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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엔 있고, 대형마트엔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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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엔 있고, 대형마트엔 없는 것

[이정전 칼럼] 2010년 새해부터는…

시골에 살 때, 하루는 돌쩌귀를 사려고 읍내 마을의 철물점을 찾아 들어갔다.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다른 아주머니와 얘기하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 준다. 가게 주인아저씨는 뒷전에서 담배를 피우며 낯 설어하는 눈치를 보내고 있고. 돌쩌귀를 집어 들고 나오는데 가게 아주머니는 무엇에 쓸 것이냐고 묻고는 보통 못 대신에 나사못을 써야 한다면서 나사못 대 여섯 개를 집어준다. 값을 물었더니 나사못은 그냥 가져가라고 한다. 돈을 지불하고 나오려는데, 커피가 다 끓었으니 한 잔 마시고 가라고 권한다. 서울로 치면 커피 값이 아마도 내가 산 돌쩌귀보다 더 비쌀 것 같다. 커피를 마시노라면 이런 얘기, 저런 얘기 길어질 수밖에 없다. 시골 마을의 구멍가게에는 대체로 이런 인정미가 흐른다. 서울이 아무리 살벌하다고 하지만 서울의 동네 구멍가게에서만은 이와 비슷한 광경을 그런대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2009년도 다사다난했던 한 해였다고 한다. 언론의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지만, 의미심장한 사건도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 주인들이 대형 슈퍼마켓의 진출에 강력 항의하면서 도처에서 시위를 벌인 일이 그것이다. 물론, 대형 슈퍼마켓이 동네 구멍가게보다 훨씬 저렴하고 효과적으로 소비자들의 구미를 맞추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효율을 최고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었고 이명박 정부는 과거 그 어떤 정부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정부다. 그러니 효율추구가 대세를 이룰 수밖에 없다. 대형 슈퍼마켓의 골목 진출은 그런 대세를 타고 있다. 그런 대세 앞에 생존권을 보장하라는 영세상인들의 목소리는 잦아들 수밖에 없다.
▲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2009년 대형유통업체들의 골목상권 진입에 저항하는 중소상인들의 움직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프레시안

그러나 동네 구멍가게에는 있지만 대형 슈퍼마켓에는 없는, 아주 소중한 것이 있다. 인간관계가 그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경제학자나 신자유주의자들은 펄쩍 뛸지도 모른다. 대형 슈퍼마켓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니 인간관계가 북적대는 곳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경제학이 자연과학이 아니라 사회과학인 이유도 바로 그런 인간관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말할 것이다. 하지만, 대형 슈퍼마켓에서의 인간관계나 경제학이 다루는 인간관계는 어디까지나 상품과 돈을 매개로 한 간접적인 인간관계이지 직접적·인격적 인간관계는 아니다. 대형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은 서로 대화를 나눌 필요도 없고 정을 나눌 필요도 없다. 상품에 대한 정보나 가격은 모두 상품 포장지에 적혀 있으며, 아양을 떤다고 해서 값을 깎아주지도 않는다. 거래가 기계적으로 이루어질 뿐,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 모두 상대방에 대하여 아무런 고마움을 느낄 필요도 없다. 서로 필요한 것을 주고받았을 뿐이기 때문이다.

대형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의 거래는 자판기에 돈을 넣고 물건을 뽑는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 자판기와 사람 사이의 거래를 인간관계라고 보기 어렵듯이 대형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진정한 인간관계라고 보기 어렵다. 경제학 이외의 다른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에서 흔히 다루는 인간관계는 정과 고마움을 주고받거나 상호이해와 대화를 바탕으로 합의를 구하는 직접적·인격적 인간관계(하버마스가 말하는 의사소통 행위)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에 대한 연구가 사회과학의 주된 특징이라면 경제학은 진정한 사회과학이라고 보기 어렵다.

정과 감사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인간관계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데 대형 슈퍼마켓이 지저분한 동네 구멍가게를 밀어낸들 무슨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형 슈퍼마켓이 동네 구멍가게를 밀어내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 도도히 진행되고 있는 소위 상업화 혹은 상품화의 큰 흐름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돈의 위력이 커지면서 돈벌이의 대상(상업화·상품화의 대상)도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대리모 사업(?)이 성행하고 있다고 하는데, 대리모 사업이란 요컨대 자궁임대업이다. 물론, 옛날에도 씨받이라고 해서 대리모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은밀히 그리고 아주 제한적만 이루어졌지 오늘날처럼 공정가격이 있을 정도로 공공연하고 대규모로 성행하지는 않았다. 옛날에는 인간의 장기를 사고파는 일은 생각하기 힘들었지만, 오늘날에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자궁임대나 장기거래가 이해당사자들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니 나쁠 것이 전혀 없다고 경제학자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은 말한다. 하지만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이 돈벌이의 대상이 되는 순간 대체로 그 내용이 비인간적인 방향으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대학교육을 예로 들어보자. 지식의 상품화가 진행되고 대학등록금이 시비 거리가 되면서 학생들은 교수의 가르침을 등록금에 대한 대가로만 여기게 되고, 그러면 자연히 교수들도 등록금의 범위 안에서만 학생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들게 된다. 학생과 교수 사이의 관계가 점차 금전적 관계로 전락한다. 이런 가운데 교수와 학생들 사이의 돈독한 사제관계도 점차 사라지는 것이 오늘의 세태이다.

의료서비스만 해도 그렇다. 과거에는 의술이라고 하면 생명을 구하는 기술이었으며 그래서 의사는 고마운 분이요 존경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의술은 점차 그 순수성을 잃고 돈벌이 수단으로 변모하고 있으며,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도 단순히 의술을 사고파는 관계로 전락하고 있다. 응분의 돈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환가가 특별히 의사에게 마음속으로 고마워할 필요도 없다. 의술의 내용도 변하고 있다. 예컨대, 성형수술, 치아교정, 체중조절, 발모 및 탈모조절, 콘택트렌즈 등 외모 가꾸기나 우울증, 긴장, 고독감, 소외감, 등 생명과 별 관계없지만 돈벌이가 최고로 잘 되는 의술의 비중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으며 이쪽으로 인재들이 몰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생명과 직결된 분야 의술의 질이 크게 저하되지 않을까 걱정들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의 일각에서는 의료서비스의 영리화를 서두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상업화와 상품화의 비중이 커지면서, 인간관계도 썰렁해지고 있다. 요새 젊은이들은 사랑이나 우정도 얼마든지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한다지만, 돈에 팔린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 수는 없으며 돈에 팔린 우정이 진정한 우정일 수는 없다. 요즈음에는 선물을 주고받을 때에도 얼마짜리인가에 많은 신경을 쓴다. 상대방의 성의를 금액으로 가늠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나도 금액으로 나의 성의를 표시하게 된다. 5만 원짜리 선물을 받았으면 5만 원짜리로 되갚으려고 한다. 이와 같이 받은 만큼 정확하게 되갚는 것은 시장거래의 특징이다. 시장에서의 거래는 주는 것과 받는 것이 정확하게 동등할 것을 요구한다. 1000원짜리 빵을 샀으면 1000원을 지불해야 한다. 요구하는 것과 지불하는 것이 정확하게 맞아 떨어져야 거래가 이루어진다. 시장에서의 거래는 등가(等價)거래다. 왜냐 하면, 시장에서는 아무도 손해 보는 짓을 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족사이나 친구사이의 관계와 같이 시장 밖에서의 거래는 통상 등가거래가 아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무한하고 무조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의 사랑이 고귀하다.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생각하지 않는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무조건적인 우정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시장 밖에서의 거래는 동등한 대가를 지불하는 행위를 오히려 싫어하는 경우도 있다. 옛날에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계산이 정확한 사람, 예컨대 10만 원 어치 대접을 받았으면 정확하게 10만 원 어치로 신속하게 되갚는 사람은 인간미가 없는 사람, 야박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이런 사람은 사업의 상대로는 환영받을지 모르지만 친구 감은 아니다.

오늘날 도도하게 진행되는 상업화와 상품화는 정과 감사 그리고 대화를 나누는 인격적 인간관계를 우리 사회에서 점차 밀어내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양식 있는 사람들이 상업화·상품화를 걱정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대형 슈퍼마켓이 동네 구멍가게를 밀어내는 현상을 걱정스레 바라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시장의 확대를 요구하고 시장의 원리가 좀 더 확대 적용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아무리 물질적으로 잘 살게 된들 이로 인해 우리 사회가 살벌하고 썰렁한 사회가 된다면 무슨 낙과 무슨 보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새해부터는 우리 사회의 그늘에 좀 더 깊은 배려를 하며, 우리 사회를 인간미 넘치는 훈훈한 사회로 가꾸기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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