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여자농구 간판스타 출신 박찬숙 씨가 지난 5월 우리은행 신임감독 선발에서 탈락된 것이 성차별적 결정이라며 지난 11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한 것과 더불어 스포츠계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스포츠계 관계자들은 이를 '빙산의 일각'이라고 지적한다.
지난 27일 서울 정동 배재학술지원센터에서 문화연대 및 한국여성민우회 주최로 열린 '스포츠하는 여성을 위협하는 폭력과 차별, 그리고 이에 맞서는 아주 상식적인 대안들' 토론회에서는 한국 스포츠계에 만연된 다양한 폭력과 차별 사례들이 쏟아졌다.
WKBL "우선 그런 일이 없어야겠죠"
이날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은 동아대 스포츠과학부 정희준 교수는 "세상이 변한것 같지만 수많은 여성 금메달리스트와 세계적 스타를 배출한 스포츠 영역에서 여자 대표팀, 프로팀의 감독만큼은 남자들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며 "더군다나 스포츠계 여성들은 바깥 사회에서 성희롱, 성추행에 해당되는 일들을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특히 박명수 감독 사건을 대하는 이해당사자들의 행위는 문제의 심각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는 "박명수 감독이 작성한 사과문에는 '사과'가 아닌 '실수에 대해 죄송스럽게 생각한다'는 표현만 들어있다"며 "심지어 경찰서 대질신문에서도 자신의 행동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밝혔다.
또 정 교수는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이 지난 5월 28일 성추행 사건의 후속 대책으로 선수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개설한 'WKBL핫라인'(080-077-0909)도 진정성이 의심되기는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그는 "상담원은 한 명 뿐이고 그나마 상근이 아닌 담당자 핸드폰으로 연결되며 담당자조차 이전에 있었던 것(고충처리센터)과 똑같다고 말했다"며 "담당자는 전화가 오면 자신이 직접 판단해 총재(김원길 국회의원)에게 보고하고, 이후 총재가 조사를 해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겠냐는 안이한 답변만 내놨다"고 밝혔다.
그는 "담당자는 심지어 '하다 보면 시행착오도 있겠지만 우선 그런 전화는 없어야죠'라고 했다"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거나 고민을 들어줄 자세가 전혀 안 돼 있다"고 비난했다.
"우리은행, 사업주로서 책임 방기하고 있다"
이어 토론자로 나선 한국여성민우회 박봉정숙 사무처장은 사업주로서 우리은행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5월 성추행 사실이 밝혀진 뒤 박명수 감독은 사직했다. 그러자 우리은행은 사표 수리일자를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인 지난 4월 10일로 처리한 뒤 성추행 사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발뺌하고 있다. 징계없이 물러난 박 감독이 농구계로 복귀할지도 모른다는 설도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박봉정숙 사무처장은 "이는 남녀고용평등법에 명백히 위반되는 행위"라고 말했다. 남녀고용평등법 14조에는 '사업주는 직장내 성희롱 발생이 확인된 경우 지체없이 행위자에 대해 징계, 그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여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그는 "우리은행 노동조합 또한 사측에 박 감독의 징계를 요구하고 시행여부에 대한 모니터링을 실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현재 박 감독의 성폭력에 대한 피해자의 문제제기가 오히려 이후 선수생활의 위협으로 이어지는 황당한 일이 발생되지 말아야 할 것"이라며 우리은행 및 스포츠계가 피해자 보호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조적인 성폭력, 승리 지상주의가 부채질
경인여자대학 허현미 교수는 최근 주종미씨가 '한국여성체육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인용해 스포츠계 여성이 겪고 있는 성폭력이 '구조적인 문제'임을 지적했다.
이 자료에는 지난 1999년부터 2006년까지 언론을 통해 보도된 14건의 성폭력 사례를 분석하며 △피해자의 대부분이 여자 청소년이라는 점 △가해자의 대부분이 남성 체육교사 또는 코치라는 점 △발생 장소가 운동부 숙소 또는 전지훈련 장소라는 점 △1명 이상의 피해자에게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이뤄졌다는 점 △성폭력 가해자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졌다는 점 등을 공통점으로 들었다.
<한겨레> 김동훈 스포츠부 기자는 "한국 스포츠계에는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 승리지상주의가 만연돼 있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언어, 신체적 폭력부터 시작해 선수들에 대한 감독 또는 지도자들의 인권침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동훈 기자는 "이런 폭력이 여자 선수들에게는 그 강도가 더 심각하다"며 "빨래, 청소부터 성추행까지 선수들은 선수 생활을 계속하려면 감독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밝혔다.
문화부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토론자들은 한목소리로 체육계를 담당하는 부처인 문화관광부를 비롯해 관련기관의 정화노력이 절실하다고 주문했다.
정희준 교수는 "체육계가 앞으로도 사회조직으로서 기능을 수행하려면 이제까지와 같은 '눈가리고 아웅' 식의 솜방망이 처벌과 징계는 버려야 한다"며 "박명수 감독의 영구제명은 최소한의 징계"라고 밝혔다.
또 정 교수는 "남성이 독점하고 있는 여성스포츠계에서 여성이 올바른 몫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여성지도자 배출을 위한 법적이고 제도적인 지원이 선행돼야 한다"며 "현재 같이 여성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상황에선 외국처럼 쿼터제 도입이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사례발표를 맡았던 박찬숙 씨는 "여자 프로농구단이 결성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한번도 여자 감독이 나오지 않았다"며 "능력이 없고 결단력이 없어서 안된다고들 얘기하지만 실제로는 여자감독이 나올 만한 기회를 주지도 않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봉정숙 사무처장은 "오늘날 체육계의 비민주적이고 성차별적인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에는 문화부의 관심부족도 한몫 하고 있다"며 "세계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실력을 떨치고 있는 한국 체육의 이 같은 실상이 알려진다면 그야말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이날 역시 토론회에 참석한 문화부 조영권 체육국생활체육팀 주무관은 "체육계 성폭력과 성차별의 현실이 솔직히 이 정도인 줄 몰랐다"며 "오늘 나온 이야기를 참고해 우선적으로 성교육 대상에 지도차, 코치 포함시키는 것부터 시작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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