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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매화가 별처럼 피었네

3월의 폐사지학교

“탐매객(探梅客) 서성이는 폐사지에 매화가 별처럼 피었네.”
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는 꽃피는 3월, 제8강으로 산청 일대의 폐사지를 찾아갑니다. 3월의 폐사지에는 특히 단속사지의 정당매(政堂梅) 등 전국적으로 유명한 매화나무가 있어 매향(梅香) 넘치는 답사길이 될 것입니다. 3월 15일(토) 당일로 산청 지곡사지와 삼장사지 삼층석탑, 산청 산천재(남명매)와 단속사지(정당매), 도전리 마애불상군을 돌아봅니다.

▲산청 단속사지 정당매 꽃망울 Ⓒ이지누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3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정전수양진중대춘풍(庭前垂楊珍重待春風)>이라는 문장을 아십니까. 뜰 앞에 긴 가지를 드리운 수양버들이 봄바람이 불어오기를 진중하게 기다린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글은 글로써 읽는 것이 아니라 동짓날부터 한 획, 한 획 쓰는 글입니다. 날마다 한 획씩 그리면 모두 81획이 됩니다. 정(庭)이 열이고, 수(垂)가 여덟 획이며, 나머지 글자는 모두 아홉 획입니다. 그러니까 9글자의 획을 모두 더하면 81획입니다. 그러니까 동짓날로부터 하루에 한 획씩 긋기 시작하여 81일이 지나면 대개 3월 10일경입니다. 그날이 되면 옛사람들은 뜰에 나가 한 그루 나무를 살펴보곤 했습니다. 바로 매화나무입니다.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라는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빈 매화가 81송이가 그려진 종이를 벽에 붙여놓고 동짓날부터 매일 한 송이씩 칠을 해나가는 것이 <구구소한도>입니다. 그렇게 옛사람들은 매화와 봄을 기다렸습니다. 다행히 폐사지에 소문난 매화나무가 있습니다. 경남 산청의 단속사지에 있는 정당매(政堂梅)가 그것입니다. 여말선초의 문신인 통정(通亭) 강회백(1357~1402)이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심었다고 전합니다.

더불어 매향(梅香) 넘치는 폐사지에서 대통선사(大通禪師) 신수(神秀)에게서 비롯된 북종선(北宗禪)을 이 땅에 가지고 들어 온 신행선사(704~779)의 이야기와 함께 남종선과 북종선의 차이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전기(田琦) 작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국립중앙박물관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19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시작으로 불교를 익혔으며 폐사지와 처음 만났습니다. 90년대 초반에는 분단 상황과 사회 현실에 대하여, 중반부터는 민속과 휴전선 그리고 한강에 대하여 작업했습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2년 초반까지는 계간지인 <디새집>을 창간하여 편집인으로 있었으며, 2005년부터 2006년까지는 <불교신문> 논설위원으로 나라 안의 폐사지와 마애불에 대한 작업을,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탐사 작업을 했습니다. 2009년부터는 동아시아의 불교문화와 일본의 마애불을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고, 2012년부터 폐사지 답사기를 출간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충청도의 폐사지 답사기인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그리고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를 출간했으며, 다른 지역들도 바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2014년 3월 15일 토요일, 이날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답사일정>

서울 압구정동 공영주차장→산청 지곡사지→점심식사 겸 뒤풀이(춘산식당)→산청 삼장사지 삼층석탑→산청 산천재→산청 단속사지→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서울 압구정동 공영주차장

▲폐사지학교 제8강 답사로 Ⓒ폐사지학교

<상세일정과 답사자료>

07:00 서울 출발 (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강 여는 모임

11:00 산청 지곡사지(智谷寺址) 도착
지곡사에는 진관선사(眞觀禪師) 석초(釋超)라는 탁월한 선승이 주석했으니 지곡이라는 절 이름은 선사의 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 진관선사는 원주 거돈사의 원공국사, 합천 영암사의 적연국사와 함께 당시 선종을 이끌던 분이었다. 비록 탑비는 남아 전하지 않지만 탁본만은 남았으니 그 귀한 모습의 한 조각이나마 가늠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스님은 충청도 충주 출신이며 912년에 10월 15일에 태어났으며 4살에 이르자 마늘, 파, 달래, 부추, 흥거(興渠)와 같은 오신채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후 918년에 영암산의 여흥선원(麗興禪院)으로 출가하여 법원대사(法圓大師)를 찾아뵙자 대사가 물었다. “동자는 어디에서 왔는가?(童子何許來)” 그러자 석초는 “온 곳으로부터 왔습니다(從來處來)”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지곡사지 귀부 Ⓒ이지누

그로부터 여흥선원에 머물던 선사가 928년에는 원주의 법천사를 찾아 현권율사(賢眷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경 읽는 소리를 듣지 않고 책을 상자 속에 넣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선사는 고려 태조 23년인 940년 봄, 홀연히 배를 타고 창파를 헤치며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나 절강성의 용책사(龍冊寺)에 머물며 법을 닦았으며 6년 후인 고려 정종 1년인 946년에 돌아왔다.

그 후, 949년 광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은 숙수선원(宿水禪院)에 머물던 진관으로 하여금 지곡사로 가서 대중들을 바르게 이끌기를 바랐으니 스님은 지곡사에 10여년 가량 머물며 가람을 일구고 선법을 펼쳤다. 다시 귀산선사(龜山禪寺)와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로 옮겨 주석하던 스님은 광종 15년인 964년 9월 2일 열반의 길로 떠나셨다.

세진교를 지나 저수지를 곁으로 두고 지곡사터로 올랐지만 석초 스님의 밝은 선지식이 지리산에서 내려온 바람에 흩날리고, 남명과 그 제자들의 글 읽는 소리가 계곡에 울려 퍼졌을 지곡사의 옛 모습은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절터의 모습이 흐트러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은 금당자리에 펜션마저 들어서고 말았다. 그 펜션의 왼쪽 끄트머리 놀이터 곁에 비석을 올렸던 귀부 한 기가 옹색하게 남았으며, 또 한 기는 저수지 근처에 놓여 있을 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산음현 조에 고려의 예부상서인 손몽주(孫夢周)가 찬(撰)한 혜월(慧月)과 진관의 두 비가 있었다고 전하니 아마 지금 내가 본 귀부가 그것이리라. 그러나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몸돌이 사라진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귀부의 머리 부분이 모두 잘려져 나간 것이다. 펜션이 지어진 통에 불상대좌의 흔적 또한 가늠할 길이 묘연했으니 씁쓸하기만 했다.

▲지곡사지 귀부 문양 Ⓒ이지누

이리하여 우리는 고려 초기에 다섯 손가락에 안에 들던 선원이었던 귀한 터를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다. 늘 말하고 다시 거듭 말하거니와 가령 이곳에 보물이라도 한 점 있었다면 이리도 엉망으로 헤쳐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 탓을 할 것인가. 그것이 없더라도 귀한 곳을 귀하게 지키지 못한 것은 밝고 지혜로운 눈을 지니지 못한 우리들의 잘못일 뿐이다. 저수지 옆 평상에 앉아 있는데 간혹 낙엽이 떨어졌으며 힘 잃은 내 발길도 이내 돌아서고 말았다.(이지누)

11:40 점심식사 겸 뒤풀이(춘산식당)
12:40 식당 출발
13:00 산청 삼장사지 삼층석탑 도착
삼장사의 옛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무너져 흩어져 있던 것을 일부 수습하여 세워놓았다. 삼장사는 절 이름의 유래나 역사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밭으로 변한 주변에 건물의 기단을 비롯한 여러 석조물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쳐주는 2층 기단(基壇) 위로,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으로, 원래는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아래위층 모두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마다 기둥모양을 본떠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모서리에만 기둥조각을 해두었을 뿐 다른 꾸밈은 보이지 않는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을 두었으며, 수평을 이루는 처마 선은 양끝에서 살짝씩만 들려 있다.

5층석탑으로 추측되어 통일신라의 석탑으로서는 보기 드문 모습이며, 세부 수법에서 지붕돌의 밑면받침이 4단으로 줄어드는 등 간략화되고 약해진 모습들이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삼장사지 석조유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1호 삼층석탑

13:30 출발
14:00 산천재 도착(남명매)
1501년(연산군 7년) 경상좌도 예안현(지금의 경북 안동) 온계리에서 퇴계 이황이 태어나고, 경상우도 삼가현(지금의 경남 합천) 토동에서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년)이 태어났다. 16세기 학파 형성기에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 된 이들은 같은 해에 태어나서 퇴계는 70세, 남명은 72세까지 장수했다. 퇴계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서 이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영남학파를 바탕으로 한 이 동인 정파는 다시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되었다.

▲조식이 이황에게 보낸 편지 Ⓒ국립중앙박물관

16세기는 사회적으로 성장한 사림과 기성 정치세력인 훈구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 사화가 연속적으로 발생한 시기다. 한 세기에 걸쳐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하면서 귀족화한 훈구파와 사회개혁을 요구하면서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사림파의 격돌은 필연적이었다. 그러나 정치판의 물갈이라는 절실한 시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신파인 사림과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의 격돌은 언제나 사림이 피를 흘리는 사화로 결말이 났고, 그러한 상황은 연속되었다. 칼자루는 언제나 정치적, 경제적으로 우위였던 훈구파가 쥐고 있었던 것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진 사림인 조광조가 등장하여 성리학적 이상 사회를 위한 대개혁을 추진했지만 학문적 미성숙성과 과격성 때문에 실패하게 되는데, 이때도 정권의 승자는 중종반정의 훈구세력이었다. 훈구파의 전횡에 질려서 신진 사림에 힘을 실어주려 했던 왕도 두 세력의 대격돌 앞에서는 결국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사림이 미래라면 훈구파는 현실이었다. 왕이 추구하는 미래가 사림에게 있다 하더라도 왕은 자신의 오늘이 있게 한 훈구파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권이 훈구파에게 넘어가면 사림은 귀향하여 학문을 연마하고 제자를 키우면서 때를 기다리게 된다. 향촌 사회에서 때를 기다리던 사림이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된 것은 중종 후반기에 이르러서다. 퇴계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산천재 남명매 Ⓒ이지누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인 그 당시에 퇴계는 그 길을 걸었지만 남명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재야 지식인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산천재는 조식이 만년에 덕산에 지은 강학장소이다. 뜰에는 매화를 심고, 창의 좌우에는 각각 경(敬) 자와 의(義) 자를 써붙였다.

14:30 출발
15:00 산청 단속사지 도착(정당매)
내가 단속사터를 찾아가는 까닭은 따로 있다. 그곳에 시작과 끝이 있기 때문이다. 겨울의 끝이 있는가 하면 봄의 시작이 있고 화엄이 풀포기로 남았는가 하면 선(禪)은 바람이 되어 그를 어루만지고 있다.

살갗에 닿는 바람의 매서움이 가실 무렵 그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은 자못 크다. 책을 읽다가도 문득 그가 그립고 눈을 감으면 그 정경이 안화(眼花)가 되어 흩날리기까지 한다. 그러니 깊은 밤, 공부방에서 바라보는 하늘에 별이 빛나거나 창에 빗발이 비치기라도 하면 들썩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다. 그 마음이 파도처럼 일어도 일부러 억누르지 않는다. 비록 그것이 욕심일지라도 그 설렘을 통해 내 속에 아직 사랑이 말라버리지 않았음을 만끽하고 싶은 것이다.

▲단속사지 정당매 Ⓒ이지누

해마다 나를 그토록 들뜨게 하는 것은 한 그루의 매화나무이다. 단속사터의 금당자리 뒤편에 다소곳하게 피어나는 그 매화를 보고 싶어 안달을 하는 것이다. 그는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았으면 이미 쓰러졌을 만큼 늙었지만 아직 꽃을 피우는 일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600여 년, 그 자리에는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꽃이 피고 졌다. 탁영(濯纓) 김일손의 <정당매시문후(政堂梅詩文後)>에 따르면 그 자리에 매화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것은 600년이 넘었고 처음 심은 사람은 단속사에서 공부를 하던 통정(通亭) 강회백이다. 그러나 그 나무는 100여 년을 넘게 살다가 죽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안 통정의 증손인 강용후가 1487년에 묵은 뿌리 곁에 새 뿌리를 옮겨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김일손은 그를 두고 통정이 오른 정당문학(政堂文學)이라는 벼슬이름을 따서 ‘정당매’라 불렀다.

또 통정의 손자인 인재(仁齋) 강희안이 쓴 <양화록(養花錄)>에는 “단속사에 통정이 손수 심은 매화를 중들이 매년 북을 주고 잘 길러 가지와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이끼가 덮여 있었다. 그 밑에 아직 죽지 않은 한 자 남짓한 낡은 등걸이 있다”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 매화나무를 고깝게 여긴 사람도 있었으니 그는 꼿꼿하기 이를 데 없는 남명(南冥) 조식이다. 그가 단속사를 몇 차례나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서재인 산천재(山天齋)가 바로 이웃한 덕산에 있었으니 자주 드나들었던 것만은 분명하리라. 그가 이미 폐허가 된 단속사를 찾았던 어느 날, 마침 매화가 피었던지 시를 한 수 지었다.

절은 부서지고 중은 파리하며 산도 예와 다른데 寺破僧嬴山不古
전왕은 이로부터 집안 단속 잘 하지 못했네 前王自是未堪家
조물주는 정녕 추위 속의 매화의 일 그르쳤나니 化工正誤寒梅事
어제도 꽃 피우고 오늘도 꽃 피운다네 昨日開花今日花

그는 학문의 깊이를 퇴계 이황과 견주어 모자람이 없을뿐더러 강직하기로 나라 안에 소문난 선비가 아니던가. 그의 눈에 정당매가 지조도 없이 어제도 꽃을 피우고 오늘도 꽃을 피우는 것으로 비친 것은 강회백의 처신 때문이다. 그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 1년에 세자의 스승이 되었고 이어 밀직사사(密直司事) 대사헌(大司憲)이 된 후, 조선조 건국 후 태조 7년인 1398년에 다시 벼슬자리에 나서 동북면도순열사(東北面都巡閱使)를 지낸 인물이다.

고려가 망하였음에도 먼저 섬기던 왕을 위하여 지조를 지켜 은거하지 않았으며 더군다나 다시 조선조의 왕을 섬긴 셈이다. 그러니 시 속에서 어제는 고려를 말하는 것이고 오늘은 조선을 일컫는 것이다. 그러나 매화는 한겨울의 추위 속에서도 지조를 지키며 이윽고 눈 속에 꽃을 피워내는 강직함을 지닌 꽃이 아니던가. 남명은 선비로서의 올곧지 못한 강회백을 그가 심은 매화를 빌어 조롱한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언제부턴가 정당매를 두고 성스러운 수행자라는 뜻을 지닌 아이(阿夷)를 붙여 ‘아이매’라 부른다. 나무를 심은 주인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나무 한 그루가 그만한 세월을 견디며 꽃을 피웠으면 그는 숭고하도록 성스러운 수행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무 한 그루나 바위 하나가 묵언 수행을 하듯 덤덤한 모습으로 자리를 지켜 주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물며 절터에 붙박이로 있는 나무임에랴. 그는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과도 같은 것 아니겠는가. 그를 통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니 말이다.

삼층석탑을 에돌아 마주한 매화나무, 이제 겨우 망울이 맺혔을 뿐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내가 성급했다. 동짓날부터 여든 한 송이의 매화를 그려놓고 날마다 한 송이씩 색을 입히며 봄을 기다리던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옛 선비들처럼 그것을 그리며 때맞추어서 나서는 것이 아니니 언제나 내 마음은 한발 앞선다. 그러나 매화가 꽃을 피울 무렵은 아직 봄이 아니다. 그는 봄이 오기 전에 미리 피어 봄을 준비하는 꽃이다. 그가 운을 띄우면 비로소 다른 꽃들이 앞다투어 봄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보여주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혹독한 겨울을 견딘 나뭇가지가 움을 틔워 이윽고 꽃망울을 맺는 것이리라.

그만하면 됐다. 꽃은 보지 않아도 본 것이나 다르지 않다. 터질 듯한 꽃망울을 머금고 있는 모습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아름다우며 환한 꽃이다. 그렇기에 그는 견딤과 기다림의 미학을 함께 지닌 꽃이다. 또 꽃이 피고 나면 그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향을 즐겨야 하는 꽃이기도 하다. 이어질 듯 말 듯, 암향(暗香)이 닿는 끝자락에 서서 눈을 감으면 꽃을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나의 버릇은 끝끝내 그에게로 가지 않는다. 오히려 에둘러 그의 향기가 닿는 끝까지 거닐어 먼 곳에서 그를 떠올리는 것이다. 굳이 눈으로 보거나 듣지 못했다고 해서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눈앞에 보이지 않아 아름답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그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마을 들머리, 당간지주가 있는 아름다운 솔숲에 누워 송뢰(松籟)에 실려 오는 매향을 기다렸다. 연례행사처럼 나는 무거운 매향이 솔바람에 실려 오기를 기다린다. 이윽고 그가 느껴질 무렵 덩달아 맑은 향기를 풍기며 찾아온 사람이 있다. 그는 신행선사(神行禪師)다. 매화가 겨울 속에 미리 피어서 봄이 머물 자리를 마련하듯이 신행의 선향(禪香)은 진즉부터 단속사터에 그윽했다.

그는 734년, 나이 서른이 되자 머리를 깎았으며 운정율사(運精律師)에게서 2년 간 수행했다. 그 후 청도의 호거산에서 선법을 펼치고 있던 법랑선사(法朗禪師)를 스승으로 삼는데 법랑은 이미 당나라에서 쌍봉 도신(雙峰道信)의 법을 받고 돌아 온 선사였다. 3년이 지나 그가 입적하자 신행은 당나라로 향해 도신의 또 다른 제자인 황매 홍인(黃梅弘忍)에게 법을 물려받은 대통 신수(大通神秀)의 손(孫)제자인 지공(志空) 문하에서 선정에 들었다. 지공이 “가거라! 존경스런 인재여. 너는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서 미혹된 나루터를 깨치게 하고 깨달음의 바다를 높이 떨쳐라(往欽才 汝今歸本曉悟迷津 激揚覺海)”라는 말을 마치고 입적하자 그로부터 받은 선법을 단속사로 옮겨온 것이다.

화엄의 풀이 웃자라 나라 안을 휩쓸고 있을 때, 그의 새로운 향기를 좇아 선객들이 단속사로 찾아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아직 이 땅에 남종선의 종지를 널리 펼친 도의선사가 당나라로 향하기도 전의 일이었으니 신행의 선은 외롭고 고독한 수행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신행이 펼치던 북종선(北宗禪)은 아직 활짝 핀 선은 아니었으되 화엄의 풀밭에 뿌리 뽑히지 않을 견고한 나무 한 그루를 심는 선이었던 것이다.

그의 그것이 덩치 큰 꽃을 피우지 못했으면 또 어떠랴. 겨우내 찬바람을 견디며 이윽고 꽃망울을 맺은 매화의 아름다움처럼 신행의 선 또한 그와 같은 것이다. 신행선사가 단속사터에서 선법을 전할 때는 아직 추운 겨울이었으리라. 그는 겨우 봄이 머물 자리를 마련해 놓았을 뿐 779년 10월 21일 입적하고 말았다. 그 후에 준범(遵範), 혜은(慧隱)이 빈자리를 지켰으며 비로소 아름답게 피어난 꽃이 지증선사(智證禪師) 도헌(道憲)이다. 그는 구산선문 중 희양산문(曦陽山問)을 열었으니 그곳은 문경 봉암사이다. 그러니 어찌 빛나는 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꽃 또한 882년 12월 18일 떨어지니 최치원은 지증의 탑비에서 말한다. “아! 별은 하늘로 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에 떨어졌도다(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終).” 지증이 별과 달이었다면 신행은 하늘이자 바다였을 것이다. 꽃은 눈앞의 꽃일 뿐인데 모두 그것만 본다. 그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보는 것일 뿐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어찌 처음부터 선이 이 땅에 아름다운 꽃으로 피었겠는가. 아니 꽃뿐 아니라 꽃망울로 맺히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

앞 서 이야기했던 꽃샘바람이 그렇듯이 화엄과 선의 관계 또한 그랬던 것이다. 어찌 화엄의 부처가 선의 부처를 미워했겠는가. 아니었다. 바람이 꽃을 시샘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람을 시샘했듯이 화엄의 믿음이 선의 종지를 퍼트리려는 새로움을 시샘했던 것이다. 그 가혹한 지나침을 견디기 힘들었던 선사들은 깊은 산을 찾아 들어가면서도 결코 선을 놓는 법이 없었다. 지금 우리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아름다운 선의 모습은 그 험한 고통의 시간을 견디고 피어난 꽃인 셈이다.

▲산청 운리 야매(野梅) Ⓒ이지누

훌쩍 매화나무 곁의 저수지로 올랐다. 마을과 절터가 한눈에 보일뿐 더러 논둑에 홀로 서 있는 야매(野梅)를 보기 위해서였다. 조금 전까지 내 앞에 있던 아이매와 이곳에서 보이는 야매는 서로 다르다. 아이매는 사람의 손을 탄 것이고 야매는 그저 그대로이다. 들판에서 찬바람을 맞았건만 그는 우뚝하여 당당하다. 아이매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오래 된 것이지만 그 또한 꽃을 피우는 법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이웃해 있으면서도 꽃을 피우는 시기는 서로 다르다. 언제나 야매가 늦게 피는 것이다. 아이매가 흐드러지게 필 무렵에야 그는 겨우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저 찾는 이 드문 야매가 신행의 모습이려니 믿는다. 선종이 이 땅에 뿌리 내릴 무렵의 선사들이 그랬듯이 상상 속의 신행은 고독한 모습이니까 말이다.

그것은 야매가 꽃을 피웠어도 매 한가지이다. 꽃이 그의 쓸쓸함을 덜어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쓸쓸하다는 것이 당당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야매가 그렇듯이 내 마음 속에서 신행선사는 언제나 당당하게 말한다. “마음을 보라(看心)”고 말이다. 절터를 떠나 청계를 내려오며 되돌아 봤다. 문득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은 속 깊은 쓸쓸함을 잔뜩 머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지누)

▶단속사지 석조유물
보물 제72호 단속사지 동 삼층석탑
보물 제73호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

16:00 출발
16:30 산청 도전리 마애불상군 도착
바위 면에 새겨진 29구의 부처님들 중 수인으로 항마촉지인을 한 부처님이 한 분도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조성시기가 통일신라시대에서 벗어나는 것이지 싶다. 또한 통일신라시대가 지녔던 세련미나 탄력성은 보이지 않지만 앉음새가 단정하며 법의의 주름들은 촘촘히 밀집되어 있다. 더구나 바위 전체의 부처님을 선새김이 아닌 돋을새김으로 조성했다는 것은 고려 중기 이전으로 봐야 할 것이다. 부처님들이 새겨진 바위 자체가 잘 부서지며 떨어지는 사암류 성질을 지닌 것이어서 화강암에 새긴 것들보다는 세부 묘사나 양감이 뒤처지지만 불상 하나하나가 지닌 전체적인 균형미는 안정된 편이다.

▲도전리 마애불상군 Ⓒ이지누

조각 솜씨를 뜯어보면 여러 사람이 따로 새긴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 의해서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더더욱 흥미를 끄는 것은 부처님 곁에 제각각 ‘〇〇〇先生’이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그 글씨 또한 여러 사람의 글씨라고 보기는 힘들며 한 사람의 글씨체로 짐작된다. 곧 누군가에 의해 집중적인 관리를 받았던 흔적인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곁에 개인의 이름을 써넣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통일신라가 망하고 고려 왕조가 자리를 잡아가던 혼란기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일신라의 미감을 채 떨어내지 못했지만 생각은 이미 분방하여 부처님을 개인 기복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니 말이다.

▶도전리 마애불상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9호

17:30 서울 출발. 제8강 마무리모임
21:00 서울 도착(예정)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장갑), 스틱, 아이젠, 식수, 윈드재킷, 우의, 따뜻한 여벌옷, 충분한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폐사지학교 제8강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십시오.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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