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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토지>·<태백산맥> 안 읽는 진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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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토지>·<태백산맥> 안 읽는 진짜 이유는…

[절망의 인문학]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세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태백산맥>, <토지> 같은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요?" 문학평론가 정영훈 경상대학교 교수가 답합니다. "아니요! 고통만 넘치고 공감은 사라진 이런 세상에서 언감생심입니다!" <편집자>

① 첫 번째 질문 :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② 두 번째 질문 : 안철수는 과연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 조정래의 <태백산맥>(해냄 펴냄). ⓒ프레시안

밤을 새워가며 <태백산맥>(조정래), <장길산>(황석영), <지리산>(이병주), <임꺽정>(홍명희), <토지>(박경리) 같은 소설들을 읽던 때가 있었다. 한 권으로 끝나는 이야기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디서, 얼마만큼을 읽은 다음 책을 놓아야 할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읽어 가다 보면 이게 누구였더라, 전에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묻게 되는 때도 종종 있었다. 인물들이 많고, 사건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태백산맥>은 등장인물이 200명도 넘는다). 몇 번 같은 일을 경험한 후에는 인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적어 가며 소설을 읽기도 했다. 벌써 20년도 더 된 과거의 일이다.

이런 경험이 나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누구나 이런 소설 한두 편씩을 읽고는 했다.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인물들에 이끌리고, 역사책에 한두 줄 언급된 것들을 생동감 넘치는 구체적인 이야기로 실감하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거나 사는 곳이 달라 가까이서 들을 수 없는 옛말과 토속어들에 휘둘리면서 이런 소설들에 눈길을 주고는 했던 것이다.

소설을 집어 들게 한 충동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배어 있었는가 하면, 특정한 시대의 삶과 현실을 보다 생생하게 경험하고 싶은 지적 욕구와, 체제 전복적인 삶을 살았던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현실에서 얻지 못한 것을 대신 얻어 보고자 하는 욕망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만큼 재미있는 오락거리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들은 문학 작품이면서 역사서이고 교양서이고 사상서이고 오락물이었던 것이다.

몇 권 이상이라고 정해진 기준은 없지만 보통의 장편보다는 긴 이런 소설들을 부르는 이름이 있다. 대하소설. 대하 역사 소설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든 엄밀한 의미의 양식 개념은 아니다. 그저 "사건의 연면한 지속과 시간의 장구한 흐름"(<한국 현대 문학사>(권영민 지음, 민음사 펴냄))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대개는 우리가 경험했던 과거의 중요한 어떤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겠다.

소설을 읽고 비평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서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을 일이 거의 없어졌다. 단편을 비중 있게 다루는 문단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좀처럼 이런 종류의 소설들이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이다. 단편 위주의 문단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장편 소설 대망론이 대두될 정도였으니, 그보다 몇 배나 긴 대하소설이 나오기를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글이 짊어지고 있는 물음은 대하소설은 여전히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결론을 미리 당겨서 답해 보자면, 그럴 것 같지 않다. 문단 안과 밖을 두루 살펴보고 문학을 둘러싼 여러 환경들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답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오늘날 소설이 서사를 전달하는 다른 여러 매체들과 경쟁하고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영화나 TV 드라마와의 경쟁에서 소설이 승리할 수 있을까.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문단 내부의 논의에서 작가와 비평가들은 다른 매체들과 공약 불가능한 어느 지점에 문학을 문학이게 하는 무엇(문학적인 것)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제출하기도 했다. 소설에서 다른 매체들과 공약 가능한 가장 뚜렷한 요소가 이야기에 있고 보면, 여러 소설 형태 가운데서도 이야기적 요소가 가장 강한 대하소설은 문학적인 것에서 가장 거리가 먼 양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 사실의 재현을 바라보는 최근의 입장들도 대하소설을 기대하기 어렵게 한다. 대하소설은 전통적인 의미의 소설들, 우리가 흔히 리얼리즘 소설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소설들의 한 극점에 있다. 이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폭넓게 그리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했지만, 이는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거나 권력의 입맛에 맞게 윤색되고 변형되어 있어 위험을 무릅쓰고 폭로해야 하는 현실인 경우가 많았고, 작가들은 당대 역사학계의 성과들을 두루 섭렵하고 발품을 팔아 소설 속 무대를 직접 답사하고 나서야 소설 쓰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소설의 사실(史實) 왜곡, 예를 들자면 <장길산>에서 상업 자본의 형성과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실제에 비해 한 세기나 앞서 있다는 식의 비판이 가능했던 이유는, 작가와 독자 모두 소설이 사실의 진실된 재현이라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하소설은 역사적 사실들을 복원하고자 하는 열정이 만들어 낸 양식이다. 독자들도 이러한 명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서 읽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누구도 이런 식으로 역사 소설을 쓰거나 읽지 않는다. 가령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비롯하여 인물들이 남한산성에 갇혀 있는 현실은 당대 동아시아 정세와 역학 관계에 대해 성찰하게 만들지 못한다. 우리가 소설에서 목도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이 어떤 특수한 상황과 마주치면서 현실화되는 광경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 놓인 개별적 현실이 아니라 인간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한 장소로서 선택된 보편적 현실이다. 이는 문학적으로 의미 있을 수는 있어도 역사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공간이다. 사료를 근거로 했다고 해서 이런 주장이 부정될 수는 없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형상화로는 대하소설 식의 서사적 확장은 거의 불가능하다(노파심에서 덧붙이자면, 이것이 미학적 가치 판단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우리 근대 소설사에서 대하소설이 양산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다. 대하소설과 같이 긴 형식이 필요했다는 것은 기존의 서사 형태로는 담아낼 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다는 뜻이겠다. 이를테면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충분히 담아내는 데 제약을 느꼈거나 시대 현실을 좀 더 폭넓게 그려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는 것.

이런 인식에 이르게 된 데는 대중의 출현도 한몫했을 성싶다. 많은 대하소설들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민중은 몇몇 예외적인 개인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 군상들을 통해 그 모습이 좀 더 잘 드러난다. 하나보다는 둘이, 둘보다는 넷이 민중을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대하소설이 적절한 형식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역으로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민중들의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현실을 넓고 깊게 그리는 데 민중들의 일상보다 더 좋은 소재는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민중들에 대한 관심이 대하소설을 쓰게 하고, 대하소설을 쓰기 위해서 민중들의 삶의 현장으로 들어갔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민중은 역사의 주체일 수 있을까. 프랑스의 비평가 루시앙 골드만은 문학 작품의 진정한 생산 주체는 작가 개인이 아니라 그가 속한 계급 전체라고 보았다. 작품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세계관인데, 이 세계관은 개인의 생산물이 아니라 집단의식의 산물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골드만은 나중에 세계관 개념을 매개하지 않고 소설과 사회 구조의 상동성을 직접 설정하게 되는데, 그가 세계관 개념을 폐기하게 된 데는 노동자 계급의 몰락이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골드만은 이런 맥락에서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을 읽었고, 거기서 인간의 수동성과 사물의 자율성, 비인간화 같은 주제들을 발견했다.

골드만의 이런 분석이 우리의 논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전 지구적 자본주의를 피부로 경험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과 노동 운동이 거의 아무런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라면 대하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열정적이고 활력이 넘치는 인물 군상을 집단적으로 형상화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 <토지>의 소설가 故 박경리. ⓒ연합뉴스
대하소설은 보통의 장편과 비교할 때 서사가 크게 확장되어 있다. 서사의 확장은 서사 시간을 길게 하거나 공간을 확대하는 것으로 가능해질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글로벌한 시대, 자유롭게 세계를 오갈 수 있는 시대, 누구라도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세계의 정세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시대다.

공간의 확장이라는 면을 염두에 둘 때,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 대하소설을 쓰기에 유리하고 또 대하소설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는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니까 실제로 대하소설이 쓰이고 있는가 하는 것과는 별개로, 서사를 최대한 확장한 형태인 대하소설이야말로 이 시대를 가장 잘 표현해 줄 수 있는 서사 형태는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정반대다. 지금 우리의 경험이 구성되는 방식 속에서는, 대하소설이야말로 절대로 쓰일 수 없는 그런 서사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글로벌한 시대에 우리 경험이 구성되는 방식과 대하소설이 가능한 조건은 상이하다는 이야기.

대하소설이 쓰이기 위해서는 서사의 확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조건으로서의 서사적 중심, 이를테면 다양한 인물들이 펼쳐내는 개별적인 서사들을 묶어 놓을 수 있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1970년대에 대하소설과 더불어 우리 소설의 특징적인 경향으로 지목되고 있는 연작 소설은 바로 이 점에서 대하소설과의 친연성이 있다.

연작 소설에서 개별적인 서사들을 묶어 주는 중심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최인훈)처럼 육체적인 자기 동일성을 지닌 한 개인이 될 수도 있고, <우리 동네>(이문구)나 <원미동 사람들>(양귀자)처럼 인물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 대하소설의 경우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가령 <태백산맥>이 그토록 다양한 인물들과 서사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결국 그 모든 이야기들이 '벌교'라는 제한된 공간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보면 이 사실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다양한 공간들로 확산되어 가는 <아리랑>의 경우도, 결국 그 이야기의 출발점은 군산이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의미의 중심, 주체가 없다.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공간의 확장은 세계 곳곳을 누비는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이 그런 것처럼, 스펙터클을 경험하게 하고 다양한 풍광들을 감상하게 하는 역할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들은 다만 주인공의 동선을 따라 이어져 있을 뿐 이어져야 하는 내적인 근거가 없이 이어져 있는 그런 공간들일 뿐이다.

책임질 수 없는 공간, 책임지지 않아도 좋은 공간. 그에 비해 대하소설이 우리에게 펼쳐보여 주었던 세계는 가능한 세계, 공감할 수 있는 세계이고, 서로에 대해 충분한 정도의 책임을 질 수 있고 져야 하는 세계, 그렇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는 누군가를 윤리의 이름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다. 책임져야 할 타자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아서 그들의 고통이 우리를 우울증적 상태로 내모는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세계다.

공간이 확장된 만큼 서사 역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확장될 수 있는 서사는 우리가 대하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그런 공간들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타전되어 오는 고통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이 많은 고통들로부터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해 낼 수 있을까.

무수한 고통들은 우울증을 낳고, 도처에 널린 고통들을 수용하되 반응하지 않게 만든다. 무수한 고통들을 화면으로 불러들이면서 그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마저 모니터에 위임하고 있다고나 할까. 우리에게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새로운 주체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자를 대상화하고 편집증에 사로잡혀 있는, 마땅히 해체되어야 할 존재로서의 주체가 아니라 공간들을 연결하고 관계 맺게 하는 중심으로서의 주체, 소통의 매개가 될 수 있는 주체. 이에 비하면 대하소설이 여전히 가능한가 하는 물음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소설가 김주영의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동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인터뷰를 하게 된 모양이었다. 거기에는 <객주> 완결 편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10권을 쓴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이미 1년 전부터인데, 내년쯤에는 작품을 볼 수 있을 모양이다.

그보다 앞서 지난 3월에는 소설가 문순태의 <타오르는 강>이 완간되어 나왔다. 모두 9권. 처음 나왔을 때부터 2권이 더 늘었다. 애초에 쓰려 했으나 자료의 미비로 할 수 없었던 광주 학생 운동 이야기를 최근의 관련 연구들을 참고하여 덧붙였다는 후문이다. 이 두 작품으로 대하소설은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게 된 셈이다.

대하소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쓰이리라는 데는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일단 이런 이야기들은 젖혀두고 우선은 시간과의 길고 질긴 싸움에서 승리한 두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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