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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맛기행에 예술기행을 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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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통영 맛기행에 예술기행을 더하다

12월의 통영학교

깊은 멋과 맛의 본향(本鄕) 통영(統營).
통영은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전혁림 선생 등 예술계의 거목들이 나고 자란 땅입니다. 또 이중섭 화백이 그의 대표작인 소 연작을 창작한 곳이기도 하며 백석 시인이 애틋한 연시를 쓴 곳이기도 합니다. 가히 '예술의 도시'라 이를 만합니다.

게다가 통영은 맛있기까지 합니다. 맛에 관한 한 통영은 경상도가 아닙니다. '경상도의 전주'입니다. 자다가도 일어나 떠나고 싶은, 여행자들을 한없이 유혹하는 도시 통영. 통영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여행자)의 12월, 제5강은 예술가들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예술기행인 동시에 겨울 통영의 맛을 느껴 보는 맛기행이기도 합니다. 답사는 12월 21(토)∼22(일)일 1박2일로 통영 일대에서 열립니다.

▲해무에 쌓인 통영 바다가 선경을 방불케 한다. Ⓒ이상희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시인, 에세이스트, 여행자이며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선생님이기도 합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등단했으며, 문화일보 평화인물 100인에 선정되었습니다. 2006년부터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500여 개)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동안 300여 개의 섬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섬들을 걸으며 섬의 문화와 풍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11년 3월부터는 통영 동피랑 마을에 거주하며 통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일도 병행해 왔고, 결과물인 <통영은 맛있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저서로 <통영은 맛있다>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어머니전>(문광부 우수문학도서) <섬을 걷다> <그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자발적 가난의 행복>(문광부 우수문학도서) <보길도에서 온 편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등 다수가 있습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통영학교를 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변방의 소도시지만 통영(統營) 사람들의 통영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사람들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항구란 뜻이지요.

통영은 예향(藝鄕)입니다.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김상옥, 전혁림, 김춘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곳이지요.

통영은 또 이순신 장군이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땅이기도 합니다. 통영은 300여 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의 사령부가 있던 군사도시였지요. 통영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 역사, 문화적 전통이 통영 사람들의 자부심을 키운 자양분이었을 것입니다. 박경리의 <토지>에도 꼬마 아이의 입을 통해 그 자부심이 표출됩니다.

"갯가라 카지마는 옛날에는 사또보다 높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명정리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놓은 사당도 있고요. 저어기 저, 왜놈들을 몰살시킨 판데목도 있고 통영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으다고요? 그래서 왜놈 서장도 보통내기가 와서는 맥도 못춘다 안캅니까?"

아직도 통영과 충무를 별개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통영과 충무는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통영의 일부가 한때 충무였던 때가 있었지요. 본래 통영은 하나였으나 1955년 통영군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은 충무시와 통영군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의 통합으로 충무란 이름은 사라지고 통영시만 남았습니다. 통영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지요. 면적 234.8㎢, 인구 14만. 바다의 땅, 통영은 250여 개(최근에는 바위섬들까지 포함해 500여 개라고도 합니다)의 섬이 있는 '섬나라'이기도 합니다.

1603년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가 두룡포란 작은 포구에 터를 닦고 1605년 세병관, 백화당 등 삼도수군통제영 건물을 지으면서 통영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군사도시 통영이 생기면서 살림을 뒷받침해 주는 12공방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통제영은 이경준 통제사부터 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300여 년간 존재했지요.

▲통영 미륵산 정상에서 본 야소골 풍광 ⓒ이상희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통영은 예향인 동시에 맛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멋은 맛에서 왔다 합니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하다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습니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풍요로워야 맛이 생기고 마침내는 음식에 멋까지 부리게 됩니다. 그렇게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통영은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래서 통영의 음식은 각별히 맛있습니다.

통영의 바다는 사철 풍성합니다. 서해바다는 겨울이면 텅 비다시피 하지요. 대부분의 어류들이 추위를 피해 남쪽 바다로 떠나거나 동면에 들어 깊은 바다 속으로 숨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동해는 어종이 단순합니다.

하지만 남해 바다는 겨울이야말로 제철입니다. 동서남해 모든 바다의 어류들이 모여드는 까닭입니다. 그 남해에서도 통영은 가장 많은 해산물들의 집산지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통영을 걸으며 통영의 맛있는 해산물 음식과 역사와 문화를 맛보고 느낄 것입니다. 통영학교는 그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맛있는 통영, 멋있는 통영. 여행자라면 누구나 통영의 맛과 멋에 깊이 중독되고 말 것입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이번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통영에서 그려진 이중섭의 소들

그림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이중섭(1916-1956)의 <소> 그림 한 점쯤 모르는 사람은 드물것입니다. 미술교과서에 <소> 그림이 실려 있고 방송 언론을 통해서도 자주 소개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이중섭의 대표작 <소> 연작이 통영에서 그려졌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이중섭은 젊은 시절부터 소에 푹 빠져 지냈다 합니다. 종일토록 소만 바라보며 보낸 날들이 많았습니다. 어느 해인가는 원산의 송도원 들판에서 끊임없이 소들을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받기까지 했을 정도입니다. 이중섭이 소를 관찰하는 동안 소들은 하나둘씩 이중섭의 몸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이중섭의 몸 안에는 드넓은 초지가 생겼고 소떼가 풀을 뜯었습니다. 이중섭은 스스로 목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중섭의 몸 안에는 드넓은 초지가 생겼고 소떼가 풀을 뜯었다. Ⓒ이중섭

한국전쟁이 나고 피난민이 되어 부산으로 제주로 떠도는 동안에도 이중섭은 소들을 키웠습니다. 자신은 굶어도 소들은 풀을 먹였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키우던 소떼를 몰고 이중섭이 통영으로 왔습니다. 통영에서 이중섭은 깨달았습니다. 제 안에 기르기엔 소들이 너무 커져버렸다는 것을. 이중섭은 마침내 기르던 소들을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풀려난 소들이 이중섭의 손끝을 타고 화폭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중섭의 화폭 위, 통영의 들판에서 흰 소도, 황소도, 포효하는 소도 마구 뛰어 놀았습니다. 통영은 어느새 소떼들 천국이 되었지요.

제주 서귀포처럼 통영도 피난시절 이중섭에게 안식을 준 땅입니다.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중섭 일가는 여러 곳을 떠돌며 전전했습니다. 부산과 서귀포 피난 생활 후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중섭은 1952년 늦봄, 통영에 와서 1954년 봄까지 2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중섭의 대표작 <흰소>와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도원> 등이 모두 통영시절 작품입니다. 이중섭은 통영의 풍경도 많이 그렸습니다. 시인은 사랑하면 시를 쓰고 화가는 사랑하면 그리게 되는 것이지요. 통영 그림으로 보아 이중섭의 통영 사랑도 깊을 대로 깊었던가 봅니다. 그래서 통영 소녀를 사랑한 백석은 <통영>이란 시를 세 편이나 썼고 통영을 사랑한 이중섭은 통영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세병관 풍경> <통영 앞바다> <통영 풍경> <통영 유원지>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 <충렬사 풍경> 등이 통영을 배경으로 한 그림들입니다.

가히 통영 시절은 '이중섭의 르네상스'였습니다. 이중섭은 동향 친구 유강렬과 통영의 화가 김용주와 초대 통영 시장 김기섭 등의 후원으로 통영에서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며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통영을 떠날 때는 감사의 표시로 김기섭에게 그의 대표작 <흰소>를 선물하기도 했다 합니다. 특히 통영 출신 화가 김용주는 이중섭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었습니다. 이중섭에게 물감과 캔버스 등 미술 재료를 공급해주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 생을 이어가는데 필수품인 쌀과 된장, 간장, 김치 등 먹거리를 책임져 주었으니 생명의 은인이지요.

통영시 항남동 241-1번지, 경남도립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이중섭은 그곳 책임자였던 유강렬의 배려로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에서 전혁림, 김경승, 남관 등과 함께 기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고 전혁림, 유강렬, 장윤성 등과 통영의 호심다방에서 <4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성림다방에서는 개인전도 열었지요. 당시는 다방이 화랑 같은 기능도 했습니다. 아래는 <4인전>에 대한 고 전혁림 화백의 회고입니다.

"장윤성이하고, 유강렬하고, 나하고, 중섭이가 모여서 그림 팔려고 한 거 아닙니까? 팔렸어! 나 그림은 서울 사는 부인이 다방으로 들어오더마는 현장에서 돈을 주고 사가고 그란께 딴 사람들이, 중섭이가 혀를 헤 내밀더만. 중섭이 <소>는 딴 사람이 샀어요. 그때 돈으로 8만원이이라고 하드나."(구술집 <전혁림 다도해의 물빛 화가>)

이중섭은 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에서 학생들에게 데생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통영 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도 이중섭에게 가르침을 받은 제자입니다. 현재 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가 있던 월드세븐랜드 건물 앞에는 이중섭이 작품 활동 하던 곳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문화마당에는 이중섭의 그림과 연보판이 세워져 이중섭을 기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중섭 화백의 초상이 새겨진 통영의 시내버스 정류장 Ⓒ이상희

이중섭은 항남동 포트극장 근처 <복자네 집>이란 술집에서 청마 유치환을 비롯한 통영의 벗들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다 합니다. <샘이집>이라는 술집에서는 다다미방 바닥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주인 할머니의 타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지요. 그 그림은 아마도 낙서 취급을 받으며 지워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통영에서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렸던 이중섭은 통영을 떠난 후 진주, 서울, 대구 등을 전전하던 중 1956년 9월 6일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간장염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었습니다. 이중섭이 통영에 살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미술사는 한결 초라해졌을 것입니다. <소> 연작을 비롯한 그의 대표작들이 그려지지 못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지요. 이번 통영 답사 길에는 이중섭이 기거하던 집을 둘러보고 통영의 벗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던 골목도 거닐어볼 예정입니다.

백석 시인과 통영, 그 죽일 놈의 사랑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통영 충렬사 건너 쌈지공원에는 백석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시비에 새겨진 시가 <통영2>입니다. 저 머나 먼 북쪽 땅 정주가 고향인 백석의 시비가 남쪽 끝자락 통영에 서 있는 이유는 무얼까요.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입니다. 백석은 생애를 통해 참으로 많은 여인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다닌 사내였지만 통영의 여자 '난'에게는 도리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통영2>는 서울 살던 백석이 난이란 여자를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 충렬사 입구 돌계단에 쪼그려 앉아 서글픈 심사로 쓴 것입니다. 백석은 <통영>이란 제목의 세 시편을 남겼습니다. 백석이 남쪽 끝 항구도시 통영에 대해 시를 세 편이나 남긴 것은 그만큼 그 여자 난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때문일까요.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1935년 절친한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이화고녀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지요.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 <편지>에서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산문 <편지>)

난은 신현중의 누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는 잘 아는 사이였지요. 백석은 내친 김에 신현중과 함께 허준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나섰습니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된 <통영>입니다. 1936년 1월 백석은 난을 만나기 위해 다시 통영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리고 맙니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통영2>입니다.

백석은 3월에도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해 또 한 번의 엇갈림, 하지만 사랑의 엇박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936년 12월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합니다. 이때의 상황은 2010년 통영시에서 발간한 <예향 통영>에 세밀히 나와 있어 인용합니다.

"1937년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서상호는 통영 출신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통영의 유력자였다.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2010년 통영시 발간 <예향 통영>에서 발췌 인용)

백석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제대로 찍힌 셈이지요. 백석의 입장에서는 친구의 배신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백석은 후일 여러 글에서 믿었던 친구에게 버림받은 아픔을 토로합니다. 그 와중에도 백석은 통영에 왔을 때 먹었던 그 시원한 대구국 생각이 났던 모양입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충렬사 앞의 백석 시비 Ⓒ통영학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은 법! 충렬사 건너 백석의 시비 앞에서 나그네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엇갈린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를 봅니다. 하긴 언제나 현실은 삶을 배신하기 일쑤입니다. 현실보다 더한 막장 드라마가 어디 있을까요. 사랑 앞에서는 국경이 없다지만 사랑 앞에서는 우정 또한 없습니다. 고금에 사랑 때문에 친구끼리 등을 돌리는 것은 흔한 일이지요. 백석의 친구 신현중 또한 난이를 연모했으니 어찌 그만을 탓하겠습니까. 친구는 사랑의 전쟁터에서 승리한 것뿐인 것을요!

백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의 실패 덕분에 우리는 백석의 그 아름다운 시편들을 얻게 됐습니다. 난과의 사랑에 성공했다면 백석은 아마 통영에 정착해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아니라 혹 선원이나 선주가 되지는 않았을까요. 우리는 빛나는 시인 한 사람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이 정작 백석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은 자명합니다. 계관 시인의 명성을 잃을지언정 연모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고 싶은 것이 남자의 마음이니까요.

겨울 보약 대구탕과 타락죽처럼 부드러운 물메기탕

통영 여행의 절반은 음식입니다. 통영은 시작부터 끝까지 맛있습니다. 통영은 어느 계절이나 맛있지만 겨울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맛을 자랑합니다. 겨울 통영은 굴과 대구와 물메기와 복어의 계절입니다. 시원한 복국과 물메기탕, 진한 생대구탕은 잃었던 입맛을 되돌아오게 하는 묘약입니다. 통영 음식문화의 대명사 다찌도 겨울이 가장 풍성하고 맛있습니다. 굴의 산지답게 어느 식당을 가나 생굴은 밑반찬으로 거저 나옵니다. 이번 통영학교 답사에서 맛보게 될 음식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요.

통영 사람들은 계절마다 통과의례처럼 꼭 먹어야 하는 제철 음식이 있습니다. 봄은 도다리쑥국이고 여름은 하모회나 장어구이, 겨울은 단연 물메기국과 대구탕입니다. 서울 사람들이 보신탕이나 삼계탕을 먹어야 여름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통영 사람들은 마치 물메기탕이나 대구탕을 챙겨먹지 못하면 겨울을 날 수 없기라도 할 것처럼 안달입니다. 우리도 통영에 발을 딛자마자 생대구탕이나 물메기국으로 지친 속을 달랠 것입니다.

한류성 어족인 대구는 겨울 대구가 최고입니다. 대구는 동서양 어디나 즐겨먹는 물고기입니다. 대구는 그 큰 입만큼이나 탐욕스럽게 먹어대는 물고기입니다. 전형적인 탐식성 어류인데 심지어 제 알이나 제 새끼를 잡아먹을 정도로 무자비한 식성의 소유자지요. 하지만 그 포악한 성질과는 달리 대구의 맛은 담백하고 부드럽습니다. 한동안 멸족의 위기까지 갔던 대구가 다시 잡히기 시작한 것은 10여 년 전부터 거제시에서 대구 치어를 방류한 덕분입니다.

물메기탕 또한 통영의 겨울 별미지요. 물메기는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인데, 동해에서는 곰치나 물곰이라고 하지요. 통영에서는 흔히 '미기'라 합니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오는데 이때가 산란철이라 살이 올라 가장 맛이 있습니다.

나는 통영의 물메기탕보다 더 부드럽고 속을 편하게 달래주는 해장국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곧잘 술병을 고친다"고 했겠지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살이 타락죽(駝酪粥, 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한 것처럼 살이 살살 녹습니다.

▲통영 다찌 상차림. 다찌는 다양한 해산물 음식을 모두 맛볼 수 있는 통영의 보물이다. ⓒ이상희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 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향토사연구소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立(ち)飲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겨울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천계(天界)의 옥찬(玉饌) 마계(魔界)의 기미(奇味), 복국

통영에서의 아침 해장은 복국입니다. 통영은 이 땅에서 복국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고장이지요. 더구나 겨울은 복이 제철입니다.

"복어는 천계(天界)의 옥찬(玉饌)이 아니면 마계(魔界)의 기미(奇味)다. 복어를 먹으면 신통하게도 체내의 불화(不和)가 사라지고 엄동설한의 추위도 잊어버리게 한다."

<미미구진(美味求眞)>이란 책에서 인용했다는 정문기 선생의 <어류박물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독이 있는 물고기들은 대체로 맛이 뛰어납니다. 한중일 세 나라만이 아니라 동남아, 이집트 사람들도 복어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위험한 물고기를 탐식합니다. 복어 중에서도 맹독을 가진 복어일수록 맛이 일품이니 그 유혹 또한 강렬합니다.

미국 FDA도 복어회를 캐비아, 푸아그라, 트뤼플(송로버섯) 등과 함께 세계 4대 진미 식품으로 정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소동파는 복어를 먹어본 뒤 "복어의 신비한 맛은 생명과도 바꿀 만한 가치가 있다"고 찬양했습니다.

복어가 독이 있는 위험한 물고기지만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면 안심하고 먹을 수 있습니다. 아가미와 알, 내장을 따내고 뼈를 다져서 물에 담가 핏물을 빼내면 무탈합니다. 더한 자극을 즐기려는 욕심이 화를 부르지요. 술꾼들에게 복어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유혹입니다. 복어 회 한 접시는 천상의 안주이고 북국 한 그릇은 술독을 푸는데 명약입니다.

요즘 통영 복국집들의 주재료는 졸복입니다. 통영 복집들이 본래부터 졸복을 썼던 것은 아닙니다. 졸복은 작아서 손질하기 성가시고 품이 많이 드는 까닭에 예전에는 잘 취급하지 않고 밀복류를 썼다 합니다. 그러나 크기는 작아도 졸복의 맛이 밀복류보다 더 깊고 더 개운합니다. 육질도 더 쫄깃하고 국물도 시원합니다. 복국으로 속을 달랬으니 이제 통영의 길을 걸으러 가 봅시다.

▲통영의 보물 편백나무 숲 ⓒ이상희

법정 스님이 출가했던 미래사와 치유의 숲, 편백숲

용화사 입구에서 출발하는 둘레길을 따라 미륵산 중턱 미래사까지 갑니다. 미륵을 기다리는 절, 미래사. 미륵산 미래사는 법정 스님이 출가한 절입니다. 대학생 박재철은 전남대 상대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고뇌하다가 1954년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고승 효봉 스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합니다. 그는 다음날 바로 통영 미래사로 내려와 부목(땔깜 담당 나무꾼)이 되어 행자생활을 시작했지요.

법정 스님의 스승인 효봉 스님(1888~1966)은 통합종단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고승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판사 생활을 하다 법복을 벗고 스님이 된 당대의 고승이지요. 미래사는 오래 된 절은 아니지만 산 속에 푹 파묻힌 모습이 더없이 고즈넉합니다. 절 주변에는 효봉암과 구산대 등이 있습니다.

미래사를 잠깐 둘러보고 이제 치유의 숲, 편백숲으로 갑시다. 나그네가 보기에 미래사의 가장 큰 보물은 건물들이 아니라 절 주변의 편백나무 숲입니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심었던 편백숲을 후일 미래사에서 매입했다 합니다. 편백숲이 암을 비롯한 난치병 환자들에게 좋다는 소문이 나 많은 환자들이 찾고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건강을 위해 찾아듭니다.

모든 나무는 상처를 입을 경우 병균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톤치드라는 물질을 뿜어
내는데 편백의 경우 소나무 등 다른 침엽수보다 세 배 이상의 피톤치드를 뿜어낸다 합니다. 그래서 편백숲의 치유효과가 뛰어나다지요.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드는 수령 60∼100년 사이가 가장 많다 하는데 일제 때 조성한 미래사 편백숲의 수령이 그 정도 됩니다. 편백숲은 모두 5만여 평. 통영의 숨겨진 보물입니다. 곧게 뻗은 편백숲을 걸으면 움츠러들었던 정신의 갈기가 곧추 서고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 겁니다.

왜구들의 영혼을 떠받들기 위해 팠다? 해저터널

해저터널 위를 흐르는 좁은 해협은 통영운하입니다. 통영의 야경은 어느 항구도시보다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야경은 상당 부분 통영운하에서 비롯됩니다. 미륵도와 통영을 잇는 통영대교와 충무교 두 다리 아래 바다가 통영운하입니다. 오랜 옛날 통영반도와 미륵도는 하나로 이어진 땅이었습니다. 미륵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였는데 뱃길을 단축시키기 위해 미륵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목을 파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륵도는 섬이 되었습니다. 충남 안면도와 같은 경우입니다.

통영운하 아래에 뚫린 해저터널은 1931년 7월 26일 착공하여 1년 4개월만인 1932년 11월20일 완공됐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제는 해저터널을 파기로 한 것일까요. 그 당시에도 미륵도와 통영 사이에는 나무나 돌로 된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대체하고 새 다리를 건설하면 될 터인데 굳이 해저터널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도 야담이 전해집니다. 해저터널 부근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수없이 빠져 죽은 곳입니다. 일제는 이곳에 다리를 놓게 되면 그들 조상들의 영혼을 밟고 다니게 되는 형국이기 때문에 터널을 팠다고 합니다. 터널을 파고 바다 밑으로 다니면 오히려 자기 조상들의 영혼을 받들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다리를 놓지 않고 해저터널을 팠다는 것이지요.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수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동피랑 마을은 가파른 비탈에 들어선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습니다.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얼마 전(10월 26일) 동피랑 마을에 안철수 대통령 후보가 다녀갔습니다. 경남 순방 길에 들른 통영에서 오로지 동피랑 마을만을 방문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안 후보는 주민들과 간담회에서 동피랑을 "공동체 복원의 모범사례"로 꼽으며 "진즉부터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들에게는 앞이 아니라 옆과 뒤를 돌아보는 공동체 삶이 더 시급하다"며 "동피랑 마을가꾸기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했습니다. 개발의 바람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대선 후보들에게도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미 동피랑은 이 나라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가 된 것이지요.

▲동쪽 벼랑에 있는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통영보다 더 유명해졌다. ⓒ이상희

동피랑은 본래 산이었습니다. 48.5m의 야산에 불과하지만 동암산(東岩山)이라는 번듯한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지요.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 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 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세병관. 통제영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이상희

팔만대장경을 보호한 천년의 칠, 옻칠미술관

한국 옻칠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청동기시대 옻칠 유물도 출토된 바 있습니다. 고구려나 낙랑, 백제 고분, 경주의 천마총 등에서 출토된 옻칠 제품은 수천 년을 견디고도 그 빛이 변함없습니다. 도료로 쓰이는 옻나무의 수액을 옻칠이라 합니다. 통영은 옻칠 공예의 본고장이지요. 삼도수군통제영 12공방 중 상하 칠방에서 나전칠기를 생산했었습니다. 그 전통이 400여 년 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온 것입니다. 사라져버린 문화재가 아니라 여전히 전승되고 있는 문화라 그 가치가 더욱 큽니다.

통영에서는 어느 집을 가나 나전칠기 공예품 한둘쯤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나전칠기의 고장답습니다. 통영에는 옻칠을 현대미술과 접목시켜 옻칠회화라는 새로운 예술 장르를 만들어낸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옻칠미술관의 김성수 관장입니다. 옻칠미술관은 초승달 같은 미늘고개 부근에 김성수 관장이 사재로 건립했습니다.

옛날에는 옻이 진귀한 칠이었습니다. 그러니 특별한 곳에만 썼습니다. 명품 중에 명품만 썼습니다. 그렇게 귀한 칠이다 보니 옻칠 제품은 고가입니다. 그만큼 소비층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판매가 쉽지 않자 생활고에 시달리던 옻칠 장인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옻칠 대용으로 쓰는 카슈칠이었습니다. 한동안 나전칠기에도 옻이 아니라 이 카슈칠을 사용했습니다. 사실은 칠기가 칠기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카슈칠은 너무 역한 냄새가 납니다. 사람들이 이 냄새 때문에 칠기 제품을 싫어했습니다. 카슈칠은 다시 부흥할 듯하던 나전칠기 공예의 몰락을 재촉했습니다.

옻칠은 반영구적 재료입닌다. 보존성이 매우 뛰어나지요. 고려시대 대장경을 보관하는 경함도 옻칠을 했습니다. 몽고 침입 시절 대장경을 옻칠한 경함에 넣어서 땅속에 숨겼어도 썩지 않고 보존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려시대의 나전칠기 작품이 한국에는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일본,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 반출되어 있습니다.

목기에 옻칠을 한 것은 곰팡이나 습기에 강한 방충, 방습 효과 때문입니다. 옻칠 그릇에 음식물을 담아서 배탈이 난 적이 없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과거 제사를 모실 때 더운 계절에도 옻칠한 제기를 사용하여 음식을 담아두면 오래 노출시켜도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항균 작용이 강했다는 증거지요. 일본 사람들이 옻칠 기술을 발달시킨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일본은 옻칠 그릇을 써서 전염병을 예방했습니다. 옻칠미술관에서는 옻칠 회화를 비롯한 다양한 옻칠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공원, 평화의 의미를 묻다

이순신공원은 한산해전의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만들어진 공원입니다. 한산 바다의 전망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선조 25년(1592)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연합하여 왜군과 일전을 치릅니다. 이순신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바다 견내량해협은 좁고 얕아 전투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왜적을 큰 바다로 유인해 격파할 작전을 수립하지요.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오자 갑자기 학익진을 펼치고 대포와 화살을 쏘아대며 왜적을 초토화시키는 대승을 거둡니다.

한산도 전투에서 왜군의 총대장은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라는 장수였습니다. 육전에서 그는 3천 병사로 조선군 5만 명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자였지요. 당시 함포는 조선이 절대적인 우세였지만 화약에 불을 붙여 철환을 날리는 함포 공격은 사이 간격이 너무 길었습니다. 배 숫자가 적은 조선으로는 불리한 조건이었지요. 와키사카는 조선수군이 배 숫자를 많게 보이게 하기 위해 일자진을 펼칠 거라 예상했습니다. 숫자가 월등한 자신들이 일자진을 깨버리고 포위해 들어가면 절대적으로 우세할거라 확신했다는군요.

그러나 이순신은 일자진이 아니라 학익진을 펼쳤습니다. 조선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습니다. 판옥선은 직사각형 모양의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인데 앞뒤로 2문, 옆으로는 8문씩, 모두 20문의 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판옥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에 360도 회전이 가능합니다. 앞쪽에서 포를 쏘면 배가 바로 돌면서 옆쪽 포문에서 연달아 포탄을 쏟아냈고 다시 뒤쪽, 옆쪽으로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1척이 앞쪽에서만 포를 쏘는 전함 10척의 몫을 해냈지요.

그런 전함들이 학날개처럼 펼쳐져서 왜선을 향해 연달아 포를 쏘아대니 왜선은 감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1592년 7월 8일 조선군 연합함대 55척이 거의 손실이 없이 왜군 전함 73척 중 46척을 부수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둔 것은 전적으로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에 힘입은 바 크다 합니다.

학익진 전법은 함대함 진법의 전형이고 근대적 전법의 시작이라 합니다. 한산대첩의 또 하나 의미는 전면전 최초의 승리라는 점입니다. 한산대첩 전에도 전투에서 연승했지만 그것은 기습전이었지요. 전면전을 통한 한산대첩 승리로 조선군은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으니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은 아주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순신공원 앞 한산 바다는 비할 데 없이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순신공원에서 한산해전의 승리에 도취하기보다는 이 바다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길 기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통영운하 야경.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이상희

통영학교 제5강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21일(토)>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 영주차장에서 <통영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5강 여는 모임
11:00 통영 도착
11:30-12:30 점심식사(시원하기가 일품인 통영의 겨울 별미 생대구탕 요리)
12:50-13:20 윤이상기념관 탐방
13:40-15:40 통영 미륵산 둘레길과 편백숲 걷기(4km)
용화사→띠밭등약수터→미래사→편백숲→오솔길→용화사
16:00-16:40 박경리기념관 및 묘소 탐방
17:00-17:30 해저터널 걸어서 건너기
17:40 숙소 도착 및 방 배정(여객터미널 앞 <캘리포니아호텔>, 다인실)
18:00 이중섭 화백 살던 집 탐방
18:20-20:20 저녁식사 겸 뒤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제철 해산물 요리의 향연)
20:20 자유시간 및 취침

<12월 22일(일)>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통영 최고의 복국집에서 복국, 해물된장, 물메기탕 중 택1)
09:00-11:00 가볍게 통영 걷기
동피랑 마을탐방→ 청마거리→세병관→→백석시비
11:10-11:50 이순신공원 산책
12:00-12:50 옻칠미술관 관람
13:00-14:00 점심식사(제철 생선회와 장어구이, 해물뚝배기 등 통영식 한정식)
14:00-15:00 중앙시장에서 장보기 혹은 강구안 거북선 산책
15:00 제5강 마무리 모임. 서울 향발

▲통영학교 제5강 답사로 약도 ⓒ통영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따뜻한 여벌옷, 윈드재킷, 장갑, 우의(+접이식 우산), 스틱, 물통,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강제윤 글, 이상희 사진 <통영은 맛있다>를 참고하시면 통영 답사의 의미가 더욱 깊을 것입니다.
☞<통영은맛있다> 바로가기 http://www.yes24.com/24/goods/9201491?scode=032&OzSrank=1

▲숨막히게 아름다운 통영의 일몰 ⓒ이상희

통영학교 제5강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3만원입니다. 좌석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통영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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