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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국토학교...<호남평야 황톳길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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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6월의 국토학교...<호남평야 황톳길 순례>

[알림]답사키워드는 <동학의 지평선과 하늘>

여름이 다가옵니다. 6월의 국토학교(교장 박태순, 소설가)는 '여름 농사전쟁'이 한창인 호남평야로 갑니다. 이번 15강의 답사 주제는 <호남평야 황톳길 순례>, 답사 키워드는 <동학의 지평선과 하늘>입니다. '치열하면서도 장엄하기만 한' 이 여름의 호남평야를 밟으며 한껏 생명의 기운을 길어 올리시기 바랍니다.

교장선생님의 <답사지 배경 설명>을 들어봅니다.

농사일이 바쁜 계절을 가리켜 '농번기'라 하지만 오죽 고되었으면 <여름 농사전쟁>이라 했을까. 모내기철은 남부로 내려갈수록 늦게 이루어지게 마련인데 특히 삼남지방은 보리라든가 밀 등의 수확기와 못자리 이앙기가 겹치게 되는 6월 중순~7월 중순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된다.

보리타작이 끝나자마자 그루터기를 갈아엎어 들불(野火)을 질러야 하고 그와 동시에 논물을 끌어들여 모심기를 서둘러야만 한다. 물론 요즈음에는 기계모가 보편적이어서 손모의 모심기는 아예 드물게 되었고 들밥 대신에 주문배달 음식을 들기도 하는 등 재래 농법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2모작은 보리 대신 유채 등의 원예작물로 대체되고 불시재배(不時栽培)의 시설작물로 홍수출하라든가 단경기의 한계를 극복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하지만 자연환경의 지배를 크게 받는 농업의 특성 때문에 애벌 이듬 만물의 세 번 김매기 등의 제 철 농사일을 소홀히 할 수 없는 데다가 농촌 인구의 감소로 노동력은 턱없이 부족하여 모든 농가마다 경황이 없게 된다.

대농촌지역일수록 여름 농사력(農事曆)은 고달프고 고되다. 김제 만경에서 부안, 정읍, 고창, 순창, 장성으로 이어지는 곡창지대의 한여름 풍경은 농군들의 전쟁마당을 뜨겁게 연출한다. 평야는 무한대로 확장되고 인간은 최소한으로 졸아드는 <대지와 농민>의 맞물림이 실로 치열하면서도 장엄하기만 하다. 동이 트기 전에 들판으로 나서서 해동갑(同甲)으로 흙 씨름을 벌이어 땅거미가 내린 후에야 어슬어슬 귀로에 오르면서 부르는 토민(土民)의 구성진 육자배기 남도가락 한 자락은 소중한 무형문화유산이 된다.

<요원의 불길>이란 표현은 매우 빠르게 번지는 들불을 가리킨다. 무서운 기세로 퍼져 가는 세력의 막강함을 가리킬 적에도 비유적으로 쓰이는데 이러한 들불의 요원(燎原), 평지풍파의 거센 바람, 평지돌출로 솟구친 고개와 산성, 바람과 구름을 몰고 다니는 풍운아의 활갯짓…, 자연농업경제 시대의 거대풍경은 산업경제 시대로 들어선 이후로 계속 훼손돼 왔으나 그렇다고 일망무제 대평원의 바람과 구름(풍운)마저 추방시키지는 못한다.

<징게맹게 외배미들>이라 함은 김제 만경 일대의 논배미가 여러 배미로 끊어지는 게 아니라 대평원 전체가 하나의 전답으로 툭 트여져 펼쳐지는 경관을 일컫는 말이다. 호남평야의 대곡창지역은 <징게맹게 외배미들>이 대표적이지만 고창 부안 지역과 함께 특히 정읍 지역은 전주와 광주 사이에 놓이어 교통의 요지를 이룬다. 전국전토를 향하여 <사발통문>을 띄우기에 적합한 '정치지리학'의 우점(優點)이 있었으며 동시에 벼슬길에 약빠른 지방관들은 가렴주구의 온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정읍 황토현을 중심으로 하여 장성 갈재와 김제 모악산 및 전주 일대 옛길에서 오늘에도 살펴볼 수 있는 동학의 지평선…,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역사의 지평선>은 열려져 있어야 한다.

최제우의 '시천주'와 전봉준의 '제폭구민'…, 하늘님(천주)을 내 속에 모시기 위해서는 하늘을 새롭게 열어야 하고(개벽), 봉건압제와 가렴주구를 없애려면 막히고 갇힌 세상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광제창생). 동학의 하늘과 농민의 대지를 새롭게 찾는다. 호남평야의 황톳길에 오롯이 살아 흐르고 있는 농민해방-인간해방의 염원,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노래로써 찾고자 했던 새 세상 열망의 꿈은 오늘에도 소중하기만 하다. 구슬땀으로 일궈내는 한여름 농번기의 농사 번영(繁榮), 그 한마당 속으로 들어간다.


▲내장사의 여름ⓒ내장사

답사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6월 26일(토요일)

07:00 서울에서 출발 (행락객으로 붐벼 교통체증을 만날 수 있습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유진여행사 경기 76 아 9111호에 승차 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0:00-11:30 : 동학농민혁명 발상지 답사

1) 백산 창의소(전북 부안군 백산면 용계리)

1894년 4월 30일(음력 3. 25) 전봉준을 창도대장으로 하여 동학혁명 봉기의 집합소가 되었던 백산은 47m의 야트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탁 트인 평원의 전망대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부안(서), 고부(남), 정읍(동) 및 태인(북)으로 연결되는 길목이었고 세곡 창고가 있었던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였다. 농민군들은 흰옷을 입어 죽창을 들고 있었기에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이 저절로 생겨났다 한다. 1989년 11월 <백산 동학혁명창의비>가 세워지고 정기적으로 창의기념 축제를 갖기도 한다. 문화기행, 역사기행 참가자들은 백산을 전통민속극 마당판으로 삼는다면 최적의 환경 조건이 된다고 찬탄해오곤 했다.

2) 전봉준 장군 고택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부락)

1981년 11월에 사적 제293호로 지정되었는데 '전봉준 선생 고택지(址)'라는 명칭이었다. '전봉준 선생'이라는 호칭은 어색하고 당연히 '장군'으로 불러야 한다는 여론에도 아랑곳 않고 아직도 문화재청은 "선생 고택지'라는 명칭을 고수하고 있다. 여러 차례 복원공사를 거듭하면서 고택은 말끔해졌으나 주변 환경은 되레 흐트러진 점도 있다. 가령 말목장터의 <전봉준 감나무>는 정자를 시멘트로 세울 적에 그 독성 때문에 고사한 사례가 그러하다.

고택이 자리 잡은 배들벌(梨坪)의 면사무소 일대는 부안-고부-태인으로 이어지는 들판의 한 복판인데 조소(鳥巢)부락은 '새 둥지 마을'이니 아늑하기도 하지만 유사시에는 모의 장소가 됨직한 보금자리 형세이다. 전봉준은 농사와 함께 서당 훈장으로 생계를 꾸리면서 술사(術士; 풍수지리가)로 유랑하기도 했는데 요즈음 표현으로는 '여행탐험가'에 해당될 것이다. 전봉준 고택 일대는 초기 동학운동의 발상지가 되기도 하였다. <고부민란>은 1894년 2월 15일(음력 1.10), 1천여 명 농민들이 말목장터에 운집하여 이로부터 고부관아를 습격 점령하면서 발생된 것이었다.

3) 황토현 전적지 (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전 12권의 대하장편소설 <녹두장군>을 집필한 송기숙씨에 의하면 거주민들은 '황토재', 또는 줄여서 '토재'라고 부른다면서 '황토현(峴)'이라는 명칭에 이의를 제기한다. 47m의 백산보다도 낮은 해발 33.5m에 불과한 '황토고개'의 환경 특성을 <현(峴)>이라는 어휘가 앗아버리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나지막한 황토언덕이 어찌하여 국토의 명소로 대두될 수 있었던가. '동학농민혁명기념관' 홈페이지에는 이 기념관으로 찾아오면 <역사 속에 잠자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로고를 띄워놓고 있다. 그러한 이야기를 알아내기 위해 오늘에도 여러 형태의 국토순례단의 탐방 코스가 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바로보기 : http://www.donghak.go.kr

▲황토현 전적지의 전봉준 장군 동상ⓒ이승철

황토재가 역사의 성소로 조영되기 시작한 것은 1963년 10월 3일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건립되면서부터였다. 이 기념탑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웅대하여 탑 높이 7.5m, 탑신은 6.3m에 이르는데 <농민봉기탑>으로서는 한국 역사상 최초로 세워진 것이라 하였다.

무엇보다도 <동학혁명>을 기념하는 탑이라는 표현 자체가 획기적인 것이었다. 식민시대에서 8∙15 해방시대를 지나 4∙19혁명을 거친 이후까지도 줄곧 <동학란>이라 했었다. 변란, 민란의 평가만 받아왔고 당시에는 조선 조정만 아니라 일본 문서에서도 비적(匪賊)이라 매도되기만 했던 '농민봉기'를 국가가 최초로 <동학혁명>으로 공식 인정해준 것이었고 탑신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라는 동학 문자를 각자해놓기도 했다. 역사학자 김상기가 작성한 비문은 보다 적극적인 역사평가를 내리고 있었는데 '민중전선' '민족전선'이란 표현을 쓰기도 했다.

"전봉준 선생은 동학의 조직당을 통하여 농민 대중을 안아 들여 우리 역사상 처음 보는 대규모의 민중 전선을 이룩하고…" 

<황토현 전적지>는 1981년 12월에 사적 제295로 지정되는데 이는 전봉준 고택 성역화사업에 뒤이은 것이었다. 이와 함께 전두환 집권시절이던 1983년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건축되었는데 전봉준 유품의 벼루·붓·패랭이·갓·신 등과 함께 <갑오실기> <전봉준 공초기> <용담유사> <동경대전>등의 사료와 당시의 사진·무기·책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 기념관은 그 뒤로 계속 증설되었고 그와 함께 '제세문', '보국문', '재민당', '전봉준선생 동상' 등에다가 초가형 교육관, 전시관의 각종 시설물에 온갖 준공-완공 기념비들이 조성되었다. '동학혁명' 자체보다도 역대 정권의 '기념사업'이 더 두드러져 보일 지경인데 이로 인해 황토고개 스카이라인이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정황도 빚어내게 되었다.

<동학혁명>은 가령 프랑스혁명의 경우에서도 그러하듯 몇 단계의 심화 확대 과정을 거쳐 가며 '근대혁명'의 성격을 뚜렷하게 한 것으로 파악된다. 1894년 2월 15일의 말목장터 봉기의 '고부민란'은 자연발생적인 농민란 성격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다음 자진 해산하였다는 점부터 그러하였다.

4월 30일의 '백산 창의'는 조직과 이념을 어느 정도 갖춘 '농민군 거사'의 형태였는데 황토현에 진출한 동학군은 5월 11일(음력 4. 7) 새벽에 유인작전을 전개하여 관군과 보부상의 연합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동학혁명'으로부터 '동학농민전쟁'의 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황토현에서 구체적으로 살펴야 하는 것은 '전적지'의 역사현장 탐구여야 하는 바, 동학농민군의 '병법 지리학'에 대한 관찰이다.

<주변의 가 볼만한 곳>

고부 관아 터 (정읍시 고부면 고부리)

오늘의 정읍시는 갑오동학혁명 당시에는 고부군, 정읍현, 태인현으로 구획되어 있었는데 고부 관아가 가장 컸다. 관아 터에는 1906년에 고부초등학교가 설립되었는데 바로 옆의 고부향교는 현존한다. 인근의 고부면 중산리에는 <동학혁명모의탑>, <무명농민군위령탑>이 있다.

만석보 유지비(遺址碑) (정읍시 이평면 하송리)

강물을 막아 봇둑을 쌓아 관개 수리를 하면 만석의 소출을 늘일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명분으로 1893년에 고부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을 임금도 주지 않은 채 강제 동원하여 보를 쌓은 후에는 높은 수세(水稅) 착취의 가렴주구로 농민봉기가 일어나는 진원지가 되게 했다.

정읍천과 태인천이 동진강 상류로 합수되는 곳에 쌓은 만석보는 농민을 위한다는 수리 제방 사업이 실제로는 농민의 원한만 쌓게 하였음을 알게 한다. 오늘에 만석보의 흔적은 없고 1973년에 세운 만석보 유지비는 다만 광활한 베들 평야의 조망대 구실을 하고 있을 따름이다. 건너편에는 일본 동척회사의 농민수탈 관사와 곡물창고들도 있었는데 이러한 역사경관도 제대로 갈무리 되지 못한다.

12:00-12:40 : 점심식사(정읍시 정금식당에서 한식요리)

13:00-14:30 : 내장사 (정읍시 내장동)

내장산(763m)과 남쪽의 백암산(741m), 서쪽의 입암산(626m)은 연봉을 이루고 있는데 이 일대는 1971년 11월에 '내장산국립공원'(제8호)으로 지정되었다. 호남정맥은 전북 장수에서 내장산-추월산-무등산-백운산으로 남진하는데 전북의 호남평야와 전남의 나주평야의 척추 구실을 하는 산줄기이다.

내장산과 입암산의 북쪽 경사면은 동진강의 상류가 되고 입암산과 백암산의 남쪽 경사면은 영산강 상류인 황룡강 물줄기를 이루고 내장산과 백암산의 동쪽 경사면은 섬진강 상류를 형성한다.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은 서쪽 대평야지대의 물줄기를 동쪽 산악지대에서 발원되게 하므로 특히 호남평야 인문지리학 답사에는 내장산 일대의 산악문화를 제대로 살피는 일이 필요하고 동학농민혁명 답사에도 필수적인 코스가 된다. 평야에서의 농민운동과 산악에서의 실력배양 및 은신은 서로 밀접히 연결된다.

늦가을 단풍 명승지 내장사는 속(內)에 감추어둔(藏) 활엽수림을 알뜰하게 비축하여 산업역군 노릇에 겨워하는 각처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녹색체험을 겪어 보도록 하는 그린필드 국토이다. 자연의 그린필드만 아니라 청사(靑史)의 그린필드를 함께 탐방 탐문하는 투어가 요청된다.

내장산국립공원 바로보기 : http://naejang.knps.or.kr/

15:00-16:00 : 백양사 (장성군 북하면 약수리)

내장산의 내장사에서 백암산의 백양사로 넘어가는 산길(49번 도로)은 포장도로가 되어 있으나 호남 국토의 비밀코드 루트라고 할 수 있다. 옛 삼남대로는 장성 갈재를 넘어 대체로 1번국도의 노선을 따라 북상하지만, 장성 갈재에서 입암산 남창골로 들어서서 장성 새재-백암산-내장산으로 빠지는 샛길이자 뒤안길이 전통시대에 있었다.

관로였던 문경 새재와는 달리 장성 새재는 관헌의 눈을 피해야 했던 이들, 특히 동학혁명운동의 좌절 이후에 나타나는 여러 신흥종교(민족종교라 부르기도 한다)의 아지트 루트가 되어오기도 한다. 외부에 대해 개방적인 환경인 내장산 내장사에 비하자면 은둔적이라 할 백암산 백양사와 입암산성 일대의 골짜기는 신흥종교인들에 의해 <국토의 배꼽> 또는 <남(南)조선 사상>의 배양지로 은밀히 저축되어 오기도 했다. 오늘에는 일부 산악인이라든가 탈세간 거사들만 국토의 이러한 비의(秘儀)의 은미(隱微)를 탐사해보고자 할 따름이다.

▲백양사 전경ⓒ내장산국립공원

16:20-17:00 : 입암산 남창골 자연관찰로

입암산(笠岩山)은 '갓바위산'이라 부르는 것이 더 온당할 듯싶다. 바위산의 정수리가 갓의 모양으로 생긴 형상을 어렵게 표현할 이유가 없다 함은 가령 장성 '노령(蘆嶺)'이라 하기보다는 '갈재'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익숙하고 친근한 경우에 비겨 보아도 알 수 있다. 정읍 쪽에서 오르는 입암산 등산로는 개방되지 않고 있으나 앞으로는 동학루트 코스로 조영될 것이라 하는데 전봉준의 은신처이기도 하였다.

전통시대의 농민문화는 외부로 표현될 적에는 농민운동이 되지만 내면으로 응축될 적에는 농민사상 내지 농민종교로 심화된다. 특히 호남 농민문화는 3군데의 올림푸스 산을 간수하고 있는데 계룡산, 모악산과 함께 입암산이 포함된다. 하지만 산악숭배의 성격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어서 계룡산과 모악산이 농민종교의 배양소라면 입암산은 은신처 내지 마지막 보루의 피난소 유형이 된다.

장성 갈재가 교통의 요충지라면 입암산은 뒤로 물러나 숨어 있는 형세를 이루고 있는 것과 관련될 것이다. 한국 농민메시아니즘에 관한 탐구는 상투성을 벗겨내야 할 일이다. 자칫 하다가는 극우 쇼비니즘이 되거나 또는 허무주의 종말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가령 '후천개벽'에 관한 접근과 연구가 보다 세련될 필요가 있겠다.

<주변의 가볼만 한 곳>

방장산(方丈山, 743m)

고창군 신림면, 정읍시 입암면, 장성군 북이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인데, 원래 방장산은 삼신산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었으니 옛 사람들이 성산으로 여겼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백제 시대에는 방등산이라 하였고 가사가 전하지는 않지만 '방등산곡'이라는 향가가 있기도 하였다.

산적에게 잡혀간 아낙의 노래라 하였고 지아비가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는 내용이라 하는데, 이에 대한 해석을 전혀 달리 내리는 국문학 연구가 있다. 아낙은 새 세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입산을 했건만 지아비는 낡은 세상의 미망에 잠겨 있는 것을 한탄하는 노래였으리라 추정하는 적극적인 해석이다. 언제부터 산 이름이 바뀌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산자락의 오지랖이 넓고 용추폭포가 있는 용추골을 비롯하여 세 개의 계곡이 웅숭깊어 활인(活人)의 명산으로 여긴 까닭이 있는 듯하다. 방장산 답사는 별도의 기획으로 마련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7:30-18:30 : 장성읍 문화유적

1) 황룡강 전적지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

동학농민군은 황토현의 승전을 전환점으로 삼아 정읍-무장(고창)-영광-함평 관아를 차례대로 점령하였으나 나주 감영 장악에는 성공하지 못한 채 다시 북상을 하게 되는데 장성 지경에서 1894년 5월 11일(음력 4. 23)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된다. 황토현 승전으로부터 16일이 경과한 때였는데 농민군은 전주에 주둔하고 있던 홍계훈의 경군(京軍)을 남방으로 유인하여 장성 황룡강변에서 극적으로 승리하게 되었다. 이때의 승전으로 농민군은 쿠르프포 1좌와 회전포 1좌, 그리고 양총 1백여 정 등 많은 무기를 빼앗았는데 이에 장성 갈재를 무난히 통과하여 마침내 전주로 입성할 수 있게 된다.

황토현 승전이 동학혁명의 제1단계 전개의 출발이라면 황룡강 승전은 제2단계의 '근대혁명'으로 진행되어 나가는 전환점이 된다. 전주입성에 이어 전주화약(和約)을 이끌어내게 됨으로써 동학군은 호남의 모든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바, 위로부터의 폭력과 아래로부터의 '농민혁명'이 이처럼 맞물리는 경험은 한국 역사에서 처음 겪는 일이었고, 동학혁명을 '근대혁명'으로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영산강 상류의 지류가 되는 황룡강은 장성댐으로 생겨난 장성호에서 흘러내리는데 장성군내를 관류하여 광주시 동남부에서 영산강 본류와 합류되어 나주로 내려간다. 장성 황룡면의 황룡강은 이처럼 전남과 전북을 관통하는 교통의 요지가 되는데 뒤늦게 1997년에 <동학혁명승전기념공원>을 조성하여 기념탑을 세우고 다음 해인 1998년에는 국가사적지 제406호로 지정했다.

이와 함께 관군(경군) 선봉장이었던 이학승의 순의비가 보존되고 있는데 이는 1897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우만이 글을 쓴 것이었다. 또한 면암 최익현이 비문을 지은 경군대장 이학승 순의비도 세워져 있다. 최익현은 물론이려니와 기우만과 그의 조카 기삼연은 동학농민전쟁이 좌절된 다음 해인 1895년의 '을미의병전쟁'과 10년 뒤의 '정미의병전쟁'에 나섰던 대표적인 의병장들이었다. 이들의 '의병전쟁'과 동학의 '농민전쟁'을 함께 비교 관찰할 수 있는 역사 현장 체험이 특이한 쪽이라 할 수 있다.

한말의 근대운동을 개화파계열, 척사위정계열, 동학농민계열의 세 계통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로부터 1백년이 훨씬 지난 오늘에 과연 이를 어찌 합류시키고 있는 것일지 <살아있는 학예술 및 교육>의 현장 실습에 더욱 충실해야 할 터.

2) 필암서원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순천에서 인물 자랑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 말고, 장성에서 학문 자랑 말라> 하는 속담이 있는데 장성이 이러한 물망에 오르게 된 것은 하서 김인후(1510~1560)를 배향하고 있는 필암서원이 호남 성리학의 센터가 되어왔기 때문이었다. 1590년(선조 23)에 김인후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세웠고 1662년(현종 3)에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전통건축 연구에 있어서 특히 종묘건축이라든가 서원건축은 <예절건축(또는 예절관건축)>이라는 장르를 따로 마련하여 종교건축인 가람건축 등과 비교하기도 한다. 전국 도처 서원건축의 구성과 배치 및 원림 조영의 탐미 연구는 전문가들만 독점하고 있는 쪽이라 하겠는데 필암서원의 공간구성이 어떠한 세련성과 경건성 및 실용성의 구색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넓게 마련되어야 한다. 여기에는 이 서원의 건물 명칭들만 나열한다.

<외삼문> 곽연루(廓然樓), 청절당(淸節堂), 우동사(佑東祠), 진덕재, 숭의재, 장서각, 목판고,
<내삼문> 동재(東齋), 서재(西齋).

19:00 : 저녁식사/ 숙박 (장성군 남면 한마음자연학교 황토방, 마을 뷔페식)

6월27일(일)

07:00-07:40 아침식사 (마을 뷔페식)

08:30-09:00 장성 갈재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미륵골)

문경 새재, 죽령, 박달재 등에는 '생태환경 역사도로공원'을 조성해놓고 있는데 장성 갈재가 누락되고 있는 것은 아쉽기만 하다. 조선시대의 9대로에는 험산준령을 넘어야 하는 고갯마루들이 있어서 역사의 애환과 나그네 설움을 갈무리하는데 삼남대로는 가령 영남대로에 비해 순탄한 평지 쪽의 대로이지만, 공주의 차령고개와 장성의 갈재가 예외적이다.

갈재에는 박달재의 금봉이 전설보다 더 흥미로운 미인바위(가래바위, 갈애바위) 전설이 있다. 중앙권력(관원의 부임 행차, 선비의 과거시험 상경)의 이동로가 되지만 동시에 지방자치문화의 수문장 역할도 한다. 주막집의 미인 주모는 관원이라든가 과거길의 선비와 자연스레 접촉하게 되는데 어느 쪽에 우점(優點)을 두느냐에 따라 전설의 컨텐츠가 정반대로 구성된다. 미인에게 우점을 두게 되면 탐관오리라든가 출세주의자를 골탕 먹이어 지역문화를 수호하는 역할을 수행한 것이 되고, 관원 및 예비관원에 우점을 두게 되면 교활한 여인에게 농락당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여 엄한 징벌을 내리게 하는 전설이 된다.

갈재의 전설은 정반대되는 두 가지 콘텐츠를 함께 지니고 있는데, 공식부분(관변측) 보다는 비공식부분(민간측) 쪽의 전설을 현지 주민들은 더욱 신봉하고 마을 자랑으로 삼기도 한다. 도로사정이 달라지고 환경의 훼손으로 갈재의 미륵골에서마저도 <미인바위>를 확인하기는 어렵게 되었지만 국도 1번(2차선 구도로)과 중복되기도 하는 갈재야말로 호남 황톳길의 대표적인 경관을 간직한다.

09:30-10:10 열두 당산마을(정읍시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마을)

자연지리에는 결함이 있게 마련이어서 이를 인문환경의 삶터로 삼으려면 비보(裨補)를 하게 되는데 골막이, 물막이의 신물(神物)들을 차리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교통의 요지에 놓인 '뚜껑 열린 마을'일수록 동구 밖은 물론이려니와 마을길과 앞산, 뒷산의 요처마다 수령이 오래 된 당산나무를 비롯하여 석장승, 목장승 등을 세우고 산짓당(山祭堂)을 차려놓는다. 외부에 대해서는 방어와 수호가 되고 마을 내부로는 협동과 자조 자립의 결속이다.

원백암마을은 흰 바위가 많은 마을이라는데 원래에는 24 방위마다 24개의 당산을 두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열두 당산만 남아 있다. 크기는 작지만 실물과 유사한 남근석(전북 민속자료 13호)을 동구 밖 서쪽에 세워놓고 있는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기 위해서임은 물론이고 장군석 또는 망주석이라 부르기도 한다. 전에는 대추나무가 울창하여 '숲정이'라 불렀다 하고 여근석에 해당되는 여음석이 있었다 하지만 벌써 전에 없어졌고 다만 오래된 수령의 느티나무 줄기 한 가운데가 깊숙이 패어 있어 이를 '여근목'으로 부르고 있다.

이와 함께 할아버지 당산, 할머니 당산, 행운돌 당산, 칠석돌 당산(견우 직녀 사랑 소망 당산), 주업나무당산(모든 업을 없애주는 당산목), 누운돌 당산 등이 있는데 타처 사람들이 발복 소원을 위해 찾기도 한다고 한다. 전통부락은 동구 밖의 당산나무-장승-빨래터-우물터 등의 공적 공간과 고샅길-논틀밭틀-자드락길-뒷담길로 구성되는 사적공간의 연결구조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원백암마을의 취락구조는 이미 이를 지탱해 내지는 못하고 있다. 농민문화와 함께 농촌 촌락문화도 이미 해체되고 있지만 그러함에도 그 아름다운 잔영을 열두 당산마을에서 찾는다.

10:30-11:00 무성서원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정읍 태산 선비문화권>이라 한다. 태인(泰仁)이란 지명도 그러하지만 신라 시대에는 '태산'이라 하였는데 최치원이 태수로 부임하여 덕치의 교화를 베풀어 역대로 고명한 선비들을 배출했는데 <태산선비문화사료관>이 개설되어 있다. 최치원의 영정이 봉안돼 있는 무성서원을 필두로 하여 2개의 서원과 10여개의 사우, '피향정'을 위시하여 10여개의 누정이 있다. <상춘곡>을 쓴 정극인과 송세림, 신잠, 이항 등의 명유들이 배출되었고 한말에는 최익현, 임병찬 등의 의병전쟁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무성서원 일대가 '한옥문화촌'으로 조영되어 있고 이 서원에서는 '향음주례'의 예법을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기도 하다.

▲최치원 영정이 봉안된 무성서원ⓒ정읍시

장성과 태인의 선비문화, 정읍 배들벌과 입암산 남창계곡의 농민(메시아니즘) 문화, 내장사와 백양사의 불교문화를 고르게 섭렵하는 역사기행은 더욱 계속 반복될 필요가 있다. 선비 중에는 위정척사 계열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고 전봉준 자신이 선비 출신이기도 했다. 그리고 호남 불교는 특히 하생미륵 변혁신앙이 두드러진 측면이 있었으며 농민의 지주층에서도 후기에 이를수록 동학 가담자가 많이 배출되고 있었던 사실도 확인되는데 고창의 손화중 자신부터 지주층의 덕망가 출신이기도 했다. 이와 함께 칠보면에서 멀지 않은 정읍 산외면 동곡리에 김개남 장군묘가 있고 그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놓는다.

11:20-12:00 원평 장터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동학혁명 지도자는 정읍의 전봉준, 고창의 손화중, 남원의 김개남 중심의 3두 체제였는데 여기에 원평의 김덕명을 더하게 된다. 남북 교통망의 요지이며 물산집산지를 이루었던 원평 장터 일대는 옛날의 번영도 명성도 놓치어 한산하기만 하다. 하지만 동학혁명기행에 반드시 답사해야만 하는 역사유적지이다. 원평은 동학의 최초의 모의 과정, 농민전쟁의 진행 과정, 그리고 최후의 결전 과정에서 모두 중요한 거점이자 진지였다. 역대로 미륵메시아니즘 및 농민 해원(解寃) 운동과 사상의 산실이 되어 온 모악산을 배후로 하여 웅도 전주 권역에 포섭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1894년 5월 11일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3일 뒤인 14일 원평의 관군을 진압하여 선전관 이주호, 군관 이효응 등을 참수하고, 전주 외곽 삼천(전주시 삼천동)으로 진출하여 다음 날인 15일 전주성으로 입성한다. 한편 이 해 7월 25일 새벽 청일전쟁이 발발하여 5일 뒤인 30일에는 성환에서 일본군이 승전한다.

농민군은 이로부터 더욱 일본군과 맞부딪치게 되지만 9월 초에 전봉준은 원평에서 제2차 기포를 결정한다. 하지만 11월의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은 크게 패퇴하여 논산을 거쳐 전주로 돌아왔다가 다시 후퇴하는데 12월 21일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내면서 결정적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지난 2009년 12월 21일 금산면 용호리 구미란 전적지에서는 <구미란 전투 희생자를 위한 추모행사>가 처음으로 개최되기도 했다.

12:20-13:00 점심식사 (김제시 금구면 예촌면(麵)사무소에서 국수요리)

13:30-14:00 모악산 귀신사 탐방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귀신사(歸信寺)는 모악산 금산사의 말사이기는 하지만 소설가 양귀자가 <숨은 꽃>이라는 작품의 배경으로 삼은 곳이기도 하고 '옛길 걷기 운동가' 신정일이 가장 찾아가고 싶은 명소로 선정하기도 한 고즈넉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파랑새> 민요 낭송으로 동학농민 추모의 모임 자리를 갖는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남게(나무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 맞는다

새야 새야 녹두새야 웃녘 새야 아래녘 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함박 쪽박 열나무 딱딱 후여

새야 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남게 앉은 새야
엄마 죽은 넋세 보오 아빠 죽은 넋세웨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는 어이 찾아 왔니
솔닢 댓닢 푸릇푸릇 봄철인가 찾아왔지

14:00 서울로 출발

<국토학교>는 원활한 교외교수(校外敎授)를 위하여 <국토학교 카페>를 인터넷에 개설하여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국전토의 국토답사를 위한 온갖 정보와 지식의 아카이브(기록보관소)이며 아스날(정보창고)이 되고자 합니다. 올바른 국토문화 창달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회원 가입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든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국토학교 카페 : http://cafe.naver.com/dadsaschool

국토학교의 국토강좌는 개교 2년째에 이르기까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2009년>
제1강 (4월): 남한강 뱃길 따라 영남대로 옛길 따라
제2강 (5월): 영남 전통마을 순례 (답사 키워드 - 산은 책이다)
제3강 (6월): 호남의 누정문화 원림문화 (풍경의 발견과 재발견)
제4강 (7월): 북강원의 요산요수 (동해안 풍류길 되살린다)
제5강 (8월): 내포지방에 부는 바람 (백제의 미소와 제2의 지중해)
제6강 (9월): 금강문화권의 초대장 (옛이야기 재잘대는 실개천 휘돌아)
제7강 (10월): 낙동강 따라 가야 달빛기행 (우리 땅의 고고학 상상력)
제8강 (11월): 만추의 호남 단풍길, 침엽수길 (대자연 소자연 합자연)
제9강 (12월): 동해에서 묵은해 보내기(동해용왕과 수로부인과 해신당)

<2010년>
제10강 (1월): 임진강의 봄, 한탄강의 봄(분단유목문화 가로지르기)
제11강 (2월): 얼쑤! 대보름 달마중 가세(봄맞이 카니발 : 아산 공주 청양 부여)
제12강 (3월): 순천만에서 섬진강으로(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제13강 (4월): 남한강 상류 녹색체험(주천강, 영월 동강, 정선 아우라지)
제14강 (5월): 북한강의 흐르는 강물처럼(홍천강-소양강-파로호-내린천)


국토학교 6월 답사 참가비는 16만원입니다(교통비와 숙박비, 4회 식사와 뒤풀이, 입장료, 여행보험료,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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