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 발행되는 '프레시안 books' 89호는 어린이 책 특집으로 꾸렸습니다. 열두 명의 필자가 어린이 책에 대한 특별한 생각을 마음껏 펼쳤습니다. 여러분 마음속의 어린이 책은 무엇입니까? <편집자> |
나는 어린이 문학을 잘 모른다. 어릴 때, 학교 도서실에서 이원수 선생의 동화를 몇 권 읽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20대에 권정생 선생의 동화를 감탄하며 읽었지만, 딱히 다른 어린이 문학 작가들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초등학교 5학년 꼬마를 키우고는 있지만, 아이에게 어린이 문학을 읽으라고 권유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어린이를 '양육과 보호의 대상'으로 특화시킨 근대적 아동 교육의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어린이 문학뿐 아니라 요즘 세상에 넘쳐나는 '어린이를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그 숱한 이벤트나 프로그램들 또한 별로 바람직하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오늘날 어린이 문학은 어린이 문학 출판 시장의 존재와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고 나는 본다. '어린이에게 꿈을 키워주는 문학'이라고들 하지만, 과연 오늘날 어린이들이 그런 문학책을 읽으며 꿈을 키우고 위로를 받고 있기는 한 것일까, 아이들의 삶에서 어린이 문학은 얼마나한 긍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어린이 문학에 종사하는 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하지만, 나는 이런 가능성에 대해 퍽 회의적이다.
요즘 아이들 문제라고, 옛날과 다르다고, 종잡을 수 없다고들 하지만, 많은 경우 이런 진단들은 있지도 않은, 만들어진 현실에서 유추되었거나 문제 설정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이를테면, 요즘 아이들이 책을 안 읽는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리 근대사 100년만 놓고 보아도 요즘 아이들만큼 끔찍하게 책을 많이 읽는, (읽기를 강요당하는) 세대는 없다.
요즘 아이들이 책을 못 읽어낸다고 하지만, 내가 교단에서 직접 겪어본 바, 아이들만큼 민감하게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기억하는 존재는 없다. 아이들이 읽어내지 못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면, 텍스트 자체에, 혹은 아이들이 텍스트를 접하는 환경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른들이 조성해 놓은 어떤 상상의 현실 속으로 아이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고 문제시하는 어른들 자신이 문제인 것이다.
▲ <거짓말 학교>(전성희 지음, 소윤경 그림,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서 나는 이 동화가 어떻게 '문학동네'라는 우리나라 문학 출판 시장을 양분한다는 거대 출판사가 제정한 어린이 문학상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는지 좀 의아했던 게 사실이다.
일단 간략하게 내용 소개를 해 보자. '거짓말 학교'라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절해고도에 자리한 학교가 있다. 특수 목적 중학교쯤 되겠다. 존재 자체가 국가 기밀이고, 아이들은 엄청나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입학 허가를 받는다. 거짓말에 능란한 엘리트를 키우는 것이 이 학교의 교육 목적이다. 아이들은 매일처럼 거짓말을 잘 해야 큰 일꾼이 된다는 교장의 훈시를 듣고, 논리학, 진실학, 거짓말학 따위 과목들을 배운다. 서른 명 중에 성적이 처지는 열 명은 1년 뒤 탈락되어야 한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네 아이가 있다. 아버지가 붕어빵 장수를 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고 독하게 공부하는 조숙한 소녀 인애, 부모의 이혼으로 인한 마음고생 때문에 이 학교를 선택한 나영이, 그리고 명문대 교수 부모를 둔 엘리트 소년 준우와 이 학교에 배를 기증하고 기여 입학했다는 의심을 받는 좀 덜떨어진 도윤이가 있다.
교장은 국가주의, 엘리트주의, 약자에 대한 편견과 모멸로 무장한 '왕재수'이고, 교사들도 어슷비슷하지만, 아이들에게 나름 존경받는 진실학 선생님이 있다. 그런데 학교에서 아이들을 모아놓고 커다란 텔레비전으로 '거짓말 뉴스'를 시청하는 시간에 아이들이 픽픽 쓰러진다. 뭔가 이상하다 싶은 아이들이 교장실에 잠입해 들어가 음모를 파헤쳐나간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파견되어 학교로 와서는 교장과 대립하던 의사 그리고 아이들을 옹호해주던 진실학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게 되고, 교장은 학교의 음모를 파헤치는 아이들의 이런 노력을 알게 된다. 교장은 한 번은 용서해줄 테니 누가 이 기밀을 발설했는지 너희들 안의 첩자를 알아오라는 과제를 준다. 아이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진실학 선생님과 의사마저 의심한다.
교장에 의하면, 진짜 첩자는 아이들이 믿고 따르던 바로 그 진실학 선생님이었다. 그는 정부가 이 프로젝트에 반대하는 세력에 잠입시킨 이중 첩자였다는 것, 그래서 반대 세력의 첩자였던 의사도, 아이들도 진실학 선생님에게 속았고, 그는 유유히 학교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장이 이 학교의 비밀을 알아버린 아이들에게 제안한다. 자신들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비밀 프로젝트, 뇌에 자극을 주어 양심의 작동을 마비시키는 '메티스 칩'을 뇌에 이식하는 수술을 받으라는 것이다. (허걱!) 양심이 없으면, 죄책감이 없어져서 큰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그러면 이 학교를 떠나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를 받을지 말지를 고민한다.
인애는 오직 자기하고만 비밀 쪽지를 주고받던 진실학 선생님이 이중 첩자라는 것을 믿지 못하다가 선생님이 나영이에게도 그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절망한다. 서로 믿고 의지했던 나영이와 인애들 또한 지금껏 서로의 솔직한 감정을 속여 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세상에 진실은 없다, 진심어린 소통도 없다, 모두 거짓말쟁이다. '강인애, 앞으로 어떡하지?' 인애의 고통스런 독백으로 이 소설은 마무리된다.
이 소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는 알겠다. 그리고 이 소설이 오늘날 어린이 문학의 일반적인 경향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신선하다는 점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내가 보기엔 많은 부분 어설프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두 축이 있다면 하나는 '거짓말 학교'라는, 실제에 있을 것 같지 않은 신비스러운 존재가 품고 있는 판타지이며,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왜 텔레비전을 보다가 쓰러지는지, 거기에 숨어있는 교장의 음모를 밝혀나가는 추리 소설적 구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둘 다 어설프다. '거짓말 학교'의 판타지는 특수하고 비밀스러운 학교로서의 리얼리티가 담보해줄 것이다. 그러나 헬기와 배만으로 오간다는 설정 말고는 이 학교가 정말 절해고도에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아침마다 국민교육헌장을 패러디한 거짓말 헌장을 암송한다는 것, 큼직한 화면으로 거짓말 뉴스를 시청한다는 사실 말고는 거짓말 학교로서의 정교함을 담아낼 구체적인 콘텐츠가 없다.
다른 하나, 이 소설을 그나마 이끌어가는 힘은 추리 소설적 요소다. 나 또한 이 소설을 그래도 끝까지 읽었던 이유는 아이들이 왜 자꾸 픽픽 쓰러지는가, 그게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뭔가 있겠지, 하는 '반전의 기대' 같은 게 있었다. 그리고, '설마, 거짓말 뉴스를 방송하는 텔레비전에서 쏘는 전자파 때문은 아니겠지', 했는데, 정말 그것 때문이었다. 텔레비전을 오래 보는 아이들이 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거짓말 세뇌를 시키기 위해 교장의 조종으로 큼직한 영상에서 쏘아보내는 뇌파 때문에 아이들이 지금껏 줄줄이 쓰러진 것이다. 존재 자체가 국가 기밀인, 국가의 비밀 프로젝트라는 '거짓말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가하는 세뇌로서는 너무 무지막지하고, 판타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박하다.
초등학교 5학년생인 우리 집 꼬마는 이 소설을 집어 들더니 50쪽을 채 넘기지 못하고 책을 덮고 말았다. 우리 집 꼬마는 <무한도전>을 즐겨본다. 바보스럽고 단순한 캐릭터로 설정된 등장인물들이 실은 대단히 영리한 방식으로 자기 캐릭터를 소화해내면서 또한 매회 새롭게 던져지는 복잡하고도 중층적인 과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우리 꼬마 같은 아이들은 이런 <거짓말학교> 같은 콘텐츠에는 별무반응이다.
<무한도전>에 출연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저렇게 바보스럽지도 단순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굉장히 두뇌 회전이 빠르고 순발력이 뛰어난 사람들임을, 그래서 <무한도전> 속에서 저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연기'인 것을 알고 있는 어린이 독자는 '거짓말 학교에서는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소박한 설정으로 이끌어져가는 어린이 소설에 반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어린이 문학이 서 있는 자리는 어떤 곳인가. 어린이 문학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작품을 아이들은 어떻게 읽어내고,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일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는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져본다. 인터넷 서점 'YES24'에서 실시하는 어린이 독후감 대회에 출품된 <거짓말 학교> 독후감을 찾아 읽어 보았다. 이런 대목이 눈에 들어온다. 초등학교 5학년 어린이의 글이다.
나도 거짓말을 했던 적이 있다. 오빠와 싸울 때마다 내가 불리하면 거짓말을 넣어 엄마에게 일러바친다. 그럼 엄마는 내 편을 들어주시고 오빠는 억울해서 씩씩거린다. 오빠의 모습을 보면 내가 이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내가 거짓말을 해서 오빠를 혼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내가 죄책감을 느끼고 나면 오빠에게 잘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좀 잘해주게 된다.
작가로서는 맥이 좀 풀릴 것이다. 거짓말로 인한 죄책감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이 책을 쓴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아동 문학가 김진경은 이 작품을 두고, "아이들을 인큐베이터 속에 들어있는 미숙아"로 취급하는 어린이 문학의 일반적인 발상을 뛰어넘는 작품으로 <거짓말 학교>를 상찬하고 있지만 나는 이 작품 또한 오늘날 아이들의 미숙한 감수성을 전제하고 만들어진, 어린이 문학의 일반적인 문법에 충실한 작품이 아닐까 하고 판단한다.
출판사는 어린이 문학상이라는 이름으로 상을 만들어서 주고, 그 이름값으로 책을 판다. 아이들은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부모와 학교의 채근으로 책을 읽고, '그래도 나는 거짓말을 안 하겠다'는 독후감을 써 낼 것이다. 이런 글들을 심사해서 인터넷 서점은 아이들에게 상을 줄 것이고, 아이들은 스펙을 쌓을 것이다.
오늘날 어린이 문학을 둘러싼, 빈곤과 허위의 악순환이다.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오늘날 어린이 문학이 서 있는 자리는 어떤 곳인가. 어린이 문학은 꼭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아이들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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