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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요정 정치 산실, 꼭 헐어야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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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 요정 정치 산실, 꼭 헐어야 했나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6> 순라길과 오진암

익선동은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장소는 아니다. 인파는 보통 창덕궁과 북촌을 거쳐 삼청동과 경복궁, 그리고 인사동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인사동과 종묘 사이에는 인적이 별로 없다. 이런 형편을 서울시도 알고 있어서, 시는 종로 주변 순라길을 관광 상품화하려는 전략을 세워놓았다.

순라길은 과거 조선시대 화재와 도적을 감시하기 위해 순찰을 돌던 길이다. 원래는 2~3명이 함께 다니기도 힘든 좁디좁은 길이었다.

"예전에 순라길 주변에는 한옥이 엄청 많았어요. 지금과 달리 좁디좁은 골목이었죠. 아이들은 밤에는 무서워서 순라길에 못 갔어요.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고."
- 과거 순라길 인근 한옥 거주자 인터뷰, 2013년 5월 10일


▲인파는 보통 창덕궁과 북촌을 거쳐 삼청동과 경복궁, 그리고 인사동으로 내려온다. 그러나 인사동과 종묘 사이에는 인적이 별로 없다. ⓒ김경민

ⓒ김경민

그러나 그 많던 한옥은 2006년 서순라길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거 철거됐다. 이전과는 판이해진 모습의 순라길을 관광 상품으로 만든다고 한들, 북촌에서 인사동 거리를 지나는 인파를 종묘까지 이어지게 할 수 있을까.

인사동 입구에서 순라길까지 이어지는 600미터에 달하는 직선거리에는 아무 볼거리가 없는 형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걸어서 순라길까지 가라는 것은 무리다. 거리가 긴 만큼, 중간 중간에 사람들을 유인할 무언가, 즉 앵커(Anchor) 역할을 하는 건축물 또는 콘텐츠가 존재해야 한다.

한국 밀실 정치의 산실, 오진암(梧珍庵)

과거에는 앵커 역할을 할 만한 장소가 있었다. 바로 오진암(梧珍庵)이다. 오진암은 1950~1960년대 한국 밀실 정치 스토리를 간직한 역사적 장소였다. 한때 '기생 관광의 중심지'라는 사회적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이 또한 엄연한 한국, 그리고 서울의 역사다.

아마도 과거에는 사람들이 요정을 구경하기 위해 호기심을 가지고 오진암을 관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익선동에서 오진암을 볼 수가 없다. 아쉽게도 오진암은 익선동에서 철거돼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오진암이 있던 자리에는 비즈니스 호텔 이비스(IBIS)가 들어섰다.

철거된 오진암에 대해 지역 주민이 품었던 감정은 애틋하다.

"지역 주민 입장에서 오진암 내부를 가볼 일은 없었죠. 기생 관광을 하던 곳을 서민들이 어떻게 가보겠어요. 하지만 제가 사는 집에서 오진암을 내려다보면 오진암에 있었던 매화나무들이 정말 멋있었어요. 오진암 담벼락의 매화가 너무도 탐스럽게 열렸었고 향도 좋았어요. 오진암 지붕 기와가 하나하나 뜯겨나갈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 익선동 주민 인터뷰, 2013년 5월 10일

▲ 2010년 9월 8일, 서울 종로구 익선동 오진암(梧珍庵)의 철거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1953년 문을 연 오진암은 한국 최초의 근대 요정으로 이미 문을 닫은 삼청각, 대원과 함께 정치인, 기업인들이 자주 찾던 '3대 요정'으로 유명하다. ⓒ연합뉴스

▲ 지붕 기와가 뜯겨나간 오진암. ⓒ연합뉴스

익선동 주민과 인근 상인들은 유서 깊은 오진암이 철거된 자리에 주변과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몸뚱이의 호텔이 들어선 데 분개하고 있다. 오진암을 부수고 다른 건물을 지을 거라면, 주변과 어울리는 제대로 된 건물을 지었어야 한다는 섭섭함이 든다.

"저 호텔 벽돌이 진짜 비싼 거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도대체 주변하고 어울리지가 않아요. 주민들은 벽돌 색깔에 불만이 많아요."
- 익선동 소재 OO카페 사장 인터뷰, 2013년 4월 20일


만일 오진암이 남아 있었다면 많은 사람은 인사동을 벗어나 오진암까지 발길을 옮겼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비즈니스 호텔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길 사람은 많지 않지만 말이다.

▲오진암 자리에 들어선 짙은 회색의 IBIS 호텔. ⓒ김경민

오진암의 원형 보존한 '한옥 호텔' 만들었다면…

오진암 철거는 지역의 역사와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건물이 어떻게 사라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국은 오래된 건물을 재개발할 때 역사와 정취를 느낄 수 있는 본래 모습(Historic Look and Feeling)은 최대한 유지하며 건물 일부를 변형하는 것만 허용한다.

수많은 관광객이 서울을 찾는다. 넘쳐나는 호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호텔도 새로 건설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문객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현대식 건물의 호텔이 아닌, 조금은 차별화된 호텔에서 투숙하고자 할 것이다.

만약 수명을 다한 오진암을 철거하는 대신, 그 원형은 살려둔 '한옥 호텔'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최근 관광업계에서는 이른바 '비앤비(B&B, Bed and Breakfast)' 형태의 숙박 시설이 뜨고 있다. B&B는 일반적인 호텔과 달리 그 지역의 고유한 분위기, 독특한 역사적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는 숙박과 아침 식사만 제공하는 시설이다.

전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비즈니스 호텔이 아닌, 고급 요정이란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오진암 B&B'를 만들었다면, 같은 가격에 오진암 B&B를 선호하는 관광객이 많았을 것이다. 600년 역사 서울 한복판에 있는 한옥 숙박 시설은 한국을 찾는 외국인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진정한 서울의 가치를 알리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 종묘 담벼락 옆 작은 골목길, 순라길은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 됐다. 조선시대 순찰을 돌았던 길이란 것을 상상하기 어렵고, 그나마 관광 자원이 될 수 있었던 오진암도 철거됐다. 서울 시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골목길이 된 순라길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럼에도 정책 입안자들은 옛 정취를 하나도 느낄 수 없는 순라길이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원형을 지운 후 관광 상품화를 시도하는 정책, 그리고 그나마 관광 상품화가 능했던 역사 자원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며, '결국 이런 방법이어야 했느냐'는 아쉬움이 든다.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면 오진암이 철거된 장소에 대규모 오피스 건물이 들어서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많은 방문객들이 숙박하게 될 비즈니스 호텔은 차악이나, 최악은 아닌 듯 싶다. 호텔에서 내려다본 한옥 집단촌 '익선동 166번지'를 통해 익선동의 가치를 방문객들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1> 서울, '200년 역사' 상하이보다 못하다…왜?
<2> 휘청휘청 용산 개발, '티엔즈팡'만 미리 알았어도…
<3> 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4> 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만든 그는 왜 잊혔나
<5> 당신이 몰랐던 피맛골,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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