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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신'을 죽여야 인문학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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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의 '신'을 죽여야 인문학이 산다!

[절망의 인문학] 인문학은 무엇이 아니어야 하는가?

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열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인문학은 무엇이 아니어야 합니까?" 철학을 공부한 자유기고가 노정태 씨가 답합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다 여기는 것, 그것이 과연 인문학일까요?" <편집자>

① 첫 번째 질문 :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② 두 번째 질문 : 안철수는 과연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③ 세 번째 질문 :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④ 네 번째 질문 : 현대 동양 철학은 가능한가?
⑤ 다섯 번째 질문 : 문학 비평은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⑥ 여섯 번째 질문 : 인문학 스타 사도 바울의 정체는?
⑦ 일곱 번째 질문 : 인문학을 파는 사기꾼을 고발한다!
⑧ 여덟 번째 질문 : 사회과학의 역할은 무엇인가?
⑨ 아홉 번째 질문 : 심리학은 뇌 과학에 자리를 내어 주는가?
⑩ 열 번째 질문 : 지금 우리에게 지옥은 무엇인가?
⑪ 열한 번째 질문 : 인문학은 노동자의 무기가 될 수 있는가?

인문학 전성시대, 우리의 현황

바야흐로 인문학 전성시대다. 온갖 대학, 지방자치단체, 영리기업, 사회적 기업, NGO, 기타 다종다양한 단체들이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거나 초빙하는 형태로 그 열풍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일단 긍정적인 현상이다. 대중들이 단지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서, 그 바깥에 있는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동시에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을 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인문학 열풍이 부는 사회는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스터디 모임이 열리는 사회보다는 훨씬 나은 곳이다.

국내에 이른바 '희망의 인문학'을 소개하며 인문학 강좌 열풍을 선도한 성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의 경우, 2012년 10월 현재까지도 꾸준히 수업을 개설하고 본래의 취지에 맞도록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노숙인에게 인문학을 가르침으로써 '정신적으로 고양된 삶'을 제공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이 스스로 가난과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을 준다는 그 목적에 맞게, 문학, 철학, 예술사, 역사, 작문 등의 강의가 충실한 시간표를 통해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실망스러운 경우도 없지 않다. 물론 수강자들의 관심과 참여도, 교육 수준 등을 고려해서 수업이 짜인다는 것을 감안해도 그렇다. 이전까지는 '백화점 문화 강좌'라는 제호 하에 진행되었을 법한 수업들이 고스란히 '인문학 강좌'가 되어 있는 경우도 있고, 도무지 인문학과는 관련이 없는 수업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가령 허브 키우기, 우클렐레 치는 법, 사진 잘 찍는 요령 등을 가르치고 배우기도 한다. 그것이 2012년 현재 성행하고 있는 '대중적 인문학'의 풍경이다.

앞서 말했듯이 사람들이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긍정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미 질리도록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어온 사람들이 자신의 귀한 여가 시간을 활용해 술을 먹고 노래방에서 탬버린을 흔드는 대신, 이름부터 친숙하지 않은 서양 철학자 등의 케케묵은 이론을 공부하는 것은 여러모로 고무적인 일이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즐거움, 지난 시대의 누군가가 남겨놓은 텍스트에서 현재를 향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쾌감을 사람들이 알아갈수록,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반은 탄탄해질 것이다.

두 개의 인문학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내가 모든 대중적 인문학 강의를 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언론의 보도 및 해당 단체의 커리큘럼 등을 통해 검토해보면, 그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앞서 말했듯 굳이 '인문학'이라고 분류될 필요가 느껴지지 않는 일반적인 교양 강좌들이 한 묶음으로 크게 존재한다. 그 반대편에는 사실상 대학원 수준으로 진행되는, 고대 희랍어나 영화 비평에 사용되는 현대 철학 등에 대한 수업들이 있다. 전자에 해당하는 교양 수업들이 작금의 '인문학 열풍'을 양적으로 보여준다면, 후자에 해당하는 전문적인 인문학 강의들은 그 열풍의 바닥에 잠재되어 있는 학문적 에너지의 질적인 측면을 표상한다.

문제는 그 양적인 측면과 질적인 측면이 서로 만나 상호 작용하는 대신, 일종의 평행 우주를 그리고 있다는 데 있다. 대중적인 '인문학'을 강의하는 사람들은 틈틈이 '상아탑 속의 철학', '너무 어려운 외국어가 한가득 나오는, 우리의 삶과 관계없는 인문학' 등을 비난한다. 하지만 너무 어렵고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그런 인문학은 비단 상아탑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철학아카데미로 대표되는 '대학교 바깥 인문학'의 전문적인 강의들 역시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대학교의 체제 내에서 다 다루지 못하는 것들, 혹은 좀 더 심화 학습이 필요한 것들이 주로 커리큘럼에 오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문학의 대중화가 진행되면서, '더욱 더 쉽고 말랑말랑하게 대중들에게 지식을 전달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간판을 걸고 온갖 종류의 수업이 진행된다. 그 중 대부분은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인문학과는 그리 큰 상관이 없다. 인문학이 태동하고 발전해온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일천한 학문적 역사와, 어쨌건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폭넓은 교양 수업을 제공해야 한다는 수요 공급의 원리가 맞물려, '사람과 삶을 이야기하는 모든 것'이 곧 인문학으로 통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각광받는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인문학이다. 한국어의 현재 맥락 속에서 '인문학'이란 '사람 사는 이야기'에 가까운, 사실상 특정한 내포를 지니지 않기 때문에 그 외연을 무한정 확장할 수 있는 교양 수업들의 집합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나는 그 현상 자체를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매우 중요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을 따름이다.

인문학의 시작과 역사

▲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 ⓒen.wikipedia.org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야기한다. 人文學. 사람 인, 글월 문, 배울 학. 인간과 글에 대한 공부가 인문학 아닌가요? 물론 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풀어놓은 다음, 역사적 맥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해석한다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문학, 특히 서유럽에서 발전하여 지금 우리에게까지 수입된 인문학은 스스로를 다른 학문과 구별 짓는 자신만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서양 고전학자 루돌프 파이퍼가 쓴 <인문 정신의 역사>(정기문 옮김, 길 펴냄)를 통해 그 내막을 살펴보자.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서구 세계는, 십자군 전쟁 이후 쏟아져 들어온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들을 주목하게 되었다. 기존의 기독교적 질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자유롭고 인간적인, 즉 신 중심의 사고가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를 하는 내용들이 그 텍스트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내려온 문헌들을 해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책들은 다양한 필사본의 형식으로, 결코 완전하지 않은 형태로, 개별적인 필사본마다 조금씩 다르게 전해져왔다. 그러므로 여기서 몇 가지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어떻게 '원본 텍스트'를 확보, 혹은 확정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올바르게 해석해낼 것인가? 해석해낸 내용을 어떠한 방식으로 다른 이와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아 지식의 선순환 구조를 확립할 것인가?

바로 그런 고민들이 모여 이른바 '고전 문헌학'을 태동시켰다. 그 출발점에 선 사람이 바로 14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이다. 그는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가 남긴 책을 토대로 자신의 역사책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 가지 행위를 통해, 그는 그의 동시대 및 이전 세대의 고전 연구자들과 다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게 된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는 자신의 역사책을 집필하면서 리비우스의 주요 주제들을 고르고, 베껴 쓰고, 보충하는 데서 머물지 않았다. 페트라르카가 직접 쓴 필사본이 발견되면서 그가 텍스트의 원본에 문제가 있다고 확신할 때면 텍스트 자체를 복원하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텍스트의 비판-편집(editio critica)의 부활을 선도하였다. 텍스트의 여백에 그가 단 주석은 다른 작품과 달리 단순한 예증이나 설명에 멈추지 않았다. 두 필사본을 대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는 다양한 독법(讀法)을 인내심 있게 기록하였고 여러 문장을 기교 있게 교정하였다. 그의 시대 학자 누구도 이런 작업을 해낼 재능이나 행운을 갖지 못했다. (19쪽)

우리가 아는 서양의 인문학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고전 텍스트, 특히 성경을 읽고 주석을 다는 비판적 독서는 오래도록 지속되어 왔지만, 원전을 읽고 그 자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사실상 원전을 '확립'해나가는 학문은 바로 저 시대에 출발한 것이다.

그렇게 수많은 고전 그리스 로마인들의 텍스트가, 마치 조각난 도자기를 흙에서 파낸 후 한 조각씩 섬세하게 이어 붙여 복원하듯, 되살아났다. 그 중 페트라르카를 포함해 수많은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바로 고대 로마의 정치가인 키케로였다. "페트라르카는 키케로에게서 로마인이 그리스인을 단지 학문의 모델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사람다운 사람'(genus humanissimum)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배웠다."(30쪽)

그때부터 고전 문헌을 연구함으로써 지금까지 잊혀 왔던 '사람다움'을 탐구하는 학문이 자리 잡게 되었고, 당대의 사람들도 그것을 "인간에 대한 학문"(studia humaniatis)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맥락에서 인문학, 혹은 인문주의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지만, 그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 로마 고전에 대한 문헌학적 연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리학자인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김용준 옮김, 지식산업사 펴냄)에서도, 20세기 초 독일의 김나지움에 다니던 학생 하이젠베르크가 기숙사 지붕에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의 한 구절을 곱씹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서양에서 지속되어온 인문학의 역사와 전통이다.

지금 여기의 '신'과 싸우기 위하여

고전 문헌에 대한 비판적 독해와 더불어, 인문학을 인문학으로 만들어준 것은 다름 아닌 그 내용이었다. 인간을 만들었고 전지전능하여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의 말씀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를 살다가 죽었던 어떤 '사람'들이 쓰고 남긴 텍스트를 고전 문헌학자들은 연구했다. 그 속에서 그들은 낡았지만 새로운,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다른 인간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새로운 아틀란티스>라는 제목의 책으로 과학 문명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마찬가지로 최초의 인문학자는 그들 손에 주어진 텍스트를 바로 그렇게 '새로운 아틀란티스'로 바라보고 세월의 더께를 털어내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인문주의자들에게 '인문학'이란 즉 '신학'이 아닌 그 무언가였다. 지금은 그 누구도 철학과와 신학과가 갈등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키케로는 기독교를 믿지 않았다. 기원전 106년에 태어나 예수가 탄생하기 전에 죽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찌됐건 고대 그리스 로마의 작가들은 '이교도'였고, 이교도의 글을 연구하고 읽고 흠모하고 애호하는 것은, 때에 따라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모든 고대 문헌 연구자들, 인문주의자들이 다 이단으로 몰렸거나 고초를 겪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지금까지 묻혀 있었던 '새로운 옛 사람'을 복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즉 자신들이 기독교적인 세계 속에서 '신학이 아닌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자. 한국에서 '인문학'은 과연 그렇게, 지금 여기의 지배적인 사고방식 및 세계관과 스스로를 차별화하고 있는가? 돈을 벌고, 성공하고, 출세하라는 자본주의적 계시 앞에서, 묵묵히 다른 텍스트를 읽어나가며 '새로운 옛 사람'을 찾아내는 그런 인문학은 어디에 있는가?

너무 쉽게만 흘러가고, 그저 많은 수강생을 확보하는 데만 급급한 나머지, 작금의 인문학 교실들은 바로 그 중요한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대중들과 소통하는 '쉬운 인문학'과, 상아탑에 자리 잡지 못하고 대중들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어려운 인문학'이 서로 손을 잡을 때, 그 문제에 대한 해법의 실마리가 주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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