000년 8월 이 지역에 대한 시굴조사 결과 건물지와 구덩이 등 7기의 유적과 대가야시대의 토기를 비롯한 다수의 기와와 벽돌 등이 출토되었고 특히 이른바 ‘대벽건물지(大壁建物址)’가 확인되었는데 대벽건물지는 주로 궁전이나 절터에서만 발견되는, 밖에서는 기둥이 보이지 않는 큰 벽으로 된 건물을 말합니다.

<삼국사기>의 562년 대가야의 멸망 기사에 따르면 궁성의 출입문에 해당하는 전단문(栴檀門) 혹은 전단량(栴檀梁)이 건립되어 있었다고 하는데 대가야에서는 문(門)을 ‘교량, 다리, 들보’의 의미를 지닌 양(梁)이라고 했으며, 이로 미루어 보아 대가야의 궁성은 성곽 주변으로 커다란 구덩이인 해자(垓字)를 파고 그 속에 물을 채운 다음 통행을 위한 교량을 건설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대가야시대의 왕궁지

고령향교가 처음 창건된 시기와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1413년(태종 13) 고령지역에 현감을 파견한 것으로 보아 이때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건립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보면 “현 서쪽 2리의 이산(耳山, 주산) 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후 3차에 걸쳐 이건(移建)되고 마지막으로 170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겼는데 이때 땅 속에서 옥기와, 연와, 주춧돌 등이 출토되었다고 하며, 이것은 이곳이 처음 창건된 향교지(鄕校址)이거나 대가야 궁성지(宮城址)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재, 고령향교 부근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있고, 향교의 건축물에는 사찰의 것으로 보이는 석재와 탑재 등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종합해 보면, 현재 향교의 터는 대가야시대의 왕궁지였다가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원이 세워졌으며, 조선 초기에 향교가 설립되었고 이후 향교가 다른 곳으로 이건되었다가 1702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령향교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東廡), 서무(西廡), 빈흥재(賓興齋), 내삼문, 외삼문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사가 약간 높은 터에 남서향하여 건물을 앉혀 놓았고 대지를 2단으로 정지하여 배향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을 뒤쪽에 배치하고 같은 축선 상에 강학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을 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향교는 고을의 크기에 따라 규모가 달랐는데 전주, 강릉, 경주, 상주 등과 같이 관찰사가 있는 곳에는 90명 정원의 대설위(大說位)를, 부(府), 목(牧) 도호부(都護府)가 있는 곳에는 70명 정원의 중설위(中設位)를, 군(郡), 현(縣)이 있는 곳에는 30에서 50명 정원의 소설위(小設位)를 설치하고, 대성전에 모신 성현의 수도 대설위는 공자와 4성(맹자, 증자, 안자, 자사), 10철, 송조6현, 공문72현, 한당22현, 그리고 동국18현 등 총 133위를 모시고 중설위는 공자와 4성, 10철, 송조6현, 동국18현 등 39위를 모시고 소설위는 공자와 4성, 송조4현, 동국18현 등 27위를 모십니다.

고령향교는 소설위라 대성전에 5성의 위패를 배치하고 그 좌우에 송조4현, 신라2현, 고려 2현, 조선14현 등 공자를 비롯한 27위의 성현의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 주향위에는 공자를 위시하여 배향위로 4성인 안자(晏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5성을 배향하였고 서배위에는 정호(程顥), 주희(朱熹), 설총(薛聰), 정몽주(鄭夢周),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김인후(金麟厚), 성혼(成渾), 송시열, 박세채(朴世采) 등 10인이 종향되었으며, 동배위에는 주돈이(周敦頤), 정이(程頤),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김굉필(金宏弼), 조광조(趙光祖), 이황(李滉),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준길(宋浚吉) 등 10인이 종향되었습니다.

특히, 고령향교가 갖는 특징은 제향 공간 내에 빈흥재라는 건물을 두고 있다는 점과 동, 서무를 두고 동,서재가 없다는 점인데 이는 모두 1900년대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며, 그 이전에는 고을의 등급인 현(縣)에 걸맞게 소설위로 동,서무가 없으며, 동,서재가 갖추어진 전통적인 공간 구성 양식을 갖추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영남사림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의 종택 Ⓒ고령군


아름다운 개실마을

개실마을은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를 입은 조선전기 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의 종조(宗祖)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5대손이 1650년경에 이 마을로 피신와서 은거하며 살았던 350여 년 된 선산(일선)김씨 집성촌으로, 꽃이 피고 골이 아름다워 아름다울 가(佳), 골짜기 곡(谷)을 써서 가곡이라고도 하고, 또 꽃이 피는 아름다운 곳이라 하여 개화실(開花室)이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개애실이 되고 현재 개실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점필재 종택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가문의 종가(宗家)입니다. 김종직은 야은 길재(吉再)의 학풍을 계승한 김숙자(金叔滋)의 아들로 태어나서 성리학(性理學) 보급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훈구파(勳舊派)와 대응하여 영남 사림파(士林派)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이언적(李彦迪) 등으로 그 학맥이 이어졌습니다.

아버지인 김숙자 이후로 계속 밀양(密陽)에서 거주하고 있던 김종직 가문은 17세기 중반 5세손인 김수휘(金受徽) 대에 고령에 정착하였으며 당시 고령에 세거하고 있던 처부 최필손과 박언임의 전민(田民)을 나눠 받아 재지적(財地的) 기반을 마련하여 고령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때 점필재 종택이 지어졌습니다.

고령읍에서 동쪽으로 낙동강 변에 있었던 개포나루는 고려시대에는 수로(水路)로 이곳에 도착한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열뫼재~고령읍~낫질신동~야로를 거쳐 해인사에 이운한 역사 때문에 개경포(開經浦)라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 때 개포라 부르게 되었으며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경상도 내륙지역의 곡식과 소금을 운송한 큰 포구였습니다.

조선시대 지방경제는 장시(場市)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장시를 중심으로 보부상들이 모여들어 조직을 결성하게 되는데 고령에서는 읍내장과 안림장이 생기면서 고령상무사(高靈商務社)가 창설되어 부상단(負商團)인 좌사계가 1866년, 보상단(褓商團)인 우사계가 30여 년 뒤인 1899년 무렵부터 활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부상 또는 보상이라는 명칭 대신 좌사, 우사라고 쓰게 된 것은 조선시대 보부상단이 한때 부상단은 좌사, 보상단은 우사로 불리게 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고령상무사는 1866년(고종 3년, 병인)부터 조직되어 일제의 강점에도 살아남아 현재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임원 구성은 물론 정기총회, 대제 등을 옛 방식대로 진행하고 있어 전통 상인단체의 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우륵이 가야금 연주한 금곡(琴谷)

우리나라 전통 악기인 가야금은 악성 우륵(于勒)이 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오동나무에 명주실로 12줄을 엮어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아 12곡을 작곡까지 하였습니다. 고령읍 쾌빈리의 금곡(琴谷)은 속칭 정정골이라고도 불리는데,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을 연주한 곳으로서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악성 우륵 영정 Ⓒ고령군


고을학교 제6강은 3월 23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07:00)-고령(10:00)-대가야박물관-대가야왕릉박물관(11:00)-지산동고분군-주산성(12:30)-점심식사 겸 뒤풀이(14:00)-지산동 당간지주-어정(고령초등학교)-고령향교-개포나루(15:30)-개실마을-점필재종택(16:30)-서울(19:30)의 순입니다.

▲고을학교 제6강 고령고을 답사로 ⓒ고을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모자, 스틱, 아이젠(미끄러울 때),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고을학교 제6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입장료, 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고을학교 카페(http://cafe.naver.com/goeulschool)에도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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