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0월 30일 09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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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해직 고발 '진동아굿' 이후 옥살이...그래도 "잘 놀아 보세"
[탈춤과 나] ⑥ 故 박인배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의 탈춤
[탈춤과 나] 여섯번째 글로, 지난 2017년 별세한 한국 연극계의 거목이자 증인인 故 박인배 선생의 2002년 글을 싣는다. 서울대 물리학과 재학 시절인 70년대 초 탈춤과 연극을 시작한 고인은 엄혹했던 독재 시절 춤과 극을 통해 그 한을 해학으로 풀어내온 기억을 더듬었다. 편집자 1970년대 초 대학 연극반 시절, 처음 연습한 연극이 일제시대 유랑극단
박인배 전 한국민족극운동협회 이사장
2021.07.19 09:19:04
"낙양동천 이화정"...탈춤, 고개잡이의 혁명
[탈춤과 나] ⑤ 연천중학교 교사 김순희의 탈춤
봄... 19살,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내게 봄이란 바람이 몹시도 불던 계절이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넓은 플레어스커트 교복 치마를 입고 노란 개나리 꽃길을 걷다가 예고 없이 불어닥치는 모래바람에 놀라 치마 자락을 감싸쥐면서 주저앉았던 봄은 내 고향 속초를 떠나 봄에도 바람이 불지 않아 낯설던 서울로 대학을 오면서,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으
김순희 연천중학교 교사
2021.07.15 08:00:38
나의 탈춤, 그 시작은 불손하였으나...
[탈춤과 나] ④ 국가무형문화재 이주원의 탈춤
안동은 어디서든 탈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시내 자주 가는 레코드가게 간판에 하회탈이 그려져 있었고, 맞은편 가게에서는 탈과 안동소주 등의 안동시 관광상품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하회마을로 소풍을 간 적도 몇 번 있었지만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누나가 언젠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보고 뚱뚱한 사람이 턱이 없는 탈을 쓰고 바보처럼 행동하는 모습
이주원 국가무형문화재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
2021.07.12 06:16:46
이화여대 민속극연구회 박찬숙의 탈춤
[탈춤과 나] ③ 나의 이도향촌(離都向村)기
내가 농촌 행을 결심하고 이곳 전라북도 순창에 내려온 것이 1983년 6월이었으니 같은 주소지에서 38년의 세월을 산 셈이다. 최근 5~6년 사이 급격히 늘고 있는 귀농, 귀촌의 범주가 아니고, ‘이촌향도’ 시절의 역주행이니 그냥 ‘이도향촌’이라 하는 것이 맞을 듯하다. 농촌에 내려올 결심을 하게 만든 계기는 대학 1,2학년 시절 여름과 겨울, 네 차례에
박찬숙 농민운동가
2021.07.08 07:24:41
백기완의 탈춤 "곧은 목지 와장창"
[탈춤과 나] ② 故 백기완 선생과 탈춤
[탈춤과 나] 두번째 글은 지난 2월 작고하신 백기완 선생(1932-2021)의 글이다. 은율탈춤의 고장 황해도 은율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탈춤을 보고 자란 선생은 해방 이후 남한으로 내려와 통일운동과 함께 민중문화의 소중함을 설파하고 몸소 실천해 왔다. 백 선생의 할아버지 백태주는 1919년 삼일운동 이래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1942년 일제에 의해 투옥돼
백기완
2021.07.05 07:56:58
전근대의 유산 탈춤, 청년들에 의해 끓듯이 부활하다
[탈춤과 나] ① 채희완의 회상
대학 탈꾼들의 탈춤에 대한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는 '탈춤과 나'를 주 2회 연재한다. 대학가에서 탈춤이 추어진 건 1969년 부산대 민속연구회가 처음이었으나 본격화된 계기는 1971년 9월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가 봉산탈춤을 추면서부터였다. 이후 1973년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고려대 등에 탈춤반이 생겨났다. 1960년대 중반까지 케케묵고 낡은 것,
채희완 부산대학교 명예교수
2021.07.01 07:4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