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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실을 말하자! "안철수는 국민 자작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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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실을 말하자! "안철수는 국민 자작극이다"

[절망의 인문학]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

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계속되는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안철수는 과연 인문학적인 정치인인가?" 문학을 공부하는 한보희 씨가 답합니다. "여러분, 이제 자작극은 그만합시다!" <편집자>

① 첫 번째 질문 :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안철수 교수는 언젠가 '강남 좌파가 아니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가 웃으면서 내놓은 대답은 이랬다. "강남에 살지도 않고 좌파도 아닌데요."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인가?'라는 물음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꾸하고 싶다. "그는 인문학에 지적 주소지를 둔 사람도 아니고, 정치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강남에 살지도 않고, 좌파도 아니지만 그를 '강남 좌파'라고 보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고, '안철수는 인문학적인 정치인'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꽤 많다. 왜일까? '강남 좌파'가 강남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도, 좌파를 뜻하는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싸이의 히트곡 '강남 스타일'의 주인공 '오빠'가 그다지 강남 스타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강남 오빠'를 만나본 적도 없지만, 그런 사람을 만났다한들 그를 '강남 스타일'의 '싸나이'로 기억하진 않을 것 같다. 도대체 '싸나이' 자체가 전혀 '강남스럽지' 않은 단어 아닌가. '강남 좌파'는 어떤가? 안철수는 좌파스럽지 않기에 '강남'이고, 강남스럽지 않기에 '좌파'로 불린다.

결국 '강남 좌파'는 좌파 아님, 강남 아님이라는 이중의 부정을 통해서만 '강남 좌파'이다. "강남에 살지도 않고 좌파도 아닌" 안철수야말로 '강남 좌파'란 말에 들어맞는 사람일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 정치인'이라는 이상한 말의 경우도 사정은 같다. 그는 '인문학적'이지도 않고 '정치인'도 아니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인문학적 정치인'일 수 있다.

안철수는 정치인이 아니다. 아직까지는. 안철수는 인문학과 별 관련도 없었다. 이제껏 죽. 그런데도 불구하고, 안철수는 '인문학적 정치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기이한 일이다. 유력 대선 주자로서의 그의 인기의 상당 부분도 그의 인문학적 이미지―특히 '소통'과 '힐링'―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안철수는 의과 대학 출신이고, 정보통신 업계 경영자로 유명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적 정치인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이 이상한 사실을 대다수의 사람들이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소통'은 정보통신을, '치유'는 의사를 연상시키기 때문일까?

오늘날 인문학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소통'과 '치유'이고, 그때의 '소통'과 '치유'가 정보통신 기술과 의학과 자연스레 연결된다면, 이제 인문학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인간이 아니라 생체 테크놀로지로서의 인간을 다루는 학문으로 바뀌었다는 말인가? 이 이상한 상황에 '융합'과 '통섭'의 신화에 사로잡힌 우리 시대의 지적 혼란상이 있겠지만, 그건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뉴시스

'강남 좌파'나 '인문학적 정치인'이란 말은, 4대강 사업을 '녹색 개발'이라 부르는 것처럼, 꿈의 언어―무관하거나 모순되는 이미지들을 욕망의 논리에 따라 하나로 압축한 것―이다. '강남 좌파'라는 증상적 언어는 어떤 외적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욕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문제는 강남 좌파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 이전에 그런 말을 만들고 쓰는 집합적 주관의 상태다. 다루어야 할 문제가 바로 그 꿈의 작동이라면, '말이 안 된다', '꿈 깨라' 하고 야단치는 것은 번지수가 틀린 '지적'일 뿐이란 얘기다. '인문학적 정치인 안철수'라는 꿈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것이 어떤 욕망에서 나온 말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안철수에 대한 기대와 인문학에 대한 호출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배경에는 무한 경쟁, 승자 독식, 양극화, 사회의 정글화 등 시장주의의 추세로부터 벗어나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공동체적 가치로 국가의 방향을 돌리고 싶어 하는, 그리고 지난 한 세대 동안의 신자유주의 드라이브에서 누적된 피로―가계 부채에서 우울증에 이르기까지―에서 안전하게 벗어나고 싶어 하는 국민들의 소망이 있다고, 소박하게 해석해볼 수 있다.

예컨대 양극화 문제는 오래전부터 경고음이 울려온 것이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아파트값 하락과 함께 중산층이 대거 하우스푸어로 전락하면서 '1퍼센트 대 99퍼센트'라는 말이 광범위한 공감을 얻을 만큼 심각해졌다. 어쩌면 국민들은 이제 자신들이 '알던 것을 알 때가 된 것'인지 모른다.

한국 사회는 MB(멘붕 씨)의 통치 행태―사적 이익의 교활한 추구로 점철된 전과 14범이 마침내 국가라는 공적 질서를 자신의 수익 모델로 삼는 광경―에서 멘탈 붕괴를 경험하며 자신이 상상해왔던 자기 이미지가 실제로는 무엇인지 보았다. 마치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에서 여주인공이 내심 꿈꿔왔던 마조히즘적인 판타지가 실제로 실현되었을 때 받는 충격이 이와 비슷할까.

'대한민국'의 성공 신화는 정확히 MB(이명박)의 성공 신화―가난한 집안의 자식으로 태아나 어렵게 공부해 명문대에 진학하고, 샐러리맨으로 입사해 기업과 함께 승승장구하다가 사장이 되고, 정치인으로 전환해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을 거쳐 마침내 대통령에 오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인격화이며 자화상인 것이다.

지금은 아무도 그걸 믿고 싶어 하지 않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던 5년 전만 하더라도, 그런 신화적 스토리에 동감하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그걸 인정은 했었다. 방송 3사의 9시 뉴스에서 BBK 관련 동영상을 보고도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당선시켜준 것은 대한민국 국민들이다. 그때 '없어진 주어'는 이명박이라는 주어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주체성 자체였던 것이다.

이후 '나가수'를 비롯해 '나는―이다'가 유행어가 되어 홍수를 이룬 것은, 잃어버린 주체(주어)에 대한 뒤늦은 회복 시도가 아니었던가. 드라마 <추적자>의 마지막 장면은 유력 대선 후보의 범죄적 위선을 본 국민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달려가 그를 낙선시키고 징죄하는 것으로 돼 있다. 많은 시청자들이 열광했던 그 엔딩은 국민들 자신이 5년 전 저질렀던 과오―부정의와 부패에 대한 노골적 묵인―에 대한 상상적 만회가 아닌가. 이번 대선도 바로 그런 상상적 만회의 연장선에 있지 않은가.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들―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등―이 모두 나름대로 이명박과의 대척점에서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신화에 대한 갈망이며, 이러한 갈망에 가장 근사하게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안철수인 것 같다. 하지만 주의할 지점이 있다.

비록 안철수는 이명박과 반대되는 퍼스낼러티를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만, 성공 신화를 가진 인물―게다가 경영자 출신―이라는 점에선 일치한다. 안철수에 대한 국민적 열망의 한편은 변화이지만 다른 한편은 여전히 성공한 자, (부와 학력 등의 자본을) 가진 자로 자신을 재현, 대표하고 싶은 욕망이다.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도저처럼 밀어붙여 성공한 자가 아니라, 공정한 룰에 따라 '모범적으로' 성취를 이룬 자를 바라며 이번에 덕성과 인간미까지 갖추기를 바란다. 한국의 유권자들은 '건전한 시장주의', '따듯하고 인간적인 자본주의', <조선일보>가 (일종의 알리바이, 아니면 '이미지 세탁' 차원에서) 밀고 있는 '자본주의 4.0' 같은 것을 욕망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적인 냉혹한 이윤 추구 기계에서 하루아침에 그 정반대의 이미지, 따듯하고 인간적이며 공정한 신사로 변할 수도 있다면, 그래서 자본주의 1.0, 2.0, 3.0, 4.0, 5.0…으로 무한히 이어질 수도 있는 것이라면, 이 경우 자본주의란 대체 무엇인가? 인간 문명과 동의어인가? 아니면 인간들이 거기에 적응하고 변화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벗어날 수는 없는 자연환경 같은 것일까? 이러한 자본주의의 자연화는 무엇을 뜻하는가?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뜻인가?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가?

우리에게 절박한 현안으로 도착한 이 물음이 대선의 이슈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다루어지지 않을 수도 없을 것이다. 사실 복지, 정의, 공정, 기업의 사회적 책임, 경제 민주화, 공공성의 회복 등등의 이슈들 배후에는 자본주의적 시장주의에 대한 강력한 회의가 도사리고 있지 않은가.

대선 주자들의 공통된 공약들이나 <안철수의 생각>(김영사 펴냄)―그 부제는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이다―의 기본적 방향과 어조는, 2008년 금융 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반-시장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이라고 배척되던 것들이 아닌가. '경제 민주화'니 '동반 성장'이니 하는 말들에 대해 재벌 회장들이 보여준 불쾌한 반응―"공산주의 하자는 것인가", "그런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다" 등등―은 사태의 본질을 오히려 잘 드러내주지 않는가.

이번 대선에서 누가 당선되든 대선을 전후로, 그간 억지로 틀어막고 악화시켜왔던 한국 사회의 문제들―특히 부동산과 가계 부채 문제―이 배탈 난 사람 설사 터지듯 급격히 터져 나올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구제 금융을 받게 되든 아니든, "IMF 시즌 2"라 불릴 만한 공황적 사태가 전개될 가능성도 매우 농후하다. '우리에겐 공황이 이미 진행 중이다, 내내 진행 중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아주 많다.

문제는 그에 대한 대응의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이다. 그런 맥락에서, 안철수 현상에는 기대를 걸어볼 만한 아주 독특한 면이 있다. 국민들이 '관전'만 하고 있을 수 없게 만드는 지점, 안철수의 유보적 침묵이 바로 그것이다.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임에도 불구하고 안철수는 출마 선언 및 선거 운동―정당을 구성하거나 정치 세력화를 시도하는 것―을 일체 하지 않고 있다. 그렇게 보일만한 비유적 행보만 있을 뿐이다.

신비주의 전략인가? 그렇진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은 오히려 거기서 새로운 정치, 모바일 네트워크에 기대는 새로운 시민 정치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보고 싶어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고 또 성공적으로 대선 국면을 이끌게 된다면, 정당 정치나 대의 정치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선, 그런 기대가 있다는 정도다. 나는 다른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안철수가 인문학적 정치인이냐는 물음이 주목해야할 지점도 여기일 것이다.

언론은 안철수의 유보적 침묵에 안달을 내지만, 정작 안철수 자신의 자신을 호명한 어떤 소리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총선이 예상치 않게 야권의 패배로 귀결되면서 나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다시 커지는 것을 느꼈을 때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 열망이 어디서 온 것인지에 대해서 무겁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철수의 생각>, 5쪽)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호명한 까닭을 묻고 있다. 정치 공학적인 연출이 아니라 진심으로 묻는 것 같다. "왜 나를 부르는 겁니까? 나한테 원하는 게 무엇이죠?" 그는 국민을 큰 타자처럼 대한다. 이런 자세, 이 물음의 진지함이, 여러 실망스런 지점들―그의 명예 타령, 사실이더라도 굳이 그런 걸 자기 입으로 말하다니 낯간지럽다고 여겨지는 생의 이력들, 역사의식의 깊이, 한국 사회의 문제들에 대한 '모범생' 같은 답변 뒤에 있어야 할 고뇌나 배제된 자들에 대한 공감의 결여 등등―에도 불구하고 '안철수 현상'에 어떤 기대를 갖게 한다.

어떤 기대냐면, 그가 대통령이 되면 잘하겠다는 기대가 아니다. 그가 대선에 나온다면, 그리고 혹시 대통령이 된 후에도, 기성 정치판에선 기대하기 어려운 사태들, 연출되지 않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 안철수 현상의 핵심에는 태풍의 눈 같은 '빈곳'이 있다. 안철수가 채우려고 하지만 잘 안 되는 그 '빈곳'을 통해, 사람들이 비로소 정치적 소통이란 걸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물음은 타자의 장에서 발생하며, 기존의 상징계가 깨어지는 간극에서 나타난다. 시쳇말로 멘붕 상태에서 떠오르는 말이다. 그런 물음이 발생하는 '빈곳'은 인문학적 사유가 돌아가는 바퀴축의 구멍 같은 것이다. 정치적 영역에서 그런 구멍이 유력 대선 후보의 입을 통해 계속 흘러나오는 것은 분명 징후적인 사태다.

그는 자신이 "국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울림통"으로서의 소임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안철수 현상을 통해 분명히 입을 벌린 한국 사회의 저 정치적 '빈곳'이 앞으로도 계속 열려 있어야 하며, 우리는 바로 그 '빈곳',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펼쳐지는 장에 개입해야 한다.

"열패감에 사로잡혔던 20~40대들이 서울시장 선거 등을 거치면서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는 분석이 있던데, 이런 변화에 약간은 기여를 한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안철수의 생각>, 51쪽)

이 적절한 말을 이렇게 고쳐 이해하고 싶다.

'안철수 현상을 만든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체에 뚫린 거대한 상처이고 구멍이다. 안철수가 섣부른 출마 선언과 공약들로 그것을 채우는 대신 유보적 침묵과 조심스런 물음을 통해 그 구멍을 '무대'로 만들어주었다. 정치적 주체가 되어 그것을 채워야 할 사람은 우리이며 우리의 삶-정치이다. 안철수는 그런 기여를 한 것에 보람을 가질 자격이 있다.'

안철수 현상은 국민 자작극이며, 서막을 훌륭히 소화한 안철수에 이어 무대에 오를 자는 안철수가 아니라 국민 자신이다. 비극이 될지, 사이코드라마가 될지, 서사시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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