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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말아먹은 '민비' vs 조선의 상징 '명성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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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라 말아먹은 '민비' vs 조선의 상징 '명성황후'

[망국 100년·32] 日 야욕을 보여준 '명성황후'

19세기 후반은 세계 어디에서나 급격한 변화의 시대였거니와, 조선은 그중에서도 가장 급박한 사정을 겪은 곳의 하나였다. 19세기 초반까지는 비록 기능이 매우 쇠퇴해 있기는 해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민족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을 넘길 때는 식민지로 전락할 위험에 빠져 있었다.

고종 즉위 직전, 1860년경이 되어서야 북경이 서양 오랑캐에게 유린당하는 것을 보며, 적어도 명-청 교체 이후로는 처음으로 비상한 상황이 닥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했다. 1864~73년 세도 정치의 틀을 따르면서도 극단적 쇄국 정책과 함께 전례 없이 강한 개혁 정책을 추진한 대원군 집권은 위기에 대한 첫 국가적 대응이라 할 수 있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요즘 표현으로 출구 전략이 빈약한 정책이었다. 폭력적 수단에 의한 강압적 개혁 정책으로는 국가의 획기적 체질 개선을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항의 필요가 절실해지는 데 비해 개항을 위한 준비는 더뎠다. 1873년 말 대원군이 정권을 내놓은 것은 더 이상 대책이 없어서 스스로 물러선 것으로 보인다. 자기로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개혁을 해놓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대원군이 물러난 후 정권을 넘겨받은 민 씨 일파는 역시 세도 정치의 틀에 따라 권력을 운용하면서 국가의 진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대책을 별로 강구하지 않았다. 대원군의 개혁 중 가장 의미가 큰 것이라 할 수 있는 서원 철폐를 집권하자마자 뒤집어 놓은 데서 단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강화도조약 체결 등 대외 관계의 진전이 있었지만, 사세에 떠밀려 진행된 일일 뿐, 능동적 조치를 취한 것이 거의 없다. 강화도조약 체결 직후 수신사를 일본에 보낸 후 4년이 지나서야 2차 수신사를 보낼 정도였다.

김홍집이 1880년 2차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에야 장래에 대비하는 움직임이 조금이나마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 때 <조선책략>이 들어와 청나라 양무파의 정책 노선이 알려짐으로써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초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일본과 청나라에 신사유람단과 영선사를 파견한 것이 대표적인 움직임이었다. 탐색의 방향은 양쪽이었지만, 청나라보다 열성적으로 조선에 접근해 온 일본 쪽으로 기울어지는 추세를 별기군 창설이 보여준다.

민 씨 정권의 부패에 대한 불만과 개화 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겹쳐져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청나라 양무파 정권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국정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적극적 협조에 기대를 걸고 있던 급진 개화파가 1884년 말 갑신정변을 일으켜 반전을 꾀하다가 실패한 후 청나라의 통제가 더욱 강화되었다.

1882~94년 조선 간섭기의 청나라 정책은 일본에 대한 상대적 우위를 지키기 위해 조선에서 변화의 계기를 억누르는 방어적 노선이었다. 시국에 관한 주견 없이 권력 유지에 만족하는 민 씨 집단이 주견이 강한 대원군보다 다루기 쉽기 때문에 청나라의 선택을 받았다. 1891년 이후 민 씨 세력 수령으로서 당대 으뜸의 탐관오리로 명성을 날린 민영준(후에 영휘로 이름을 바꿈)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민영준은 원세개의 조종에 따라 동학혁명 진압을 위한 청나라 출병 요청을 주도, 청일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장본인이었는데, 나중에는 일본 쪽에 붙어 합방 후 작위까지 받은 대단한 인물이다.

(이번 작업에서 조선 내부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깊이 살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무엇보다 동학농민전쟁에 이르는 경위와 양상을 개관하면 당시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깊이 있게 파악할 수 있을 텐데, 필자의 능력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이번 작업에서는 비 연구자로서도 윤곽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대외 관계와 지배층의 향배에 관심을 제한한다. 이후라도 사회경제적 상황까지 설명 범위에 끌어넣을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면 보완 작업을 하고자 한다.)

청일전쟁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서 최대의 경쟁자를 물리쳤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일본이 요구한 조건이 엄청난 것이었다. 조약을 체결하러 시모노세키에 간 이홍장이 일본 국수주의자에게 총격을 당하는 바람에 조건이 다소 완화되었다고 하는데도 당시 열강들 사이의 상식으로 납득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1주일 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조건의 완화를 권하는 '3국간섭'에 나섰다. 세 나라, 특히 러시아의 이익을 위해 3국간섭이 이뤄진 것이 사실이기도 하지만, 일본의 요구 조건이 워낙 황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간섭이 성립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이 한 차례 승전을 계기로 일거에 동아시아 지역 패권에 접근하려 한 것이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은 1890년 출범한 의회의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1892년 7월 출범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은 1893년 말 중의원을 해산했지만 새로 선출된 의회는 이듬해 5월 내각 탄핵 상주안을 가결했다. 1894년 6월의 사태 발생에서 8월 1일 선전포고에 이르기까지 전쟁을 서두른 것은 국내의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서였다. 전쟁을 종결함에 있어서도 여러 정파를 두루 만족시키기 위해 가혹한 강화 조건을 관철시켜야 했고, 조선의 뒤처리도 서두르게 되었다.

서두르는 과정에서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을 저질렀다. 일본이 청나라를 따돌린 후 조선의 '개혁'에 박차를 가하면서 국왕의 정치 개입을 억제하는 데 대한 반발로 고종 측근 세력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시도했다. 3국간섭에서 러시아의 힘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서 성과를 거두기에 조급한 일본인이 측근 동원에 능란한 왕비를 제거하고 왕을 공포에 몰아넣기 위해 일을 저질렀는데, 얼마나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사건인지 충분히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개항 이후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위기의식을 가진 조선인이 국가의 진로를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방향이 엇갈리고 있었다. 청나라와의 전통적 협조 관계를 지키느냐, 이웃의 신흥 강국 일본과의 협력 관계를 만드느냐 하는 것이었다. 어느 방향이든 대다수 사람들은 조선의 국체 보존을 기본 전제로 삼고 있었다. 자기 자신이 보호되려면 자기가 속한 사회가 보호되어야 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로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인식한 것이 국가였다. 청나라와 일본 사이의 선택에서도 어느 쪽이 국가를 지키기에 좋은 길이냐 하는 것이 첫 번째 기준이었다. 개화의 효율성 같은 것은 국가가 지켜진 뒤에 부차적으로 따질 문제였다.

청나라는 전통적 관계 때문에 대다수 조선인들이 경계심을 덜 품는다는 이점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임오군란 이후의 간섭기 동안 많이 까먹었다. 대원군을 납치하고 부패한 민 씨 정권을 옹호하는 편의주의적 태도가 환멸을 불러일으켰고, 중국 상인의 과도한 보호 등 이익에 대한 집착으로 전통적 관계에 대한 신뢰를 손상시켰다. 청일전쟁으로 완전히 쫓겨나기 전에 조선인들의 마음에서는 이미 스스로 벗어나 있었던 셈이다.

청나라가 쫓겨나는 것을 보고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의 주도권을 대세로 받아들였다. 일본이 요구한 '개혁' 수행에 김홍집이 앞장선 것은 일신의 영달보다 주어진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뜻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아관파천 후 그가 죽음을 맞는 상황에 관해 다소 엇갈린 서술들이 있지만, 그가 죽음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애국심과 합리성을 갖춘 많은 사람들이 일본 주도의 개혁에 종사하고 일본의 어느 정도 이권도 인정해 줄 용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조선 궁궐을 짓밟고 왕비를 살해한 것이다! 최소한의 신뢰를 깨뜨린 행위였다. 이 씨 왕조가 시원찮으니 다른 왕조를 세워야겠다든지, 이제부터의 세상에서는 왕국보다 공화국이 적합할 테니 왕실을 없애야겠다든지, 아무 대안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현존하는 국가의 상징을 군화발로 뭉개버린 것이었다. 상징성의 유린을 통해 조선 사회와 조선인을 존중하는 마음이 일본에게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야욕'은 강화도조약 이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드러나 왔지만, 적어도 말만은 이웃을 돕는 '선의'를 내세워 왔다. 그 가식을 꿰뚫어본 사람도 일본이 최소한의 체면만은 지켜 나갈 것을 기대하며 그 현실적 힘을 존중하려 했다. 그런데 일본은 을미사변에서 극악한 야욕을 극악한 방법으로 드러냈다. 내키지 않더라도 일본의 힘과 존재를 받아들이려던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은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고 현실적으로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궁궐을 짓밟고 왕비를 살해한 자들이 못할 짓이 무엇이란 말인가!

▲ 이승만이 하야할 때 눈물을 흘린 사람들이 모두 이승만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아니었다. 권력의 무상함을 비감해 한 사람들도 있고, 국가 주권의 상징이 흔들린다는 사실 자체를 마음 아파한 사람들도 있었다. 대원군 실각 이후 '민비'가 정치에 관여한 데 대해서는 포폄의 시각이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지만, 을미사변을 통해 '명성황후'가 조선의 상징으로서 일본의 극악한 야욕을 드러낸 것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이론의 여지없이 큰 공헌이었다. ⓒ프레시안
을미사변에 자극받아 의병을 일으킨 사람들 중에는 고종과 민비를 비판적으로 보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차 없이 보여주고 있었지만, 바로 그런 사람들이 의병으로 나섰다. 왕과 왕비의 존재는 국가 주권의 상징이었다. 그 존재에 대한 위협은 그들이 자기 노릇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을미사변 석 달 후인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있었다.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1월 28일에도 왕이 미국 공사관으로 도망하려다가 실패한 소위 춘생문사건이 있었는데 그 후 러시아 공사관 측과 긴밀하게 의논하며 준비한 결과 잠행에 성공한 것이다.

왕의 이어(移御)가 친일 정부를 바로 붕괴시킬 수 있었던 데는 을미사변으로 인한 인민의 분노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당시 서울에만도 1000여 명의 일본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러시아 병력은 겨우 100여 명이었다. 12년 전 갑신정변 때는 왕을 붙잡고 있던 소수의 일본 군대를 다수의 청나라 군대가 거침없이 몰아붙였다. 그 때에 비해 일본이 러시아와 정면으로 대결하기 힘든 문제도 있었지만, 조선 인민의 반일 감정을 더 이상 악화시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관파천이 고종 측의 독자적 결단이냐, 러시아 측의 획책에 따른 것이냐 하는 논란이 있다. 서영희의 <대한제국 정치사 연구>(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에 이런 대목이 있다.

아관파천에 대해 고종의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전·현직 러시아공사인 베베르와 스페에르가 본국 정부의 승인을 받기도 전에 고종을 설득하여 단행한 것이라고 추정한 연구도 있으나(최문형, 2000, "아관파천과 러일의 대립", <한국학논집> 34, 한양대학교), 당시 러시아 정부의 최대 관심이 만주에 있었고 조선은 완충지대로서의 가치밖에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두 공사가 본국 정부의 방침을 어겨가면서까지 아관파천을 주도했다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8쪽)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내게는 최문형의 관점이 더 그럴싸하게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러시아가 조선보다 만주를 중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주석의 <제정러시아 외교문서로 읽는 대한제국 비사>(이담 펴냄) 중 "러시아 외교 라인의 면면"(34~36쪽)을 보면 당시 러시아의 정책 결정자들에서 실무자들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대한 강경파와 온건파가 뒤섞여 있어서 정책 혼선이 여러 층위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조선 정부를 통째로 포섭할 기회가 나타났을 때, 만주 진출 정책을 지키기 위해 기회를 외면한다는 것은 설령 대 일본 온건파라 하더라도 취할 길이 아니었을 것 같다.

노주석의 책에는 파천 당일 쉬페이예르(스페에르) 대리공사가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보낸 보고문이 수록되어 있다.

1896년 2월 2일 전문으로 보고한 바와 같이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밀지를 보내 수일 안에 왕세자와 함께 공사관에 피신하겠다는 희망을 밝혀 왔다. 전임 대리공사 베베르와 함께 고종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보호하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 다음 날(2월 3일) 고종은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2월 9일 저녁 공사관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했으나 이날 결행하지 않고 경비병 증원을 요청해 왔다. 공사관은 알렉세예프 극동 총독에게 긴급 요청, 2월 10일 해군대령 몰라스가 100명의 수병을 인솔하고 서울에 왔다. 고종은 2월 11일 새벽 7시 30분에 공사관에 왔다.

파천 이전에 공사관은 준비를 위해 극동 총독의 협조를 받고, 외무장관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종 측의 독자적 결정을 러시아가 순순히 받아줄 수 있는 부담 없는 일이 아니었다. 러시아가 아무리 일본과의 정면 대결을 꺼리고 있었다 하더라도 3국간섭처럼 일본을 견제할 필요는 분명한 상황이었다.

설령 조선에 대해 궁극적인 야심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조선 정부를 포섭해 놓는 데는 협상 카드로서라도 매우 귀중한 가치가 있었다. 아관파천의 기획에 러시아 공사관, 특히 1885년 이래 10년 넘게 조선에 주재하며 고종의 특별한 신임을 얻고 있던 베베르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 리가 없다. (☞필자의 블로그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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