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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 영화배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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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마을 사람들, 영화배우가 되다

[마을주의자]<1>양평 연수리 마을영화감독 신지승

마을', '동네.' 정겨운 이름이지만 우리 사회는 이 단어를 오랫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산업 발전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마을을 등졌고, 이방인들이 몰려든 도시에서도 마을 공동체는 파괴됐습니다. 21세기 '마을'을 살리려는 노력들이 방방곡곡에서 진행 중입니다. 정기석 국회정책연구위원(정의당)이 '마을주의자' 연재를 시작합니다. 정기석 위원은 <마을을 먹여살리는 마을기업>, <마을시민으로 사는 법>, <오래된 미래마을> 등 마을 관련 책을 내는 등 마을 전문가입니다.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 발행됩니다. 편집자

마을주의자 : 국가나 정부의 구조악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마을 속으로 들어가, 마을사람들과 더불어 사람사는 마을을 건설하고 경영하는 '마을시민'으로 살아가는 길이 상책이자 정도라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진보적이고 정의롭고 창조적이고 공동체적인 사람

"영화감독이란 대중에게 삶의 '드라마'를 발견하게 해주는 존재죠. 김종학 감독은 시대와 역사 속의 드라마를 영화 이상의 무게로 대중의 삶 속에 던져놓았어요. 하지만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제작시스템은 더 이상 예술혼이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요. 아마 김 감독도 자본의 힘에 더 견디지 못한 거겠죠."

신지승 감독은 지난날 MBC에서 조연출로 일할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 '여명의 눈동자' 팀을 보면 부러웠다. 김종학 감독과 팀원들은 드라마를 찍는 게 아니라 마치 전쟁을 하는 투사들 같았다. 자본의 힘보다 예술혼에 더 집착하는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작품이 안될 때마다 김종학 감독의 세트장을 기웃거렸다.

신 감독도 운 좋게 KBS의 외주업체에서 드라마를 경험한 적이 있다. 김수현 원작에 기라성 같은 스타급 배우들이 출연하는 방송국 외주드라마 1호 작품이었다. 물론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예술혼과 매일 치열한 전투를 벌어지는 가난하고 열악한 현장이 그곳이었다. 방송국 내부 제작비의 1/3수준의 자본으로, 나머지는 순전히 예술혼으로 만드는 외주드라마는 처절한 '을'의 전장이었다. 생활인으로서 고된 경험이었지만 예술인으로는 좋은 깨달음을 대신 얻었다. "돈의 힘으로 살면 돈이 없으면 죽은 목숨이 된다."

▲ 신지승 감독과 마을 어르신. ⓒ정기석

'마을영화감독' 신지승

신지승 감독(50세)은 마을영화감독으로 불린다. 국내에서 '마을영화'라는 개념을 처음 창안하고 제작한 장본인이다. '마을영화'란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만드는 영화다. 마을 주민들이 배우는 물론, 시나리오 작가도 되고 감독도 되는 영화다. 한마디로 '마을 사람의, 마을 사람에 의한, 마을 사람을 위한 영화'라 할 수 있다. 자본의 힘에 휘둘리는 기존 영화시스템의 대안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래서 재미있고 돈 되는 상업영화는 찍지 않는다. 감동은 있을지언정 대중적인 재미는 별로 없는 순정한 마을영화만 찍고 다닌다.

신 감독은 마을영화 감독답게 산골 외딴 오두막에서 아내와 아이 둘과 함께 산다. 양평 연수리다. 제 손으로 지은 소박한 누옥은 자택이자 영화제작소다. 자본의 냄새나 치장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공간이다. 그렇게 살아서 영화판에서는 철저히 무명감독이 됐다. 하지만 이런 특별한 감독을 알아봐주는 눈 밝은 이들이 있었다. 올해 교보환경대상 생명문화부문 대상을 받았다.

"최고가 아니라 유일함을 꿈꾸는 편이죠. 꿈과 열정은 강렬하지만 욕심이 없어요. 그저 소박하죠. 그냥 내 생각, 내 영역 , 내 생존, 그리고 내 작품의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생각이나 행동을 거짓, 나약, 위선 이라 부르는 세상사람들도 있지만…."

신 감독은 그런 사람이다. 딱 그 정도의 사람이다. 계획이나 작업은 요란하지 않다. 올해도 세워놓은 궁리나 구상은 많다. 세계마을영화축제, 일본, 미국 등 해외상영회 등. 크든 작든 모든 작업은 그저 마을공동체를 고민하는 이들과 현장에서 만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현재 있는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생체적인 능력과 잠재된 예술적 끼를 바탕으로 마치 마당극처럼 날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을영화는 마을 안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의 지식, 끼, 표현을 발견하는 일에서 시작하는 거죠. 아무리 작은 마을에서도 앞장 서 나대는 목소리 큰 이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런데 그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요. 침묵하며 살고 있는 다수의 마을주민이 참여하는 영화라야 의미가 있다고 봐요. 마을영화는 마을공동체사업의 이치와 다를 게 없어요."

신감독의 영화철학은 마을공동체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혹자는 마을영화에 참여하는 마을의 노인들이나 아이들이 연기적으로 아마추어일수 밖에 없으니 다큐멘타리에 가까운 것 아니냐고 의심해요. 아니죠. 엄연히 80% 이상이 예술적 작업인 연기적 행위예요. 엄연히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하는 것이죠. 생활과 연기는 분명히 달라요."

흔히 마을영화라고 하면 마을을 주제로 설화 같은 이야기를 다루는 것으로 착각하거나 오해한다. 본질적으로 한 마을에 공존하는 마을주민들이 공통적으로 느끼고 호흡하는 인간관계 이야기다. 전설이나 설화가 아닌 생생한 일상의 생활이야기다. 예술적 희로애락을 대대로 공유해온 집단 공동체험이 영화로 변환되는 작업이다. 이로써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 마을 주민 전체가 생활공동체로서 영화적 일체감을 이루어낸다. 한마디로 "마을 공동체의 영화적인 기념사진 같은 것"으로 신 감독은 정의한다.

▲ 연수리 자택 앞에서. 신지승 감독 가족. ⓒ정기석

마을영화는 공동체의 기념사진

"물론 마을 안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만 재현하는 건 아니죠. 실재와 가공의 이야기가 적절하게 혼합된 구성으로 하나의 주제로 귀결돼요. 마을영화는 드라마죠. 적절한 스토리텔링이 개입돼야 해요. 또 마을 주민들의 캐릭터가 그대로 이야기에 개입되기 때문에 사전 시나리오는 있을 수 없어요. 대강의 시나리오만 순간순간 구성되고 다시 해체하기를 되풀이하죠. 오직 최상의 작품을 위해서."

신 감독은 마을운동가가 아니다. 스스로도 그렇게 규정한다. 운동가나 활동가가 아니라 영화창작의 입장에서 미시적 공간인 마을이라는 무대를 관조한다. 마을주민들을 동반자로 삼아 삶의 고민과 우주적 존재자로서의 자아와 공동체의 문제를 더불어 탐색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 감독에게 영화는 수익을 창출하는 도구가 아닌지 오래되었다. 그에게 영화는 함께 즐기는 축제나 잔치다. 사물과 존재를 재인식하는 인문학적인 학습도구다. 신 감독에게 마을영화 작업은 일련의 수행과정과 다를 게 없어 보인다.

부인인 이은경 씨도 영화감독이다. 둘은 가족이자 동지다. 이들의 작업은 마치 1960년대 볼리비아 우카마우집단이 했던 민중영화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듯하다. 그들은 마을로 들어가 주민들 이야기를 공동창작하고 카메라를 가르쳐주고 주민 스스로의 시각에서 영화를 만들도록 도와준다. 부부감독은 영화를 만들어 주는 게 아니라 도와주는 사람일 뿐이다. 그렇게 신 감독은 지난 10여 년 동안 전국 80여 개 농촌마을에서 60여 편의 마을영화를 창작했다. 농촌의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영화운동을 통해 예술의 사회적·생태적 역할을 꾸준히 모색해왔다.

신 감독은 대학에서 연극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게 영화판의 모진 인연으로 이어졌다. 서울에서는 방송국, 제작사 연출부로 일하다 예술영화연구소를 만들어 직접 영화를 찍기도 했다. 하지만 상업영화판은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상처와 손해만 잔뜩 부여안고 마을로 하방했다. 12년 전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를 받아 준 마을 속으로, 마을주민으로 녹아들었다.

▲ 마을 영화 작업 현장. ⓒ정기석

처음부터 마을영화를 만들려는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다. 운명적으로, 또는 우연히 마을영화를 만난 셈이다. 마을과 신 감독을 마을영화로 이어준 고리 역할은 호기심 많은 마을아이들이었다.

"외진 산골마을에 낯선 영화감독이 들어와 영화를 찍고 있으니 마을 아이들이 하나둘 기웃거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호기심 많고 용감한 아이들 몇몇이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는 거예요. 마침 돈이 없어 전문 연기자를 쓸 수 없는데 잘 됐다고 생각해 영화에 출연시켰던 거죠."

마을의 아이들이 영화에 나오자 이번에는 마을 어른들이 영화촬영 현장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마을사람들과 영화를 함께 찍으면서 신 감독은 영화에 대한 생각과 시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이 직업 연기자보다 더 훌륭한, 창의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예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마을사람들과 함께. 마을 사람들이 시나리오도 쓰고 연기도 하고 제작진으로까지 참여하는 마을영화는 그렇게 탄생했어요."

신 감독의 마을영화가 특별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 직접 자신들의 생활상을 영화에 그대로 담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마을영화는 마을 사람들이 공감하고 공유하는 이야기, 마을 공동체의 이야기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영화로 재현된다. 너와 내가 따로 없고, 주인공과 조연, 단역이 따로 없다. 마을 사람 모두가 마을영화의 주인공이고, 마을의 주인이다. 신감독이 소망하는 사람 사는 마을의 모습이나 세상의 풍경, 또는 일생일대 궁극의 미장센(mise-en-scen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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