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됐다.
정운찬 후보자의 전공은 경제 분야이지만, 그는 교육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사로 꼽혀 왔다. 우리나라 교육 전반을 좌우하는 대학 입시에 큰 영향을 주는 서울대 입시 정책을 관할하는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가 총리 후보로 발탁된 배경에는 최근 교육 개혁에 주력하는 청와대의 의지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그렇다면 정운찬 후보자의 교육 철학은 무엇일까? 서울대 총장 재임 시절 그가 추진한 통합교과형 논술 고사와 지역 균형 선발제에서 그의 교육관의 일면을 볼 수 있다.
통합형 논술·지역 균형 선발제…정운찬표 서울대 입시 개혁
통합형 논술은 정운찬 후보자가 노무현 정부 및 여당과 갈등을 빚었던 사안이다. 정 후보자의 교육 철학을 서술한 <나는 비빔밥 인간을 만들고 싶다>(박태견 지음, 뷰스 펴냄)을 보면, 정 후보자는 2002년 총장 취임 직후 "요즘 중등학생들은 우리 때보다 몇 배나 더 시험 공부에 시달리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볼 때 사물을 종합적으로 보는 능력은 퇴화된 셈"이라며 "한마디로 말해 '외우는 능력'만 기형적으로 발달했을 뿐이지, '생각하는 능력'은 빵점"이라며 논술 고사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2005년, 정운찬 후보자는 2008년도 입시부터는 통합교과형 논술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하며 소신을 실천에 옮겼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해 여권에서는 "사실상 본고사를 부활시키려는 것"이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당시 진보적인 교수단체도 "정운찬 총장이 현실을 너무 모른다"며 통합형 논술이 사교육을 늘릴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이에 정 총장은 거듭 '대학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반박에 나섰다.
정 후보자는 2005년 지역 균형 선발제를 도입한 것으로도 잘 알려졌다. 그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을 모아 놓으면 다양한 간접 경험을 공유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좀 다른 생각을 할 기회가 된다"며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창의성이 개발되고, 그것이 바로 지식전수 단계에서 창출단계로 가는 충분조건은 아닐지라도 필요조건 중 하나는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소신을 바탕으로 정 후보자는 서울대 총장 취임 직후 좀 더 강력한 지역할당제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비록 서울대 구성원의 반발과 역차별 논란에 부딪혀 끝내 할당제는 도입하지 못했지만, 서울대의 지역 균형 선발제는 만연됐던 지역간 대입 불균형을 해소하는데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효율성 교육 주장…"고교 평준화 폐지해야"
이처럼 교육의 형평성을 대입 제도에 반영하려 노력했던 정 후보자는 다른 한편으로는 '효율성 교육'의 필요성 역시 강하게 주장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3불 정책(본고사 금지, 기여입학제 금지, 고교등급제 금지)을 비판하며 고교 평준화를 폐지하고 중·고교 입시를 부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후보자는 2005년 7월 한 강연에서 "교육의 목적은 가르치는 데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솎아내는 데도 있는 만큼 현행 고교평준화는 재고돼야 한다"며 "중·고교에서 솎아내는 과정을 겪으면 해외로 조기유학 가는 일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해 논란을 불렀다.
그는 "지나친 경쟁으로 심성이 피폐해지는 것을 막자는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 경제를 구성하는 구성원의 질이 좋아야 한다"며 "평준화 제도 폐지가 돈의 힘이 초래한 교육 양극화 현상 해소의 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 후보자는 영어 교육 과열 경쟁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지난해 현 정부가 영어 몰입 교육을 제안하자 "전 국민이 영어를 전부 잘 해서 무엇하느냐"며 "이런 식으로 정책을 펴면 부자만 공부를 하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2003년 한 강연에서 그가 "꼭 필요한 사람들만 영어를 잘하면 됐지 4800만이 모두 영어를 잘해서 무엇에 쓰겠는가. 이것은 국가의 큰 자원 낭비다"라고 했던 말과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교육계 일각에서는 이같은 정운찬 총장의 '엘리트 교육' 중심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청와대가 주도하는 교육 개혁, 총리가 개입할 여지 적을 듯"
정운찬 후보자의 내정 소식을 들은 교육계는 현재 교육 정책에 정 후보자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분위기다.
동훈찬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정책실장은 "청와대가 교육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리로서 크게 관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는 현 정부의 교육 개혁이 크게 변할 것 같지 않다"고 말했다. 동훈찬 실장은 "오히려 교육 정책의 주도권을 전혀 갖지 못하는 식물 교육과학기술부에 변화가 필요한데 이번 개각에 반영이 안 돼 아쉽다"고 지적했다.
김명신 함께하는교육시민모임 공동회장도 "총리로서 교육 문제에 관여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또 정 후보자는 기본적으로 엘리트 교육이라는 기본 철학이 있기 때문에 교육 정책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명신 회장은 "정운찬 후보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지금 교육이 미래 사회의 발목을 잡는 상황에서 지식인으로서 제대로 된 한국의 사회상을 제시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본고사 논란이나 고교 평준화 발언을 보면서 요즘 학생들의 세태나 성장 환경, 사교육 현실에 감이 없는 분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며 "총리로서 교육 정책에 개입했을 경우 우려되는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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