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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피맛골, 아직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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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몰랐던 피맛골, 아직 살아 있다

[김경민의 도시 이야기] <5> 창덕궁 돈화문로 피맛골

철학 없는 정치가와 개발업자의 만남…피맛골을 밀어 버리다

2000년대 초중반, 서울 종로 교보생명 건물 동쪽 지역이 재개발로 대규모 철거됐다. 당시 가장 논란이 됐던 것은 서민이 즐겨 찾던 '피맛골'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교보문구 후문에서 지하철 종각역까지 뻗어 있던 피맛골이 철거됨에 따라, 서민의 사랑을 받던 빈대떡, 해장국, 생선구이 집들이 사라졌고, 많은 사람이 이를 안타까워했다.

피맛골은 과거 하급 관리나 서민이 말을 탄 고위 관료들을 피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避馬)이다. 당시 서민들은 고관이 주로 행차하는 대로에서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인사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이 골목길을 이용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서민을 상대로 한 저렴한 음식점들이 형성됐다. (전종한, 2009, <도시 뒷골목의 '장소 기억': 종로 피맛골의 사례>, 대한지리학회지, 44(6): 779-796.)

조선시대부터 서민의 애환이 서린 청진동 166번지 피맛골은 1983년 도심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된 이래 수차례에 걸쳐 재개발이 시도됐다. 지역 상인과 문학·예술인, 정치인 등의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사업이 미뤄졌지만, 2003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은 결국 피맛골을 철거하고 거대한 오피스 건물을 건설하는 계획을 밀어붙였다.

당시 서울시는 새롭게 태어날 청계천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종로 피맛골 일대를 정비하여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재개발하겠다고 약속했다. 또 부동산 개발업체인 (주)르메이에르는 보도자료를 통해 수복 재개발 방식을 이용하여 지역 고유의 분위기를 유지하겠다고도 공언했다.

이런 '약속'과 '공언'을 통해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으로 탄생한 피맛골의 모습은 아래와 같다.

ⓒ김경민

과거 피맛골에 있었던 '청일집', '청진옥', '미진' 등 유명 맛집들은 현재도 르메이에르 건물 1층에 자리하고 있다. 그나마도 이들 맛집 간판에 적힌 설립연도를 꼼꼼히 찾아 읽지 않으면, 주변에 흔하게 널린 식당들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조차 없다. 그리고 그 외 많은 음식점들은 높은 유지 비용에 부담을 느끼고 떠났는지, 피맛골에서 찾을 수 없게 됐다.

이렇게 종로 피맛골은 과거의 흔적과 장소성, 그리고 그만의 맛을 상실한 채, 우스꽝스러운 조형물과 함께 우리 앞에 서 있다.

▲ 맛집 청일집(식당)의 과거(왼쪽)와 현재(오른쪽). 아래는 르메이에르 건물 '피맛골의 명소' 표지판. 오래된 음식점은 몇 군데 남지 않았다. ⓒ김경민

종로 피맛골은 한국전쟁 중에도 훼손되지 않고 살아남은 거리다. 1950년 인천상륙작전을 이끈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종로를 포함한 서울시 전 지역에 대한 폭격을 계획했다. 이에 당시 주일 공사였던 김용주는 경복궁, 덕수궁 등 주요 고궁과 4대문만큼은 문화적 가치가 크기에 폭격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다. 다행히도 맥아더 장군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종로 거리는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에서도 기적처럼 살아남은 피맛골은 세월이 흘러 정치인과 건설업자들에 의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상업 시설 통로로 변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피맛골에 대한 강간'이라며 분개한 미국인 문화비평가 스콧 버거슨은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썼다.

"한국이 (생각하는) 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한 최상의 방법은 피맛골과 같은 역사적인 랜드마크를 파괴하고 서구에서도 볼 수 있는 똑같은 모양의 영혼 없는 현대적 고층 건물을 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랜드마크를 부수고 현대적 고층 건물을 세우는 것이) 외국 관광객들을 떼로 불러들이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 <문화+서울> 2005년 창간호 '서울시 문화 정책은 있다?' 중


당신이 몰랐던 피맛골, 아직 살아 있다

대부분은 피맛골을 종로와 평행을 이루면서 그 배후에 뻗어 있는 이면 도로, 즉 '뒷골목'으로 이해할 테다. 하지만 피맛골은 오직 종로에만 있었을까? 우리 역사를 조금만 더 들추어 보면, 종로에만 피맛골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란 점을 알 수 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된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까지 왕의 거처로 사용되지 않았다. 광해군 이후 250년 넘게 왕궁으로 사용된 곳은 익선동 북쪽에 위치한 창덕궁이다. 창덕궁은 3대 태종(이방원)이 난을 일으켜 왕좌에 오른 후 경복궁을 정궁으로 사용하는 것을 께름칙하게 생각해 만든 이궁으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조선의 왕들이 가장 많이 행차했던 길은 종로가 아니라 창덕궁에서 남쪽으로 뻗은 돈화문 길일 것이다. 그렇다면 종로 이외 지역, 즉 돈화문로 인근에도 피맛골이 생기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실제로 서울시에서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피맛골은 돈화문로 이면 도로에도 형성돼 있었다. 돈화문로 피맛골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익선동이 품은 또 다른 가치의 재발견이다.

▲ 서울역사박물관 개관 10년 기념 '서울 2000년 역사 문화 특별전' <아스팔트 아래 운종가 - 청진 발굴의 아홉 수수께끼> 중. ⓒ 서울역사박물관

▲ 익선동 피맛골. ⓒ김경민

재미있는 점은 익선동 주변 돈화문로 인근에 국악 악기상과 관련 학원, 국악 연습실과 사무소가 많이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이곳에서 우리 음악의 클러스터(cluster)가 형성됐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저녁 시간 익선동 피맛골 식당에서는 국악인들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지난 4월 익선동 피맛골에서 만난 한 식당 주인은 이렇게 전했다.

"최근 수년 사이에 국악 하시는 분들이 많이 오세요. 대략 이틀에 한 팀 정도 와요. 보통 오후 5시 넘어서 오시는데, 어떤 분들은 공연 마치고 한복을 입고 상모를 쓴 채 이곳에 오세요. 텔레비전에 나온 유명한 분들도 오십니다."

전통 문화 예술인들의 존재는 익선동 피맛골이 과거 종로 피맛골과 같이 '정취'가 살아 있는 지역으로 변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비단 피맛골만이 익선동에 있는 의미 있는 골목길이 아니다. 고려시대 서울이 남경이라 불리던 시절의 골목길이 여전히 남아 있다. 책 <오래된 서울>(최종현·김창희 지음, 동하 펴냄)은 창덕궁과 돈화문로가 조성되기도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700~900년 전, 이곳에 고려시대 골목길이 존재했단 사실을 전한다. (☞관련 기사 보기 : 요즘 뜨는 서촌, 뒷이야기가 궁금해?)

ⓒ김경민 제공

원형 보존과 주민 위한 개선, 조화 가능하다

이렇게 익선동 한옥 지구는 과거 피맛골과 고려시대 골목길 등을 안고 있는 매우 가치 있는 장소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을 원형대로 보존할 것이냐, 아니면 거주하기에 불편한 한옥을 어떻게든 업그레이드할 것이냐는 문제가 생긴다. 이는 좀처럼 해결법을 찾을 수 없는 어려운 문제다.

이와 관련, 미국의 정책 사례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미국은 오래된 건축물을 보호하고자 할 때, 그 건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본래 모습(Historic Look and Feeling)을 최대한 유지하는 선에서 제한적인 내·외부 변형만을 허가한다. 그러면서 건물에 대한 개선 공사(업그레이드)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을 세제 혜택 형식으로 지원한다. 물론, 반드시 그 원형을 보존해야 하는 '유적'은 일부라도 변형할 수 없다. (☞ 관련 인터넷 페이지 바로 가기 : Federal Historic Preservation Tax Incentives)

이와 같은 미국의 건물 보존 정책과 과거 서울시의 개발 계획은 아주 상반된다. 서울시의 계획대로는 종로 피맛골이 "새롭게 태어날 청계천과 조화를 이루는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이 될 수 없다. 미국 정책의 기본 방향인 '건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본래 모습'을 지킬 수 없음은 물론이다. 익선동 한옥 단지와 피맛골을 없애는 현재와 같은 재개발 계획은 바람직한 방향이 결코 아니다.

다만 익선동 안에서 진행되는 아주 작은 수위의 개발은 원형 보존과 편리한 개선이란 두 문제가 조화 가능하단 점을 보여준다. 익선동에 있는 전통 찻집들은 과거 한옥벽의 많은 부분을 허물고 통유리로 벽이자 유리창을 새로 세웠다. 일부 파괴를 했지만, '건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본래 모습'을 충분히 지켜낸 것이다.

ⓒ뜰안

특히 여기서 논란이 되는 부분은 한옥 변형에 관한 것이다. 지난 연재에서도 설명했듯, 북촌 한옥은 전통 한옥이 아니라, 20세기 초 거주자들의 삶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변형된 20세기형 퓨전 한옥이다. 100년 전 북촌과 익선동 한옥의 개발자였던 정세권은 전통 한옥의 '역사적 모습과 느낌'을 보존하면서 20세기 생활 방식을 반영한 개발에 성공했다.

따라서 21세기식 새로운 생활 방식이 만들어진 현재, 20세기 초반의 삶을 이 지역 주민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이는 시대와 다른 불편한 삶을 한옥에서 감수하라고 하는 것으로, 원조 개발자 정세권의 철학에 반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보존 가치가 높은 한옥은 서울시가 투자를 통해 소유권을 이전 받아 원형을 보존하면 되지만, 일반인들이 지금도 살고 있는 한옥은 현재 생활 방식을 고려해 변형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원칙인 '건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본래 모습'을 보존하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또 우리만의 원칙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 원칙을 개별 건물에만 적용할 것인지, 아니면 더 넓은 지역 차원에 적용해야 할 것인지도 고려해야 한다. 더는 청진동 피맛골 재개발처럼 역사를 철저히 지워버리는 개발이 진행돼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지역 주민에게 무작정 불편을 강요하는 것 역시 온당치 못하다.

중요한 원칙이 제시되지 않았을 때의 폐단은 대단하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의 연재(오진암 철거와 동대문역사문화공원 파트)에서 하기로 한다.

도시 이야기
<1> 서울, '200년 역사' 상하이보다 못하다…왜?

<2> 휘청휘청 용산 개발, '티엔즈팡'만 미리 알았어도…

<3> 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역사 속으로 사라지나
<4> 서울 최고의 한옥 지구 만든 그는 왜 잊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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