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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시민 사상에 대한 철학자의 고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12> 새로운 시대를 여는가? - 헤겔 Ⅱ

시대와 싸우는 철학자, 헤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한 대중강좌 <우리 눈으로 본 서양근대철학사>의 열 두 강좌가 모두 끝이 났다. 이 철학사 강좌는 다음 달 <마르크스주의사상사> ㅏㅇ좌로 이어져 현대철학의 지형도를 보다 조밀하게 살펴보게 될 것이지만, 근대철학사의 대미는 역시 헤겔이 장식해야만 했다. 강의를 맡은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는 결론적으로 "칸트, 헤겔 모두 시대와의 싸움을 하고 있었고, 그 싸움은 종교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종교와의 대면을 직접적으로 전개하지 않고, 그들의 극복 과정은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철학자는 어떤 역할을 하는가로 반전되어 진행"되었다. 물론 플라톤 이래로 위대한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늘 시대가 던진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철학과 철학자의 사명에 대해 고민해왔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지적한 대로 칸트와 헤겔이라는 독일관념론의 두 거장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고 분열된 지역이던 작은 국가에 살면서 '세계시민 사상'을 구상했다는 점은 자못 비장하고 역설적이다.

이정은 교수는 강좌의 마지막 강사답게 근대철학의 특성과 그 흐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고, 헤겔의 생애와 그의 사회정치철학을 함께 풀어 나갔다. 헤겔의 생애에서 중요한 점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려운 논리를 펼친 헤겔"이 '왜 신학교에 들어가서 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는가'일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애초에 그는 역사발전을 체계적으로 다루는 역사철학과 법철학을 쓰기 위한 목표를 갖고 있었는데 말년에 가서야 자신의 철학적 체계 속에서 그것을 다룰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헤겔이 신학직을 거부했던 것은 "종교적 규제와 정치적 규제"를 모두 거부하는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기인했다.

피히테, 셸링, 횔더린과 더불어 튀빙겐 신학교에서 칸트의 "이성적 신학, 도덕 신학에 매료"된 헤겔은 당시 독일에 만연하던 종교적 입장을 비판했다. 더불어 그것은 "국가-교회 주도적인 민족 교육, 그것을 야기한 독일식 계몽주의"를 비판하는 것이기도 했다. 시민계급의 자기해방을 선언한 프랑스식 계몽주의와 그것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혁명은 이들에게 축하와 부러움을 모두 포함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칸트와 헤겔 모두에게 사회와의 싸움은 종교와의 싸움이었고, 철학적 견지에서 시대와 벌이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또한 칸트 못지않게 루소의 영향을 많이 받은 헤겔은 그의 저작을 통해 "사회 비판과 그 대안 모델을 만드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루소는 문화와 역사 발전이 지닌 이중성, 즉 선한 질서가 발전하면 악한 질서도 동시에 심화된다는 '문명사의 우울'을 내비친다." 역사의 발전을 설명하고 싶은 헤겔은 "이런 우울을 극복하기 위해, 칸트의 이성 비판과 역사적 통찰을 활용한다." 칸트에게서 '세계사적 관점의 보편사'라는 관점과 역사발전의 가능성을 확인한 헤겔은 점차 자신만의 체계를 구상해가며 "칸트도 아닌 루소도 아닌 헤겔 고유의 관점"을 형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칸트와 헤겔은 모두 "독일의 후진성이 동반하는 문제점을 시대 변화에 비추어 고민하고, 통치자를 향해 철학(자)의 역할을 말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독일 계몽주의가 만들어냈던 폐해와 상명하달식의 민족 교육, 그 구조의 근간인 보수적인 종교적 입장을 거부했던 "튀빙겐 신학도의 철저한 비판 정신"은 헤겔을 철학자로 만들었고, 죽음에 이를 때까지 안고 갔던 문제의식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정신'을 공유한 두 철학도의 사상은 어떤 지점에서 서로 다른가. 국가 간의 경계가 해체되는 오늘날, 칸트와 헤겔의 세계시민사회 논의는 담론 층위에 한정되어 있더라도 여러 사회철학적 문제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그래서 아래에서는 칸트와 헤겔의 대립 지점에 대해 주로 살펴본다.

철학과 철학자의 역할

앞서 말했듯이 철학과 철학자의 역할을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헤겔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의 발전을 목도하며, 독일 신학교의 특정한 종교적 입장이 정치 개혁과 역사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비판할 근거와 대안적인 사회 발전방안을 찾는 과정에서 정치 문제에 고민하게 되었고, 철학과 철학자는 주어진 시대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성찰했다. 그런데 앞선 칸트는 철학자가 유력한 정치적 주체는 아니지만, 미래를 전망하고, 개혁의 목표를 세우며, 세계시민사회를 위한 기획을 구상하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통치자는 철학자에게 귀를 기울일 때 정치와 역사 발전에서 제 궤도를 찾게 되며, (이를 통해) 세계 평화를 지속시키는 힘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칸트에게 철학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중세 시대에 '철학은 신학의 시녀'였고 근대 철학자들은 그 관계를 전복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복은 곧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에 칸트는 보다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사람들은 시녀로서의 철학이 횃불을 들고 귀부인들 앞에서 가고 있는지, 아니면 귀부인들의 긴 옷자락을 들고 뒤에서 따라가고 있는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칸트는 여전히 철학자의 역할을 시녀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 시녀는 '횃불을 든 시녀'로서, "횃불을 들고 귀부인의 앞길을 밝히는 시녀이다." 이정은 교수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철학자가 횃불을 잘못 들어 길을 잘못 밝히면, 통치자와 그를 따르는 사회 전체가 어떻게 될지는 명약관화하다."

"진리 탐구와 정치적 실천을 동시에" 고민하는 플라톤적 입장과, "진리 탐구를 정치적 실천과 분리하고 정치에서 한 발 물러나 시대를 성찰하는" 다른 입장은 서양철학사에서 양분되는 지점이었다. 칸트와 헤겔은 모두 전자의 문제의식을 견지했던 사람들인데, 칸트가 '도덕성의 개선'에 역사 발전의 포커스를 맞추었다면, 헤겔은 "국가의 보편적 모델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는 "세계사에서 보편사가 가능한지와 세계사 발전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칸트의 역사철학적 착상을 '이성의 전개'로 전환하여 밀고 나갔다." 그래서 헤겔은 칸트가 개개인 내면의 '주관적 종교'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공동체의 삶과 관습에서 나오는 '인륜적 요소'를 논할 여지가 부족하다고 보았다. "공적 종교를 추구하며 헤겔은 종교와 인륜성의 관계, 종교와 공동체의 관계, 종교와 정치의 관계를 마련하기 위해 칸트를 넘어서야 했다."

이정은 교수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진리의 현상과 철학자의 의식을 『법철학』에 나오는 '미네르바의 올빼미'를 통해 보다 단순화해서 설명했다. 철학자는 낮에는 잠들어 있다가 밤이 되면 깨어나서 활동하는 올빼미에 비유된다. 그는 모두가 잠든 사이에 낮 동안의 일을 정리하고 성찰하고 개념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게 있어 철학자는 플라톤과 달리 철인왕도, 칸트와 달리 횃불을 든 시녀도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철학자는 "철인왕과 시녀가 잠든 사이에 노역을 강행하는 밤의 황제이다." 지나 간 모든 것을 사후에 정리하지만 그는 동터오는 신새벽을 뜬 눈으로 맞이하며 새 시대를 가장 먼저 바라보며 예감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밤의 황제, 철학자는 "자기 시대를 앞서 가지는 않지만, 다음 시대를 앞서 가며, 다음 시대를 밝히는 자이다."

밝은 낮 동안 철학자의 의식은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따라가면서 지켜보며 결정적 순간에 부상"할 순간을 기다린다. 그는 자연적 의식과 현상적 의식이 교차하는 시간을 견뎌내며, 본질적 변화와 본질적인 결과를 관찰하고, 시대정신의 발현을 반성하고 체계화한다. "주어진 현상 가운데서 참된 것을 파악하고 진리를 도출하는 철학자의 의식은 (현상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의식과 현상적 의식의 대립을 거치는 가운데서 등장"하는 것이다. 이정은 교수는 철학자의 진지하고 성실한 역할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관찰과 성찰의 과정이 "소홀하거나 철저하지 못하면, 체계화가 불가능하다. (결국) 헤겔에게 철학자는 낮이나 밤이나 지속되는 긴장과 노역을 견뎌내는 자이다."

세계시민 사상의 거부와 새로운 시대

칸트는 인간은 누구나 이성과 양심을 지니고 그것으로부터 보편적 도덕 법칙을 도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실천이성을 가진 존재는 모두 이성적인 도덕적 존재로 살아갈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 실천이성을 따르면 이성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한 칸트는 "윤리학의 도덕 법칙과 의무론을 정치학에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이러한 이성적 사회가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국내법을 요청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시민사회가 구성되며, 그것을 전 세계로까지 확장하면 '세계시민사회', '세계시민법'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법 제도화의 힘과 법적 장치에 대한 기획은 헤겔에게도 그대로 유지된다.

그런데 칸트의 생각처럼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자유'가 사회의 폐단과 학문 권력의 오류를 비판하고 교정하려는 철학자의 역할이라면, 오늘날에는 과연 그런 학자나 철학도가 부족해서 세계시민 사회라는 꿈은 아직 요원한 것인가? 우리 사회가 나날이 이기적이고 흉흉하고 단절된 사회로 심화되는 원인이 단지 진정한 철학자가 부족한 것에 있지 않다면, 왜 사람들은 경쟁과 돈을 맹신하며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자유'에만 골몰하고 있을까? 자기 자신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철학자는 대중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결국 아무리 고매한 철학이라도 그것은 사람들의 삶 속으로, 그들의 고민 속으로 침투하지 못하는 것일까? "도대체 인간의 이성은 어디로 간 것인가?" 칸트가 믿었던 도덕성의 발휘와 세계시민사회의 실현에 대한 열망은 어디로 숨어 든 것인가?

헤겔은 프랑스 혁명을 처음에는 열광하며 찬사를 보내다가 공포정치가 이어지자 나중에는 실망감으로 사태를 관조하며,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을 끼친 루소의 계몽주의적 입장을 비판하게 되었다. 그래서 헤겔은 민주정치와 권력 집행의 매개성을 중시하며 삼권분립에 기초한 대의제 정치를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 매개성은 권력의 수직성이 아니라 수평성을 강조하는 입장으로 헤겔이 칸트의 세계시민사회론을 거부하는 이유가 된다. 물론 헤겔이 칸트의 세계시민사회나 세계국가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은 그 실현의 어려움과 당위성 때문이 아니다. 헤겔은 국가의 본질을 일종의 '인격(인륜성)'으로 간주하며, "국가 간에는 하나로 환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고 강조했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인격'은 그 사람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보편적 전제이면서 그 사람을 인간답게 만들며, 타인과 구별되도록 만드는 개성이다. 또한 나 자신이 나로 살 수 있는 자기동일성에 근거하는 이 인격은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개체성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국가 간에 있어서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입장이다. 나의 동일성, 나다움도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나와 타자의 차이에 대한 인식 속에서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 하나의 원리로 "통폐합되지 않는 것을 통폐합시키려는 폭력"의 문제 때문에 인간사회를 특정한 기준으로 환원하고, 나아가 국가와 세계사를 환원하는 것은 더욱 요원하다는 것이다. 헤겔이 말하는 역사 발전은 세계정신의 지난한 실현 과정이기 때문에 그 인식 속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칸트가 자유를 추구하는 시민사회를 국가와 세계사 발전의 궁극적인 모델로 제시했다면, 헤겔은 '인륜적 국가', '국가의 자유 실현'을 제시했다. 칸트가 시민사회를 곧 국가로 간주하는 데 반해, 헤겔은 시민사회와 국가를 구별하여 가족이나 시민사회를 국가의 한 계기로만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칸트가 실천이성을 보다 넓은 분야에도 적용하여 도덕학의 원리를 정치학의 원리에 적용하려고 했다면, 헤겔은 추상과 현실의 역사적 간극을 인식하며 사회 인식을 초역사적인 도덕학으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했다. 역사발전을 관조하려면 변증법적인 시각 속에서 철학자의 사후 정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근대철학사 강좌를 마치며

강좌의 마지막 시간은 '간단한 뒤풀이'를 위해 수강생들이 서로 둘러 앉아 진행됐다. 석 달 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된 근대철학사 여행은 '헤겔역'에서 끝이 났다. 함께 도착한 사람들은 뒤늦게나마 자기소개를 나누고 강좌에 대한 소감과 평가를 기탄없이 교환했다. 또한 매번 바뀌었던 몇몇 강사 선생님들의 얼굴도 다시 볼 수 있었고, 강좌를 준비한 프레시안 대표님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선생님도 참석하여 그간의 강좌를 되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직장인들이 많아서 평일 늦은 저녁에 진행될 될 수밖에 없다는 핑계가 있었지만, 이 열림의 마음과 소통의 시간이 왜 진작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아쉽기도 했다.

그래서 "매번 뒤통수만 보던 수강생들의 얼굴을 비로소 마지막 시간에야 보게 되니 아쉽다"는 어느 수강생의 아픈 지적은 다음 강좌의 방향성을 가늠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인문학 공부에 대한 갈증, 근본 문제를 고민하고 역사와 사회를 보다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철학에 대한 열망"이 분명히 이 시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필자 또한 이 강좌를 통해 '철학이 대중과 어떻게 만날 수 있으며, 철학자들은 어떻게 그들만의 언어와 논리 속에 갇히지 않을 것인가'를 보다 실제적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하나의 끝은 늘 새로운 시작을 예비하는 것이듯이, 다음 달부터는 근대철학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현대철학의 다양한 조류들을 살펴보는 강좌가 이어진다. 나아가 동양철학사와 서양고대철학사까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 공동기획 '철학사 강좌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어느 수강생분의 의견처럼 "철학사에 대한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이해시키는 시간보다는, 저마다의 관점과 고민을 바탕으로 그날의 주제를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 한편 오늘 살펴본 독일관념론의 세계시민 사상도 결국 '인류가 어떻게 서로 화합하여 잘 살 것인가'를 고민했던 죽은 철학자들의 유산이라면, 루소를 강의했던 김광호 선생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 같다.

"저는 기회가 된다면 이 강의실에서 강사와 수강생들의 자리를 뒤바꾸어서 서로의 지식과 생각을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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