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중국 상하이 티엔즈팡(田子坊, Tian Zi Fang)의 모습이었고, 현재도 이런 특징은 일부 남아 있다. 티엔즈팡 주변은 가내 수공업 공장들이 자리 잡은 곳이었고, 주변 타이캉루 지역은 한국의 재래시장처럼 과일과 채소를 팔던 시장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이곳은 상하이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할 '명소'가 됐다.
도시 이야기 <1> 서울, '200년 역사' 상하이보다 못하다…왜? |
1980년대 이후, 상하이의 도시 재개발 기본 전략은 원주민을 몰아내고 대규모 아파트와 사무·상업용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이런 재개발 전략에 따라 상하이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성됐던 거주 커뮤니티는 상당수 사라졌다. 상하이시는 특히 저소득층 밀접 지역으로 주거 환경이 열악한 축에 속했던 티엔즈팡에도 '철거 후 재개발'이란 도시 개발 전략을 적용코자 했다.
하지만 상하이시는 지역 주민과 지역에서 활동하던 예술인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기존 커뮤니티를 보존하면서도 지역 활성화를 꾀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발 전략을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시는 티엔즈팡 주민의 삶이 생생히 닮긴 지역 고유의 모습을 유지하며, 기존 건물 내부에 스튜디오, 갤러리, 공방, 카페, 레스토랑 등 다양한 문화 예술 공간을 입주시켰다. 보존과 활성화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노린 전략이다.
▲ 티엔즈팡의 다양한 모습. ⓒ김경민 |
재미있는 도시, 티엔즈팡
이런 티엔즈팡을 외지인들이 찾아가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대로가 아닌 뒷길인 탓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제대로 도착했는지조차 헷갈리기 마련이다. 외지인들은 미로를 헤매는 과정을 거쳐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곤 한다.
이렇게 티엔즈팡에 들어서면, 이곳이 '매우 재미있는 지역'이라는 첫인상을 갖게 된다. 건물 1층에는 갤러리, 디자인 스튜디오, 예술품 판매처, 카페 등이 자리하고 있다. 2층에는 빨래를 거는 아주머니, 러닝셔츠 속옷 차림에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담배 피우는 아저씨가 있다. 관광객 사이로 노란 봉지를 들고 장을 보고 오는 할머니도 있고, 좁은 골목길에서 뛰어노는 꼬마들도 눈에 띈다.
고급스럽고 창의적인 현대식 공간에 있는 깔끔한 옷차림의 외지인과 기존의 생활 양식을 지키며 사는 원주민이 공존하고 있다. 지역 사회의 삶이 과거와 동일하게 현재로 이어져 숨 쉬고 있는 모습이다.
낮은 건물, 좁은 골목, 활력 넘치는 광장
건물은 어떠한가. 티엔즈팡에서 보게 되는 건물은 미국 대도시 뉴욕 맨해튼에 있는 거대한 초고층 건물들이 아니다. 기존 것을 부수고 재건축한 건물이 아니라 허름한 건축물 대부분을 그대로 이용했다. 그래서 어찌 보면 한국 중소 도시의 모습 또는 1960년대 어느 골목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잘 만들어진 아담한 벽돌 건물이 있는가 하면, 보기 흉한 콘크리트 건물도 존재한다. 건물 외형만을 따지면, '도대체 여기에 볼 게 뭐가 있나?'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볼품없고 허름한 건물의 원형을 통해 상하이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와 함께 현대적인 예술과 문화가 숨 쉬는 티엔즈팡은 현대인이 원하는 깨끗하고 문화적인 소비 공간이기도 하다.
골목길! 길이 넓어야 원활한 통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동차 중심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이런 좁은 길은 매우 낯선 느낌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상하이의 떠오르는 지역이라는 곳에 길이 좁아 자동차조차 진입할 수 없고 두 명이 함께 걷기도 어렵다면 더욱 의아할 것이다.
하지만 좁은 골목 좌우로 위치한 공방, 스튜디오, 각종 전시관, 카페와 음식점 등 다양한 장소를 주목한다면, 뜻밖에 이런 좁은 길을 걷는 것이 매우 편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또 '휴먼 스케일(인간의 체격을 기준으로 한 척도)의 길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티엔즈팡의 좁은 골목길은 가로가 꼭 넓을 필요가 없고, 좁은 길이라도 상품화돼 지역 활성화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오픈 스페이스'. 기껏해야 몇 십 명이 모일 수 있는 좁은 이 공간을 다양한 사람들이 훌륭하게 사용하고 있다. 몇 백 명 아니 족히 수천 명은 품을 것 같은 서울 송파구 가든파이브 쇼핑몰의 거대한 광장은 사람이 없는 죽은 장소가 됐다. 하지만 티엔즈팡의 오픈 스페이스는 규모가 그것의 100분의 1이 안 됨에도 활력으로 넘쳐난다(편집자 - 오픈 스페이스 : 건물·구조물 등이 많지 않고 대부분이 비건폐지로 유지되는 토지를 총칭하며, 공원·녹지를 포함한 녹지 공간의 개념으로 쓰이는 단어).
개발과 보존은 병행 가능하다!
▲ 낮고 현대적인 건물과 창의적인 소매점. ⓒ김경민 |
티엔즈팡의 광장, 건물, 골목길은 어느 것 하나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초대형, 초고층, 자동차를 위한 거리'와 닮은 구석이 없다. 좁고, 작고, 낮은 공간이어도, 어떤 기능이 들어가느냐에 따라 도시에 새로운 가치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티엔즈팡이 보여준다.
전통적 경관과 현대적 기능의 공생. 그리고 지역 커뮤니티와 외지인의 공생이 티엔즈팡의 가치를 높이는 원동력이다. 모든 것을 100퍼센트 원형으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건물 내부는 현대적으로 바꿈으로써 새 인파를 지역 내부로 끌어들였다. 그러면서도 외부 인파가 내부 원주민과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는 모양새다. 개발의 필요성을 인정한 전향적인 자세이면서도 건물과 지역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보존을 넘어서 지역 주민의 생활 양식까지 보존하는 차원으로 확대하고 있다.
2층 및 지역 외곽 주민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재도 삶을 영위하고 있으며, 일부 주민은 임대를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기도 한다. 도시 재개발 사업을 통한 개발 이익이 지역 주민에게도 공유되게 하려는 노력이 묻어난다.
티엔즈팡이 한국에 주는 교훈
물론 티엔즈팡이 완전한 것은 아니다. 한국의 인사동이 상업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지역으로 끌어당겼던 재미있는 공방들이 쫓겨나는 것처럼, 티엔즈팡 성공을 이끌었던 세계적인 사진작가 동키앙(Er Dongqiang)이 최근 임대료 인상을 버티지 못하고 티엔즈팡을 떠났다. 그의 사연은 중국 관영 신문인 <환구시보>의 영문판 <글로벌타임스>가 기사화해 대중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 기사 원문 보기)
그럼에도 대규모 전면 철거 위주의 도시 재개발에서 이제 막 벗어나려는 한국에 티엔즈팡이 주는 교훈은 매우 크다. 지역에서 문화 예술을 포함한 창조적 기능이 싹틀 때 지역이 변모할 수 있음을. 허름한 건물과 좁은 골목길이 존재해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음을. 빨래를 걸고 요리를 하는 지역 주민과 현대적 카페에서 담소하는 외국인들이 공존할 수 있음을. 서울보다 소득 수준이 열악한 도시 상하이 그리고 그 상하이의 대표적 낙후 지역인 티엔즈팡은 이처럼 우리에게 보존과 개발의 조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티엔즈팡과 비슷한 성공 사례가 한국에도 있다. 서울 '북촌'이다. 북촌 골목길은 자동차가 지나기에는 버겁고, 건물(한옥)은 고작 한 층짜리가 일반적이다. 거대한 오픈 스페이스조차 없는 이 지역은 그러나, 넘치는 사람들로 대단한 활력을 뽐낸다.
우리는 도시의 가치와 브랜드를 높이기 위해 10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을 지어야 하며, 그래서 용산 국제업무지구를 완성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처럼 작고, 낮고, 아담한 북촌과 티엔즈팡의 성공을 목도하고서도 크고, 높고, 거대한 도시만을 주장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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