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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다! 다도해 비경‥관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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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봄바다! 다도해 비경‥관매도

3월의 섬학교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대상을 받았던 3만 평의 소나무숲이 해변을 따라 도열한 남도의 수국(水國). 국립공원 1호 명품마을인 섬.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의 파릇파릇 3월, 제25강은 진돗개와 진도아리랑의 고장으로 유명한 진도 남쪽에 위치한 최고 절경 관매도를 찾아갑니다.

▲석양녘이면 한없이 서쪽으로 가고 싶은 열망이 찾아든다! Ⓒ섬학교

머나먼 남쪽 진도에서도 배를 타고 들어가야 닿을 수 있는 환상 같은 섬. 관매도는 국립공원 지역의 마을들이 개발을 위해 국립공원에서 벗어나기를 원할 때 국립공원 안에 남기를 처음으로 자처한 섬입니다. 그만큼 아름답고 순수한 자연과 우리 삶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보석보다 귀한 섬이지요. 이번 관매도 가는 길에는 삼별초의 항몽 유적지인 진도의 남도석성도 탐방합니다. 큰 맘 내지 않으면 한번 가보기 어려운 진도 바다의 이번 섬여행은 3월1(토)∼2(일)일, 1박2일로 진행됩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4년 3월 답사지인 관매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선녀가 떡방아 찍던 ‘방아섬’

진도 팽목항에서 출항한 여객선은 항해 내내 9노트의 속력으로 운항한다. 느린 배지만 1시간 20분에 불과한 거리니 여행객들에게는 지루할 틈이 없다. 여행객들 대부분은 좁은 선실보다 갑판에 나와 사진을 찍느라 바쁘다. 다들 바다와 섬이 그려내는 풍경화에 푹 빠져 있다. 여객선이 조도와 죽항도 사이 해협을 지나니 관매도가 지척이다. 문득 운전대를 잡고 있던 선장이 왼쪽의 작은 섬을 보라고 손짓하며 방송을 한다.

"저것이 방아섬이요. 꼭대기에 바위 하나 안 있소. 그게 선녀들이 방아 찍었다는 방아바위란 말이지."

▲미지의 땅이 사라진 시대, 섬은 마지막 남은 미지다. Ⓒ섬학교

관매도 마을 뒷산에 붙어 있는 작은 무인도. 관매도해수욕장과 함께 관매도의 상징물이 된 것이 저 방아섬이다. 선녀들이 내려와 방아를 찧다 올라가곤 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섬. 저 방아섬의 방아바위 때문에 건너 섬 청등도 처녀들이 바람 잘 날 없었다. 그 바람을 잠재우기 위해 청등도 어른들은 처녀들이 방아섬을 보는 것조차 금기시했고 관매도 사람들과는 결혼도 시키지 않았다. 또 방아섬과 마주보고 있는 하조도 신전리에서도 관매도 사람과 결혼하면 파경에 이른다는 속설이 있어서 혼인을 금했다고 전한다. 대체 저 방아섬은 왜 청등도 처녀들을 달뜨게 하고 섬들 사이의 혼인까지 막았더란 말인가.

아마도 방아섬 중앙에 솟아오른 장대한 남근 모양의 방아바위 때문일 것이다. 선녀들이 내려와 찍었다는 방아가 무슨 방아였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지 않겠는가. 본래 저 바위는 좇바위나 자지바위 같은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 노골적이라 느낀 사람들이 방아라는 메타포를 사용한 것일 터다. 남근석이 일깨워주는 성에 대한 호기심이 청등도나 하조도 처녀들을 일찍부터 이성에 눈뜨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 성에 자유로워지는 처녀들의 의식을 잠재우기 위해 그런 금기들이 만들어졌던 것은 아닐까.
사촌 남매의 비극적 사랑

1965년 여름, 어떤 남녀가 관매도를 찾았다. 둘은 마을 뒷산에서 동반자살을 했다. 음독이었다. 근래까지도 자살을 위해 외딴 섬을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자살자들은 고립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로 섬을 택하곤 했다. 20대 후반, 두 남녀는 우연히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 평생 함께 할 것을 약속한 남녀는 양쪽 부모님의 결혼 허락까지 받아냈다. 마침내 양가의 상견례 날. 비극은 그곳에서부터 시작됐다. 상견례를 위해 식당에서 만난 양가 부모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남자의 아버지와 여자의 아버지는 남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한국 전쟁 때 이북에서 피난 내려오다 헤어진 친형제였다.

상견례 장은 이산가족 상봉의 장이 되고 말았다. 기막힌 인연이었다. 다시 만난 형제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지만 두 남녀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사랑하던 연인이 갑자기 사촌 남매가 되고 말았다. 결혼은 불가능한 일이 되었고 사랑 또한 금단의 사랑이 되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고통 받던 남녀는 외딴 섬으로의 마지막 여행을 준비했다. 그곳이 관매도였다. 현생에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다음 생에서 이루기로 기약한 연인은 함께 극약을 마시고 생을 하직했다.

▲선녀들이 내려와 방아를 찧었다는 전설의 방아섬 Ⓒ섬학교

자녀의 동반자살 소식을 듣고 관매도를 찾아온 양가 부모도 그들의 비극적 사랑이 다음 생에서라도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그래서 둘을 그들이 목숨을 끊은 관매도에 묻어주기를 원했다. 마을 사람들도 두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무당을 불러 씻김굿을 해주었다. 장례도 마을에서 치러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이 죽어서나마 서로 자유롭게 만나기를 바라며 두 관의 가운데를 터놓고 합장을 시켜주었다. 그 후 비가 오는 날이면 마을 사람들은 바구니만한 불덩어리 두 개가 백사장 끝 동굴 해안가 절벽을 누비며 춤추는 것을 목격하곤 했다. 사람들은 그것이 두 남녀가 원한을 푸는 춤을 추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후 늦게 관매도에 도착한 나그네는 마지막 피서객들로 북적이 있는 관매리를 피해 관호리로 찾아들었다. 늦은 밤, 관호리 마을 민박집 방에서 목포 관매도향우회가 만든 작은 책자에서 몇 줄의 이야기를 접했다. 짧은 글 속에 숨어 있던 절절한 사연을 들려준 것은 혹 그때의 그 연인이 아니었을까. 관매도의 밤이 깊다.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받은 관매도 솔숲

진도군 조도면의 새끼섬 관매도. 관매도는 관매리와 관호리 두 개의 큰 마을이 있고 장산편, 장산너머 두 개의 작은 마을이 있다. 인구가 많을 때는 2,000명까지 살기도 했던 섬이지만 이제 180명 남짓만 남은 한적한 섬이 되었다. 수려한 경관으로 인해 여름 피서철이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뭍에서의 접근이 쉽지 않은 까닭에 섬은 난개발을 피해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관매도는 원래 볼매도, 관호도 등으로 불렸다. 지금도 조도 군도의 섬으로 둘러쌓인 관매도 앞바다는 호수처럼 아늑하고 잔잔하다. 그래서 관호라 이름했다. 하지만 일제 때 전혀 엉뚱한 이름을 얻어 관매도가 되었다. 매화나무 한 그루 없던 관호도가 매화섬[觀梅島]이 된 것이다. 지금은 이름에 맞추기 위해 매화나무 단지를 조성하기도 했지만 아직 매화섬이라 이르기엔 역부족이다. 하지만 관매리 해변을 따라 조성된 곰솔숲은 이 땅 어느 해변이나 섬보다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고 규모도 크다. 300여 년 전 섬에 입도한 함씨가 방풍림으로 조성했다는 곰솔 소나무숲은 무려 3만여 평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그 덕에 관매도의 솔숲은 2010년 제1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인 생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해변 솔숲을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관매도의 성황림 Ⓒ섬학교

관호마을 돌담으로 이어진 마을 안길을 걷는다. 이집 저집 기웃거리는데 어느 집 마당, 돌담 그늘에 할머니 한 분 앉아계신다. 대문이 없는 집. 작은 섬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대문이 없다. 하지만 집과 집 사이에 돌담은 있다. 담장은 있어도 대문이 없는 것은 경계를 정하되 경계 없이 살자는 공동체의 약속이다. 마당 안으로 고개를 삐죽 내밀었다 얼른 돌아서려는데 노인이 발길을 붙드신다.

"시원한데 좀 쉬다 가시오."

낯선 이를 경계하여 내치지 않고 환대해주는 풍습은 작은 섬의 아름다운 풍습이다. 나그네는 이제 섬에만 남은 이 따듯한 환대가 그저 고맙다. 숙였던 고개를 들자 할머니가 먼저 아는 체한다.

"어제 같이 온 아저씨 아니요."

어제 오후 같은 배를 타고 온 할머니다. 배 안에서도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데 할머니는 나그네를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객실에 누워계셨던 듯도 하다. 할머니는 옷을 곱게 차려 입으셨다. 어디를 가시려는가.

"예수 믿으러 갈라고 그라요."

할머니는 주일 예배를 보러 가기 위해 관매리에서 오는 교회 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이 놀러와 돌담 아래 나란히 앉는다. 이웃에 사는 사촌언니가 마실을 온 것이다. 마당에서는 갓 수확한 녹두가 말라간다.

"멜치도 많이 잡고 미역, 톳, 듬북이 이런 것들 많이 해요."

대다수가 노인들만 사는 마을이지만 배를 부리는 젊은 사람들 몇 집은 멸치잡이와 고기잡이로 제법 많은 소득을 올린다.

"젊은 사람 살기는 좋지요. 대통령 월급도 그렇게는 안 나오지요. 얼마나 많이들 버는데..."

반면에 노인들의 소득은 보잘 것 없다. 노인들은 미역과 툿, 가시리, 듬북 등의 해초를 캐다 팔아서 가용에 보태는 정도다. 미역과 톳, 새미 가시리를 뜯어다 말리는 오뉴월이 가장 힘든 철이다. 그나마 할머니는 움직일 수 있으니 생활이 나은 편이다. 섬에는 거동이 불편해서 "미역도 못 따먹고 한 양반들도 많"다. 해초는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작업해서 분배하지만 작업에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의 몫은 없다.

"내가 못하게 생기면 못하제. 해 묵는 사람만 권리가 있죠."

그런 노인들은 생활보호대상자 지원금마저 없으면 살기가 힘들 것이다.

"자식들도 다들 즈그 살기도 어려운데 나라에서 안 살린다면 어쩌고 살 것이요."

밭들이 묵어가고 있지만 노인들에게는 농사 일이 힘에 부쳐 묵히고 있다. 할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미역이나 톳 양식도 하고 그랬지만 지금은 그저 마을 공동 어장의 해초만 뜯어먹고 산다. 양식을 하면서 골병도 많이 들었다.

"톳 하다 골병들고, 미역 하다 골병들고, 옛날에는 리아카도 없었어요. 미역도 톳도 머리로 이고 다니다 골병들었지."

할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수술도 못하고, 암인지도 모르고 살다가 너무 늦어버렸어. 담배, 술을 여간 좋아한 양반었어라우. 일 하다 힘들면 술, 담배 밖에 드실 것이 뭐가 있어요."

그때는 두 양주 "통발이도 하고 주낫질도 하고" 그랬다. 소득이야 지금보다 좋았지만 그만큼 고생도 많앗고 골병도 키웠다.

"아잡씨 있으면 그저까지 한다고 덤벙거려 불거인디."
노인의 고향은 업도(우데섬)라는 작은 섬이다. 상조도에서 배를 타고 간다. 고향에 가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에도 가물가물하다. 사는 피붙이가 없으니 갈 일도 없다.

"고향이라고 성제간도 없고 머하러 가겄소. 다들 서울, 목포로 나가서 사께. 그래도 섬에 사는 것보다 자주 만나져요."

마당 한 켠에는 할아버지가 중선배로 조기잡이를 다닐 때 쓰던 어구가 버려져 있다.

"중선 배 도라요."

그물을 감아올리던 도르레다. 쓸모없이 녹슬어가지만 버리지 않는 것은 애틋해서다. 그 시절이 그렇고 할아버지가 그렇다. 할머니는 그 시절 손으로 바늘대 잡고 직접 한 땀 한 땀 그물을 짰다. 그물 짜는데 쓰던 실을 꺼내 보여주신다. 할아버지는 중선 배를 타고 흑산도, 동중국해 등지로 가서 조기를 잡아왔다.

"조기 잡이 해서 자석들 갤쳤으니 더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마당에는 버리지 않은 것이 또 있다. 우물. 관매리에 상수도가 생겨 수돗물이 들어오지만 노인은 여전이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마신다.
"타레박으로 떠서 쓰면 좋아요. 기분도 더 환하고."

▲관매도 주민들의 큰 소득원이 톳 작업이 한창이다. Ⓒ섬학교

여전히 우물물을 먹는 섬사람들의 지혜

상수도 물보다 우물물이 더 달고 맛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우물만으로도 물이 부족하지 않은 때문이다. 마을은 곳곳에 우물이 남아있고 사람들은 여전히 수도보다 우물물을 더 선호한다. 예전에도 물이 부족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크게 물을 쓸 일도 없으니 우물에는 사철 물이 넘친다. 상수원에 가두었다 수도관을 통해 받아먹는 물보다 막 길어 올린 우물물이 달고 시원하다.

그런데도 많은 섬들이 상수도가 생기면서 우물을 방치해 못쓰게 된 것을 보았다. 우물물은 길러서 쓰지 않으면 썩는다. 이 나라 물정책은 철저하게 댐이나 저수지 등 상수원 중심이다. 상수원 토목공사가 끝나면 우물들은 나 몰라라 방치해 버린다. 하지만 이 섬 주민들은 상수원 물은 허드렛물로나 쓰고 식수는 우물에서 길러 먹는다. 편리함만을 쫓지 않고 우물을 보존한 이 섬 주민들의 선택은 현명했다. 각각의 집에 있는 우물만이 아니라 마을 산 밑에는 '묏뚝샘'이라는 마을 공동우물도 있다. 산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물맛이 달고 뛰어나 여전히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다. 이런 샘들이야말로 이 섬에 피가 돌게 하는 생명의 물이며 살아있는 문화재다. 노인이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준 물맛이 달다.

관매도에도 토속신앙은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아직도 관매리 초등학교 앞, 300년도 넘은 후박나무(천연기념물 212호)는 옆자리의 느릅나무, 곰솔과 함께 성황림을 이루고 있다. 이 성황림 안에는 관매도의 신전인 성황당이 있었다. 성황당(혹은 서낭당) 신앙은 옛날 이 땅의 가장 보편적인 마을신앙이었다. 마을 사람들이나 마을 앞을 지나가는 나그네들은 모두 성황당 앞에 건강과 안녕을 빌었다. 성황당은 어디서 비롯된 신앙일까. 국민대 국사학과 박종기 교수는 <새로 쓴 5백년 고려사>에서 성황당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성황당에서 성은 산성을 뜻한다. 성 밑에 파놓은 땅을 호라 하는데 황은 호에 물을 채워 적이 성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시설을 말한다. 황은 성지라고도 한다. 흔히 해자라고 하는 것이다. 성황신은 성과 황이 성 안 주민들의 생명을 지켜주는 데서 비롯됐다. 성황신은 성과 황처럼 마을을 공동체의 안녕을 지켜주는 신인 것이다. 성황신을 믿는 행위가 성황신앙이다. 성황신앙은 6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성행했는데 고려시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곳이 성황당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서낭당으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성황신앙이 국가의 공인 신앙 중 하나였다.”

관매도에서도 당제를 모실 때는 제관이 3일 동안 성황당에서 생활하며 치성을 드릴 정도로 지극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성황당도 사라지고 당제의 맥이 끊긴지 오래다. 섬 마을의 신전이던 성황당의 자리를 대신 한 것은 교회다. 교회는 섬의 유일한 신전이 되었다. 할머니도 사촌언니도 교회에 다닌다. 교회에 나가면서부터 할머니는 제사를 모시지 않는다. 하지만 벌초는 꼬박꼬박 한다. 아마도 교회에서 제사는 금했으되 벌초는 금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사도 안 지내시면서 힘들게 벌초는 왜 하세요?"
"그래도 이발은 해야 안 쓰겄소."

말씀은 그래도 할머니는 그 또한 부질없음을 안다.

"죽어서 묘 베면 뭣 한다요. 한번 죽어 불면 그만이지."

노인들은 혼자 몸으로 제사상 차리는 일도 힘겹지만 그 많은 망자들 산소에 벌초하는 일도 여간 고된 일이 아니다. 우상숭배라고 제사를 금하는 교회가 우상의 무덤 벌초마저 금해준다면 얼마나 고마울까. 노인들의 고생도 면해지지 않겠는가.

▲영광에서도 보기 드문 해풍에 말리는 진짜 굴비가 관매도에 있다. Ⓒ섬학교

“털보! 넌 누집 사우냐?”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고 큰길가로 나서려는데 골목 초입에 간판도 없는 구멍가게 하나가 있다. 마침 물건을 새로 들이는 중이다. 주인 할머니는 갈수록 장사가 안 된다고 한탄이다. 미역을 실어 나르는 짐차가 부탁 받은 물건을 목포에서 사다 주기 때문이다. 맥주고 소주고 술들도 다 목포에서 박스로 사다 놓고 먹는다. 그래도 소주 값을 물으니 "2천원"이라면서 눈을 흘긴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값만 묻는 나그네가 귀찮으신 것이다. 가게 앞에는 곱게 차려 입은 노인들 여럿이 골목에 모여 있다.

"어디 나들이들 가세요."
"주님한테 가는 중이다. 한데 너는 누구 털보냐?”

걸걸한 목소리의 할머니 한분이 신원조사를 하고자 하신다.

"먼 데서 온 털봅니다."

수염 때문에 종종 털보 소리를 듣는 나그네다.

"누집 사우냐?"

못 보던 얼굴이니 누구 집사위가 아닌지 궁금하신 거다.

"이 마을 사우가 아니라 그냥 나그넵니다."
"아이고 미안하요. 난 누집 사운 줄 알았소."
"아닙니다, 할머니. 교회 잘 댕겨 오세요."

마침 교회의 봉고차가 와서 교인들을 싣고 관매리 마을 쪽으로 사라진다. 교회 덕에 노인들은 하루 고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쉬게 된 것이다.

▲관매도의 솔숲은 모래해변을 따라 도열한 방풍림이다. Ⓒ섬학교

섬학교 제25강 <관매도> 1박2일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3월1일(토)>

07:00 서울 출발 (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25강 여는 모임
12:00 진도 도착
12:00-13:00 점심식사(진도에서 간재미회무침요리)
13:30-14:10 삼별초 항몽유적지 남도석성 탐방
15:00 진도 팽목항 출항
16:20 관매도 도착
16:30-18:30 관매도 걷기 및 일몰 감상(5km)
선착장→관호리마을→묏뚝샘(샘물마시기)→우실→꽁돌과돌묘→할미중드랭이굴→하늘다리→(유턴)→선착장→관매도해수욕장→관매리마을 숙소
19:00-21:00 저녁식사 겸 뒤풀이(솔밭식당에서 생선회와 매운탕)
21:00 자유시간 및 취침(솔밭민박. 다인실)

<3월2일(일)>

06:00 기상
07:00-08:00 아침식사(솔밭식당)
08:00-11:00 관매도 둘째날 걷기(6km)
관매리마을→성황림→셋배쉼터→장산편마을→독립문바위 입구→방아섬→장산너머마을→장산재→장산편마을→솔숲→관매리마을 숙소
11:00-12:00 자유롭게 해변산책
12:00-12:50 점심식사(솔밭식당)
13:20 관매도 출항
14:40 진도 팽목항 도착. 서울 향발. 제25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25강 관매도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섬학교 제25강 답사 참가비는 23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저 낡아가는 빈집을 두고 떠나간 주인은 또 어디서 늙어가고 있을까. Ⓒ섬학교

[4월 제주도 특집]
섬학교는 4월 4일(금)부터 6일(일)까지 2박 3일간 제26강으로 [봄특집 : 제주의 17만평 청보리밭 <가파도>와 화산섬 <비양도> 걷기]를 준비합니다. 이번 답사는 각자 항공편(또는 배편)으로 이동해서 제주공항에서 모일 예정입니다. 따라서 항공권을 예매해야 하며, 예매는 빠를수록 편리하고 이점이 많습니다. 섬학교의 <새봄 제주도 특집> 참가자는 먼저 반드시 항공편을 예매하시고 참가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관매도 저 금빛 물결에 물들고 싶다! Ⓒ섬학교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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