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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이 시각장애인에게 손해배상 소송 당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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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이 시각장애인에게 손해배상 소송 당한 이유

[시민정치시평] 생색내기 웹서비스에 우는 시각장애인들

결혼한 지 2년이 돼가지만, 나는 아내와 마트에 간 적이 별로 없다. 대체로 인터넷 배송 시스템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워낙 편리하게 먹을거리를 주문할 수 있어서 굳이 장을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트에서 식료품을 구입하는 일 뿐만이 아니다. 대학 수강신청이나 귀향 열차표 예매 경쟁의 성패 역시, 얼마나 재빠르게 '클릭질'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오프라인 서점에 가는 일도, 음반매장에 가는 일도 갈수록 뜸해진다. 이제 모든 것이 웹(web)에 있다. 불과 십여 년 동안 이루어진, 그야말로 커다란 변화다.

그런데 웹에서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됐다는 건, 바꿔 말하면 웹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줄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평균적 인간의 삶에서 인터넷을 뺀다면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어렵다. 웹에서 소외되면 일상을 온전히 이끌어나가기 어렵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시각장애인들에겐 어떨까. 비장애인들에게 점점 편리해져만 가는 이 세계가 그들에겐 오히려 점점 불편하고 힘든 곳이 돼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들은 현실에서보다 더 웹에서 소외되고 있지는 않을까.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인터넷 공간에서 시각장애인들은 현실에서보다 더 철저히 고립된 채 주변화돼 왔다. 인터넷 사이트의 게시물을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스크린 리더기를 이용하지만, 상당수 웹사이트가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아 무용지물이 될 때가 많다. 줄글을 스크린 리더기로 읽어주더라도 중요한 그림이나 사진, 표에 대한 설명이 없어 게시물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부지기수다.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어야 한다는 웹의 기본 정신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아직까지 딴 세상 얘기다.

'웹 접근성(web accessibility)'에 대한 논의는 인간의 삶에서 웹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본격화됐다. 웹의 기본정신을 지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확산되면서 누구든 웹에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명징한 요청이 공감대를 얻어간 것이다. 외국에서는 이미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된 소송이 적지 않다. 미국시각장애인연합회(NFB)는 지난 2006년 미국의 유통업체 타깃이 웹 접근성 의무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600만 달러(약 70억 원)를 배상받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당시 한 시각장애인이 웹 접근성을 준수하지 않은 조직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벌인 일은 유명하다. 그 역시 이 소송에서 2만 호주달러(약 2400만 원)를 배상받았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이제는 웹 접근성 준수가 '의무'가 됐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따라 2013년 4월 11일부터 공공기관은 물론이고, 기업들도 모두 웹 접근성을 준수해야 한다. 웹 접근성을 보장하지 않을 경우 과태료가 부과될 뿐 아니라 형사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시각장애인들과 국내 굴지의 항공사 대한항공 사이에 중요한 소송이 있었다. 시각장애인 10여 명이 대한항공이 웹 접근성을 준수하지 않은 데 대해 장애인차별금지법상 책임을 묻겠다며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이들이 소송을 통해 대한항공에 요구한 내용은 △비장애인들이 웹사이트에서 얻는 것과 같은 정보를 동등하게 얻을 수 있도록 웹사이트를 개편하라는 것, △지금껏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은 데 대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것이었다. 법원은 이 소송을 조정절차로 넘겼고, 여기서 확정된 내용에 따라 대한항공은 2014년 11월까지 '한국형 웹콘텐츠 접근성 지침(KWCAG 2.0)'에 맞춰 시각장애인들이 불편 없이 웹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를 개편해야 한다. 법원의 판결이 아닌 조정 결정이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지만,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구체적 규범력을 확인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

많은 기업들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적절한 대체수단을 제공하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냐는 항변을 하곤 한다. 대한항공 역시 이 소송에서 비슷한 주장을 편 바 있다. 예를 들어 대한항공 웹사이트는 별도의 시각장애인용 홈페이지를 제공하고 있고,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전화 예약 서비스도 운영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당황스러운 것은 대한항공이 별도로 마련한 시각장애인용 홈페이지에서조차 항공권 예매 서비스는 제공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사이트는 그저 시각장애인들에게 항공권 예매를 위해 어디로 전화를 걸어야 하는지 안내하고 있다. 결국 비장애인들이 이용하는 일반 홈페이지는 웹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아 시각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없게 돼 있고, 시각장애인용 홈페이지에서는 항공권 예매 기능이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시각장애인용 홈페이지를 운영하는 게 생색내기에 불과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별도의 사이트를 운영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은 장애인을 일반 소비자로 생각하기보다 부가적 서비스 이용대상자로 여기는 것이며, 그러한 분리 수용(segregation)은 그 자체로 명백히 장애를 차별하는 것이다.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별도의 사이트를 만드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이면서 간편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 되겠지만, 이것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의 기본정신에 반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문제는 비용이다. 많은 기업들이 웹 접근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점을 호소한다. 그러나 웹사이트의 접근성을 확보하는 데 드는 비용은 당연히 부담했어야 할 비용이지, 갑자기 떠안은 짐이 아니다. 안타까운 건, 법이 버젓이 있는데도 여전히 웹 접근성 준수를 위한 노력에 나서지도 않는 기업이 많다는 사실이다. 2008년에 제정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상당한 유예기간을 주었음에도 많은 인터넷쇼핑몰과 금융기관, 병원은 여전히 시각장애인들을 외면하고 있다.

조선 시대 태종은 '명통시(明通寺)'라는 시각장애인 단체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을 지원했다. 조선 시대의 장애인은 지금에 비해 편견과 차별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구분 짓고 장애를 '특별히' 차별하기 시작한 건 오히려 근현대의 일이었다는 어느 역사학자의 주장은 서글프게 읽힌다. 하물며 조선시대에도 장애인들이 지금처럼 소외되지는 않았다는데, 온 국민이 2년에 한 번씩 스마트폰을 갈아치우는 오늘날 장애를 이유로 인터넷 세계에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는 소박하다 못해 씁쓸하게 느껴진다. 시각장애인들이 더 이상 인터넷의 바다에서 길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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