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화도 연화봉 정상에 서면 욕지도, 소매물도 등 한려수도 수많은 섬들이 선경처럼 펼쳐진다.ⓒ이상희 |
이 길을 걸으면서 우리는 한없이 자유롭고 깊어질 것입니다. 이 길은 또 걷기가 단지 다리 근육의 운동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는 정신의 운동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줍니다. 연화도 청정한 바다에서 양식하는 고등어가 선사하는 고등어회는 거의 회맛의 완결판이고 건너섬 우도 어부 아내가 손수 뜯어다 차려주는 해초밥상은 정신줄을 놓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만추(晩秋), 몸은 가볍고 정신은 비옥하게 해줄 통영 바다의 섬으로 초대합니다.
섬학교 제21강은 2013년 11월 2(토)∼3(일)일, 1박2일로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섬 연화도와 우도를 찾아갑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1월 답사지인 연화도와 우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노인이 그물을 손질하는 뜻은
연화도 부둣가, 물양장에 노인 한분이 주복 그물을 손질하고 계신다. 주복은 지금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정치망의 일종이다. 햇살이 따가운 가을 한낮. 노인은 우산을 머리에 쓰셨다. 우산을 받친 것이 아니라 모자처럼 쓰셨다. 기발한 아이디어의 모자다. 그 우산모자 어디서 나셨는가 물으니 "인터넷에서 많이 팔아요" 그러신다. 이 먼 섬마을 노인도 인터넷으로 물품을 구매한다. 연화도와 우도 사이 바다는 횟감용 생선의 가두리 양식장이다. 부표를 때우고 그 아래 바다에 그물을 처서 물고기들을 기르는 해상 양식장이다. 연화도 가두리에서는 주로 돔, 우럭, 농어, 능성어, 줄돔 등을 기르지만 최근에는 고등어를 기르는 양식장도 생겼다.
▲연화도 용머리해안. 꿈틀거리며 대양을 향해 나아가는 저런 풍경을 용이라 이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뽈로기 |
노인은 연화도가 고향이지만 노인의 아버지는 통영시 산양읍 영운리가 고향이었다. 일제 시대에는 연화도 뱃머리에 어업조합 공판장이 있었는데 노인의 아버지는 공판장 책임자로 연화도에 부임해 왔고 노인은 연화도에서 태어나 자랐다. 군 제대 후 다니던 회사가 망하자 배를 타기 시작했다. 외항선 기관사로 30년 넘게 배를 탔다. 마지막 탔던 배는 1,500톤짜리 화물선이었는데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잡화를 실어 날랐다. 섬에 다시 들어온 것은 노모가 치매에 걸린 뒤였다. 92세 된 노모를 지금껏 지극하게 봉양한다.
노인이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것은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양식장에서는 가끔씩 그물이 터져 기르던 물고기떼가 집단으로 탈출하는 일일 종종 발생한다. 그러면 양식장 주인은 막대한 손해를 입고 파산하기도 한다. 노인은 그런 시련을 당하고 실의에 빠진 섬사람들을 더러 봐왔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이 주복 그물 손질이다. 누구의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니다. 또 이익을 바라고 하는 일도 아니다. 다시 누군가의 양식장 그물이 터져 물고기가 탈출하는 일이 생기면 이 그물을 가져다 써서 손해를 다소나마 줄여보라는 뜻에서 손질해 두는 것이다. 물고기 떼가 빠져 나갈 바닷길 양쪽에 이 그물을 치게 되면 탈출한 물고기들 일부는 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다. 양식장이 망하면 그 어민이 "어디 가서 직장생활도 못할 텐데"하는 안타까움에서 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기 위해 그물을 손질하다. 보살의 마음이시다.
▲보살의 마음으로 주복 그물을 손질하는 노인 ⓒ섬학교 |
섬의 장똘뱅이
연화도 뱃머리가 기계음으로 요란하다. 절단기에 잘게 토막난 생선들이 차곡차곡 박스에 쌓인다. 가두리 양식장으로 갈 사료들이다. 냉동 청어, 갈치, 정어리 등은 통영항으로 수입 돼 각지의 양식장으로 흘러든다. 작업 중인 사내는 2만 마리의 우럭을 키운다. 그의 양식장에는 이십 삼사 킬로들이 생선 사료 박스가 하루에 30개 정도 투입된다. 물고기들은 연화도와 우도 사이 가두리 양식장에서 길러진다. 양식이라고 하지만 사료가 아니라 멸치나 정어리 같은 어류를 먹이니 맛은 자연산이나 큰 차이가 없다. 고등어인 경우는 더 기름지고 맛있다. 성어를 잡아다 살을 찌운 뒤 출하시키는 까닭이다. 그래서 뱃머리 횟집들에서 파는 생선회는 비할 데 없이 고소하고 맛있다.
뱃머리에 식품차가 들어왔다. 대파, 숙주나물, 브로콜리, 계란, 해남 배추도 싣고 왔다.
"오늘은 우유도 없네."
"대리점이 문을 안 열었는데 내보고 어찌라고."
대파 값이 비싸다. 한단에 5,000원.
"김은 없나?"
"김은 다 나갔어요."
두부는 한모에 1,000원.
장돌뱅이 사내는 삼천포에 살며 트럭에 물건을 싣고 욕지도와 연화도를 넘나든다. 욕지도는 일주일에 다섯 번, 연화도에는 한 번씩 들른다.
"배추 다섯 단 가 온나."
"모레 아침에 나오소."
섬에 들어오지 않는 날은 주문을 받아 배에 실어 보내주기도 한다.
결핍에 시달리다
연화도(蓮花島). '연화세계를 알고자 하거든 그 처음과 끝을 세존에게 물어보라'(欲知蓮華藏頭尾問世尊). 세존께서 알려준 연화세계가 이 섬이었던가. 옛 사람들이 꿈꾸던 유토피아, 연화세계란 대체 무엇일까? 헐벗고 굶주림이 없는 세계. 그것이 옛사람들이 그토록 바라던 이상향이고 무릉도원이며, <산해경> 속의 남류향이며, 지리산의 청학동이고, 태백산의 오복동(五福洞)이고, 비로자나불이 계신다는 연화세계가 아니겠는가.
오늘의 나는 어떤가? 나는 더 이상 밥 굶거나 헐벗지 않고, 추위에 떨지도 않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연화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또 어디서 연화세계를 찾자고 길 떠나 헤매는 것일까. 옛 사람들이 꿈에도 열망하던 그 세계에 살면서도 어째서 나는, 우리는 늘 결핍에 시달리는가. 진정으로 연화세계에 이르는 길은 무엇일까. 스스로 만족함을 아는 것일까. 하지만 만족이란 또 얼마나 어려운 경지인가. 모자람을 참는 일보다 더 어려운 것이 만족이 아닌가.
연화도는 면적 3.41㎢, 해안선 길이 약 12.5㎞의 작은 섬이다. 연화봉에 오른다. 산길은 원만하다. 뱃머리에 연화봉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초입만 약간 가파를 뿐 산길은 내내 평탄하다. 바다와 섬들을 보며 걸을 수 있다. 연화봉 정상까지는 20분이면 도달 가능하다. 연화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용머리해안의 풍경은 저절로 탄성이 일게 한다. 용이 상상의 동물만이 아니라고 느껴진다. 꿈틀거리며 대양을 향해 나아가는 저런 풍경을 용이라 이름하지 않으면 다른 무엇으로 부를 수 있겠는가. 통영팔경을 넘어 대한팔경의 하나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연화봉 정상 부근에는 연화도인과 사명대사의 토굴 터가 있는데 연화도란 이름은 불교와 관련이 깊다. 연화도(蓮花島)의 지명 유래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섬의 모양이 연꽃처럼 생긴 데서 유래했다 한다. 또 하나는 연화도사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시대 연산 임금 시절 불교 탄압을 피해 서울 삼각산에 살던 연화도사가 세 명의 비구니와 함께 섬에 들어와 암자를 짓고 수도 생활을 했다. 세월이 흐른 뒤 연화도사가 열반에 들자 비구니들은 도사의 유언대로 바다 속에 장사 지냈다. 바다에서는 연꽃이 피어났다. 연화도사의 전설이야 전설이니 진위를 따질 것은 못 된다.
하지만 연화도사의 수도처에 후일 사명대사가 들어와 수도했다는 전설까지 있고 보면 섬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연화도만이 아니다. 통영 앞 바다의 여러 섬들이 불교문화의 자장권에 있었던 듯하다. 유배자의 후손들이나 도망 노비, 관의 수탈에서 달아난 사람들이 섬에서 피난처를 찾은 것처럼 지배세력의 탄압을 피해 불교 수행자들이 찾아낸 피난처 중 하나가 이 남해 바다의 섬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뭍에서는 이룰 수 없는 연화세계, 불국토의 꿈을 섬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연화도와 욕지도, 두미도와 세존도, 미륵도 등 불교에서 비롯된 통영 바다 섬들의 이름은 그 꿈이 남긴 흔적이 아닐까.
연화봉에 정상에 올라서 보면 연화도는 결코 연꽃 모양이 아니다. 섬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연화도의 이름이 섬의 형상에서 유래하지 않은 것은 자명하다. 그보다는 연화, 욕지, 두미, 상노대, 하노대, 갈도, 국도, 세존도, 미륵도, 연대도 등의 섬들이 둥그렇게 펼쳐져 그리는 모습이 흡사 연꽃 같다. 연화세계는 하나의 섬으로 이룰 수 있는 세계가 아닌 것이다. 넓은 바다에 펼쳐져 있는 크고 작은 섬들이 이루는 동심원(同心圓). 서로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는 섬들 간의 연대 속에 연화세계는 연꽃처럼 피어오른 것이 아니었을까.
연화봉에서 시작된 연화도의 탐방로는 보덕암을 지나 동두마을까지 이어진다.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충분하다. 동두에서 뱃머리로 돌아올 때는 도로를 따라 걸어오면 30분쯤 걸린다. 뱃머리 마을을 지나는 길에 마을 할머니들이 직접 담가서 파는 막걸리 한잔은 나그네의 갈증을 채워주고도 남는다.
▲호수처럼 아늑한 연화도와 우도 사이 바다 ⓒ섬학교 |
오직 한 생각
사람이 섬으로 와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풍경일까. 휴식일까. 싱싱한 해산물들일까. 얻을 수 있다면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 하지만 이들은 섬에 오는 누구나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 오롯한 자신의 것은 아니다. 누구도 얻지 못하고 나만이 온전하게 얻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생각'뿐이다. 새로운 '한 생각'을 얻는 일이야말로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한 생각'을 떨칠 수 있는 지름길이다. 섬에서는 걷기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자동차의 방해 없이 걸음에 몸 맞기고 온전히 걸을 때 생각은 자유를 얻는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한 생각이 오고 한 생각이 간다. 온전한 걷기란 단지 다리 근육의 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잠들어 있는 생각을 깨우고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는 정신의 운동이기도 하다.
연화도 부둣가에는 몇 개의 포장마차들이 나란하다. 양식업을 하는 어민들이 외지인들을 상대로 생선도 팔고 밥도 파는 간이식당이다. 저녁을 먹으러 들렀다가 연화도 어촌계장님과 합석을 했다. 어촌계장님이 20대였던 30여 년 전에는 완도의 청산도나 보길도까지도 삼치낚시를 많이 갔었다고 회상한다. 일본 수출이 잘 될 때였으니 통영 배들이 완도는 물론 제주 근방까지도 무시로 드나들었다. 청산의 여서도에 갔을 때는 산에 방목하는 소들을 봤던 기억도 난다고 한다. 일전에 여서도에 갔을 때 나그네 또한 산에 울타리를 처 놓고 방목하는 소를 봤던 터라 반갑게 맞장구를 친다.
"그때 들은 이야긴데 시집온 색시가 3년이 지나도 자기 밭을 못 찾았다는 말이 있었어요."
그랬겠지, 여서도 그 작은 섬에 산비탈의 다락밭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 당시에는 일본쪽 섬들까지 고기잡이를 다니곤 했다. 이제 섬사람들도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은 드물다. 양식업이 아니고서는 바다에서 먹고 사는 일이 수월치 않다.
"어족이 급속도로 고갈돼 지금은 고기잡이배들이 거의 없어졌어요. 작년이 저 세상 같다니까."
섬마을 포장마차에 탄식의 밤이 깊어간다.
성도 이름도 없이 '아무 것이네' 하고 부르고
아침 일찍 연화사를 둘러보고 내려오는데 길 가 집마당에서 할머니 한 분이 호박을 말리고 있다. 호박을 잘게 썰어서 말리지 않고 한통의 반을 잘라 속을 파내고 통째로 말리는 모습이 특이하다.
"할머니 어째서 호박을 통으로 말리세요?"
할머니는 호박을 통으로 건조시켰다가 꾸득꾸득 마르면 길게 썰어서 묵나물을 만드실 거란다.
"고향은 어디세요?"
"거제서 나서 열여덟에 시집 와 이라고 있습니다. 아파트는 못 살겠고 그래서 이라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자식들에게 가서 살아도 봤지만 답답해서 다시 돌아왔다.
"열, 열하나씩 살았어요. 씨아재, 씨누들 여기서 다 키와서 시집 장가 보냈지. 씨아재는 또 미국 가고, 한 씨아재는 죽고, 영감도 십년 전에 돌아가고."
이 좁은 집에서 열씩, 열 한명씩 북적이며 크고 자라 지금은 다들 멀리 가고, 더러 죽기도 하고 할머니 혼자만 산다. 혼자 살기에도 넓어 보이지 않는 집에서 예전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할머니?"
"팔십 둘, 설 쇠면 셋이고. 다리가 아파서 염증 수술 하고 마산까정 맨날 약 타러 다닙니다. 걱정이 태산이요 태산. 돈도 없고."
할머니는 통영까지 배를 타고 나가 손자들 사는 마산의 병원까지 또 버스를 타고 가서 약을 타 오는 일이 고역이다. 할머니는 아직 불을 때고 사는 부엌을 수수빗자루로 청소한다.
"사람 사는 것도 아니지."
누추한 부엌살림을 들킨 것이 민망하신지 할머니가 괜한 말씀을 하신다.
"겨울에는 불을 때서 난방을 하세요?"
"나무도 때고 추운 날은 전기도 꼽고."
"나무는 어디서 구하시는데요?"
"영감이 해놓고 갔어요."
"십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요?"
"예, 빈집에 해놓고."
할머니는 10년 전에 할아버지가 해놓고 간 나무를 아끼느라 몸이 성할 때는 손수 해다 땠을 것이다. 몸에 병이 생겨 움직이기 힘든 이즘에야 아껴 둔 나무를 가져다 때는 것이겠지.
"무릎에 물이 고여서 두 번 수술을 했어요. 내일이나 죽을 줄 알면 수술을 안 할 텐데. 90까지 살게 되면 밥도 못해 먹고 자식들 원망 들을 것 같애서 죽으나 사나 수술을 했지요. 입때까장 병원 모르고 살았는데 병원에 갇혀 있으려니 좀 갑갑했어야 말이지. 죽을 때까정 병원을 모르고 살어야 하는데. 맘대로 안 되는 기고."
마산의 큰 아들은 진작에 세상을 떴고 며느리가 손자들이랑 산다.
"큰 아들은 죽고. 메느리가 손자들 돌보고 사니라 고생이 많제. 내사 농사 이놈 갖고 애들 공부시키고 한다고 허리도 꼬부라지고."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섭섭하시죠?"
"하나씩 죽어야 하제. 늙어서 둘이 있으면 어쩔거야.
기둥에는 1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 명패가 여태 걸려 있다
"할머니 성함은 어떻게 되세요?"
"성도 이름도 없어요. 누구 즈그 어메라고 부르고. 아무 것이네 하고. 성도 이름도 없이 살아요."
"절에 다니세요?"
"절 지을 때 나가 밥해 줬습니다. 뒷집 할매하고. 나가 일흔 한 살부터 3년간 밥을 해줬지. 뒷집 할매는 돌아 가싯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고산 스님이 십 수 년 전 연화도에 연화사를 지을 때 이야기다. 절 짓는 그 많은 인부들 밥을 칠순이 넘으신 노인들 두 분이 해냈다. 평균 10여 명 매일 세끼씩. 어떤 날은 60여 명의 밥을 해준 날도 있었다. 한 달 50만원을 수고비로 받았다.
"요새도 큰 스님이 잘 해요. 공양 했냐고 걱정도 해주시고. 그 때는 고산 큰스님도 여기 와서 주무시기도 했었지."
할머니는 마당에 널어 말리던 메밀을 까불러 나간다.
"감기 들면 끓여먹고. 열을 내린다 해요. 메밀이."
혼자 살지만 할머니는 아픈 다리 이끌고 종일 움직인다.
"가만있으라 한들 가만 못 있어요. 일해 먹던 사람이 돼 놔서."
'챙이(키)'로 메밀 터는 모습을 지켜보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발길을 붙든다.
"나 이름은 윤 필순이요."
▲연화장 세계로 저물어가는 연화도의 일몰 ⓒ섬학교 |
섬학교 2013년 11월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1월 2일 토요일>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21강 여는 모임
11:00 통영 도착
11:30-12:30 점심식사(특별한 맛, 통영식 해물탕)
13:00 통영항 출항
14:00 연화도 도착
14:20-17:30 첫째날 연화도 걷기(8km)
본촌(선착장)→연화봉(212m)→사명대사 토굴 터→5층석탑→출렁다리→동두마을→산림욕길→본촌
18:00 저녁식사 겸 뒷풀이(생선회와 매운탕)
20:00 자유시간, 취침(연화도 <용머리횟집민박>, 다인실)
<11월 3일 일요일>
07:00 기상
08:00-09:00 아침식사(해물된장백반)
09:10 연화도 출발(도선)
09:20 우도 도착
09:20-11:30 둘째날 우도 걷기(3km)
선착장→우도마을→뒷등 구멍섬→당산나무→우도마을
11:50-12:30 점심식사(우도 어부 아내가 손수 차려주는 해초밥상)
12:40 우도 출항(도선)
12:50 연화도 도착
13:20 연화도 출항
14:20 통영항 도착
14:20-15:00 서호시장에서 장보기
15:00 서울 향발. 제21강 마무리 모임
▲섬학교 제21강 연화도·우도 답사로 Ⓒ섬학교 |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http://www.yes24.com/24/goods/3261557?scode=032&OzSrank=1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http://www.yes24.com/24/goods/5185914?scode=032&OzSrank=1
<어머니전>
http://www.yes24.com/24/goods/6996168?scode=032&OzSrank=1
섬학교 제21강 답사 참가비는 23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5회 식사비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참가신청 바로가기
[학습자료]
우도와 구멍섬
"펑" 거대한 굉음이 천지를 울렸다. 1951년 6월 29일, 연화도 사람들은 건너 섬 우도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리고 연기가 치솟는 것을 목격했다. 우도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고 목격자들은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날은 태풍처럼 거대 파도가 치던 날이었다. 우도 앞 해변으로 거대한 쇳덩어리가 파도에 떠밀려 왔다. 마을 주민 세 사람이 괴물체를 발견했다. 그들은 괴물체가 일본군이 미군 함정을 침몰시키기 위해 설치했던 어뢰라고 판단했다. 그들은 드럼통 세 배쯤 되는 어뢰를 해체해서 고물로 팔면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갈고리를 만들어 어뢰에 걸어서 끌어올리기로 했다. 세 사람은 어뢰에 갈고리를 걸어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순간 거대한 폭발음을 내며 어뢰가 폭발했다. 뇌관에 갈고리를 걸었던 것이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근처에 있던 목격자 한 명을 포함해 네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구경꾼 한 사람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평화롭던 섬 마을을 역사상 최대의 참사였다. 일제가 벌인 태평양 전쟁의 유물과 사람의 욕심이 만들어낸 재앙이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고 오늘 우도는 어느 섬보다 평화롭다.
▲우도 구멍섬. 저 사이를 통과하면 이상향에 이를 수 있을까. ⓒ섬학교 |
통영시 욕지면 연화리 우도는 연화도와 지척이다. 면적 0.447㎢, 20여 가구, 거의가 노인들만 사는 작은 섬이다. 손을 흔들면 보일 정도의 거리지만 두 섬 사이를 오가는 나룻배는 없다. 민박집 배를 빌려 타고 우도로 건너왔다. 자는가 싶던 바람이 다시 거세진다. 파랑이 일고 먼 바다에 나갔던 작은 어선들은 서둘러 포구로 돌아온다. 우도를 둘러보고 두미도로 갈 생각인데 바람 골 터지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 배가 뜰 수 있을까. 폭풍주의보는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 부는 날 바다는 예측불허다.
바다처럼 섬살이도 늘 예측불허. 우도의 주민들은 대부분 고개 넘어 움푹 파인 분지 안에 둥지를 틀고 산다. 통영 미륵산에서 바라보면 소가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인다 해서 소섬, 우도라 했다고 전한다. 또 개척민들이 처음 입도했을 때 구멍난 곳(트인 곳)이 많아 소(疏)섬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우도에 용강정이나 혈도 등 뚫린 지형이 많긴 하지만 아무래도 전자의 유래가 타당해 보인다. 사람들은 섬에 들어오기 전 무인도일 때도 섬에 이름을 붙여 부르곤 했을 것이다. 그 이름이란 대체로 밖에서 보이는 섬의 형상에 따라 붙여지는 경우가 많다. 우도 또한 웅크린 소처럼 보이는 까닭에 그리 불렀을 것이다. 대체로 제주의 우도나 옹진의 우도 등 우도란 이름을 가진 섬들의 유래가 그렇기도 하다.
여객선 뱃머리 선창가에는 몇 채의 집들만 다닥다닥 붙어 있을 뿐 초입의 컨테이너 박스는 여름철 상점으로나 사용하는지 문이 잠겨 있다. 공동 우물은 뚜껑이 덮여 있다. 들머리 첫 집은 민박을 하고 낚시 배도 부린다. 뒷집은 대문이 잠겨 있다. 겨울 한철 출타 중인 모양이다. 겨울에 일거리가 없는 노인들은 섬을 떠나 자식들 집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돼서야 돌아오기도 한다.
잠깐 고갯길을 넘으면 우도의 큰 마을이다. 분지에 푹 안겨 있는 마을은 아늑하고 안온하다. 토담집과 돌담들, 원형을 거의 그대로 간직한 마을은 오래된 기억 속의 고향 같다. 특별하지 않음이 이 섬의 특별함인 듯하다. 오랜 세월 섬사람들은 좁은 땅에 보리와 고구마를 심어 곡식 삼고 미역과 톳, 청각을 뜯고 홍합 등의 해산물을 채취해서 뭍에다 팔아 연명해 왔다. 한 때는 작약을 제법 많이 심기도 했었다. 한약재로 팔기 위해서였지만 값싼 중국산이 들어오면서 작약 재배도 끝나버렸다. 하지만 그 덕에 봄이면 섬에는 작약꽃이 지천이다.
▲우도의 전통가옥 토담집 ⓒ섬학교 |
많은 섬들이 그랬듯이 말린 홍합은 우도 사람들에게 든든한 생계 밑천이었다. 홍합은 생것을 까서 그대로 말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삶아서 꼬챙이에 꿰어 말려서 팔았는데 이를 오가잽이라 했다. 홍합 중에서도 오가잽이를 최상품으로 쳤다. 소매물도처럼 우도에서도 홍합을 삶는 특별한 방식이 있었다. 보통은 솥에 물을 붓고 홍합을 삶아내는데 우도에서는 솥을 쓰지 않았다. 바닷가 몽돌밭을 솥 삼았다.
자갈밭에 구덩이를 만들고 장작더미를 쌓아 불을 질렀다. 몽돌들이 뜨겁게 달궈지면 불을 끄고 홍합을 쏟아부었다. 그러고는 열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홍합을 거적으로 덮었다. 달구어진 몽돌이 홍합을 잘 익게 만들었으니 홍합 몽돌구이였던 셈이다. 그렇게 익힌 홍합을 꼬챙이에 끼워서 말렸다. 물이 귀한 섬에서 물을 아끼는 방법이기도 했다. 또 물에 삶은 홍합은 진액이 빠져나갔지만 몽돌에서 삶아지는 홍합은 진액이 그대로 남아 맛과 영양이 뛰어나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다. 섬살이의 지혜였다. 지금도 응용해 볼 수 있는 방법이지 싶다.
이 섬에서도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은 당산나무들이다. 우도의 당산나무는 생달나무와 후박나무다. 생달나무 세 그루는 외가지로 곧게 뻗어 잔가지를 쳤고 후박나무 한 그루는 네 개의 큰 가지로 갈라져 자랐으나 그중 작은 가지 하나는 바람에 쓰러져 고사했다. 나무는 모두 거목이다. 나무는 네 그루이면서 동시에 한 그루이기도 하다. 좁은 땅에 뿌리내린 나무들은 이미 오래전에 하나로 뒤엉켜 양분을 공유할 것이다. 당산나무는 500년 동안이나 마을을 지켜준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래서 천연기념물 344호, 보호수가 됐다.
구멍섬(穴島)을 찾아간다. 구멍섬이 있는 해안에는 달랑 한 채의 집만 외롭다. 이 집 또한 섬을 떠나 출타 중이신가, 문이 잠겨 있다. 작은 마당은 금잔디가 깔려 정갈하다. 화단에는 굵은 회양목 한 그루. 마루에 놓인 전기밥솥과 냉장고가 사람살이의 흔적이다. 삼 칸 집. 부엌과 툇마루 사이에 작은 문을 뚫어 음식이 드나들게 했다. 안방 출입문 위 상인방에는 두 개의 액자가 걸려 있다. 할머니 초상화에는 스냅 사진이 세 장이나 끼워져 있다. 할머니의 독사진은 어느 식물원 앞인 듯하고 두 장은 자녀들과 찍은 사진이다. 왼쪽의 액자는 손자의 돌 사진이다. 현대스튜디오에서 촬영됐다.
벽에 걸린 2002년 월드컵 기념시계는 오후 1시25분을 지나고 있다. 내려진 전기 차단기는 집 주인이 장기출타 중임을 알려준다. 행랑채 출입문은 비닐 창호였으나 지금은 찢겨져 있다. 사랑채 벽에는 그물이 걸렸고 뒤안 헛간에는 어구며 농기구들이 가득하다. 집은 나무와 돌과 흙과 물, 바람과 햇볕으로 빚어졌다. 바닷가 쪽은 시누대를 심어 바람막이를 했다. 집주인은 봄이 되면 돌아올까.
해변의 고구마밭을 지나 구멍섬으로 간다. 구멍섬은 작은 무인도다. 섬의 앞뒤로 구멍이 뻥 뚫려 있다. 그래서 구멍섬이다. 섬에 구멍을 뚫은 것은 파도일 것이다. 문득 일전에 태백에서 본 자개문(子開門)이 생각난다. 구문소의 자개문 또한 물이 바위를 뚫어 생긴 구멍이다. 옛날 사람들은 매일 자시에만 열리는 자개문을 지나면 사철 꽃이 피는 오복동(五福洞)이란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물이 큰 바위를 뚫는 일은 희유한 일이니 그 문을 지난다면 이상향엔들 어찌 못 가랴. 저 구멍섬을 지나도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을까. 이어도로 이어지던 문도 저런 문이었을까. 구멍섬 옆에서는 늙은 해녀가 세찬 물결 가르며 물질한다. 그런데 문이 열려 있어도 그녀는 어째서 아직 이어도에 도달하지 못한 것일까.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중입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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