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촛불의 욕망, 그리고 촛불의 미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촛불의 욕망, 그리고 촛불의 미래

[촛불의 소리] 촛불의 욕망은 하염없이 다양해져야

도대체 살아있는 삶이 무엇인지, 우리는 과연 살아있는 아버지로부터 태어나는지, 혹시 사산아는 아닌지를 도스토예프스키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암흑의 시대에 끊임없이 곱씹으면서 절망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약 두 세기 후 촛불을 든 우리들에게도 암흑의 시대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이 시대는 공권력이 뿜어대는 물대포 이상으로 절망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도스토예프스키가 살았던 절망스런 시대가 그에게 새로운 고민을 가져다주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수 있게 해주었듯, 촛불시위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시대 역시 비록 절망스럽지만 이제까지 대중 및 시민들의 욕망이 어떻게 뒤틀리면서 변화해왔는지를 보여주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지를 모색하게 해준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부터 국가는 반공이데올로기를 통해 사회적 개혁에 필요한 다양한 질문과 그것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선택지를 줄여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적 측면에서는 민중들의 욕망이 올바르게 표출될 수 없게 만들었고, 정치적 측면에서는 정당구조를 극도로 협애하게 하여 민주주의를 정체시켰다.

비록 오랜 억압의 시기가 가져다준 상흔이 현재 촛불로 대표되는 '길거리 정치'를 이끄는 거대한 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아직도 사회적 소통과 건강한 논의가 존재해야 할 공간은 대한민국 정치의 역사만큼이나 협소하고 뒤틀려있다. 최근 몇몇 언론과 정치권에서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촛불시위 '배후설'만 보더라도, 현재까지도 사회현상에 대한 폭넓은 토론이나 논의들을 배제시키고 대중들의 욕망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현재의 시민들의 욕망에 대한 의견이 학계에서도 분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부 국내학자들은 이들의 욕망이 작년의 '디 워 사건'이 만들어냈던, 신성한 '국익'을 대표하는 집단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집단을 만들어냈기에 이를 '웹 2.0세대'라고 추켜세우고 있는 듯하고, 어떤 일각에서는 그 당시의 폭력성을 여전히 포함하고 있는 전체주의의 망령이 또다시 부활하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러워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내는 것과 무엇으로 대표할 것인지를 짚어내는 통찰력일 것이다.

정치권의 제도적이고 절차적인 부분에 있어서만 제기돼오던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제까지 쟁점화가 되지 않았던 다양한 이슈와 영역들로까지 점차 확장되면서 대중의 욕망 역시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개인들 역시 기존에 국가로부터 흔히 강요받곤 하던 체제적이고 구조적인 영역보다는 오히려 의식주와 관련된 자신의 생활영역에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경향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의 시각에서 보자면, 이 집단에게 어떤 이름표를 붙이건 간에, 이번 광우병 쇠고기 파동에 따른 촛불시위 역시 이런 미시적인 생활영역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를 담보해주지 못한 자신들의 과오를, 확률로 대표되는 과학의 영역으로 은근슬쩍 대체해버린 정부의 무책임한 행태에 분노해서 일어난 것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면 촛불로 타오르는 시민들의 욕망이 제도권 정치에 제대로 반영되고 대표되기 위해선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우선 현재 정치권의 문제를 보자. 지금의 집권 야당인 통합민주당이 보여주고 있는 장외투쟁은 정치가 시민사회의 열망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해준다. 자신의 생업에 치여 살아가는 바쁜 국민들이 손수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러한 정치권에 대한 기대가 실망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통합민주당의 손학규 대표가 등원의 의지를 밝히긴 했지만, 지금의 국회 없는 정치권은 사실 상 마비상태나 다름없다. 여당 역시 대통령의 눈치를 보랴, 복당문제와 내부사정 고민하랴 많이 혼란스런 상태이고,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역시 촛불시위를 넋 놓고 바라보거나 현장을 지원해주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정치적'으론 무기력한 상황이다.

결국 현재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제도권 정치 내부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고 정상화시키느냐를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합민주당은 노무현 정권 시절의 집권 여당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고 소수야당들과 힘을 합쳐서 지금의 촛불시위와 같은 시민사회의 대중적 열망을 제대로 반영해줄 수 있는 정치의 동력을 발견해내야 한다. 그래야만 보다 포괄적인 민주주의를 진전시킬 수 있는 역량을 지닌 정당으로 전환하여 사회경제적으로 보다 폭넓은 욕망들을 대표하는 정치의 지형을 주도적으로 형성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현재 열기를 가득 머금은 시민사회에서 기형적으로 일어나는 소통의 과잉문제를 중재하고 해결해나가는 과제는 그 이후의 문제이다.

또한 정치권의 문제 못지않게 앞으로 이러한 촛불들이 사회 속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방향으로 밝혀지기 위해선 당사자인 시민들의 책임과 역할 역시 중요하다. 길거리에서의 열기에 비해 사회 각계의 교육 부문은 미진한 편이다. 특히 자신의 삶을 구성해가는 원리인 민주주의와 그 작동방식에 대한 인식은 많이 부족하다. 현재의 촛불시위에 대한 인식과는 상반될지 모르겠으나, 한 예로 전부터 집회나 시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편견을 들 수 있다.

물론 이것에 대해선 시민들 자신의 책임보다도 보수언론을 비롯한 여러 언론매체의 책임이 컸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권익추구와 같은 시민적 '권리'의 영역이 과연 '이기심'과 같은 표현으로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냐를 판단하고 설명해주는 것은, 시민사회 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시민적 소양을 책임지는 교육의 역할임에는 틀림없다.

이제 우리에게도 노동자와 같은 경제적 약자의 이해관계가 왜 위로부터의 정치세계, 즉 정당에 반영되기 힘들었으며, 운동이라는 방식으로만 공전해야만 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그렇다고 이것이 아래로부터의 운동의 중심지가 된 것도 아니었으며, 지금 거리시위에 동참하고 있는 시민들 역시 이제까지는 시위하는 노동자들에게 결코 관대하지 못했다. 나는 이 촛불시위를 계기로 시민사회에서도 법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많은 고민이 이루어지고, 정말로 기본적인 상식과 여러 비판들이 통용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래야만 이 과정에서 거대한 열망을 지니고 예측 불가능한 힘을 지닌 대중들이 언제든지 건전한 자기비판을 통해 앞으로 도약해나가는 시민으로 전환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약간이라도 폭력의 조짐이 감지되는 순간, 일제히 '비폭력'을 외치며 촛불의 본의를 올곧게 수호해내는 모습은 지금 그들이 스스로 도약을 거듭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무리 곳곳에서 '배후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하더라도, 시민들은 알고 있다. 무엇이 문제가 있고, 무엇을 해결해야만 하는 지를 말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이를 탐탁지 않게 바라보며, 쉽게 수용하려 들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앞으로도 이런 시민들의 자발적 운동에 대한 신뢰를 어떻게 담보하여 이를 제도권 정당정치에 올바르게 투영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 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언급했듯 시민사회와 정치의 영역 상호간의 신뢰의 문제는 바로 우리 시민들의 욕망을 보다 섬세하게 만들고 다듬어나가는 문제, 그리고 어떻게 정치가 이를 올바르게 대표하고 반영해야 하는가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차후 이런 문제점들이 까다롭다고 해서 제도권 정치의 영역에서 부차적인 문제로 배제돼버린다면, 지금처럼 정치권의 신뢰도는 추락을 거듭할 것이고, 이로 인해 과열된 시민사회가 생겨나는 악순환 속에서 국민들은 또다시 혼돈에 빠질 것이다.

인간과 환경은 상호작용을 거치며 서로를 발전시켜 나간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지금의 촛불시위를 비롯한 다수의 행위 유형에 대해 작년의 필자가 품었던 의문과 회의를 새로운 희망으로 바꾸게 해준 소중한 구절이다. 작년의 '디 워 사건'에서 볼 수 있었던, 일상 속에선 하염없이 무기력했을 군중들은 분명히 인터넷 공간 속에서 '익명성'이라는 이점과 '다수집단'의 이점, 그리고 무엇보다 신성한 '국익의 수호자'라는 명분으로 소수에게 집단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뜨거운 전근대적 폭력들이 횡행하는 혼돈 속에서도 시간이 지나고 먼지가 차츰 가라앉자, 이 변화된 환경에 반응하여 진중권 교수와 같은 소수의 지식인들을 위시한, 나름 합리적인 방향으로의 정화를 위한 많은 시민들의 자체적인 노력들이 서서히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초기에 비록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변화를 주도했던 군중들도, 변화된 환경에서 새로운 역할을 담당하는 시민과 지식인들을 출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환경에 의해 스스로 변화해갔다.

이와 마찬가지로 쇠고기 문제를 바라보는 시민들 역시 그렇게 진화해갔고 변화해갔다. 시민들은 노동자들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기보단 오히려 강요된 무한경쟁에서 기꺼이 수평적 폭력을 휘두를 수밖에 없었고, 강력범죄의 증가에서 볼 수 있듯, 사회는 급속도로 황폐해지고 삭막해졌다. 이에 대안을 제시하면서 출범했던 민주노동당과 같은 소수정당도 내부적 문제로 인해 '간첩당'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고, 반(反)FTA 거리시위와 같이 생활세계와 관련된 이슈들은 하나같이 시민들에게는 단지 교통에 혼잡을 가져다주는 '걸림돌' 정도로 치부됐을 뿐이다. 더 이상 그들에게 제도정치에 대한 신뢰와 사회를 변혁해보려는 한 줌의 의지는 휴지조각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그의 유명한 저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말했듯 역사는 반복된다. 그리고 반복되었다. 1987년 6월, 작년 6월, 그리고 2008년 5월을 갓 넘긴 지금의 6월, 변혁은 우리 모두에게 더이상 악덕이 아니다. 과거 한미FTA 문제처럼 자신의 생활세계와 밀접하게 연결돼있는 사안에 대한 무관심이나 바람직하지 못했던 판단이 현재의 제(諸) 문제들을 초래했지만, 이제는 그것들이 다시 시민들의 삶의 테두리와 맞물리게 되면서 그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야 말았다. '이데올로기'와 같이 추상적 수준에서 공전하는 것처럼 보였던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은, 이제 먼 시공간을 거슬러서 평범한 시민들의 생존권, 즉 '삶' 자체에 대한 실존적 고민으로 바뀌었고, 이는 또다시 언젠가 반복될 새로운 역사를 형성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렇다. 지금 그들에게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 이명박 후보가 단순히 내걸었던 눈에 보이는 '경제성장'이 아니라, 당장의 자신의 먹고사는 '삶'과 관련된 '경제성장'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지금의 누구에게든지 불편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보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앞서 언급한 바는 있지만, 내가 촛불 시위를 보면서 거듭 우려되는 것은 현재의 이명박 정부와 정치권의 현실 그 자체이다. 그들이 집권 초기부터 보여주었던 여러 독단적인 정책들은 거기에 권력을 위임해주었던 서민들의 기대와 희망을 너무 일찍부터 낱낱이 짓밟아놓았다. 게다가 이 정책들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 정치권과 시민사회 간의 소통 부재는 즉각 촛불시위와 같이 시민사회에서 직접적인 소통의 과잉으로 이어졌고, 과격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권력과 욕망은 더 이상 모든 '국민'으로부터도, '정치'로부터도 아닌, '길거리'로부터만 위태롭게 나오고 있을 뿐이다.

책임의 여하를 떠나 결과적으로만 보자면, 이 '길거리'의 욕망은 현재 7.4%라는 경악할만한 지지율로 생명줄을 유지하고 있는 '7.47 정부'를 만들고 있는 중이고, 비록 '정의'라는 대의를 지녔지만 과잉되어있는 그 힘은 본의아니게 국회에서 모든 현실적 정치기구들과 정당의 임무를 책임져야 할 이들을 무력화시켜 '길거리'로 내몰고 있는 중이다.

설상가상으로, 여러 언론과 주요기업의 도움을 얻어 권력을 간신히 붙들고 있는 정부는 그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있지 못하고, 다양한 정책에 대한 시민적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합과 동원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아래로부터의 저항에 따른 정부의 위기, 더 나아가 '정치'의 위기를 초래한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진정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위임받은 정부라면, 스스로를 유지시켜나가기 위해 그 국민들로부터 대표성(Representation)과 책임성(Accountability)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진정한 대표성을 띠기 위해 정부가 대표해야만 할 책임성의 범위는 외면적으로만 화려하게 빛을 발산해대는 일부 기업들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들보다 더 세상을 다양하고 아름답게 해주는 중소기업과 서민들에게까지 끊임없이 확대되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시민들도 자신의 욕망을 촛불로 대변하며 앞으로 언제든지 필요하면 길거리로 뛰쳐 나올 것이고.

앞으로도 이 촛불들의 욕망은 횃불처럼 단순히 무한해지고 강렬해지기보단 별자리처럼 하염없이 다양해져야 한다. 현재 '나'의 욕망을 대변하고 있는 '길거리'만이 아니라, 미래에 '나'의 욕망을 대변해야만 할 '정치'의 영역에도 눈을 돌려보자. 그리고 소고기 문제와 생활세계와 관련된 사안들에서부터 출발하여 보다 과감하게 넓은 지평으로까지 관심과 참여의 영역을 넓혀 보자. 세상에는 단 한줌의 관심만으로도 힘을 얻을 수 있는 수많은 눈물의 골짜기들이 존재한다. 사회적 약자를 대표하는 국내외의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 장애인들과 성 소수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 대운하가 파괴시킬지 모르는 생태의 영역까지…. 이들의 몸부림은 바로 미래의 자기 자신의 몸부림일수도 있고, 당장 이름 모를 누군가의 몸부림,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몸부림일 수도 있다. 20c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헝가리의 미학자 루카치는 더 이상 별이 지도를 대신해주지 못하는 시대의 창공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새로운 시대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노래를 불렀다. 비록 세상이 살기 어렵더라도 우리 시민들 역시 타들어가다가 언젠가는 사라져갈 촛불들을 바라보면서 함께 새로운 세상, 새로운 우리의 미래를 열기 위한 촛불의 노래를 목놓아 불러보자. 이 노래가 있기에, 우리에게 아직도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게오르그 루카치, 『소설의 이론』중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