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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중 정권, 벤처광풍에 놀아나다

[1987~2012년 경제민주화 실패의 역사·<14>] 투기 열풍

2000년 신문철을 뒤져본다. 그것은 정말 광풍이었다. 새 천년을 알리는 요란한 팡파르를 타고 벤처 붐이 터졌다. 어느 날 벤처라는 낯선 영어 단어와 함께 무수한 닷컴이 쏟아지는가 했더니 온통 벼락부자 소식으로 가득 찼다. 2000년 봄은 그야말로 벼락부자 탄생의 시대였다.

나라 안 소식만 갖고는 모자랐는지 나라 밖 이야기가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20~30대가 수백억 원도 아닌 수천억 원의 떼돈을 갑자기 벌었다는 따위의 '대박기사'가 줄을 이었다. 벤처기업은 연금술사의 마력을 지녀 코스닥을 돈 공장으로 만들었다고 언론은 들떠 있었다. 신문은 연일 세상이 바뀐다는 홍보성 기사로 꽉 채워졌다.

벤처기업은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이고 서울의 맨해튼이라는 테헤란로는 벤처기업의 요람이 되어 어느 날 테헤란 밸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흥분했다. 벤처기업들이 몰려 사무실 임대료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정책자금을 받아 기술개발을 한다고 그곳은 밤을 잊고 사는 불야성을 이뤘다.

하룻밤 술값으로 1000만 원을 날리고 술집 여급이 귀동냥해서 벤처 주식을 샀더니 팔자를 고쳤다는 등등 정말 꿈나라 같은 소리가 한도 끝도 없었다. 이에 따라 주가가 경제상황과 기업의 내재가치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풍문과 소문에 따라 널뛰기를 했다.

정보기술(IT)은 세계를 하나로 엮으면서 인류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거대한 혁명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생명기술(BT)은 생명의 신비를 풀어서 무병과 풍요를 약속한다고 시끄러웠다. 그것은 세대의 변화가 아니고 세기의 변화라는 것이었다. 아마 인류역사가 13세기 칭기즈칸의 대정벌 이후 겪는 최대의 변화인 것 같았다.

당시의 분위기는 IT와 BT가 인류에게 희망의 내일을 제시하고 있었다. 무한한 가치와 미래가 손짓하는 그곳은 기회의 땅이었다. 또 노력과 능력에 비례하여 성취가 가능한 미개척지였기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용기와 모험심을 가진 자에게는 약속의 땅이 틀림없었다.

이 돌풍 같은 변화는 19세기 중반 신대륙에서 벌어졌던 '골드러시'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노다지'를 꿈꾸며 개발업자와 광부만 몰려든 게 아니다. 술집과 도박장이 들어서고 건달에 도둑과 창녀로 들끓었다. 그곳을 사기꾼과 돈놀이꾼이 그냥 둘 리 없고 총잡이인들 몰라라 할 리 없었다. 황무지가 하룻밤 사이에 불야성을 이루는 난장판으로 변했다. 서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당시 벤처광풍은 '골드러시'와 그 모습이 너무나 흡사했다.

김대중 정권도 흥분해서 법석을 떨었다. 벤처기업은 21세기 한국경제의 산실이다, 새 천년의 운명은 벤처기업에 달렸다, 벤처기업을 수만 개 만들어 육성하겠다, 한국경제도 신경제에 편입되었다 등등을 떠들어대면서 정책자금을 동원했다. 벤처기업이 연출하는 환상에 젖어 제조업은 사양의 길을 걷는 굴뚝산업으로 취급했다. 그곳에서 돈 냄새가 풍기자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게이트'라는 이름의 숱한 의혹사건을 연출했다.

그 돈 잔치는 금광 촌의 혼돈과 광기를 닮은 그들만의 축제였다. 인류의 미래라는 IT와 BT 분야에서 기술개발의 성공확률은 100만분의 1 단위라고 한다. 그런데 뻥튀기하듯이 갑자기 그 많은 벤처기업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이해가 안 간다.

한탕 했다는 꿈같은 소리가 밑도 끝도 없이 나왔던 것은 보이지 않았던 검은손들이 있었던 것을 말한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가 싶더니 후다닥 닫혔다. 이른바 정현준 사건이었다. 진실의 열쇠를 쥔 사람은 죽음으로 입을 다물었고 두 사람은 해외로 달아났다. 진실은 파묻혔고 의혹은 꼬리를 물었다.

알파벳을 적당히 조합해서 닷컴을 붙인 벤처열풍은 쌈짓돈까지 빨아들일 만큼 열기를 뿜던 코스닥에 한파를 몰고 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정보격차라는 말로 40-50대를 활동무대에서 몰아내버렸다. 컴퓨터 문맹이라는 이유로 '흰머리'가 해고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성장의 주역을 어느 날 소외지대에서 좌절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계층으로 전락시켰다. 무엇보다도 벤처광풍과 투기열풍이 이들을 무능력자로 낙인찍음으로써 박탈감마저 안겨줬다.

▲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1월 24일 서울 포스코빌딩에서 열린 '새 천년 벤처기업인과의 만남'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몰아치는 투기광풍, 격심해진 빈부격차

여기에는 정권과 언론의 책임이 크다. 벤처산업이란 개념도 불분명한데 김대중 정권은 코스닥 시장부터 만들어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당시로서는 집단도산에 따른 대량실업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미래산업을 육성하도록 노력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그 취지는 좋았다. 하지만 미래산업의 성장성을 너무 성급하게 판단하고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벤처광풍이란 부작용을 낳았다.

신문은 지면까지 늘리면서 연일 벤처 기사로 채우기 바빴다. 기자가 주식을 받은 대가로 주가를 띄우기 위해 같은 내용의 홍보성 기사를 수십 번씩 써서 구속되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다. 경제전문 케이블TV는 어느 주식이 싸니 빨리 사라고 호객행위까지 했다. 찍으면 딴다는 노름판의 훈수 같은 모습이 예사였다. '애널리스트'라는 투자분석가들이 무수하게 등장했다. 그들이 언제 어느 주식을 사고팔면 돈을 번다고 말하면 신문은 그대로 베껴 썼다.

벤처기업이란 개념부터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기술개발의 산실은 대학교나 연구소이다. 그곳에서 기술개발이 완료되어도 시장에서 상업적으로 성공할지는 미지수이다. 투자이득에 대한 기대도 크지만 투자위험이 크기 때문에 기술개발에 투입되는 돈을 모험자본(venture capital)이라고 한다. 기술개발이 성공하면 먼저 창업회사(start-up company)를 만들어 시장조사-기술응용을 거쳐 시장성이 확인되면 본격적인 기업활동에 들어간다.

그런데 기술개발에 착수하기도 이전에 벤처기업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부터 만들어 그때부터 기술개발에 나섰다. 엉터리도 너무 터무니없는 엉터리였다. 말하자면 그냥 간판을 걸고 이제부터 기술을 개발해 떼돈을 벌겠다는 것이었다.

김대중 정권이 정책자금까지 지원하며 이런 벤처광풍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지원자금을 방만하게 집행했음에도 결과적으로 IT산업의 토대를 구축한 측면이 있다. 그 후 정권은 성장동력으로서 미래산업에 대한 관심조차 없었다.

김대중 정권은 천민자본주의의 본산지인 라스베이거스판 복권을 수입했다. 이미 정부 차원에서 24종의 복권을 발행하고 있었는데도 모자란다고 판단했는지 7개 부처가 연합해 미국에서 로또를 들여온 것이다. 정권이 나서 판돈을 키워 사행심을 조장함으로써 전 국민을 상대로 푼돈 놓고 떼돈 따라고 노름판을 벌인 꼴이었다. 여기에다 '인생역전'이라는 선전문구도 환각적이었다. 상실감과 박탈감에 젖은 국민에게 로또로 신분상승을 꾀하라고 유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규제완화를 신봉한 김대중 정권은 시장질서와 약자보호를 위한 규제도 철폐대상으로 삼았다. 1970년대 후반 이후 역대 정권이 부동산 투기를 잡는다며 사슬로 묶고 그것도 모자라 겹겹이 채웠던 자물쇠를 몽땅 풀었다. 20차례 이상 부동산 경기 부양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저금리를 타고 춤추던 돈 바람이 투기망령을 만나면서 전국에 투기광풍이 몰아쳤다. 부동산 투기는 빈자의 소득을 부자에게 이전시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파괴적 행위이다. 결국 IMF 사태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빈부격차를 더욱 벌려놓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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