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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서울 도심에서 대한제국과 해방공간을 만나다"

[인문학습원] 12월의 서울학교 참가 안내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 인문역사지리 전문가)의 12월, 송년 답사(제21강)는 대한제국(大韓帝國)과 일제 강점기, 그리고 해방공간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 전까지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답사는 그동안 산을 오르내리느라 고생이 많았던 서울학교 학생들에게 평지, 그것도 도심 한복판을 가로질러 동네 한 바퀴 휘돌아보는 것과 같이 부담 없는 '마실길' 코스로 잡았습니다.

▲광화문 교보빌딩 앞에 있는 비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전이다. Ⓒ서울학교

서울학교 제21강은 12월 15일(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 서울 세종로 교보빌딩 앞에서 모입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비전→황토현→성공회성당→원구단→경운궁(덕수궁)→정동교회→배재학당→정릉 터→손탁호텔 터→중명전→이화학당→러시아공사관 터→상림원 터→흥천사 터→돈의문 터→경교장→점심식사 겸 뒤풀이(한옥집)→서지 터→영천시장→독립문→모화관→서대문역사공원

▲서울학교 제21강 답사로 Ⓒ서울학교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대한제국과 해방공간의 유적>에 대해 들어봅니다.

19세기 말엽 조선의 정치상황은 안동 김씨 45년, 풍양 조씨 15년의 60년 세도정치로 왕권은 그 권위를 잃고 관리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는 극에 달하고 백성들의 피폐한 삶은 잦은 민란으로 분출되어 마침내 동학농민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렇듯 혼란스러운 국내정세를 틈타 청나라와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로 힘겨루기를 하였고 서구열강들은 조선에 대한 이권을 행사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형국이었습니다.

이때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은 조선 오백년 동안 큰 나라로 모셔온[事大] 중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와 대등한 위치로 올리려고 하였으나 갑신정변이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맙니다. 다시 갑오개혁(甲午改革)으로 중국의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開國紀年)인 건양(建陽)을 사용하였으나 일본의 반대로 무산되어버렸으며 명성황후가 청나라와 손을 잡자 조선침략이 힘들어진 일본은 드디어 낭인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고종은 그동안 머물렀던 경복궁 건청궁(乾淸宮)을 과감히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하게 됩니다.

1년 정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 독립협회와 일부 수구파가 연합하여 청나라로부터 오래 동안 지속된 사대(事大)의 동아줄을 끊어버리려고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추진하여 연호를 광무(光武)로 하고 황제가 하늘에 고하는 원구단(圓丘壇)을 세우고 1897년 10월 12일 이곳에서 황제즉위식을 올려 비로소 대한제국(大韓帝國)이 탄생하였습니다.

▲원구단은 천자가 하늘에 제를 드리는 제천단으로, 현재 황궁우 등만 남아있다. Ⓒ문화재청

그러나 열강들에게 핍박받는 국제정치적 상황은 대한제국이 제대로 발전될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회유와 협박으로 조선 영토에서의 자국의 이권을 관철시키려는 여러 가지 조약들을 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법궁(法宮)인 경운궁은 서구 열강들의 공사관 또는 선교사들의 숙소와 교회로 잘려져 나갔고 조선을 강제로 합병한 일본은 아예 경운궁을 복원이 어려울 정도로 철저하게 훼손하였습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의 발자취를 더듬는 것은 칭제건원의 황제나라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으며 그렇게 탄생한 대한제국이 열강들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잃어 갔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며, 더하여 일제강점기 때 경운궁이 철저하게 파괴된 현장도 살펴보고 해방공간에서 분단이 아닌 자주독립의 노선을 걸었던 백범 선생께서 환국 이후 거처하시다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 경교장(京橋莊)과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교수형을 처했던 서대문형무소까지 발걸음이 이어질 것입니다.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대한제국을 수립하기 위한 수순을 밟는데 먼저 경운궁 동쪽에 있는 남별궁 터에 황제 즉위식과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원구단(圓丘壇)을 만들고 그곳에서 1897년 황제에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라고 했습니다.

원구단은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제천단(祭天壇)을 이르며 천단(天壇), 원단(圓壇)이라고도 달리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제천의례(祭天儀禮)는 삼국시대부터 농업의 풍작을 기원하거나 기우제를 국가적으로 거행하였던 것이 그 시초인데, 제도화된 원구제(圓丘祭)는 고려 성종(成宗) 때부터 거행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은 천자의 나라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므로 제천의례를 할 수 없어 세조(世祖) 때 원구제가 폐지되었다가 조선 말에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비로소 천자로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봉행할 수 있게 되어 원구단이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이곳에는 황제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둥근 모양의 원구단과 신위판(神位板)을 봉안하는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皇穹宇)와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石鼓壇)을 세웠습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이곳 원구단에 경성철도호텔을 지어 그 원형을 심각하게 훼손시켰고 호텔은 지금까지 조선호텔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고 원구단은 없어진 채 황궁우와 정문인 삼문(三門), 그리고 석고단이 호텔 한 귀퉁이에 옹색하게 서 있습니다.

▲원래 경운궁이었으나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장수(長壽) 기원의 의미로 덕수궁(德壽宮)이라 칭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문화재청

그리고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해 칭송비를 만들어 기로소(耆老所, 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의 친목 및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 나이가 70이 되면 기(耆), 80이 되면 노(老)라고 하였다) 앞에 세웠는데 지금의 교보문고 앞에 있는 비전(碑殿)이 그것입니다. 비(碑)의 정식 명칭은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육순 어극 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 大皇帝 寶齡六旬 御極 四十年 稱慶紀念碑)'로 황태자 순종(純宗)이 전서체(篆書體)로 쓴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의 내용은 원구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황제의 큰 자리에 올랐으며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정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라 했으며 특히 올해 임인년(壬寅年, 1902년)은 황제가 등극한지 40년이 되며 보령(寶齡)은 망육순(望六旬)이 되어 영수각(靈壽閣, 기로소 안 어첩 보관소)에 참배하고 기로소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비로소 기로소에 들었다는 것입니다.

비를 보호하기 위해 보호각(保護閣)을 짓고 황태자 순종이 쓴 '기념비전(紀念碑殿)'이란 편액을 걸었는데 일반적으로 '비각'이라 부르는 것과는 달리 건물의 격을 높이기 위해 '전(殿)' 자(字)를 사용하였습니다. 기념비전 앞에는 도로원표(道路元標)를 세우고 조선의 도로 기점(起點)으로 삼았으나 지금은 도로원표가 조선일보사 앞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원래 세종로는 삼거리였습니다. 지금의 세종로 사거리에 '황토현'이라는 이름의 작은 동산이 있어 숭례문 방향은 길이 없었습니다. 일제가 1912년 이 동산을 없애고 숭례문까지 이어지는 길을 만들어 사거리가 되었는데, 새로 난 길이 바로 '태평로'입니다.

경운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蒙塵)을 떠난 선조가 환도하고 보니 경복궁과 창덕궁 그리고 창경궁이 철저히 파괴되어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옛집을 임시 거처로 정하고 부근에 있던 성종의 손자인 계림군(桂林君)의 집과 주변의 민가까지도 편입시켜 만든 임금의 임시 거처인 시어소(時御所)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병조판서 이항복이 이 일대를 정비하여 남쪽 울타리를 길가까지 넓히고 동쪽과 서쪽에 목책을 세운 뒤 문을 내고 다시 담장을 둘러치고 북쪽에 별전(別殿)을 새로 영건(營建)하여 비로소 궁궐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이때부터 이곳을 '정릉동(貞陵洞) 행궁(行宮)'으로 불렸으며 선조는 행궁에서 16년간 지낸 후 승하하고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에서 즉위한 후 3년 만에 전각들을 다시 지은 창덕궁으로 옮겼으며 이때 정릉동 행궁의 이름을 '경운궁'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광해군에 의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경운궁으로 유폐되었을 때는 '서궁(西宮)'이라 불렀고 광해군을 내쫓는 반정을 성공한 인조가 이곳에서 등극하고 바로 경희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선조가 거처하였던 즉조당(卽祚堂)과 석어당(昔御堂)만 남기고 경운궁에 속했던 땅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어 초라한 규모로 전락한 채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후 고종이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여 1년을 머물면서 경운궁에 많은 전각들을 다시 짓고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다시 궁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오른 고종은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을 빌미로 일본의 강력한 퇴임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게 되었고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바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고종은 일본에 의해 경운궁에 강제로 유폐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이 머무는 궁궐이라서 물러난 임금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고 칭하였는데 그때 바뀐 이름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궁궐도서관이었던 중명전.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이다. Ⓒ서울학교

덕수궁 돌담길을 끼고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에는 근대화라는 역사적인 전환시대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 경운궁의 일부가 훼손되면서 형성된 것으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열강들의 공사관과 정동제일교회, 성공회성당, 구세군 본관 등 종교시설과 배제학당, 이화학당 등 개화교육의 시설들이 그것입니다.

이 지역을 특히 정동이라고 하는 이유는 태조 이성계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라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태조 이성계의 첫 번째 부인은 태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살아서는 왕비가 되지 못하고 태조가 즉위한 후에 신의왕후로 추존되었습니다. 그런데 태조가 둘째 왕비인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하여 왕후가 죽자 도성 안에 왕비의 능을 조성하고 가까운 곳에 왕비의 영혼을 달래줄 흥천사(興天寺)라는 사찰을 170칸 규모로 지었습니다.

그런데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태조가 죽자 신덕왕후의 묘를 도성 밖 외진 곳인 지금의 정릉으로 이장하고 제사도 지내지 않으며 방치하여 일반인의 묘와 다름없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왕후의 묘가 옮겨 갔으니 흥천사도 함께 옮겼는데 170여 칸의 사찰 목재들은 중국 사신이 머무는 태평관(太平館)의 부속건물들을 짓는데 사용하였고 흥천사 동종은 영조 때 경복궁 광화문으로 옮겨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들어서면서 다시 창경궁으로 옮겼다가 고종 때 덕수궁으로 옮겨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흥천사 터는 옛 경기여고 자리와 덕수초등학교 일대로 추정됩니다.

왕후의 묘에 세워졌던 석물(石物)들도 훼손하여 병풍석(屛風石)은 광교를 중건하는 석재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땅에 묻었다고 하니 정릉 자리인 미국대사관저가 옮겨지고 그곳을 파보면 석물들이 나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신덕왕후의 묘는 옮겨 갔으나 그 이후로 이 지역을 정릉이 있었던 곳이라 정동이라 불렀으며 지금까지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미국대사 관저와 옛 러시아공사관 사이에 중명전(重明殿)이라 불리는 근대식 멋진 건물 하나가 골목 안 깊숙이 숨어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이층 벽돌건물로서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된 곳입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조선에 들어와 있던 개신교 선교사들이 살았던 곳으로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할 때 주변의 땅들을 경운궁 권역에 포함시키고 그 터에다가 궁궐도서관인 중명전을 세운 것입니다.

고종은 중명전을 짓고 도서관으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외국 사신도 알현하고 때로는 연회장으로도 이용하였으며,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되는 원인을 제공한 헤이그밀사를 파견하였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일제강점기 때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소실이면서 일본의 밀정 노릇을 했던 사교계의 여왕 배정자(裵貞子)가 한동안 살았다고 합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살았던 경교장 Ⓒ문화재청

경향신문사와 강북삼성병원 사이에는 서대문 사거리로 넘어가는 얕은 고갯마루가 있는데 이곳이 한양도성의 서쪽 대문인 돈의문(敦義門)이 있었던 곳입니다. 도성의 서쪽 대문은 처음에는 운종가와 일직선상에 있는 지금의 서울교육청 어름에 서전문(西箭門)이란 이름으로 서 있었습니다만 지대가 높아 백성들이 다니기에 불편하여 약간 아래로 내려온 곳에다가 새로 문을 내고 돈의문(敦義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돈의문을 새로 낸 문이라고 새문(新門)이라고도 불렀고 지금은 새문안교회 또는 신문로(新門路) 등 교회 이름과 도로 이름으로 그 이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돈의문 터 바로 위에는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께서 살았던 경교장이 강북삼성병원에 파묻혀 왜소하게 남아 있습니다. 경교장은 원래는 금광업자 최창학의 소유였으나 친일행위를 속죄하는 의미에서 환국(還國)한 백범 김구 선생의 거처로 제공하였습니다. 백범 선생은 이곳에서 반탁운동과 통일운동을 주도하다가 육군 소위 안두희의 총탄을 맞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해방공간에서 활동한 김구, 김규식, 이승만의 거처가 공교롭게도 동쪽과 북쪽과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백범은 서대문의 경교장(京敎莊)에서, 김규식은 삼청동의 삼청장(三淸莊)에서, 이승만은 동대문의 이화장(梨花莊)에서 길은 다르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하였습니다.

▲수많은 독립, 민주투사들이 투옥되어 고문받고 사형당했던 옛 서대문형무소 Ⓒ서울학교

서대문 골목 안에 있는 오래된 맛 집인 <한옥집>에서 김치찜과 김치찌개로 점심식사를 하고 한양의 경치 좋은 다섯 곳 중의 하나로서 연꽃이 아름답게 피었던 서지(西池)의 옛터인 금화초등학교을 지나 재래시장인 영천시장을 둘러보고 사대와 독립이 공존하는 독립문공원을 지나 독립투사와 민주인사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였던 서대문형무소를 천천히 둘러 볼 예정입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방한 차림, 보온식수, 따뜻한 여벌옷, 장갑, 모자, 우의,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서울학교 제21강 참가비는 5만원입니다.(점심식사 겸 뒤풀이비,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현장에서는 참가 접수를 받지 않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최연 교장선생님은 재미있고 깊이있는 <서울 해설가>로 장안에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는 서울의 인문역사지리기행 전문가이며, 불교사회연구원 원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서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울이 공동체로서 '가장 넓고 깊은 마을' 임에도 불구하고 그 공동체적인 요소가 발현되지 않는 '마을'이어서입니다.

남한의 인구 반쯤이 모여 살고 있는 서울(엄밀히 말하면 수도권)이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호남향우회, 영남향우회, 충청향우회 등 '지역공동체 출신으로 서울에 사는 사람'만 있지 '진정한 서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엄연한 현실이 서울의 현주소입니다.

이러한 문제인식에서 서울에 대한 인문역사지리적 접근을 통해 그곳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마을 공동체로서 서울에 대한 향토사가 새롭게 씌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역사, 풍수, 신화, 전설, 지리, 세시 풍속, 유람기 등 가능한 모든 자료를 참고하여 이야기가 있는 향토사, 즉 <서울학>을 집대성하였습니다.

물론 서울에 대한 통사라기보다는 우리가 걷고자 하는 코스에 스며들어 있는 많은 사연들을 이야기로 풀었습니다. 그 내용은 정사도 있겠지만 야사, 더 나아가서 전설과 풍수 도참에 대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저서로는 <최연의 산 이야기>가 있으며, 곧 후속편이 나올 예정입니다. 또 서울 역사인문지리기행의 강의 내용이 될 <서울 이야기>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서울학교>를 여는 취지는 이렇습니다.

서울은 무척 넓고 깊습니다.
서울이 역사적으로 크게 부각된 것은 삼국시대 백제, 고구려, 신라가 이 땅을 차지하려고 끼리끼리 합종연횡 치열한 싸움을 벌였을 때입니다. 한반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는 서울은 꼭 차지해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서울은 고려시대에는 남쪽의 수도라는 뜻의 남경(南京)이 있었던 곳이며, 조선 개국 후에는 개성에서 천도, 새로운 수도 한양(漢陽)이 세워졌던 곳입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고스란히 감당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일본에 합병되는 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곳도 서울입니다.

이렇듯 서울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역사 유적의 보고입니다. 또한 개항 이후 서구문화가 유입되면서 펼쳐 놓은 근대문화유산 또한 곳곳에 산재해 있어 서울이 이룩해 놓은 역사 문화유산은 그 넓이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깊이와 넓이만큼 온전하게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곳도 서울입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많은 문화유산이 소실되었고, 일제강점기 때 일제는 의도적으로 우리 문화를 파괴, 왜곡시켰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그나마도 동족상잔으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박정희 이후 이명박 정권에 이르기까지 개발독재세력은 산업화와 개발의 논리로 귀중한 문화유산을 무참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피맛골 등 종로 일대의 '무분별한 개발'이 그 비참한 예입니다.

이런 연유로 지금 접하고 있는 서울의 문화유산은 점(點)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모아 선(線)으로 연결하고, 그 선들을 쌓아서 면(面)을 만들고, 그 면들을 세워 입체의 온전한 서울의 문화유산을 재구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작업은 역사서, 지리지, 세시풍속기 등 많은 기록들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만, 그 기록들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보완해야 합니다.

최근의 관심 콘텐츠는 <걷기>와 <스토리텔링>입니다. 이 두 콘텐츠를 결합하여 '이야기가 있는 걷기'로서 서울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는 <서울학교>를 개교하고자 합니다. 서울에 대한 인문지리기행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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