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무현 대통령의 삶을 다룬 영화 <변호인>이 개봉 한 달 만에 관객 수 천만을 넘어섰다. 대한민국 인구의 5분의 1이다. 통상의 추세대로라면 상영이 종료되는 시점까지 영화를 본 사람의 수는 인구의 4분의 1을 넘을 것이고, 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는 자리라면 그 중 <변호인>을 본 사람이 평균 1명 정도는 있을 거라는 말이 된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가벼운 오락영화도 아니고 스펙터클한 공상과학 영화도 아닌, 대한민국 현대사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영화, 이미 완료된 성공의 서사가 아닌 현재 진행 중인 좌절의 역사를 아무런 심리적 안전장치도 없이 육성으로 드러낸 영화가 1500만의 관객 수를 향해 달리고 있다니!
영화 <변호인>의 성공은 단지 한국 영화사의 흥행 성적을 갱신하는 것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역사 교재로, 잃어버린 청춘의 회고담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 노무현에 대한 사무치는 사모곡으로, 두고두고 말해지고 들려지고 보여질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적 열망과 인간적 감성의 회복을 촉구하는 이 영화의 놀라운 성공에도 불구하고 2014년 벽두를 채우는 나라 안 소식들은 참담하고 고단하기만 하다. 불과 5개월도 채 남지 않은 지방선거의 시점까지도 이 절망적인 느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왜? 영화는 영화이고 현실은 현실일 뿐이므로?
그리움과 절망의 서사, <변호인>
영화는 사람을 바꾸고, 사람은 현실을 바꾼다. 해서 흔히 말하듯이 영화는 단지 현실의 고단함에 대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뿐이고, 영화관을 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영화를 보는 내내 끼고 있던 팝콘 상자를 미련 없이 휴지통에 던져 버리듯 감동 또한 그렇게 버리고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뇌는 컴퓨터의 하드 디스크와는 달라서 아무리 사소한 감동이라도 쉽게 지워버릴 수 없는 각인의 구조로 되어 있다.
영화적 감동과 현실적 개혁의 괴리는 감동을 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역사성과 현실성에 있다. 그는 영화 <변호인>이 보여주듯 정의의 수호자이며 약자의 대변자였다. 그것도 아주 탁월하고 비범한. 하지만 국민 <변호인>으로서의 그의 능력과 매력이 성공의 원동력이었던 시기는 딱 2002년까지였다. 이후 그의 운명은 모두가 알다시피 장애와 절벽의 파행이었다.
그의 실패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의 성공 서사에서 느끼는 것은 그리움과 비애다. 아무리 그리워도 다시 되살려낼 수 없는 이미 죽어버린 사랑이 아닌가. 사랑한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절망은 크다. 그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대체될 수 없다는 현실이 확연해질수록 그 절망도 따라서 커진다. 그래서 <변호인>이라는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움과 절망의 서사다. 그처럼 비범했던 사람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의 냉혹함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변호는 시작조차 해보지 못하고 좌절하고만 한 영웅적 인간의 실존적 불운에 대한 서사. 영화에서는 말해지지 않은 그 나머지 서사가 우리의 심정을 더 복잡한 감회에 빠뜨리는 것이다.
물론 <변호인>은 노무현 한 개인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아픔과 연대의 기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역사 안에서 역사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다. 영화의 소재가 된 불법감금과 고문의 국가폭력 사건은 벌써 33년 전의 일이지만, 오늘날에도 국가폭력의 횡포는 사라지지 않고 더 교활하고 잔인해진 형태도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 20일이 용산참사 5주기였으며, 오늘도 밀양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죽음의 항거를 벌이고 있다. 일일이 다 나열할 수도 없는 비극들이 대한민국의 당연한 일상이 되었지만, 이 많은 억울함을 대변하고 풀어줄 <변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노무현이 아니어도 된다. 그의 자리를 대신해 “이런 기 어딨어요? 이라믄 안 되는 거잖아요!”라고 외치며 대신 나서 싸워줄 누군가, 그 싸움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뼛속까지 밴 억울함의 통증이 씻은 듯이 나을 것 같은 그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영화의 몫이고 고단함은 현실의 몫이라 했던가.
민주주의, <사람>들의 정치
역사를 만드는 것은 역사 밖의 정의도 아니고, 한 줌의 약탈자들도 아니다. 역사를 되돌리는 것도 나아가게 하는 것도 모두 역사 속에서 역사를 살아내는 사람들의 발걸음이다. 스스로 흐르면서 물길을 내는 장강의 물줄기처럼 사람들은 역사에 길을 내면서 살아간다. 아름다운 발걸음으로는 아름다운 길을, 고단한 발걸음으로는 고단한 길을 만들면서 말이다. 노무현 또한 그랬다. 무겁고 정의로운 발걸음으로 깊은 발자국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가 언제나 최적의 자리에 발을 디딘 것은 아니었을 테다.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 FTA처럼, 때로는 격랑에 휩쓸리고, 때로는 균형을 잃기도 했을 테지만 그는 정의로움으로 역사의 새 길을 만든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이제 우리는 노무현과 같은 비범한 <변호인>을 다시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노무현은 절대 되풀이될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었고, 노무현답게 노무현의 인생을 살다 갔다(고 믿는다).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상실감에 빠진 남은 ‘의뢰인’들의 발걸음이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힌다고……. 비범한 <변호인>을 잃은 자리에 비범한 <경영인>을, 또는 비범한 <의료인>을 차례차례 들여 놓아도 그 빈자리는 메꿔지지 않는다. 노무현이 채웠던 그 자리는 ‘비범함’의 자리도, ‘변호인’의 자리도 아니고 바로 <사람>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사람>의 눈으로 <사람>을 보고, <사람>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했기 때문에 그는 속물 ‘변호사’가 아닌 시대의 <변호인>이 될 수 있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적확한 표현은 “사람들의, 사람들에 의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다. <사람>은 죽은 자가 아닌 살아있는 자이며, 고단함에 굴종한 자가 아닌 스스로 자유로운 자를 말한다.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는 <변호인>의 상실이 아닌 <사람>의 멸종에 있다. 시장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우리는 모두 갑을의 계약관계에 묶여 <사람>이기를 포기하도록 강요받는다. 먹고 살려면 정의도, 자유도, 민주도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이길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미래까지도 파괴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타는 목마름으로 남몰래 부르고 써야 할 이름도, 이념도, 헌법도, 절차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생존의 길이며, <사람>으로,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사람> 사는 세상을 위해, 이제 그토록 의지했던 <변호인>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스스로와 공동체의 삶을 책임지는 자유인이 되었을 때, 아이는 부모에게서 독립한다. 그리고 전지전능할 것 같았던 부모의 약점과 상실을 인정하고 포용하면서 비로소 부모를 보호자가 아닌 한 사람으로 사랑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이 <변호인>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과 애증에 매달려 있는 한, 우리는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간직해야 할 것은 오직 그의 <사람>을 보는 눈과 <사람>을 느끼는 마음뿐이다. 그는 결코 전지전능한 영웅도 아니었으며, 언제까지나 우리를 보호해줄 수 있었던 완벽한 <변호인>도 아니었다. 그는 이 시대에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었고, 가장 깊이 외로웠던 <자유인>이었을 뿐이다, 이제는 온전히 그 자신으로 인정되고 사랑받아야 하는.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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