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의 수송 작전, 학부모들의 기원 열기, 고등학교 후배들의 응원전 등 갖가지 진풍경이 올해도 어김없이 연출됐다. 전 세계를 강타한 신종인플루엔자도 한국의 수능 시험은 막지 못했다. 전국 2800여 명의 신종플루 의심·감염 수험생은 격리 장소에서 시험을 치렀다.
최근 한나라당 조전혁 의원과 <조선일보> 등 보수 언론이 앞장서서 전국 고등학교의 수능 성적을 공개한 데 이어,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앞으로 치르는 수능 성적을 공개하겠다고 밝히면서 수능은 더 큰 사회 문제가 됐다. 수능이 대학 서열화에 이어 고교 서열화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외국어고, 일제고사 등을 둘러싼 첨예한 논란과는 달리 가장 큰 교육적 폐단을 낳는 수능을 거부하자는 목소리는 진보와 보수를 통틀어 극소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입 결과가 한 사람 인생의 많은 부분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수능 거부'는 감수해야 할 부담이 너무 큰 탓이다.
그런데, 모두가 당연한 듯 해마다 치르는 이 시험을 거부하고 나선 '고3'들이 있다. 경남 산청 간디학교에 재학 중인 고등학교 3학년 학생 5명은 이날 2010학년도 수능을 거부하고 대신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주변에서 2시간 동안 1인 시위를 진행했다. 평소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이들은 약 2주 전부터 모임을 결성하고, 1인 시위 등을 준비해 왔다고 했다.
이 학생 중 두 명은 수능과 상관없는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다. 그러나 다른 세 명은 수능을 거부하면서 대학 진학도 포기했다.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수능 거부'라는 선택을 했을까? 대학 진학을 포기한 두 학생에게 물었다.
"수능을 보는 게 학벌주의 강화에 기여한다고 느껴"
프레시안 : 언제부터 수능을 거부해야겠다고 생각했나?
박두헌 : 고등학교 와서 고교 선배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 생각해 왔다. 한때 나도 대학 진학을 준비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사회는 이 나라에서 학벌이 없으면 못 산다고 세뇌를 시킨다. 대학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다만 수능을 보는 것이 학벌주의를 강화하고, 사회를 양극화하는데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이민안 :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이 사회는 자꾸 겁을 주면서 대학에 가라고 하는 데, 그런 것에 대한 오기도 있었다. 왜 대학에 간다는 전제 아래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기득권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연극을 알게 되면서 연극을 하고 싶어졌다. 그때부터 나 자신을 진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영화와 책도 보고 연극도 보면서 즐겁게 공부했다.
프레시안 : 현행 수능과 입시 제도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박두헌 : 매년 성적을 비관하며 200명이 넘는 청소년들이 자살한다. 청소년 자살 원인으로는 당연히 1위이고, 청소년이 죽는 이유 중에서도 교통사고에 이어 성적비관 자살이 2위이다. 이건 교육이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살인교육으로 변하고 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정부는 학생들을 인적 자원으로만 보고, 무한 경쟁에 빠트리고 있다. 심지어 대안학교에서도 입시 경쟁을 피할 수 없다. 이런 가운데 초·중·고를 나오면서 우리는 교육이 아닌 암기를 배우고, 다양성을 무시당하면서 12년을 버리고 있다.
수능 점수가 곧 인생 점수가 되고, 또 행복 점수가 되는 사회 현실이 정말 말이 안 된다. 학생들은 자기 친구를 누르고, 피묻은 펜을 들고 친구들 위로 올라가야 한다. 사회는 그런 속에서 더 이기주의적으로 변해간다.
▲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2일, 삼청 간디학교 3학년 학생 5명은 '수능 거부'를 선택하고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주변에서 1인시위를 진행했다. 왼편 박두헌 학생은 수능과 대학 진학을 모두 거부했으며, 오른쪽 김찬욱 학생은 수능을 거부한 경우다. 이들은 "수능 점수가 인생 점수, 행복 점수가 되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레시안 |
"대학 아니어도 배울 수 있는 기관 많아져야 한다"
프레시안 : 대학을 나오지 않을 때 받을 수 있는 불이익에 대한 걱정은 없는지?
박두헌 : 대학 진학을 포기하면 사회 불이익이 많을 거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현재의 입시 제도에는 순응할 수 없다.
이민안 : 겁나는 것은 없다. 사회인이 되면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의 나이대도 넓어지고, 경쟁 상대도 많겠지만 나 나름의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다. 걱정보다는 궁금증이 더 많다.
가난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도 안다. 그래서 지금부터 지출을 줄이고 적응하는 훈련을 하고 있다. 돈을 많이 벌고 비싼 것을 사고, 명성을 얻어야 행복하다는 말에 공감하지 않는다. 행복의 가치관을 바깥에서 정해주는 것이 싫었다.
프레시안 : 내년 2월이면 졸업을 한다. 이후 계획은?
박두헌 : 우선 최대 목표는 부모님으로부터 금전적으로 독립하는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하고 싶은 일을 꾸준히 하면서 살고 싶다. 지금으로서는 민중가요 노래패 활동을 하고 싶다.
프레시안 : 사회 생활을 하다가 대학에 입학할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나.
이민안 : 대학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보지 않는다. 대학에서만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배움을 받을 수 있는 대학 아닌 기관이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공동체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연극 공동체, 학문 공동체 같은 게 많아지면 더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현재 우리 사회는 대학을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기관이 많이 안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거부해도 안 바뀐다고? 그럼 뭘 할건데?"
프레시안 : 부모님과의 갈등은 없었나?
박두헌 : 조금 있긴 했다. 그렇지만 대학에 가지 않고 사는 것도 사회적 지위를 떠나서 큰 배움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지금은 응원을 해주신다.
프레시안 : 소수의 사람이 수능을 거부해도 쉽게 입시 체제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박두헌 : 단호히 말할 수 있다. '그럼 넌 뭘 할거냐'라고 묻는 것이 그 답이 된다고 생각한다. 수능 체제가 바뀌느냐, 안 바뀌냐를 떠나서 개인적인 실천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 실천이 모여서 사회가 바뀔 것이다. 이제까지 이런 작은 움직임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사회가 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앞으로도 수능을 거부하는 학생이 많아지길 바란다. 물론 희망이 그리 많이 있어 보이진 않지만.(웃음)
프레시안 : 지금 수능을 보고 있는 학생,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박두헌 : 대학에 가느냐, 가지 않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본다. 중요한 건 문제의식이고, 행동을 하느냐이다. 하루빨리 청소년들이 꿈꿀 수 있는 사회가 왔으면 좋겠다.
이민안 : 수능 자체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 생각없이 수능 보고, 대학을 졸업한 뒤 얼마나 이용을 당할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아직 고등학생이고 사회를 보는 눈이 깊지는 않지만 제 생각에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신종플루보다 무서운 입시플루" 한편, 이날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평등학부모회 등 교육·사회단체로 구성된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전국 공동행동 준비위원회'는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후문에서 수능과 입시 제도 폐지를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홍세화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는 "학벌은 현대판 신분제가 된지 오래"라며 "이처럼 칼날같은 대학 서열화를 지키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홍세화 대표는 "이런 교육 속에서 학생, 학부모, 교사가 고통받는 것은 물론 인문학이 왜곡되고 있다"며 "사고력과 논리력이 요구되는 인문학이 암기과목으로 왜곡되고, 결국 학생들은 사회를 보는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대학에 가고 있다"고 말했다. 조희주 입시폐지대학평준화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장은 "신종플루도 무섭지만 입시플루로 죽는 학생이 더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며 "입시플루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기자회견문에서 "승자독식의 구조를 만들어가는 입시 경쟁은 중단되어야 한다"며 또 경쟁 교육을 조장하는 이명박 정권의 교육도 함께 중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12일 저녁 광주와 경남 마산·창원에서 퍼포먼스와 선전전을 진행하는 데 이어 14일 서울에서 입시 폐지와 대학 평준화를 주장하는 문화제를 열 예정이다.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