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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공사(KBS)의 한 프로그램에 진행자를 바꾸는 문제를 두고 한바탕 소동이 났다. 외부 사람은 참 이해하기 어렵다. 아무리 그래도, 진행자를 바꾸면서 담당 피디와 상의도 하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인사권자의 고유한 권리는 도대체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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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일이 하도 많아 그러려니 하지만, 며칠 전 검찰의 감찰이라는 것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외부 사람으로 감찰위원회라는 것을 열었다는데, 결정은 '마음대로' 했다고 한다. 위원회는 그저 '물어는 봤다' 식의 정당화 기능에 동원되었을 뿐이다. 언젠가 민주주의 비슷한 세례를 받은 결과인 그 형식은 허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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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있다. 모두가 그렇게 오래 반대해도 경제 부처의 의료 서비스 산업 짝사랑은 끝이 없다. 얼마 전에는 부총리가 주저하지 않고 '결단'을 내릴 때라는 표현을 썼다. 이제는 보건복지부까지 나서 돈벌이용 원격 의료를 추진하겠다고 한다. 보통 사람들의 걱정, 반대, 여론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다. '나를 따르라' 식의 발전주의 국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겉으로는 이 세 가지가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영역이나 양상은 제법 다르다. 하지만 어쩌면 같은 흐름을 상징하는 사건들인지도 모른다. 바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처한 궁핍한 현실.
요즘 들어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대충 봐도 크게 틀렸다고 부인할 자신이 없다. 한 가지 사건만으로도 설득력이 충분하다. 권력기관이 대놓고 선거에 개입한 것도 그렇지만, 법을 어긴 책임을 따지고 처벌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공안과 종북 몰이도 보태야 한다. 그래도 30년 가깝게 조금씩 쌓아왔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은 쓰레기 꼴이 되었다. 이념의 자유로운 시장에 맡기자는 소리는 사치라 치자. 이젠 보수의 금과옥조인 '법치'의 가치조차 우습게 여기는 것 아닌가 싶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법외 노조로 만든 희한한 결정이 대표 격이다.
국가를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는 통치의 '사사화(私事化)'는 더욱 심해졌다. 여론 재판부터 해 놓고, 법 너머까지 법을 끼워 맞추는 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가 말한 새로운, '전도된 전체주의'를 떠 올리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이것을 민주주의라 말할 수 있을까?>(셸던 월린 지음, 우석영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그래도 국회나 검찰, 정당 같은 것은 여러 사람의 관심 속에 있다(피상적이라 하더라도). 답답하기 짝이 없지만 일부 언론의 일탈과 전횡은 겉으로 드러나기라도 한다. 가끔 눈치는 봐야 하니 알아차리기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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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교묘하고도 은밀한 후퇴가 더 아프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은 여기에 더 크게 영향을 받으니 말이다. 그런 줄도 모른 채 민주주의는 물러서고 삶의 토대는 곳곳에서 허물어진다.
집권 세력의 반민주주의는 그 자체로도 그렇지만 널리 파급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현실의 후퇴는 일상적으로 행사되는 권력에 시그널로 작동한다. 직접 말하고 강제하지 않아도 그렇다. 눈치로, 알아서, 시대의 흐름을 읽는다. 권력이 작동하는 시장적 방식이다.
아마도 관료들이 가장 민감할 터. 이들만큼 최상위 권력층의 시그널에 민감한 집단이 또 있을까. 그나마 형식은 남아 있던 여론, 참여, 민주 등등은 벌써 잊었다. 밀양 송전탑 공사에서 보듯, 가장 격렬한 갈등 상황 속에서도 참여는 '공작'이나 동원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슨 위원회, 자문회의에 이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쯤에서 성찰이 필요하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유신으로의 회귀, 공안 세력의 복귀 때문인가. 대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벌써 한참 전부터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경향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아프게 확인한다.
이 정부만으로 돌리면 너무 좁다. 이명박 정부만의 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 가운데서도 한두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일은 특히 위험하다. 사람의 동기와 지향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의인화'해서 심리와 행태를 찾는 일은 핵심을 벗어난다.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의 후퇴는 경향적이다. 마녀 사냥보다는 구조와 기제(메커니즘)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더 정직하게 이야기하자. 이런 사태를 과연 후퇴라고 할 수 있을까. 혹 민주주의는 우리 사회에서 채 자라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제야 민낯을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래 모습이 그런 것이라면 할 일은 분명하다. 다시 씨를 뿌리고 길러야 한다. 사실, 후퇴인가 아예 없었던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민주주의의 토대를 쌓는 일이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현상이 후퇴이든 부재이든 꼭 같다.
실천의 공간과 국면은 실로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거시적일 수도, 미시적일 수도 있다. 그 오래된 구분을 따르자면, 중앙도 지역도 모두 제외되지 않는다. 토대가 아예 허술한 만큼, 작은 실천도 허투루 여길 수 없다.
그러나 집중하자면, 다시 '작은' 민주주의를 주목하자고 하고 싶다. 각 사람이 만들고 실천하는 것으로야 다른 대안이 없다. 물론 전망은 드넓어야 하고 높고 낮은 곳을 모두 꿰어야 할 것이다. 보편성에 흐름을 대놓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 없이는 '깊은' 민주주의도 없다.
이쯤에서 건강 이야기를 좀 하자. 건강은 작은 민주주의를 실천하기에 더 없이 좋은 주체이자 또한 객체이다. 건강을 단지 생물학적 현상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으로 보면 더욱 그렇다. 빈곤과 교육, 직장과 비정규직 등의 사회적 요인은 체질과 유전, 팔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어느 사람 치고 건강에 무관한 사람이 없다는 점도 민주주의의 힘을 실감하는 데에 좋은 조건이다. 그러니 지역과 학교, 직장에서 건강과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곧 민주주의의 시험장이자 훈련장이 될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사태를 이해한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지나간 진주의료원 논란을 빼놓을 수 없다. 그 비슷한 일은 여러 군데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지방 의료원의 구조 조정 논의는 관료와 지방 정치의 독점을 깨지 못하고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과 직결된 내년도 예산도 '그들'끼리 논의되는 것으로 끝이다.
영리 병원, 의료 서비스 산업, 원격 의료와 같은 문제는 더욱 더 깊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이되, 제대로 판단하고 관료적 결정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 논의, 심사숙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작은 민주주의가 더 크게 넓게 그리고 깊게 확장되어야 한다.
소득과 교육의 불평등, 비정규직과 같이, 간접적이지만 강력한 건강 효과를 가진 요인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일이지만 또한 정책과 구조의 일이기도 하다. 이런 일에 민주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결과를 얻고 말고를 떠나 그 자체로 삶을 더 '좋게' 만든다.
우선은 전화나 이메일, 댓글달기와 같은 개인 의견을 표시하고 요구하는 것이 첫 걸음이다. 더 적극적이 되면 협동조합이나 지역 공동체, 노동조합, 소비자 조직, 시민 단체 등이 현장이 된다. 이렇게 해서 시민 사회나 사회 '권력'이 튼튼하게 만들어질 수 있다.
마침 좋은 시도가 하나 있어 다시 소개한다. 서울에서 시민들이 모여 건강권의 기준과 내용을 만드는 모임이 기획되었다(☞관련 기사 : 쪽방 주민 건강권, 국민 참여 재판처럼 풀면 어떨까?). 건강과 권리, 빈곤, 책임 등의 문제를 민주주의의 원리를 바탕 삼아 논의할 것으로 기대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민주주의를 확장하는 중요한 시도가 될 것으로 믿는다. 이참에 새로운 참여 경험을 쌓는 것도 생각해 볼 일이다.
전체주의의 분위기가 느껴질수록 민주주의는 더욱 일상의 문제가 된다. 어떤 종류의 집중된 권력이든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공모자-시민의 지지 없이는 전체주의가 횡포를 부릴 수 없다. 앞에서 인용한 셸던 월린의 말을 되새긴다.
더 여러 곳에서. 더 많은 사람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작은' 민주주의를 상상하고 실천하자.
<프레시안>은 시민건강증진연구소가 매주 한 차례 발표하는 '서리풀 논평'을 동시 게재합니다. (사)시민건강증진연구소는 "모두가 건강한 사회"를 지향하는 비영리 독립 연구기관으로서,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의 싱크탱크이자 진보적 연구자와 활동가를 배출하는 연구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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