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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는 곧 유럽"과의 대결, 피할 수 없는 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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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는 곧 유럽"과의 대결, 피할 수 없는 관문!

[프레시안 books] 어니스트 겔너의 <쟁기, 칼, 책>

새로 번역되어 나온 어니스트 겔너의 <쟁기, 칼, 책>(이수영 옮김, 삼천리 펴냄) 제목을 보고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를 떠올리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총, 균, 쇠>가 8년 전 번역되어 상당한 주목을 받았으니, 겔너 책 제목이 이것을 흉내 낸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절대 그렇지 않다. 겔너 책이 원래 1988년에 나왔고, 다이아몬드 책은 1999년에 나왔다. 학문적 권위도 겔너의 책이 훨씬 더 무겁다. 나는 다이아몬드가 겔너의 책 제목을 흉내 낸 것이라고 짐작한다.

책 내용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근년 자라나 온 학계 풍조 하나를 지적하고 싶다. 사회과학 연구자가 역사학의 거대담론을 제시하는 풍조다. 이 풍조가 처음 뚜렷이 드러난 사례로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근대 세계체제>(김명환 등 옮김, 까치글방 펴냄) 첫 책(1974년)을 기억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큰 주목을 받은 <리오리엔트>(이희재 옮김, 이산 펴냄)의 안드레 군더 프랑크를 비롯해 사회과학 여러 분야 연구자들이 이 방향으로 작업을 진행해 왔다. 심지어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는 정치학자까지 있지 않았는가.

▲ <쟁기, 칼, 책 : 인류 역사의 구조>(어니스트 겔너 지음, 이수영 옮김, 삼천리 펴냄). ⓒ삼천리
<쟁기, 칼, 책>의 부제가 "인류 역사의 구조"다. 왜 사회인류학자가 사회의 구조 아닌 역사의 구조를 탐구한 걸까? 역사학자가 역사 공부하고 사회학자가 사회 공부하는 분과 학문의 원리가 어떤 한계에 도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9세기 이래 형성된 사회과학 여러 분야는 학문의 분과 현상이 일어나기 전 전통 시대에 역사학이 다루던 주제들을 넘겨받아 새로운 연구방법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연구방법이 '근대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환경의 큰 변화는 연구방법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월러스틴 이래 사회과학자의 거시역사학 시도가 늘어난 것도 근대체제 동요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겔너가 제시하는 역사의 구조는 수렵-채집, 농경, 산업의 세 개 문명 단계로 이뤄지는 것이다. 인류학에서 정설이 되어 있는 발전 단계론을 역사의 시대 구분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가장 뚜렷하고 어쩌면 조금은 과장된 윤곽선으로 인류 역사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것"(11쪽)이라 하고, 자신이 제시하는 "수렵채취, 농업 생산, 산업 생산의 3단계 구성이 다른 3단계론보다 훨씬 유용하고 그런 의미에서 유효하다고 생각된다."(20쪽)고 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 방법이 연역적인 것이라며 이렇게 설명했다.

역사의 배경을 그려내는 일은 단순한 묘사로 되는 일이 아니다. 현실이란 너무나 풍성하고 다양한 것이라서 선택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내겠다고 달려들어서는 작품 완성은커녕 작업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최선의 판단력을 발휘해서 인류 역사에 작용하는 중요한 기본 요소들을 선택하고 그 요소들이 함께 담고 있는 의미를 뽑아내야 한다. 그렇게 그린 그림이 존재하는 기록에 부합하고 관련된 의문들을 밝혀낸다면 잘 된 그림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전제로 삼았던 판단을 재검토할 필요가 분명하다.(12쪽)

그가 선택한 요소가 생산(production), 억압(coercion)과 인식(cognition)이고 제목의 쟁기(plough), 칼(sword)과 책(book)은 이 요소들의 상징이다. 세 요소는 역사 속에서 재화와 무력과 이념의 형태로 나타났다. 대단히 의미가 큰 요소들이고, 따라서 그 검토를 통해 겔너가 뽑아내는 해석에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가 많이 들어있다.

그런데 그렇게 그려낸 '그림'이 과연 "존재하는 기록에 부합하고 관련된 의문들을 밝혀"내는가? 내게는 그리 석연치 않다. 역사학도에게 익숙한 사실주의 화풍이 아니다.

겔너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자들이 꺼내는 역사 담론에서 사실성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 같다. 그렇다 해서 이 아쉬움 때문에 그 담론이 가치를 못 가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주의 아닌 화풍이 현실의 의미를 더 잘 보여주는 측면도 있다.

▲ <총, 균, 쇠>(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김진준 옮김, 문학사상사 펴냄). ⓒ문학사상사
겔너의 담론을 화풍에 굳이 비교한다면 인상주의라 하겠다. 글머리에서 마침 이름이 나온 다이아몬드 같으면 만화와 같은 화풍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이아몬드의 책은 전문 지식이 없는 일반 독자에게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한편 겔너의 책은 역사학 전문가들에게도 두고두고 음미할 문제점을 많이 불러일으켜 준다.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점이라도 겔너가 기본 요소들에 입각해 연역해 내는 엄밀성을 보면 다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마치 우리가 익숙한 자연광 아래서는 포착할 수 없는 이미지를 적외선 아래 알아볼 수 있는 것과 같다. '우파의 대안'으로서 파시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도 그런 예의 하나다.

앞바다의 섬나라와 본질적으로 유럽 바깥에 있는 두 세력이 결국 이 선택지를 파괴한 것은 지리적, 역사적으로 우연한 사건이었다. 전쟁의 결과는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초기에 우세했던 측의 자만심과 어리석음, 그리고 정치적 의미가 없는 지나친 조치들이 아니었다면 다른 결과가 빚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것은 유럽의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가능한' 운명이었을 뿐이다.

이 선택지와 그 지적 기반을 고찰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다. 그것을 외계로부터 비롯된 특이 현상처럼 바라보는 것은 게으른 태도다. 저명한 논자 중에도 이 방향의 주장에 가까이 간 사람들이 있었다. 사실 이 선택지는 유럽 발전을 위한 자연스러운 의제로 존재한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오만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이 선택지를 구성한 요소들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았고, 1945년에 패퇴한 특정 모델의 사망 선고는 믿고 싶으면 믿어도 좋다. 그러나 그것을 구성했던 어느 요소에도 고려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311쪽)

두 차례 인용 모두 번역본에 따르지 않았다. 번역의 한계를 잠깐 언급해야겠다.

겔너의 텍스트가 사실주의 화풍이 아니라고 위에서 말했거니와, 그의 글은 읽기 까다로운 글이고, 그 까다로움 속에 가치가 있는 글이다. 그의 글을 옮기려면 겔너와 토론할 수 있는 수준의 전문가가 주관적 해석을 통해 독자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이 바람직하겠다.

이제 나온 번역본에는 결함이 많다. 그래도 이만큼 읽을 만한 글로 옮겨놓은 것은 역자의 능력과 노력이 뛰어난 덕분이다. 일반 독자들이 겔너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는 충분한 도움이 될 것이다. 다만 리뷰어 입장에서는 더 엄밀한 파악이 필요했다. 앞뒤를 잘라 갖다놓는 인용문의 경우, 번역본 그대로는 독자의 이해가 좀 어려울 것 같았다.

책 내용 중 어느 대목을 굳이 짚어 설명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익숙지 않은 새로운 의견들이 많이 들어 있고, 어느 독자라도 그중에서 중요한 것을 많이 찾을 수 있겠지만, 관점 전체가 하나의 강력한 역사관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파시즘을 설명하면서 그가 말한 대로 그의 관점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지 않은" 느낌이다.

이런 느낌을 주는 분명한 이유가 하나 있다. 역사적 사건들 사이의 인과관계를 최대한 아껴서 보는 경향, 중요한 현상들의 필연성보다 우연성을 크게 보는 경향이다. 여러 사건과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강하게 내세우지 않으니 전체적 관점이 명확하지 않고, 사실주의보다 인상파 화풍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모호한 것 같은 이 관점이 특별한 가치를 갖는 것은 현대 사상계가 처해 있는 맥락 안에서다. 겔너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큰 줄기의 하나가 그의 유럽중심주의를 향한 것이다. 근년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 그 탈피를 위한 노력이 늘어나 왔고, 나 자신 이 노력에 동참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 방향의 담론이 아직 정교하지 못하다. 목욕물과 씻은 아기를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겔너의 역사관을 결론만 놓고 본다면 유럽중심주의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의 유럽중심주의는 19세기 이래 별다른 성찰과 고민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전통적 유럽중심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의심할 만한 것을 철저히 의심해서 확실한 건더기만 남겨놓은 미니멀리즘 취향의 유럽중심주의다.

유럽중심주의를 제대로 극복하려면 거쳐 가지 않을 수 없는 최후의 보루로도 보이고, 그 청산을 위해 준비한 마지막 대차대조표로도 보인다. 유럽중심주의를 지키려는 이들보다 벗어나려는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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